00542 암천향(暗天鄕)
나는 그 날부터 뇌룡신검의 초식을 운용하며 천뢰기를 받아들이는 반복수련을 거듭했고, 동시에 내가 지닌 검술을 더 정밀하게 다듬는 작업을 했다. 익힌 검술은 많지만 제대로 극의를 본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현재 나는 검술의 묘의로 들어갈수록 속빈강정과 같았다. 강대한 내공과 굴공천축검의 강력함, 요령 덕분에 격하의 상대에게 밀리지는 않지만 초극고수를 상대하면 속절없이 패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독고성은 수련을 시작한지 한 달째 되던 날 놀랍다는 듯 말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내공과 체력이군."
"그렇습니까?"
"휴식시간이 여태껏 열 시진도 되지 않았다. 내공을 체력으로 전환해서일텐데 아예 한계가 보이지 않는구나..."
경탄하던 독고성이 말했다.
"그런데 네 검술에 다른 유파의 흔적이 묻어있는데 그건 대체 뭐지?"
"......"
"그걸 알려줘야 네 진도를 더 빨리 빼줄 수 있다."
나는 순어구를 써서 몰래 이청운에게 연락해서 상담했다. 그러자 이청운이 말했다.
[ 굴공천축검을 사형에게 전해줘도 무방하네. 칠대절학이나 팔선신공도 알려줘도 상관없네.]
[ 독고성이 차후에 큰 변수가 되지 않을까요?]
[ 내 사형은 스스로 최고의 경지에 오르기 전에는 결코 세상으로 나오지 않을 분이네. 그리고 나온다 하더라도 그는 절대적으로 내 편일세.]
[ 음... 그렇군요. 그러면 왜 흑요석은 주지 말라고 하신 겁니까?]
[ 그 이유는... 거기서 수련을 마치고 나오면 알려주겠네. 아무튼 다른 건 다 되어도 지금 흑요석은 안 되네.]
[ 알겠습니다.]
나는 이청운의 충고대로 내가 알고 있는 굴공천축검에 대해 독고성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독고성은 크게 놀랐다.
"세상에! 이런 검술이..."
그는 초식을 암기하며 현묘함을 되새기는 듯 했다. 그러더니 의혹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절세검술을 익혔으면서 굳이 뇌신류의 검학을 또 연구하는 이유는 뭐냐?"
"다양한 검술을 익힐 수록 저변이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건 아무리 좋아도 외문의 절학이며 저는 뇌신류입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독고성은 흡족해하며 말했다.
"좋아. 그럼 네 수련을 더 열심히 봐주겠다. 그리고 틈틈히 내게 굴공천축검도 알려다오."
"네."
부우웅
부우우웅
나는 말 그대로 그 후로 석 달 가까이 수련만 했다. 지금까지 이상으로 쉴 틈도 없이 반복수련에 매달렸고, 그 사이에 피어나는 일말의 영감을 기대했다. 그리고 또다시 한 달이 지나자 독고성이 말했다.
"이제 뇌기의 축적은 충분해 보이는군. 그러나 염상(念想)이 부족해서 마지막 한 발을 내딛지 못하는 걸로 보인다."
"염상?"
"천뢰가 사상의 번개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그 또한 일종의 의념절기이며 강한 정신력을 필요로 한다. 단지 의념만으로는 안 되고, 기본적으로 천뢰로 변환할만한 뇌령지기가 갖춰져야 한다는 점이 특수할 뿐."
가볍게 설명한 독고성의 말이 이어졌다.
"번개가 무엇인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뇌령과 뇌법이 무엇인가? 네가 생각하는 최강의 번개를 구체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너는 거기에 대해 충분한 고찰이 부족하구나."
"최강의 번개라..."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건 자신감을 키우라는 뜻입니까?"
"... 비슷할 수도 있지. 다만 의념이란 게 뭔지 잘 생각해 봐라."
독고성은 자신의 주먹을 강하게 꽈악 쥐며 말했다.
"의념을 향상시키면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마치 술법처럼."
후두둑!
그 순간 독고성 뒤편에 있던 커다란 나뭇가지 서너 개가 한꺼번에 형태를 잃고 부숴졌다. 그것은 독고성이 의념으로 커다란 무형의 주먹을 만들어 내서 공간에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손을 털며 말했다.
"너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정작 무공을 써서 싸울 때는 이런 간접적인 공격법을 잘 쓰지 않고 의념을 초식에 섞어서 강화시키지. 왜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알고 있는 바였기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의념의 정신력 소모도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염력(念力)으로만 발휘하기에는 수지가 맞지 않습니다."
"그래. 그게 정답이다. 그럼 왜 소모도가 클까?"
"그야 정신력만으로 이 세상에 간섭하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지요. 원래 무형의 주먹같은 건 자연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독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의념으로, 원래부터 존재하는 자연현상인 번개를 만들어내는 것도 어려울까?"
"......"
"지금까지 뇌룡신검의 수련으로 천뢰기를 축적했던 이유는 그 난이도를 낮추려는 거였다. 다시 말해서 [번개]의 의념을 구현화시키는 건 쉬운 일이 되었다는 거지. 왜냐하면 실제로 몸 안에 뇌기(雷氣)가 매개체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가 눈을 빛냈다.
"그것이 바로 뇌신류 최절정의 경지, 천뢰지경(天雷之境)! 오랜 천뢰기의 수련으로 난이도는 이미 낮아져 있다. 그러니 다른 의념절기와 달리 소심하게 위력을 자제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생각하는 최강의 뇌법(雷法)을 머릿속에 떠올려라!"
나는 독고성의 조언을 듣자 뭐가 문제인지 깨달았다.
' 그래! 나는 지금까지 다른 의념절기와 난이도가 같다고 착각했던 거야.'
다른 무예분파와 달리 뇌신류를 비롯한 사대무류는 자연지기인 뇌수화풍(雷水火風)을 근간으로 하는 무공이며, 초입단계부터 자연지기를 수련했다. 그런만큼 오랫동안 사대무류를 수련한 달인은 해당 자연지기에 대한 친화도가 극도로 높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실존하는 자연지기를 매개체로 발휘하는 의념절기는 더욱 강력할 수밖에 없다.
마치 무사가 검을 통해서 의념절기를 펼쳐내듯, 사대무류의 고수에게 있어서는 자연지기가 병기와 같은 것!
나는 독고성의 말에서 감을 잡고 그 날부터 천뢰기의 수련을 반으로 줄이고 나머지 시간은 명상에 잠겼다. 그의 말마따나 내 내부에서 정신력을 도야시켜서 최강의 번개를 염상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두 달이 지나도록 잘 감이 잡히지 않아서 답답했다. 결국 나는 독고성에게 질문했다.
"뭔가 잘 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지. 천뢰지경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뚝딱 되는 건 아니니까. 전성기 뇌신류에도 극소수밖에 도달하지 못했던 경지였다."
그렇게 말한 독고성이 말했다.
"정 안되면 강한 자와 비무해봤던 경험을 떠올려보는 게 어떤가? 사대무류의 고수와 싸워본 적이 있으면 좋을텐데."
"......!!"
"그들 또한 자연지기를 운용하니."
나는 그 말에 뭔가가 떠올라서 무릎을 탁 쳤다.
"고맙습니다!"
사대무류의 고수와 비무해봤던 경험?
아예 썩어넘친다!
나는 풍신류의 종사인 용비천, 화신류의 종사인 한백령과 싸워본 적이 아주 많았다. 뿐만 아니라 수신류와도 몇 번 겨뤄본 적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뇌신류 내의 진소청이나 이광 등과 싸워본 적도 있었다. 게다가 교주 밑에서 칠대절학을 수련하던 당시에 그들의 응용기나 필살기도 여러번 보지 않았는가? 나는 그들과 싸웠던 전투경험을 머릿속에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초식운용과 자연지기 발현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 최강의 번개... 그건 최소한 다른 사대무류의 자연지기를 짓눌러버릴 정도여야 한다.'
마음속에서 번개가 자라기 시작한다. 그건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있었던 것 같지만, 이제야 형태를 지니고 성장하는 것이다. 동시에 나는 내가 보았던 최강의 고수들을 생각하며 그들조차 내 번개로 이길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
어렵다.
풍신류나 화신류의 절학을 누를 번개는 머릿속에서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지만, 과연 교주의 심천무량이나 무사시의 신살참, 혹은 십이율주의 천의무봉을 꺾는 건 쉽사리 떠올리기 힘들었다. 단지 상상일 뿐인데도 감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모공이 오그라들며 땀이 축축하게 배어나왔다.
절대지경이란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경지.
그 경지에 오른 자들은 이미 격하의 존재와 손을 섞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반쯤 신선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텐데, 그 경지를 몇 번이나 눈으로 목도한 적이 있었기에 한숨만 나왔다. 과연 뇌신류의 무공으로 그들을 꺾을 수 있을까?
다만 내가 심마에 빠져들지 않은 건 그나마 이청운의 뇌신지혼이 있었기 때문이다. 뇌신지혼은 앞선 절대경지에 절대 밀리지 않는 뇌신류 최고의 경지였고, 나 또한 언젠가는 뇌신지혼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 가만. 그런데 뇌신지혼을 넘어서는 최강의 번개는 뭘까?'
상상할 수 없다.
전신을 뇌화시켜서 뇌속으로 공격하며 반쯤 불사신이나 다름없는 그 최강의 상태보다 더 강력한 번개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청운이라면 심천무량의 만다라도 꿰뚫는 게 가능할 것 같았기에 골치아팠다.
나는 결국 상념을 멈추고 천뢰기를 수련했다. 머리가 너무 아플때는 몸을 움직이면 조금이나마 개운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다시 석 달이 지났다. 그러자 독고성이 말했다.
"고맙다."
"네?"
"네 덕에 굴공검과 천축검을 습득해서 내 진경이 한단계 나아갔구나."
"......"
내가 천뢰를 얻어야 하는데 왜 독고성이 먼저 성장해 버리는 걸까?
나는 독고성에게 내심 질투가 치밀어오르는 걸 느끼자 스스로에게 기가 막혔다. 아무리 천뢰지경이 어렵다지만 이렇게 뒤쳐지는 재능일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다시 수련에 집중했다.
그래, 처음부터 알고있지 않았는가?
내 재능은 밑바닥이다. 아무리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해도 그걸 뒷받침하는 오성이 거의 없다. 그렇기에 요령을 조금 얻는다 해서 쉽사리 경지에 오를 순 없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 이를 악물고 수련할 수밖에 없다.
' 한 발을 내딛자.'
나는 더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동료들이 억울하게 죽는 걸 방지할 수 있다. 그리고 전생횟수를 줄여서 이 절망스러운 세상의 운명을 타파할 수 있다.
"......"
검을 휘두르다 보니 잡생각이 든다.
어쩌면 처음부터 세상을 구하는 게 내 몫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 말고도 더 적합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죽어라 노력하는게 그저 내 이기심일지도 모른다는 건 알고 있다. 이대로 전생의 넋을 놓고 편하게 살다가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내 업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포기해버리는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건 정말로 지금까지 나를 위해 희생해준 동료들의 죽음을 헛되이 만드는 것이다. 나는 재능은 없을지언정, 그렇게 한심한 인간이 아니다.
나는 우는 소리를 할 수 없다. 내가 우는 소리를 하면 끝장이다. 재능도 외모도 지능도 아무것도 받쳐주지 않는 나이지만, 오로지 풀뿌리같은 근성 하나만으로 이 풍진 세상을 헤쳐왔다.
나는 땀투성이가 되어서 산의 들판에 쓰러지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것만큼은 버릴 수 없어."
내가 나라는 증거.
근성과 노력.
세상일은 그것만으로는 절대 해결되지 않지만 - 그래도 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근성까지 없으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 혹독한 세상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단 말인가!
한 순간 한 순간이라도 숨쉬며 살아있는 이상 나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아무리 내 근성이, 내 노력이 재능 앞에서 하찮을지라도 나는 결코 무릎꿇지 않으리라.
다시 일어나서 뇌령기를 축적하고 염상에 빠져든다.
번개여.
일어나라.
내게 용기를 다오.
그렇게 다시 두세 달을 수련했을까?
독고성이 언짢은 듯 말했다.
"이상하군. 보통 이 정도면 천뢰지경을 얻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번개를 내면에 응축시키고 있단 건가?"
"......"
"나는 모르겠다. 이미 내가 가르칠 수 있는 선을 넘은 것 같군. 다만 네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계속 도와주겠다."
독고성이 이렇게 말한다는 건, 그 또한 내심으로는 거의 포기했다는 뜻이다. 아무리 그래도 종사의 제자이기에 천뢰에 도달할 거라고 예상했을 텐데 내게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정도 상황이 되면 정신력이 갉아먹혀서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입을 닫고 조용히 수련에 몰두했다.
징징거려봤자 나아지는 건 없기 때문이다.
"... 일어나라."
번개여.
일어나라.
내가 용기를 다오.
매일 주문처럼 그 생각을 하며 번개를 생각했다. 시야 전체에 들어오는 세상과 산야를 불태우는 거대한 번개를 생각하기도 하고, 금강불괴도 뚫어버리는 번개도 생각해 봤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천뢰의 염상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부지불식간에 꺼져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천뢰기를 쌓던 중 나는 겨우 알 것 같았다.
' 못 이길 것 같아서야.'
아무리 강력한 번개를 빈약한 상상력으로 떠올리려 해도, 절대지경의 벽을 늘 체감해 왔기에 도저히 넘을 거라는 상상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상상력은 최강이 아니기에 내 안에서 천뢰로 완결될 수 없다.
의념지기란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음의 힘이다.
내 마음이 그 벽을 깨지 못하면 결코 형태를 이루지 못한다.
그렇다면 뇌신지혼을 떠올려 볼까?
하지만 그 뇌화(雷化)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가용 가능한 의념절기의 용량을 현격히 뛰어넘고 있었다. 뇌신류 최강의 경지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고급심득 수십개를 모두 터득해야 겨우 구현이 가능할 것이다. 의념절기의 용량을 뛰어넘으면 그 순간 뇌가 터져버리며 자멸하고 만다.
방법이 없었기에 나는 고행과도 같이 매일같이 쉴새없이 수련하고 잠드는 걸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동빈이 꿈 속에 나타났다.
[ 연자여.]
여동빈은 검 한 자루를 가슴에 품듯이 안고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그대가 검을 수련함은 마(魔)를 토벌하기 위해서인가?]
나는 여동빈이 난데없이 왜 내게 질문하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일단은 성의껏 대답하기로 했다.
[ 아닙니다.]
[ 그럼?]
[ 신을 없애고 이 세상이 놓인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 ......]
[ 살아남기 위해서겠군요. 영혼조차 구원받을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내가 자조적으로 말하자 여동빈이 말했다.
[ 능력은 없는데 꿈은 크구나.]
[ 늘 듣는 소리입니다만.]
[ 그대를 그 동안 지켜보고 있었으나, 너무나 요령부득하여 답답했다.]
그렇게 말한 여동빈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 연자여. 그대의 검이 말을 거는구나.]
[ 네?]
[ 검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를 주겠다.]
스스스
점차 여동빈의 형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여동빈이 내게 꿈을 통해 기억을 전달하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여동빈에게 외쳤다.
[ 잠깐만요! 당신은 연자나 세상에게 관여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왜...]
[ ......]
여동빈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으음!"
나는 꿈에서 깨어난 순간 눈 앞에서 총 96초의 검무(劍舞)가 환영처럼 스쳐지나가는 걸 알 수 있었다.
꾸욱
나는 주먹을 꽉 쥐며 그 환영을 머릿속에서 되새겼다. 그와 동시에 나는 손이 간질거리면서 오성(悟性)이 도야하는 걸 느꼈다.
쩌엉!
머릿속에서 뭔가 터진다. 그와 동시에 열오(咽烏)하는 성검(聖劍)이 정수리에 푹 꽂히듯, 거대한 충격이 내면을 강타하는 듯 했다. 동시에 나는 미친 듯이 천둔검법 대신 뇌신류의 검술을 구슬꿰듯 이어서 펼치기 시작했다.
[ 번개를 원하는가?]
여동빈의 음성이 환청처럼 들렸다.
[ 과연 그 허황된 번개로 이 검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파바바밧
이상하게도 96초의 검무 중 단 한 초식도 펼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명히 강력한 검술일테지만, 그 검술자체보다는 도리어 뇌신류의 검을 펼쳐야 한다는 강박관념같은 게 느껴졌다. 나는 홀황경에서 초식을 연계하다가 갑자기 시간이 느려지는 듯 했다.
검극(劍戟)이 춤을 춘다.
노래한다.
"......!!"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고 나는 더없이 자연스럽게 내 검을 가슴으로 휘두르며 일체가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여동빈이 전해준 96초의 검무에 새겨진 환영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세상에 저런 검이 있단 말인가?
나는 마치 뇌신류의 검무로 그 절대검식에 대항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실제로는 그럴 리가 없는데도, 여동빈이 마치 대무해 주는 것 같다.
운무(雲霧)와 해천(海天)이 녹아내리더니 일월(日月)이 교차한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검식을 대봐도 이겨낼 수가 없다. 팔의 근육이 괴사할 것 같았지만 나는 그 가공할 검법에서 버텨내기 위해서 온 힘을 다했다.
그 치열한 검무가 끝난 후 나는 뒤로 벌러덩 누웠다. 그리고 별빛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다시 하자."
그리고 다시 반 년 동안 죽어라 수련에 매달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번개를 염상하지 않고 그저 내 검술의 기본기를 갈고닦기만 했다. 또한 96초 중 단 한 초식도 펼치지 않았다. 아니 - 펼치지 못했다.
땀을 흘리고 또 흘린다.
매일같이 묘예의 역을 떠올리며 만승검결과 뇌룡신검, 뇌신검무 하나하나를 더욱 정밀하게 다듬었다. 내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계속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면의 번개는 자연스럽게 커지고 있었다.
번개여.
가라앉아라.
"너는 내 안에 있다."
나는 중얼거리면서 뇌신검무의 초식을 정갈하게 갈무리했다. 벌써 수천 번은 펼친 듯 했으나 펼칠 때마다 새로웠다.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계속해서 깨닫는 과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독고성에게 찾아가서 대련을 신청했다.
쩌어엉!!
"헉!!"
독고성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일순간 내 공격범위를 잘못 판단하고 상반신이 베일
뻔 했지만 뇌영보 천주살로 피해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성취했구나."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내 검에는 뇌력을 머금은 강기가 일렁이고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검뢰였다. 수련하던 중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 것이다. 독고성이 감격스러운듯 말했다.
"내면의 번개가 성장했는가?"
"아니요. 그건 중요치 않았습니다."
"뭐?"
독고성이 황당해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검의 목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착각하고 있었다.
그저 검에서 번개를 뿜어내면 된다고 생각해서 자연계의 뇌력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96초를 전해받아서 그 검술과 내 뇌신류의 검예를 비교하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무력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 검무는 너무나 완벽했다.
장삼봉의 극성 굴공천축검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일지도 모를 정도!
한없이 자유롭고 강했으며 하늘 전체를 위압하는 천지멸절(天地滅絶)의 검(劍)!
오로지 패왕(覇王)만이 휘두를 수 있을 듯 했다.
그 완성도에 좌절감을 느꼈기에 나는 뇌신류 검술을 모두 잊어먹을 것만 같은 공포조차 느꼈다. 그리고 뇌신류의 검이 정말로 형편없는지 알기 위해서 지금까지 배웠던 걸 성실하게 복습하며 기본기를 반 년 동안 다잡으며 수행한 것이다.
그 결과, 그렇지는 않았다. 뇌신류의 검도 충분히 그 검무에 도달할만한 잠재력이 있었다. 다만 내가 모든 검술의 기본기를 다지지 못해서 잠재력을 깎아먹고 있었다. 나는 어설프게 염상으로 번개를 만들어내려고 왕도(王道)를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멍청함을 깨닫는 순간 자연스럽게 검뢰는 내 것이 되어 있었다. 따로 강력한 번개를 생각할 것도 없이, 내 검과 뇌신류의 뜻은 모두 하나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장 모든 걸 박살낼 번개를 생각하지 않아도 검예 그 자체가 천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 그것이 바로 내가 검뢰를 얻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
"그렇게 된 겁니다."
"검명(劍鳴)의 깨달음으로 검뢰를 뒤덮는다... 그건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발상이다. 비교를 통해 부족함을 깨우쳐 경지를 상승시킨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려면 말 그대로 천상천하천외천의..."
독고성은 내 설명에 넋나간듯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말했다.
"그 96초... 혹시 펼칠 수 있겠나?"
"아니오."
"왜?"
"까먹었습니다. 첫날 기억을 전수받은 후에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났습니다."
나는 씁쓸하게 말했다. 아마 여동빈이 일부러 그렇게 해두었으리라.
그러자 독고성은 탄식했다.
"허어! 그건... 네 말대로라면 그건 필시 검선 여동빈의 천둔검법(天遁劍法)."
"네?"
"틀림없다. 뇌신류의 기록에서 봤다."
독고성의 입술과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당대(唐代)에 이미 중원무림 역사상 최강으로 칭송받았던 무적의 검술이란 말이다. 그 검예와 뇌신류가 비교당했으니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
"허허허! 검선이 대놓고 천둔검법을 뇌신류의 검술과 비교하며 네게 파각(破却)의 깨달음을 줬군. 오만하긴 하나 분한 마음은 들지 않는구나. 천둔검법이라면 인정할 수밖에..."
독고성은 그저 껄껄 웃고 넘어가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내심 의문이 남았다.
' 그럼 왜?'
독고성의 말대로라면 천둔검법은 당나라 시절 중원최강의 검술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나는 미완성의 천둔검법 덕분에 자극받아 경지가 오른 셈이다.
또한 여동빈은 그런 천둔검법을 극성으로 익혔다. 그런데 어째서 막상 여동빈이 연자로서 내게 전수해준 천둔검법은 무초(無招)가 되어버린 것일까?
초식의 유무가 도대체 무슨 차이인가?
왜 여동빈은 천둔검법을 발전시키다보니 초식을 없애버린 것일까?
' 이청운도 비슷한 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절대지경의 고수들은 그게 무슨 차이인지 알고있지 않을까?
내가 고민할 동안 독고성이 나를 불렀다.
"수련을 시작하고 꽤 긴 시간이 흘렀군.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돌아가게."
물론 나는 별로 지치지 않았으므로 지금 당장이라도 장령곡에 돌아가도 된다.
그러나 독고성이 같은 뇌신류의 후배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다는 마음을 알아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