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41 암천향(暗天鄕)
나는 이청운과 함께 독고성이 있는 용왕곡에 찾아갔다. 물론 어설프게 독고성을 끌어내려고 용왕곡의 만장단애에 올라간 게 아니라, 그가 거처하는 사찰에 갔다. 사찰은 남종선의 칠조(七祖)인 하택 신회가 말년에 은거했던 곳으로 당나라 시기의 유적이었는데 독고성은 이 유적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없군."
독고성은 자리에 없었다. 이청운은 모피를 펼쳐놓은 바닥에 가볍게 앉았고, 나는 그와 마주앉았다. 그렇게 대략 한 시진을 조금 넘게 기다리자, 사찰의 문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인기척이 서서히 가까워지더니 바로 문 앞에 당도했다.
인기척은 앉아있는 이청운의 얼굴을 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 말도 안 돼... 이럴수가..."
이청운은 힐끗 그쪽을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뭐가 말이 안 되오? 내가 바로 이청운이오, 사형."
"......!!"
투둑
사찰의 주인, 독고성은 저녁으로 먹으려고 잡아온 듯한 토끼를 그만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는 한참동안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선사(先師)께서 흑묘평에 함께 나들이 가셨을 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는가?"
이청운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자신의 검(劍)을 사형께 주시며 뇌신류의 검예는 사형께 맡긴다 하셨지요. 지금도 똑똑히 기억나오."
"오오...!!"
그러자 독고성은 눈물을 주륵 흘리며 이청운에 다가가서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가 여태껏 보여왔던 퉁명스럽고 고고한 검의 달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독고성은 이청운의 손에 있는 생기를 확인하며 넋나간 듯 말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넌 살아있었구나, 뇌신류의 종사가 살아있었어!!"
"살아있소, 사형."
"으허허헝...!! 되었다, 정녕 된 것이야!! 이걸로 뇌신류는 살았다!!"
독고성은 이내 체면불구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약간 마음이 안쓰러워지는 걸 느꼈다.
'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독고성 또한 뇌신류의 처지를 크게 비관하고 있었구나.'
이청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모든 걸 잃은 기분이 아니었을까? 사대무류에게 있어서 종사라는 존재는 그 정도의 절대적인 위치인 것이다. 잠시 해후를 하던 이청운이 독고성과 마주앉아서 나를 소개시켜 주었다.
"이쪽은 내가 새로 받아들인 제자인 백웅입니다."
독고성은 눈물을 훔치며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과연 종사의 제자구나. 엄청난 검경(劍境)에 오른 게 느껴지는군."
한 눈에 알아본다는 말인가?
내가 내심 독고성의 눈썰미에 감탄하자 독고성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광은? 그 아이도 아마 살아있을 터인데..."
그러자 이청운은 씁쓸하게 대꾸했다.
"사정이 있습니다."
"그래... 종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독고성은 별로 묻지도 않고 넘어가는 기색이었다. 본디 깐깐하기 짝이 없는 독고성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만큼 이청운이 대단한 인물이란 뜻이었다. 일단은 사제지간이라서 존하대가 확립되어 있으나 본질적으로 독고성은 종사인 이청운을 자신보다 위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말씀드릴 생각이고, 용건부터."
"그러게."
이청운이 말했다.
"나는 이 아이에게 검뢰지경을 전수하고 싶소."
흠칫!
독고성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검뢰를?"
"그렇소."
"허나 종사는 이미 천뢰지경(天雷之境)의 극한에 이르지 않았는가? 내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직접 가르치면..."
그러자 이청운이 말했다.
"본디 종사의 비전을 가르치려 했으나, 그걸 얻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지. 그렇기에 우선 얻어낸 경지부터 수습하며 토양을 다져야 하오. 또한 검(劍)에 한해서는 사형께서 나보다 더 오랜기간 연마하셨으니 잘 가르치실거라 생각하오."
"으음... 종사의 전공은 창(槍)이었지."
"그렇소. 나 또한 검뢰를 쓸 수는 있지만 숙련도에 있어서는 사형이 나을 것이오."
"......"
독고성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한참 고뇌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종사. 저 백웅이란 자를 종사로 만들 생각이 아니로군."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 검뢰에 쩔쩔매는 재능이라면 결코 종사의 후계가 될 수 없지. 정말 알쏭달쏭하군."
중얼거리던 독고성이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였다.
"솔직히 말해주게, 사제. 도대체 어찌된 사정인가?"
이청운이 말했다.
"뇌신류의 부흥에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 이상은 말해줄 수 없나?"
"그렇습니다."
실로 제멋대로인 대답! 하지만 독고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알았네. 나 뇌신류의 독고성, 종사의 명이라면 뭐든 듣겠네."
"고맙습니다."
"그럼 이 아이를 내가 가르쳐서 검뢰를 전수하겠네."
"부탁드립니다. 곧 백웅이 혼자서 다시 찾아올 겁니다."
이청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와 함께 잠시 사찰을 나와서 이청운을 장령곡에 데려다줄 준비를 했다.
파앗
이청운은 도착하자마자 내게 말했다.
"사형은 뇌신류에서 제일 가는 검의 달인이지. 검뢰를 얻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걸세. 집중해서 검뢰를 얻고, 다 얻고 나면 돌아오게."
나는 의혹어린 말투로 말했다.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검뢰는 초상승의 절예입니다."
검뢰란 천뢰지경의 일부였다. 자신의 기운을 응축해서 사상(思想)의 번개로 벼려내는 심뢰(心雷)! 그렇기 때문에 검뢰를 포함한 천뢰지경의 힘은 일반 강기를 절삭해버리는 무시무시한 위력이 있었다. 검강의 상위호환이자 뇌신류 검술에서도 명실상부한 최정상의 경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과거 독고성 밑에서 수학하면서 검뢰를 얻기 너무 힘들어서 헥헥거렸던 기억이 있다. 비록 수련기간이 짧긴 했지만 수련기간이 길었어도 얻기 힘들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청운도 그 난이도를 모르는 게 아닐텐데 너무 가볍게 이야기하는 듯 싶었다.
이청운이 말했다.
"몰랐나? 자네는 사실 검뢰를 얻고도 남을 검술경지에 이르러 있다네."
"네?"
"자네는 천하에서 제일가는 광세절학인 칠대절학과 팔선신공을 수십 년간 연마했으며 투선이 강림했던 전투 경험도 수십 번이나 되고 온갖 기인이사의 가르침을 정성껏 받았고 심지어 초절정고수들 간의 격전도 많이 치렀지. 게다가 여동빈의 도움으로 검류의 혼란도 극복했으니 자네의 검학에 스며든 현묘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네. 무술재능만 좀 뛰어났다면 이미 자신의 철학을 담은 일대검류(一代劍流)를 창시한 위대한 무예인이 되었을 것이고 장삼봉에 버금가는 존재가 되었을지도. 솔직히 말해서 자네처럼 엄청난 기연을 한 몸에 받은 인간은 무림역사상 없다네."
"......"
그렇게 말한 이청운이 히죽 웃었다.
"그런 까닭에 검뢰를 여태껏 얻지 못한 건 난이도의 문제라기 보다는 자네가 얻은 걸 다듬을 시간이 없었던 까닭이 크다고 보네. 그리고 이제 계기가 생겼으니 충분히 얻고도 남을 것이네."
"계기라고요?"
"칠감(七感)이 자네의 내부에서 감응하기 시작한 것일세."
그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육감(六感)이란 오감에서 잡아내지 못하는 정체불명의 영역까지 잡아내는 초감각이지. 그리고 육감의 영역을 예민하게 다룰 수 있어야 의념지경에 오를 수 있는 것일세. 그렇다면 칠감의 영역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흠... 모르겠습니다. 한때 백련교주가 칠감을 중요하게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만..."
내가 말끝을 흐리자 이청운이 말했다.
"육감으로도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지. 하지만 칠감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감각이라서 미래예측이 가능할수도 있네. 교주의 표현을 빌리자면 황홀경 사이에서 희미한 균열을 감지하는 능력이라고 할까?"
"음..."
"자네가 지난번 생에서 느꼈던 신의 감각영역만큼은 아니지만, 인간에게 허용된 감각의 한계를 벗어나서 공지각(共知覺)이자 초월각(超越覺)에 도달하는 것. 다시 말하자면 절대고수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능력일세."
"......!!"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떠서 외쳤다.
"그렇다면, 저도 절대지경의 초입에...!!"
"아니, 그건 아니지."
단호하게 말한 이청운이 손사래를 쳤다.
"칠감 자체는 뛰어난 초절정고수들이 대개 잠재력으로 품고 있네. 다만 인식하고 활용할 수 있는 자가 적을 뿐이야. 예전에 검마 또한 벽지상의 위험성을 칠감으로 인식했던 점에서 알 수 있지."
"아."
그런 일도 있었다. 그렇다면 칠감은 절대지경에 필수조건이긴 하지만 절대지경에 올랐다는 증거는 아닌 것이다. 내가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이자 이청운의 말이 이어졌다.
"절대지경에 오른 후 그 초월적인 칠감(七感)을 갈고닦다보면 바로 검선 여동빈의 월공투계의 경지가 되는 것일세."
"월공투계!"
그 어떤 선공(先攻)에도 기습받지 않으며 모든 속도에 대응할 수 있는 초월적인 감각!
이론상 무적이나 다름없는 저 월공투계를 완전히 습득한 것은 내가 아는 고수 중에서는 여동빈 뿐이었다. 내가 탄성을 흘리자 이청운이 씁쓸하게 말했다.
"... 그 월공투계의 [눈]은 인간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닐세. 말 그대로 생사입멸안(生死入滅眼)이라 할 수 있지. 나도, 교주도 아마 오십 년 정도의 수행으로는 택도 없겠지. 과연 투선이라고 해야할까."
"그렇군요."
"자네에게 여태 부족했던 건 범인의 영역을 뛰어넘는 감성이자 감각이었네. 허나 오랜 수행과 경험에서 겨우 칠감이 고개를 들었으니 아마 검뢰를 익히는 것도 쉬울걸세."
파앗
나는 이청운을 데려다주고 다시 용왕곡으로 돌아갔다. 돌아갔더니 독고성이 사찰에서 웬 오래된 책을 꺼내서 읽고 있었고, 내가 방 안으로 성큼 들어가자 그가 손을 앞세웠다.
"그만. 수련은 나중에 시작하자."
"네."
그는 한동안 조용히 책을 읽었다. 나는 그가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방 바깥으로 나가서 명상하며 쉬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독고성은 방에서 나왔고, 내게 질문했다.
"뇌신류의 검술은 어디까지 익혔지?"
나는 이청운의 충고를 상기했다.
' 솔직히 말하되 전생에 관련된 것과 흑요석은 언급하지 말라고 했지.'
나는 내가 지금까지 익힌 성취를 독고성에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독고성이 감탄한 듯 말했다.
"과연... 어디 한 번 펼쳐봐라."
파바밧
나는 뇌영검법에서부터 만승검결, 뇌룡신검, 뇌신검무로 이어지는 초식을 군더더기 없이 펼쳤다. 한두번 펼치는 것도 아니었고 오랜 세월 실전에서 다듬어졌기에 실수를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내 검무 시연을 다 지켜보던 독고성이 말했다.
"훌륭하다. 다 익힌 것 같군. 다만 뇌룡신검의 검무(劍舞)동안 천뢰기(天雷氣)를 받아들이는 수양이 부족한 듯 싶고, 뇌신검무도 아직은 어설퍼. 그걸 중점으로 지도하면 될 것 같구나."
"잘 부탁드립니다."
이미 알고 있는 수련과정이라서 두렵거나 위험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대로 차분히 노력하면 충분히 검뢰를 얻을 수 있다는 두근거림과 자신감이 마음속에서 샘솟았다. 나는 문득 생각나서 독고성에게 물었다.
"아까 사찰 안에서 보시던 책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독고성이 말했다.
"이 사찰의 원래 주인이 남종선의 칠조인 하택 신회의 것이라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지."
"네."
"하택 신회는 육조(六祖) 혜능의 제자였다. 그가 생전에 어떤 인물이었는지 혹시 알고 있는가?"
"잘 모릅니다."
내가 솔직히 대답하자 독고성이 뒤이어서 설명했다.
"하택 신회는 혜능의 남종선을 끌어올리고 신수의 북종을 끌어내리기 위해 신수를 폄하하고 자신의 스승을 육조인 양 부풀렸던 인물이다. 그가 원래는 신수의 제자였으니 더러운 변절자나 다름없는 것이다."
"아!"
나는 독고성과 이런 대화를 처음 한다. 자연히 하택 신회의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도 처음 들을수밖에 없었다. 내가 신기해서 질문했다.
"하택 신회가 그리도 못난 인물이란 말입니까?"
"그 자는 황소의 난 때 군역을 지기 싫어하는 농민들에게 도첩을 팔아서 병역을 면할 수 있는 양 부정한 재물을 축적하고, 그 재물을 황실에 팔아넘기기까지 했던 자다."
"... 도저히 불승(佛僧)이라 부를 수 없군요. 육조 혜능은 민간에 널리 알려진 고승일진대."
나는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그러자 독고성이 묘하게 웃었다.
"불승이 아니면 뭔가?"
"나쁜 놈이지요."
"흐흐흐. 나도 이 사찰에 오기 전까지는 너처럼 생각했지."
"네?"
독고성은 잠시 후 웃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아무튼 지금은 수련을 하자. 만일 네가 검뢰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종사의 제자인 네게 재밌는 사실을 가르쳐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