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32 암천향(暗天鄕) =========================================================================
나는 즉시 남궁세가의 비밀공간으로 이동해서 순어구를 획득했다. 순어구를 손에 넣은 후에는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 후 여인들이 학대받는 밀실으로 향했다. 예전에 봤던 참상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기에, 나는 이번에는 극도의 분노보다는 약간 인상을 찡그리는 정도로 끝났다.
퍼벅
"이 개자식... 들이..."
하지만 극호는 아닌 듯 했다. 극호는 자신의 창으로 란(欄)과 나(拿)를 응용해서 창에 꼬챙이처럼 꿰인 파수병들을 육편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극호가 살초를 써서 남은 놈들을 다 죽이려 할 때, 진소청이 나서서 극호를 막았다.
까앙!
"사형, 진정 좀 하십시오."
"빌어먹을!!"
극호는 사자후를 쩌렁쩌렁 터뜨리더니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린 듯 냉철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미안하다, 백웅. 너무 흥분했다. 몇 놈 살려둬야 증언을 할 텐데."
"아냐. 딱히 증언같은건 안 해도 상관없지만..."
나는 극호를 보며 말했다.
"흑요석으로 이미 봤던 기억이잖아? 너무 흥분하는거 아냐?"
괜히 지적한 게 아니다. 방금 진소청이 말리지 않았다면 극호는 말 그대로 남은 놈들을 수백조각으로 찢어버렸을 것이다. 이 정도의 분노를 보여주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극호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렇지 않아. 직접 맞닥뜨리니까 전혀 다른 감정이 밀려와. 흑요석으로 봤을 때는 남의 일을 보는 듯 했는데 난 지금... 분노할 수밖에 없었어."
"......"
나는 극호의 말에 침묵했다.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 흑요석은 내 시점을 주된 시점으로 해서 기억과 감정을 전달해서군.'
하지만 흑요석의 술법이 그것 뿐이라면 비전의 술법이 아닐 것이다. 흑요석의 술법은 얼마간 기억을 받은 상대방을 내 감정에 동조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기억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큰 거부감 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피시전자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다만 지금 극호의 경험처럼 너무나 자신의 상식과 역린을 건드리는 체험을 직접 맞닥뜨릴 경우 흑요석의 술법이 만들어주는 정신방어가 약간 깨질 수도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극호에게 말했다.
"이런 쓰레기들한테 일일이 마음쓰지 마."
퍼억
내가 가볍게 사권(蛇拳)을 발출하자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있던 파수병 두 놈의 머리통이 터졌다. 나는 피조차 묻어있지 않은 내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이걸로 다 죽였군. 강호에 증언을 해서 남궁세가의 악덕을 성토할 필요따윈 없어."
옆에서 술법으로 여인들에게 가벼운 옷가지를 만들어주고 있던 미호가 나를 힐끔 보며 말했다.
"마음을 굳혔구나."
"깔끔하게 하기로 한 것 뿐이야."
"본녀로서도 그게 더 마음에 드는구나."
검마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백웅. 작전대로 우리는 여기서부터 놈들을 헤집어가겠네. 자네는 자네 일을 하게."
"알겠습니다."
파앗!
나는 즉시 극호와 진소청을 데리고 비등으로 남궁세가 수뇌부가 모이는 회의장으로 향했다. 나는 이 회의장에 마침 다 모여있는 걸 확인하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 있었구나! 다행이다."
웅성
이 장소에는 남궁세가의 가주인 검왕 남궁명, 그리고 남궁팔검 장로들과 상당한 실력의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검왕과 남궁팔검을 제하고도 실력있는 무인이 적어도 오십여 명은 되는 자리라서, 검마의 말대로 이 시간에 남궁세가가 일일회의를 여는 건 사실인 듯 했다. 삽시간에 그들 모두의 시선이 우리 셋에게 날아와서 박혔다.
남궁팔검 중 하나가 덜컹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쳤다.
"네놈들은 누구냐? 누구길래 감히 남궁세가를 침범했는가!"
인간쓰레기가 참 당당하군.
스으
나는 바로 검을 뽑아서 놈들에게 달려들어 학살을 벌이고 싶었다. 저 놈들이 살아숨쉰다는
자체가 너무 혐오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검을 뽑으려는 걸 극호가 손짓으로 막으며 마주 외쳤다.
"만천하에 이름높으신 검왕 남궁명 나으리, 그간 별래무양하셨소이까? 신수가 훤해보이십니다."
"넌 누구냐?"
"지나가던 극호올시다."
그 말에 가운데의 크고 화려한 의자에 앉아있던 남궁명이 침중하게 대답했다.
"그쪽은 진소청이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진소청?"
"......"
남궁명이 진소청에게 상황을 설명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진소청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흑요석을 받기 전까지는 남궁명을 훌륭한 무인으로 존경하고 있었지만, 모든 추악한 진실을 알아버린 지금은 그와 눈을 마주치기도 싫은 것이다. 대신에 극호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왕! 정말 나쁜 짓을 많이도 저질렀더군. 궁금한게 있는데 그렇게 살면 사신(死神)이 무섭지도 않소?"
"사신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더 이상 개소리를 한다면..."
"무살(無殺)말이지."
스아앗
그 순간, 버럭 화를 내려던 검왕 남궁명의 안색이 뒤바뀌었다. 그것은 장내에서 오로지 남궁명에게만 일어난 변화였으며, 그는 약간 손을 떨기까지 했다. 남궁팔검은 자신들의 가주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건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기색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가주! 무슨..."
"가만 있어보게."
검왕 남궁명은 이쪽을 주시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흰... 설마 무살인가? 아니면 무살과 관계있나?"
"흐흐흐."
극호는 약간 징그럽게 웃으면서 내게 전음을 보냈다.
[ 봐. 효과가 있잖아. 검왕 저 놈 하나만큼은 무살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이 자리에 온 의미가 있지.]
[ 남궁팔검은 모르는 것 같군.]
[ 무엇이든 죽일 수 있는 무적의 암살자 얘기를 뭐하러 하겠어?]
[ 그것도 그래.]
무살!
그것은 검마가 내게 일전에 딱 한 번 이야기해준 적 있었던 전설의 존재였다. 검마의 3대조 전에 나타났던 그 존재는 중원 최고의 암살자이며, 오로지 자신의 대의를 위해 움직인다고 했다. 심지어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여버릴 수 있는 사신(死神)의 경지에 올랐다 하여 그 위용에 무살이라는 칭호가 은밀히 붙은 것이다.
다만 그 칭호는 매우 은밀히 전해지는지 지금 눈 앞에 있는 검왕 남궁명같은 대세력의 주인이나 알고 있을 뿐, 그 밑의 인간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잠시 헛기침을 한 극호가 남궁명의 질문에 대답했다.
"뭐라고 생각하시오?"
"이익... 감히 나를 놀리는 건가."
"놀리다니. 그저 이 극호는 검왕의 신이한 통찰력을 듣고싶을 뿐."
극호가 이죽거리자 검왕 남궁명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너희가 무살과 관계있든 없든 상관없다. 그딴 건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본가를 침범한 네놈들을 징치해 주마!!"
타다닷
남궁명이 손을 드는 순간, 장내에 모여있던 남궁세가 무인들이 벼락처럼 덮쳐왔다. 극호와 진소청은 기다렸다는 듯 그들에게 반격하기 시작했고, 나는 약속했던 대로 멸혼보를 운용해서 전방으로 나아갔다. 일련의 과정은 마치 미리 합을 맞추고 한 것처럼 진행되었다.
꽈앙!!
남궁팔검 두 명이 달려들어 검기를 내뿜었고 나는 그 공격을 내공으로 그냥 버텨냈다. 딱히 초식도 쓰지 않고 기막으로 검기를 막아버리자 그들이 경악했다.
"뭣..."
"무슨 내공이..."
퍼퍽!!
' 느려...'
나는 달려들어서 남궁팔검 한 명의 목에 일 권을 꽂아넣었다. 그리고 권섬이 별빛처럼 흐르는 순간에 재차 다른 놈의 관자놀이에 호권을 격중시켜 버렸다. 물흐르는듯한 공격이 이어진 후 나는 두 명의 등 뒤로 이동해 있었고, 가볍게 손을 털었다.
후두둑...
한 놈은 목젖이 바스라진 채, 다른 한 놈은 뇌가 곤죽이 된 채 천천히 무너졌다. 내가 검도 쓰지 않고 멸혼보와 절학의 응용으로 순식간에 절정고수 둘을 잠재워버리자 남궁팔검들이 경악했다.
"뭣?!"
"권성(拳聖)인가..."
그들이 얼빠진 소리를 내는 이유는 강호의 상식으로 절정의 무위에 이른 자를 일격에 잠재우는 건 통상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설령 초절정의 초반에 이른 자라고 하더라도 손쉽게 결판이 나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자신의 무공으로 일가를 이룬 자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해내버린 것이다. 남궁팔검의 나머지 여섯 장로는 기가 죽은 듯 주춤거렸지만 검왕 남궁명이 짜증스럽게 호통을 쳤다.
"정신 차리시오!"
"헛... 가주..."
"권성은 무슨 권성. 그냥 저 자는 극히 빠른 신법을 믿고 허점에 정확한 일격을 가한 것 뿐. 결코 권이 장기가 아니오. 당한 자들이 방어로 전환하는 게 늦었을 뿐이란 말이오!"
"그럴 수가..."
남궁팔검이 어이없어했지만, 나는 검왕 남궁명의 정확한 분석에 눈에 이채를 띄었다.
' 잘 보는군. 과연 오대세가 최강자인가.'
다른 놈들은 무공수준이 낮아서 내가 어떻게 놈들에게 파고들어서 격살했는지 원리조차 모르고 있었지만, 검왕 남궁명은 멸혼보의 속도를 어느 정도 동체시력과 육감으로 따라붙어서 내 무예숙련도까지 일견에 파악한 것이었다. 확실히 검왕은 남궁팔검 따위와는 수준이 다른 초절정고수였다.
나는 씩 웃으며 검을 들었다.
"나도 진소청처럼 해보고싶지만 아직 그 정도 수준은 아닌것 같아서 검을 쓰겠다."
"뭐라고?"
"도망치지 마."
파밧
나는 멸혼보를 써서 옆으로 교묘하게 짓쳐들어갔다. 내 공격궤도에 있던 것은 남궁팔검 장로 중 한 명이었는데, 그는 집중해서인지 내 검로를 읽어내고 막아내려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방어를 무시한 채 검에 내공을 크게 집중했다.
푸콱
"......!!"
나는 검염을 머금은 칼을 그대로 토막내어 버리며 상대방의 육신까지 세로로 쪼개어 버렸다.
' 깨달음이 부족할 때라면 몰라도 지금이라면 내공의 묘를 다 살릴 수 있다.'
내가 익힌 절학의 수준을 생각하면, 의념절기로 막지 않는 한 내 절초를 막을 순 없다. 심지어 굴공참을 이용해서 직전에 궤도를 틀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방어가 소용없음을 보여준 나는 그대로 검을 횡으로 휘두르며 옆에 있던 두 놈을 절단내려 했다.
"으윽."
"피해라."
그러자 이번에는 남궁팔검들이 나려타곤의 흉한 자세를 감수하면서, 팔 한 쪽을 주며 피하려는 듯 했다.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사지 한 쪽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위잉
뇌신검무(雷神劍舞)
내 검 끝에서 벌떼 우는 듯한 소리가 울리더니 갑자기 검끝이 뇌전처럼 파직거렸다. 동시에 뇌신검무의 초식이 마치 채찍 휘두르듯 날아갔고, 초식 끝에 걸린 장로의 목이 툭하고 베여 날아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 회전을 하며 다시 한 번 공격했고 또 하나의 목이 떨어져 버렸다.
피분수가 솟구친다.
내가 순식간에 남궁팔검의 반수 이상을 회쳐버리고 세 놈밖에 남지 않자 남궁팔검들의 눈에는 공포가 새겨졌다. 그들은 이미 전의를 잃었는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는데, 내가 그들에게 추가공격을 넣으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꽈광!
"노옴!!"
검왕 남궁명이 노성을 내지르며 나와 검을 마주쳤다. 나는 그의 검을 정면에서 받으며 생각했다.
' 위력적인 강검(鋼劍).'
그리고 나는 예전에 남궁명이 싸우는 장면을 몇 번이나 보았기 때문에, 그의 검법이 유능제강과 강능단유 모두를 자유자재로 시전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인간적으로는 쓰레기였지만 이 일 초로 남궁명이 확실히 천하를 오시하는 초절정의 검도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 뿐이다.
나는 남궁명과 검신을 마주대한 상태로 말했다.
"남궁명. 내가 왜 굳이 극호의 제안대로 널 찾아왔는지 아냐?"
"이 악적놈... 왜냐!!"
"자신감을 회복하러 왔다."
"... 뭐?"
타앙
나는 잠시 근접 대치상태를 풀고 뒤로 물러서며 어이없어하는 남궁명에게 말했다.
"너같은 건 일 초만에 수백 조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초고수가 동영에 있지. 그리고 나는 앞으로 그 녀석을 손가락으로 죽일만한 괴물과 싸워야 하거든. 그러려면 내가 지금까지 모은 힘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해."
"개소리... 그런 괴물이 세상에 어딨단 말이냐?"
남궁명이 쩌렁쩌렁 호통을 쳤다.
"남궁세가의 검법은 천하제일이다!! 너같은 허풍쟁이 따위는 죽여버리겠다."
카강
카가강
나는 격렬하게 공세를 취해오는 남궁명과 정면에서 십오 초를 겨루었다. 겨루는 동안에 남궁팔검 세 장로가 옆에서 합공해 왔지만, 나는 농락하듯 멸혼보로 놈들의 등 뒤에 나타나서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퍼버벅
"크아악."
숫자는 거의 의미가 없군.
앞으로는 혼자서 와도 되겠다.
하지만 잡졸들과 달리 검왕 남궁명은 곤란했다. 결코 일이초로 처치할 수 없는 고수였다. 검초가 내 결계의 빈틈을 노리며 집요하게 헤집어오는 건 생각없이 대적했다가는 곤란할 게 뻔했다. 오색 검강이 발출되며 용형(龍形)을 만들었고, 그건 바로 의념절기였다.
피쉿
나는 아슬아슬하게 남궁명의 제왕검법의 절초를 피해냈지만 뺨에 조그마한 상처가 나는 건 피할 수가 없었다. 그의 검에 실린 위력을 얕볼 수가 없다.
' 너무 얕봤나?'
나는 내 실력이 확실히 남궁명보다 윗줄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진소청이 직접 절대지경의 발판을 쌓았다고 인정해줬기에, 이제 와서 남궁명에게 쩔쩔매는 게 이상하다. 하지만 그런 실력의 절대적 고하와는 달리 이 자리에서는 상대적인 요소가 있었다.
남궁명은 현재 극도의 투기에 휩싸여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있었고 이 자리가 놈의 본거지라는 사실도 그에게 자신감을 주고 있었다. 내가 남궁명을 얕보지 않고 처음부터 최대절학을 쓰며 기선제압을 했다면 남궁명을 손쉽게 없앨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의 실력을 볼 셈으로 천천히 싸워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남궁명은 최대의 잠재력을 끌어내버렸고 지금은 대등해 보이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밀려줄 생각이 없다. 나는 차분하게 남궁명과 초수를 겨루다가 육십 초가 되는 시점에 삼보절기의 천지인(天地人)을 통제하며 그의 결계를 관조했다.
약점이 보인다.
진소청이 말했던 대로, 삼보절기를 익히자 내가 서 있는 공간과 상대방이 서 있는 공간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또한 고수달인에게 존재하는 결계를 어떻게 해야 파고들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한 걸음을 딛으며 남궁명의 공격을 유도했다.
심적권청의 순간에 남궁명이 외치는 게 들렸다.
[ 놈! 방심했구나.]
제왕검법(帝王劍法)
극성(極成)
제왕파천무(帝王破天舞)!
예전에도 보았던 남궁명의 필살기가 오색 강기를 머금고 터져나왔다. 제대로 맞으면 금강동인도 파괴해버리는 가공할 위력이었지만, 나는 그가 큰 기술을 쓸 때까지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다.
뇌명(雷鳴)
파지지직
갑자기 내 몸의 모든 잠재능력이 상승하며 이글거리는 뇌전이 내 몸 주변에 수십 개나 솟구쳤다. 그 찰나에 나는 엄청난 내공을 뇌명에 쏟아부으며 능력을 증폭시켰고, 증폭된 힘은 그대로 다리의 근육과 전신의 뼈와 살을 자극했다.
쉬쉭
뇌명으로 빨라진 몸으로 다시 한 번 멸혼보를 써서 남궁명의 후방으로 돌아가자 남궁명은 크게 경악하는 기색이었다.
[ 마... 말도 안돼. 그게 속임수였다고...]
당연히 보여준 빈틈이었다. 그 허실을 간파하지 못한 남궁명은 큰 기술을 사용하는 순간을 내게 읽혔고, 나는 뇌명과 멸혼보로 바로 반격한 것이다.
푸욱
나는 지체없이 남궁명의 등 뒤에서 칼을 꽂았다. 다만 강기를 실어서 터뜨리지는 않았는데, 그 때문인지 남궁명은 선혈을 흘리면서 가만히 멈춰서 있었다. 남궁명은 고통을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 끝장내지 않는건가?"
"자기가 편히 죽을 처지라 생각하나?"
나는 그에게 반문한 후 칼을 좀 더 세게 밀어넣었다.
"크아아악..."
선혈이 뚝뚝 떨어진다. 남궁명이 억눌린 비명소리를 흘렸다.
"네 아들놈도 마침 잡혔군."
저만치에서 극호가 어깨에 피묻은 창을 걸친 채, 뭔가를 한 손에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백웅. 지공대는 전멸시켰다."
"수고했어."
"쓰레기 분리수거를 할까."
그의 손에 들려있는 건 남궁환의 목이었다. 극호가 남궁환을 뇌신류 고문술로 고문했는지, 남궁환의 눈알이 까뒤집혀 있었다. 극호가 남궁명의 눈 앞에 남궁환의 목을 내팽개쳤다.
투둥
"명년 오늘이 너희 부자의 제삿날이 되겠군.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있다면 말이지만."
"크으으윽..."
남궁명은 분노때문에 몸을 파들파들 떨었지만 이미 내가 원하면 일초만에 절명하는 상황이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버럭 외쳤다.
"죽여라!!"
"왜?"
"죽어서 네놈들을 저주할 것이다."
나는 남궁명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네 손에 억울하게 죽고 학대당한 자들도 똑같은 소리를 했겠지."
"......"
"걱정 마. 너같은 잔챙이한테 그렇게 오랜 시간은 쓰지 않을테니까."
푸콱
나는 남궁명의 모가지를 날려버렸다. 극호가 옆에서 이죽거렸다.
"일일이 심문하는게 귀찮아졌나봐."
"뭐... 천신경으로 물어보지."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한 후 진소청을 찾아갔다. 진소청은 천공대와 싸우고 있었는지 막 격전이 끝나서 피곤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시체더미 위에 앉아 있었고, 자잘한 찰과상 외에는 입지 않고 천공대를 전멸시킨 모양이었다. 진소청이 나를 보자 손을 흔들었다.
"백웅. 여기도 끝났소."
그리고 저 멀리에서 미호가 술수로 내게 말했다.
[ 이 세가 전체에 결계 나생문을 펼쳤고, 잡졸들은 본녀가 다 정신제압을 걸었느니라. 오늘 여기서 있었던 일이 알려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미호가 뒷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해주니 순식간에 일처리가 끝났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윽고 미호를 만나서 합류했는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검마는?"
"누군가와 싸우고 있는 것 같다."
"뭐라고!"
"상당한 고수 같던데."
우리는 놀라서 다같이 검마가 싸우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미호의 말대로 검마가 누군가와 대치해서 한창 전투중인 걸 볼 수 있었다.
검마는 거의 승기를 잡았는지 여유로운 기색이었고 거의 다치지 않았다. 그런 반면 맞은편에 있는 자는 자신의 활을 땅에 박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무래도 검마가 몇 번인가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는데 봐준 모양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로 보였다. 대략 진소청 정도의 나이가 아닐까? 또한 청년은 새까만 옷을 두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가 들고 있는 활은 시위가 없었다.
"헉... 헉..."
검마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 나이에 대단한 실력을 가진 청년이군. 자네 이름이 뭔가?"
검마의 질문에 그 궁사(弓士)가 대답했다.
"연종휘(燕鍾揮)..."
"연씨는 세상에 드문데... 들어본 적 없군. 별호는?"
"없소."
"왜 나와 대적한 거지? 나와 은원이 없잖은가."
연종휘가 대꾸했다.
"난 오늘 남궁세가를 떠날 생각이었지만... 오늘까지는 식객이니 얻어먹은 은혜를 갚아야 했소."
검마는 내 쪽을 돌아보며 훗하고 웃었다.
"그렇다는군, 백웅. 이 자를 놓아주고 싶은가?"
"......"
"장차 거물이 될지도 모를 거 같은데."
나는 검마의 평가를 듣자 그럴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당연하죠. 하지만 바로 놔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가? 연종휘 자네, 이쪽으로 투항하게. 이미 남궁세가는 멸문했어."
검마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 남궁명과 남궁환의 수급이 있자, 연종휘가 한숨을 쉬었다.
"... 어쩔 수 없군.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시오."
진소청이 포승을 들고 걸어나왔다.
"손을 이리 내시오."
"알겠소."
진소청이 연종휘의 손에 포승을 묶는 걸 보던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 표정을 본 미호가 짖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뭔가 있구나. 저 연종휘가 뭐하는 놈이냐?"
"... 십대고수가 십대고수를 묶고 있어."
"응?"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 설마 저 자를 여기서 볼 줄이야.'
그렇다.
앞으로 50년 후 - 십대고수(十代高手)로 알려진 무림 최정점의 고수들.
그 중에서도 천하제일의 궁도고수이자 전설의 이기어시를 달성했다는, 일시백살(一矢百殺) 궁왕(弓王) 연종휘(燕鍾揮)가 지금 내 눈 앞에서 신창(神槍) 진소청에게 묶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