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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531화 (530/1,615)

00531  암천향(暗天鄕)  =========================================================================

파앗

나는 극호가 기다리고 있는 진랑곡에 도착했다. 그러자 극호가 한창 뒤편의 숲에서 무예를 수련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앗!!"

쏴아앗...

극호의 기합소리와 함께 대나무 숲의 일각이 베여나가는 기색이 느껴졌다. 근처로 가자 극호가 나를 발견하고 연무를 멈췄다.

"왔군."

극호는 내 흑요석을 받아들였기에 이전까지의 미묘한 반존대를 집어치우고 평대를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전생을 통해 능력을 축적한 덕에 극호를 뛰어넘긴 했지만, 사실 뇌신류 평제자 시절부터 기어올라왔던 것이다. 원래부터 뇌신류 전승자의 위치에 있었으며 한때 내 사형이기도 했던 극호와 괜히 존하대를 하기보다는 서로 평대를 하는 게 편했다. 애초에 술친구처럼 느껴지는 극호와 격을 쌓고 싶지 않았다.

나는 힐끔 주변의 수련상황을 보다가 말했다.

"수련은 좀 어때?"

"환상적인 기분이야."

극호는 자신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 어떤 감미로운 술도 이보다 더할 순 없군."

"칠대절학과 팔선신공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나 보군."

"물론이지."

극호가 수련을 시작한지는 아직 하루이틀에 불과했지만 그는 크게 들뜬 모습이었다. 하긴 광세절학을 익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을 것이리라. 나는 극호에게 말했다.

"네게 준 흑요석은 대략적인 기억만을 전달하게 되어있었어. 칠대절학의 기초는 수련할 수 있겠지만 응용단계로 가면 더 강한 기억이 필요할테니 나중에 마련해주지."

"흠... 갔던 일은 잘 됐나?"

"그것 때문에 왔는데."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종리권의 축복이 어떤건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아."

나는 극호에게 수기공양의식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극호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뭐여? 대라신선이란 놈이 자기가 뭘 줬는지도 설명을 안해줘?"

"일단 무의 재능을 늘려준다 했으니 수련을 하다보면 알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수련이란 게 어디 하루아침에 뚝딱 되는 건가... 그건 누가 한 말이지?"

"망량이."

"망량이라..."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중얼거리던 극호가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망량은 아무래도 네가 이번 생에서 몸을 크게 사리기를 원하는 모양이군."

"몸을 사려?"

"너 스스로 절대지경에 도달하는 걸 목표라고 했으니, 가능한 신의 계획이나 인간사에 끼어들지 않고 진득하게 수련이나 하길 원하는 게 아닐까?"

"......"

"지금 이것저것 시도해볼만한 게 많을텐데도 일단 수련을 하라고 한 건 그런 뜻으로 보이는데."

그럴지도 모른다. 나름대로의 직관으로 이야기한 극호가 자신의 창끝으로 바닥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야. 근데 그건 좀 아니지."

"뭐가 아니라는 거냐?"

"넌 아직 할 일이 남았잖아. 남궁가를 쳐부숴야하잖냐. 그것 말고도 할 일이 산재해 있고."

"... 그래."

대뢰옥 인질들과 혈도단 인질의 구출은 해냈으나 아직 남궁세가에서 학대받고 있는 여인들이 남아있었다. 다만 그 일은 대뢰옥이나 혈도단 때와는 달리 상당히 난이도가 있으므로 여러가지 꼼수를 써서 접근해야만 했다. 뭔가 생각하고 있던 극호가 말을 이었다.

"야. 이렇게 된거 실력을 확인해볼 겸 이쪽에서도 숫자로 밀어붙이지 않을래?"

"뭔 소리야?"

"여동빈한테 수명 10년을 바쳐서 무영검제를 억지로 때려눕히기보다는 지금까지 모아왔던 인연을 다 부딪혀 보자고. 남궁세가 놈들이 그렇게 대단한 놈도 아니잖아."

"어떻게."

"자, 들어봐..."

이윽고 극호가 내게 즉흥적으로 생각난 계획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시각각 표정이 변했는데, 정말로 무식한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무식함의 이면에는 충분한 성공가능성도 있어서 나를 망설이게끔 했다.

"......"

"어때? 하자. 하자고."

"아니 근데... 망량도 그런 계책을 다 생각했을 텐데 위험부담이 있으니까 나한테 말하지 않았겠지. 섣불리 진행하는 건 좀."

그러자 극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대체 뭘 쫄고 앉아있냐?"

"뭐? 쫄아?"

"막말로 네가 처발리는 영역은 신선이나 신급 수준 아니냐? 아직 그쪽하고는 부딪힐 일도 없는 상태인데 백련교에 비하면 한참 끗발이 딸리는 남궁세가 따위한테 뭐하러 빌빌거리냐고. 내가 너라면 이것저것 안따지고 그냥 밀어버릴거다."

"... 으음."

극호는 내 어깨를 붙잡고 크게 흔들었다.

"야 그냥 해보자 응? 실패하면 담부터는 안하면 되잖냐."

"......"

극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나이 한목숨! 아 너는 여러목숨."

나는 극호가 마구 밀어붙이자 마음이 흔들렸다. 확실히 내가 남궁세가 따위에게 쫄아있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마치 술친구가 술집을 옮겨서 더 퍼마시자고 하는 제안을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파앗!

나는 먼저 무영문으로 가서 서문혜를 비롯한 여성인질들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검마를 만나서 그에게 흑요석을 건네주었다. 검마는 흑요석을 받아든 후 잠시 혼란스러워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으음. 정말 승산따위는 보이지 않는 기나긴 싸움이군. 도저히 삼황오제나 [옛 지배자]를 이길만한 방법이 보이질 않아."

나는 검마의 말에 씁쓸하게 대답했다.

"전생하다보면 일 푼이라도 승산이 생기겠죠. 저는 그 일 푼을 놓치지 않을 겁니다."

"백웅. 자네의 정신력에 경의를 표하네."

검마는 내게 포권을 하더니 옆에 있던 극호에게 말했다.

"극호... 자네도 앞으로는 우리 동료가 된 거로군."

극호가 씨익 웃었다.

"잘 부탁함다, 검마 선배."

"나도 술은 꽤 잘 마시니 다음에 한 잔 합세."

"우하하. 제 주도에 반하지 마십쇼."

왠지 검마와 극호는 꽤 잘 맞는 성격인 듯 했다. 스스럼없는 극호와 생각이 트여있는 검마는 좋은 이야기상대가 될 것 같았다. 인사를 마친 후 검마가 말했다.

"극호의 계획이 재밌어 보이는군. 위험해 보이긴 하지만."

"동참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남궁세가를 내가 평소에 얼마나 싫어했었는데."

파앗

우리는 직후 미호가 있는 동영의 천황궁으로 갔다. 그리고 미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전귀와 후귀를 소환해서 침입자인 우리를 공격해 오자, 극호와 검마는 빠르게 몸을 움직여서 습격을 막아냈다. 나는 미호에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미호!! 난 네가 천계로 돌아갈 방법을 알고 있어."

"......?"

미호가 어둠 속에서 몸을 드러냈다. 그녀는 경계하는 기색으로 내 쪽을 쳐다보았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이 하얀 여우처럼 보였다. 나는 말을 이었다.

"네가 서왕모의 궁에 있다가 청조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내쫓겼다는 것도 알아."

"......!!"

미호는 정말로 깜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달콤한 꾀임으로 들렸겠지만 자신의 가장 중대한 비사를 알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미호는 이내 표정을 고치며 대꾸했다.

"흥! 어디서 굴러먹던 잡놈이 천계의 소식을 들었나 보구나. 날 꾀여서 무슨 짓을 할 작정이냐?"

"그래. 이것만으로는 천계의 신선이라면 알만한 정보겠지. 하지만..."

피피핑

나는 검강을 내뿜어 벽에 커다란 문양을 새겼다. 그것은 내가 미호에게서 전해들었던 서왕모궁 지하유적에 있었던 십수가지의 문양들이었다. 그 문양이 새겨지는 걸 지켜보던 미호는 순간적으로 탈력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 어떻게 네가 그걸..."

"네가 서왕모가 부재하던 중에 가장 깊은 곳에 호기심으로 들어갔다가 본 문양이 이거지?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청조를 죽였다는 누명을 썼고. 참고로 이 문양은 제갈유룡의 유룡집에도 수록되어 있지."

"넌 도대체... 누구냐? 어떻게 본녀밖에 모르는 일을."

"나는 백웅. 바로 너에게서 직접 전해들은 거야."

"뭐라고?"

나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전생의 너한테서 들었다고. 나는 전생자야."

"......!!"

나는 내가 놓인 상황을 미호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미호는 크게 혼란스러워했지만 이윽고 혹하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나는 미호에게 흑요석을 내밀며 말했다.

"이 기억을 받아 줘."

"생면부지의 인간에게서 이런 수상한 물건을 받을 리가 없잖느냐."

"내가 이대로 가도 괜찮아? 그러면 네가 더 궁금해서 속이 터질걸. 왜냐하면 나는 네가 천계에 돌아갈 방도를 찾아줄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니까."

"......"

"미호. 내 말을 믿어 줘. 부탁이야."

"으음..."

미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흑요석을 받아들었다.

파앗

흑요석의 기억이 모두 전송되자 미호는 그야말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믿기지 않는 듯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갑자기 날 쳐다보며 눈물을 주륵 흘렸다.

"왜, 왜 울어?"

"이 기억이... 이 기억이 모두 사실이라면 넌 정말 바보다.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냐?"

"끝까지 할건 해봐야지. 그리고 반드시 널 행복하게 해줄게."

"멍청한 놈..."

한참 후 눈물을 훔친 미호가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알았다. 널 도와주마, 백웅."

"고마워!"

나는 이 손의 온기로 확신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구태여 서왕모에게 기원하지 않아도 안정적으로 미호를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극호가 창을 어깨에 걸치며 투덜거렸다.

"아~ 뜨겁다 뜨거워. 애인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그러자 미호가 극호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후후. 너는 지나가다가 본녀가 책을 읽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서 말을 걸었던 놈이 아니냐?"

"윽..."

극호는 뜨끔해했다.

"극호야. 감기에 걸릴테니 가까운 곳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할까?"

"제길!!"

"아하하하."

극호가 불편한 표정을 짓자 미호가 깔깔거렸다. 내 전생기억 중에는 미호가 극호를 완전히 미인계로 꼬셔서 어리숙한 광경을 연출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극호는 앞으로 미호에게 크게 잡혀살 듯 했다.

"그럼 다음으로 갈까."

미호를 영입한 후에는 청룡무관 근처로 향했다. 극호는 내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내가 소청이를 데려오지."

극호는 약 한 식경 후, 한창 총사범으로서 관도들을 지도하고 있던 진소청을 불러왔다. 진소청은 난데없이 검마, 미호 등이 기다리고 있는 걸 보자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사형. 나를 함정에 빠뜨린 거요?"

"아~니."

극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간만에 사제지간에 대련이나 좀 해볼까? 니가 선공해도 돼."

"뭔가 했더니... 강호의 괴인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무공성취를 자랑하려 날 데려온 거였습니까?"

"그럴 리가. 다만 말해두는데 내가 이길 거다."

"지금은 청룡무관의 총사범이니 사형을 봐주지 않겠소. 날 함정에 빠뜨린 거라면 후회할 겁니다."

부웅

극호와 진소청이 대립하듯 서로 마주섰다. 잠시 팽팽한 공기가 흐른 후 두 사람의 창극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기기 시작했다.

까가강!!

그 격돌을 지켜보던 검마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둘 다 강호에서 보기드문 고수군."

"흥... 이런걸 뭣하러 구경한단 말이냐?"

나는 미호가 투덜거리자 대꾸했다.

"진소청도 납득할만한 과정이 필요해."

그냥 진소청을 때려눕히고 흑요석을 쥐어줄 수도 있지만, 그런 식으로는 결코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매번 귀찮다 하더라도 동료를 설득해서 받아들이게 해야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어느새 두 뇌신류 고수들의 격돌은 삼십 초 째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진소청은 란나찰으로 버티기만 할 수 있을 뿐, 도리어 공격해 들어가는 건 극호 쪽이었다.

까강

"크윽."

진소청은 크게 버거움을 느끼는 듯 세 걸음을 물러났다. 극호는 이 정도면 되었다는 듯 공세를 멈추고 물러났다.

"이걸로 알겠지? 큰 차이는 아니지만 지금은 내 무공이 앞선다. 왜겠냐?"

언뜻 무공자랑으로 들렸지만 진소청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형은 외문(外門)의 무예를 습득했군요."

"그것도 보통 외문이 아니지. 너는 이 일 초의 변화를 어찌 보느냐?"

파밧!

그 순간 극호가 허공을 유영하듯 창섬을 발출했다. 창섬은 기이한 궤도로 꺾였는데, 그 나선의 변화를 살펴보던 진소청의 표정이 달라졌다.

"절학(絶學)...!!"

"그래. 바로 장삼봉의 유진인 칠대절학 중 굴공참의 변화다. 나도 익힌지 얼마 안되서 느낌만 잡았지만 그걸로 널 상대한 거다."

"장삼봉이라고?!"

"너도 예전에 봤던 저 백웅이 내게 전해준 거지."

그러자 진소청이 의혹어린 눈으로 말했다.

"기연을 얻었군요, 사형. 그럼 이 자리에 나를 부른 이유는 뭐요?"

진소청도 이 자리가 함정이 아니란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극호는 내 손에 들려있던 흑요석을 힐끗 쳐다보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진소청. 저 흑요석을 받아들이면 너도 칠대절학을 얻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지금껏 몰랐던 세계를 알 수 있겠지."

"수상쩍군요."

"말해두지만 난 네가 받아들이지 않아도 상관없어. 아니, 도리어 그걸 바란다. 네가 받아들이면 머지않아 날 추월할 게 뻔하니까."

진심으로 이야기하던 극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질투를 접기로 했다. 그 질투를 접고도 남을 정도로 백웅에게 대의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 거냐?"

"......"

터억

진소청이 손을 내밀어 흑요석을 받아들이자 나는 그에게 기억을 전송했다. 곧 기억을 받아들인 진소청은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그랬던 거군."

"소청아. 말해두는데 나는 백웅이 원한다면 이광 사부의 목을 딸거다."

"......!!"

"난 너와 달라. 백웅은 내 복수를 이뤄줄 수 있는 유일한 녀석이고, 이광 사부는 그렇지 못해. 내 숙원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상황도 감수할 거다."

냉혹한 극호의 말에 진소청은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형은 상냥하군요. 생사결을 치르게 될지도 모르는 사제에게 그걸 경고해 두다니."

"어떻게 생각해도 좋아. 기왕 앞으로 기나긴 전생을 함께 할 거라면, 네가 각오를 다졌으면 하는거다. 설령 서로 죽고 죽이게 되더라도."

"알았습니다."

진소청의 '알았다'는 무슨 의미인 걸까?

그 자신 이외에는 알 수 없었다.

"이제 준비가 다됐군."

나는 검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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