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33 암천향(暗天鄕) =========================================================================
십대고수.
내 첫 번째 생에서 그 이름은 중원무림사슬의 최정상에 위치한 최고의 고수들을 의미했다. 물론 지금 시대의 인간들은 전대(前代)이기에 모를 수밖에 없지만, 일단 오십 년 후를 겪었던 나는 그들의 위명을 잘 알고 있었다.
태산노옹(太山老翁)
걸선(乞仙)
신승(神僧)
독왕(毒王)
궁왕(弓王)
신창(神槍)
괴협(怪俠)
권성(拳聖)
천마(天魔)
검왕(劍王)
이 중에서 현재의 삼대기인이 오십년 후에도 그대로 천하십대고수가 된다. 그리고 신창은 바로 신창무적이자 중원제일창인 대협 진소청을 의미했다.
"흐음... 그리고 저기 묶여있는 저 친구가 나중에 일시백살(一矢百殺)이라 불리는 십대고수 궁왕 연종휘(燕鍾揮)가 된다는 거군."
내 설명을 듣던 검마는 감탄하듯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 뿐만 아니라 모여있던 동료들은 다들 내 이야기를 신기해하는 듯 했다. 극호가 킬킬 웃었다.
"야 백웅. 내가 설마 십대고수 괴협인 거 아니냐?"
가능성은 있어보인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잘 몰라. 괴협은 워낙 제멋대로 돌아다녀서 별호 외엔 알려지지 않았어."
"거참. 넌 첫번째 삶에 거의 애착이 없었나보다. 흑요석으로 받은 기억에서는 워낙 인상이 희미해서 지금 듣고야 알았잖아."
"......"
"그때 기억은 굉장히 흐릿해. 네가 일부러 감추려고 한 거지?"
극호가 놀리듯 말했지만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고생만 죽어라 하다가 결국 비참하게 말년을 맞이한 이류표사의 삶이 좋을 리가 없잖은가.
그 때 듣고 있던 진소청이 말했다.
"뭔가 이상하군, 백웅."
"뭐가 이상하오?"
"다른 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검마 어르신은 아직 창창한 전성기요. 오십 년 후라지만 고수의 육체는 쉽게 노화하지 않으니 그때도 절정의 기량을 유지하고 있으시겠지. 헌데 십대고수 중에 검마가 포함되지 않는단 말이오?"
"어, 그러고보니..."
나는 그걸 별로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진소청의 말을 듣자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상태에서도 검마는 천하에서 손꼽히는 초고수인데, 오십 년 후에는 당연히 천하를 오시하는 십대고수에 들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오십 년 후에도 무영문은 있었소. 다만 워낙 격높은 문파라서 일개 표사 나부랭이였던 나는 그 소식을 잘 몰랐소. 또한 무영문은 오십 년 후에도 사중제일문파가 맞소."
"허허! 듣기 좋군."
흐뭇하게 웃은 검마가 말했다.
"흠... 내 생각엔 뭔가 강호의 이변을 느끼고 나... 혹은 혜아가 힘을 숨기고 지냈던 게 아닌가 싶군. 그게 아니라면 아마 내가 오십 년이 지나기 전에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던 거겠지."
"......"
온갖 불길한 상상이 떠올랐다.
그간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 첫번째 생에는 오십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러자 미호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백웅. 그러면 십대고수 중에서 천하제일인이 누구였느냐?"
움찔
나는 민감한 질문이 날아오자 약간 생각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잘 모르겠어. 정말 그건 모르겠어."
"무슨 대답이 그러냐?"
"그게... 그 열 명의 십대고수 중에서 검왕은 이 놈이었다고."
나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남궁환의 목을 잡아들었다. 창천검룡 남궁환은 오십년 후 검왕이자 십대고수로 이름을 날리지만, 이렇게 극호의 손에 목이 베여버렸다. 그러자 극호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 별볼일없군. 그런 잔챙이가 십대고수에 꼽히는 시대란 거냐?"
"그걸 잘 모르겠다고. 현재의 삼대기인이 고스란히 십대고수가 되는 거니까 그들 셋의 실력은 확실하잖아. 현 시점에서 이미 초절정의 끝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또한 진소청도 끼어있고. 도저히 판단을 못 하겠어."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검마가 말했다.
"아무래도 십대고수는 서로간에 실력편차가 컸던 모양이군."
"그런 거 같습니다."
"그럼... 백우선에서 봤던 '한두 명'은 누구지?"
"네?"
검마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백우선을 통해서 봤던 미래. 거기에서 진소청은 자신을 제외하고 한두명의 십대고수만이 나인교의 주교를 상대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네."
"아."
"백우선은 전적으로 자네가 수집한 지식과 경험에 의존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보패라고 알고 있네. 그렇다면 진소청이 그렇게 판단한 것에는, 자네가 갖고 있던 '십대고수'에 대한 막연한 기준이 작용했던 거겠지."
"그렇군요. 알아들었습니다."
즉 진소청이 판단한 최고의 고수들은, 즉 오십 년 후 최고의 평가를 구가하는 절대자들을 의미했다. 나는 잠시 숨을 들이쉰 후 말했다.
"천마(天魔)와 신창(神槍), 권성(拳聖)이 시대를 주름잡는 최고수로 꼽혔습니다."
"천마나 권성은 어떤 자들이었나?"
"천마는 정체불명의 마도절학을 대성해서 무패라고 불린 당대 최고의 마도고수였습니다. 그리고 권성은 고려에서 온 최고의 권법가라고 불렸는데 불패였습니다."
"신창도 마찬가지지?"
"네."
검마가 알겠다는 듯 말했다.
"천마 신창 권성 세 사람 모두가 불패(不敗)의 무적자로 명성을 날렸나 보군. 그래서 강호에서는 그들이 붙어보기 전에는 판단할 수가 없었던 건가 보군. 모순(矛盾)이란 직접 창과 방패를 부딪혀보기 전엔 결과를 알 수 없으니 말일세."
"그렇습니다."
"절대지경의 고수라면 우열을 알 수 있겠지만 그런 자가 일부러 강호의 호사가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리는 없겠지."
검마의 통찰력은 대단했다. 내가 한 마디 한 것만으로도 전후사정을 모두 유추한 것이다.
그 때 옆에서 듣고 있던 연종휘가 중얼거렸다.
"당신들은 단체로 정신이상에 걸린 거요? 아까부터 무슨 미친 소리를..."
"연종휘."
"죽이든 살리든 빨리 결정해 주시오."
"자신이 궁왕이 된다는 걸 믿지 못하겠소?"
내가 질문하자 연종휘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뭐하러 그렇게 촌스러운 별호를 쓴단 말이오? 그리고 나는 강호에서 큰 명성을 얻을 생각도 없고 그저 내 무공의 완성을 위해 수련할 곳을 찾고 있었을 뿐이오. 그러던 중 운나쁘게 당신들한테 걸린거고..."
"......"
하지만 내가 착각할 리가 없다. 눈 앞의 연종휘는 분명 차후 십대고수가 될 것이다.
나는 검마에게 전음을 보냈다.
[ 혹시 저 자가 이기어시를 썼습니까?]
[ 썼네. 미약하긴 하지만 의념절기를 사용할 줄 알아. 그래서 거물이 될 거라 한 걸세.]
[ 틀림없습니다.]
[ 데려갈 생각인가?]
[ 네.]
[ 그것도 재밌겠군.]
극호가 말했다.
"그럼 정리하고 돌아가자구."
"알았어."
나는 극호의 말대로, 척살한 남궁세가 고수들의 시체를 일단 목갑에 집어넣었다. 그냥 놔두고 가면 보나마나 강호의 여러 세력들이 배후를 캐려고 조사할 게 뻔하므로 목갑에 넣어서 실종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남궁세가에 있던 나머지 인간들은 나생문에 갇힌 채 미호의 현혹에 빠져서 기억을 조작당했다.
정리가 끝난 후 나는 빠져나와서 일행을 진랑곡에 데려다놓았고, 곧장 제갈사를 찾아갔다.
파앗
제갈사는 난데없는 불청객이 찾아오자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제갈사를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제갈사. 벽지상과의 계약은 얼마나 남았지? 이제 곧 그녀를 찾아가서 배교 교주로서 인정받아 마왕의 만신전을 세우는데 협력해야 할텐데, 이렇게 놀고 있어도 되냐?"
"넌 누구냐?"
"배교교주."
나는 흑요석을 집어들고 그에게 가볍게 던졌다. 제갈사는 직접 잡는 대신 허공에서 영체의 팔 같은 걸 소환해서 흑요석을 붙잡았는데, 흑요석을 경계하는게 분명했다. 나는 제갈사에게 말했다.
"나는 네가 제갈부의 몸에 음양천고를 넣었다는 것도 알고 있지."
"......"
"그 흑요석은 기억을 전송한다. 그걸 읽으면 내가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고있는지를 알 수 있을 거다."
"재밌겠군..."
제갈사는 흑요석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기억 전송이 끝나자, 그는 다소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이젠 아예 초장부터 막 나가는군... 크큭. 너네 사실 힘자랑 하고싶었지?"
나는 제갈사가 기억을 완전히 전승했음을 알아채자 투덜거렸다.
"제길! 매 전생마다 일일이 같은 말을 하는게 너무 귀찮아. 뭔가 너한테 흑요석을 쉽게 넘겨줄 수 있는 마법의 단어같은 건 없냐?"
제갈사의 의심이 너무 많아서 웬만한 떡밥으로는 걸려들지도 않는다. 그나마 제갈사에게 존재하는 일말의 광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에게 흑요석을 전달하는 건 상당한 난이도가 있었다. 그러자 제갈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있을 리가. 꼬우면 그냥 때려패서 인사불명으로 만든 다음에 기억을 전송하라고. 지금 네 힘이라면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 아냐."
"거짓말하지 마. 내가 무공으로 널 몰아붙이면 넌 사법이나 저주를 써서 나와 공멸할 게 뻔해."
"뭐 그렇겠군."
"뭐가 그렇겠군이야... 내가 너 때문에 파멸하는 죽음도 한번 보고싶은거냐?"
내가 질려서 반문하자 제갈사가 히죽 웃었다.
"재밌잖아."
"......"
제갈사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여하튼 그 극호라는 놈 덕에 자신감 회복은 많이 했겠군. 호구들 때려잡으니까 속이 시원하냐?"
"꼭 그렇게 말할 거 있어? 남궁세가가 나쁜 놈들이니까 토벌한 것 뿐."
"하지만 놈들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맞은 거겠지."
"놈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와는 관계없어."
내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제갈사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럴까?"
"......?"
"뭐 아무튼, 생각보다 뒤처리는 깨끗하게 잘 했군. 이제는 남은 기연을 모아서 쓸어담고 수련기간을 최대로 늘리는 전략을 짜자."
"제갈사. 이대로 가만히 황궁을 두면 안 돼."
"크크. 백련교, 황궁, 십이율... 그들의 묘한 길항관계를 어떻게 조정하느냐군."
그게 문제다.
황궁을 가만히 놔두면 전생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악신의 지원으로 막강해져서 손쓸 도리가 없어진다. 물론 그런 황궁을 부수는 방법도 있지만 신들의 힘을 크게 빌리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황궁을 부수면 이후 백련교가 중원에 진출해서 폭주해 버린다. 교주가 무생노모의 법문을 모은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결국 [옛 지배자]와 삼황오제의 전쟁이 재점화될 뿐이다.
십이율은 제 3의 세력에 가깝지만 유사시에는 중원의 격란에 끼어들어서 이득을 챙기거나 암살에 나설 수도 있다. 또한 십이율주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며 의뭉스러운 정체불명의 괴인이었다.
제갈사가 말했다.
"내 생각은 지난번과 비슷하게 흘러가되, 이번에는 봉선의식을 전혀 하지 않는 게 제일 낫겠다."
"뭐?"
"지난번 생에서 크게 틀어진 요인은 바로 네가 전욱의 사도가 된 것이었다. 그 때까지는 황궁도 무난하게 제압하고 큰 주목을 받지 않으며 적당히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 이후로 해신토벌이나 백련교가 엉키면서 사건이 폭주했지. 또한 봉선의식으로 뭘 하더라도 거대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게 뻔해."
제갈사가 팔짱을 꼈다.
"신의 사도가 되거나 봉선의식을 치르는 건 하지 마. 그건 폭탄에 불을 붙이는 거니까. 대신 칠요는 최대한 모아놔야 하고, 모아놓은 기연으로 최대한 개인적 역량을 키우는 데 힘쓰라고. 최소한 20년은 박혀서 수련할 마음으로."
"알았어."
"망량의 생각도 아마 나와 크게 다르진 않을 거다. 단지 하나 걸리는 점이..."
"뭔데?"
"꼭 알아봐야 할 게 있어."
제갈사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천계 최강의 투선, 제천대성이란 놈이 '왜' 칠요를 모으는 걸 반대하는지다."
"......?"
"놈은 천계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칠요의 해방을 반대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삼장과 함께 천축에 간 것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의 말을 듣자 번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삼장이라고 하는 존재를 찾아서 그의 영혼을 천신경으로 부르면 되겠군. 아니면 미후왕에게 직접 물어보던가."
"그래."
제갈사의 눈빛이 빛났다.
"내 생각엔 뭔가 심상치 않아. 그 삼장이란 놈의 존재가 많은 걸 풀어줄 실마리가 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