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30 암천향(暗天鄕) =========================================================================
여동빈이 무신을 대면한 적이 있다니!
그것도 수십 번이나!
나는 여동빈을 쳐다보며 물었다.
"사실입니까?"
[ 그렇네, 연자여.]
"다른 자들은 찰나의 만남으로 끝났다는데 어째서 당신은..."
[ ......]
여동빈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미숙하던 시절 여러 번 도움받은 건 사실이다.]
"어떤 도움을 받으셨습니까?"
[ 여러가지...]
"어떤 여러가지입니까?"
[ 이 자리에서 말할만한 게 아니다.]
여동빈이 별로 대답하고싶지 않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늘 여동빈이 자신만만했으며 필멸자의 질문에 크게 숨기거나 하는 일이 드물었다는 걸 생각하면 의외의 반응이었다. 그만큼 여동빈에게 있어서도 무신이라는 존재는 이해불가한 존재라는 걸까?
망량선사가 말했다.
[ 넌 무신에 대해 알고 싶은 건가?]
"알고 싶어. 가능하면 그 자와 접촉하고 싶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인간의 무예경지로는 도저히 신에게 닿지 않아... 나는 그걸 알고 있어!"
백련교주는 황궁의 지배자에게 무참히 당했고, 장삼봉 또한 옛 지배자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심지어 동영 역대최강이라 불리는 무사시는 삼황오제 전욱의 손에 무참히 짓이겨졌다. 실례(實例)를 보아왔기 때문에 절실히 체감할 수밖에 없다.
[ 호오.]
"하지만 무신이라고 하는 놈의 힘이라면..."
[ 어쩌면 신에 통할지도 모른다는 건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잠시 장내에 침묵이 흘렀고, 한동안 생각하던 망량선사가 지붕 위에서 폴짝 하고 내려왔다. 내게 천천히 걸어온 망량선사가 나를 올려다 보더니 말했다.
[ 내가 인과율을 살펴봤는데, 이상할 정도로 너는 무신과 인연이 없군. 일반인 이하로.]
"그런 것도 할 수 있어?"
[ 하지만 완전히 무(無)는 아니다. 몇 가지 조건을 마주치면 먼 훗날 네 앞에도 나타날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조건이라고..."
[ 그 조건은 여동빈에게 듣도록. 여동빈은 알고 있으니까.]
휘익
나는 여동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동빈 또한 망량선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 대선사여. 잘 모르는 것을 안다 하는 건 아는 게 아닙니다.]
[ 네가 무신의 정체나 근원을 알지 못하지만, 나타나는 조건을 알고있는 건 확실하지.]
[ 그렇긴 합니다만...]
[ 더 이상 나와는 논하지 말지. 너의 연자와 이야기하도록.]
[ 알겠습니다.]
망량선사는 내게서 등을 돌려 천천히 오솔길의 저편으로 가며 말했다.
[ 신기루를 쫓는 건 공상가 뿐이지...]
파앗
눈을 뜨자 망량이 의식준비를 거의 다 끝내놓은 상태였다. 나는 망량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망량. 이번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해져 있잖소. 오기 전부터 이야기해둔 바를 실행합시다."
"알겠소."
이번에는 망량이 직접 의식을 주도할 수도 있었지만 망량은 일부러 그러지 않고 천우진에게 일을 맡겼다. 천우진이 축문을 외우고 천기가 변화하며 신령이 강림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이 자리에 태허천존이 모습을 드러냈다.
[ 수기는 잘 먹었다. 인간들이여....]
나는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근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쵸?"
내가 이 대화를 한 게 한두번이 아니다. 태허천존이 무슨 말을 할지 다 알고 있다.
[ 으음?]
"이상한건 알겠지만 그냥 넘어가시죠. 삼황오제의 혈족과 아무 연관도 없고 이번 의식을 처음 치르는 거니까 뭐 괜찮지 않습니까?"
[ ......]
태허천존이 당황한 기색이다가 헛기침을 했다.
[ 흠흠... 알았다. 그럼 축복을 내리는 존재를 다른 자로 교체하겠다.]
파앗
다음으로는 서왕모가 등장했다. 나는 아름다운 여인의 환영이 천우진에게 강림하는 순간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 음... 한번 시도해보고 싶은 게 있긴 한데.'
서왕모는 너무나도 수상하다. 그녀와 미호가 큰 관계가 있으며, 진랑곡에서 망량과 이야기해본 결과 서왕모의 정체는 어쩌면 말도 안 되는 것일수도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만날 수 있을 때 서왕모에게서 정보를 알아내보고 싶은 것이다. 나는 서왕모가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마음을 결정하고 말을 꺼냈다.
"위대하신 서왕모시여! 여쭈고싶은 게 있습니다."
[ 무엇인가?]
"만일 삼황오제께서 칠요를 해방시켜 인간을 멸망시키고자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 뭐라고?]
서왕모는 명백히 당황한 표정이었다. 신격인 그녀가 당황할 정도라는 건 내 질문이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것이라는 의미였다. 다만 옆에 있던 망량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는데, 내 질문이 해볼만한 거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서왕모가 눈에 이채를 띄며 말했다.
[ 왜 그런 위험한 생각을 하는가? 그리고 왜 그걸 내게 묻는가?]
"삼황오제께서 꼭 인간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걸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만에 하나 그 위대하신 분들께서 인간을 없애려 들면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왕모께서는 삼황오제를 알현하실 수도 있는 위치이시니 이 의문에 답을 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 ......]
그녀는 뭔가를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 삼황오제는 그리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외환(外患)을 놔두고 섣불리 우를 범할 이유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일부러 칠요를 꺼내서 해방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가..."
덥썩
내가 '가면'을 말하려 하자 갑자기 옆에 있던 망량이 내 팔소매를 붙잡았다. 망량을 돌아보니 그는 안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고서야 지금 큰 실수를 할 뻔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하고싶은 말을 삼키고는 서왕모에게 말했다.
"실언을 했습니다."
[ 무슨 말을 하려 했지?]
"앞으로도 자손만대 인간이 무사할지 궁금했습니다."
그 말에 서왕모는 왠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 최소한 너희는 무간지옥을 겪지는 않을 것이니라.]
"무간지옥이요?"
순간, 서왕모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녀는 신령스러운 고대의 빛을 흘리며 천천히 말했다.
[ 대저 너희 인간은... 태어나고, 태어나고, 태어나고, 태어나도 그 삶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가 없으며... 죽고, 죽고, 죽고, 죽어도 죽음의 끝을 알지 못하리라. 그것이 너희에게 부여된 유일한 축복이자 천명(天命)일지니.]
삶과 죽음의 끝을 알지 못하는 것이 축복이자 천명이란 말인가?
무지렁이 시절이라면 그냥 어려운 말이겠거니 해서 넘겼겠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다. 전생(轉生)하면서 수많은 삶과 죽음과 고통을 느껴왔기에, 서왕모의 말은 크게 와닿았다.
' 그건 바로 내가 아닌가?'
내 삶의 시작을 기억하지 못하며, 죽음의 끝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물론 다 포기하면 그 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해당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통째로 하나로 융해된 수레바퀴를 무한히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홀로 불사(不死)의 사막을 헤매는 건 무슨 기분이란 말인가.
이 삶의 노심(爐心)은 어디 있는가.
하지만 서왕모는 그런 내 처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단지 서왕모는 인간이라는 종족이 맞이할 파멸을 넌지시 암시했을 뿐이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기에 잠시 침묵한 후 한숨을 쉬었다.
"그 말씀대로군요."
[ 특이한 인간이로구나. 벌써부터 종말을 걱정하는가?]
"설마요. 그저 그 종언의 날, 불쌍한 여우가 구원받지 못할까봐 걱정입니다."
[ ......]
"그럼 다음 차례를 부탁드립니다.]
다음으로 남화노선, 장삼봉, 예 등등의 차례가 모두 지나갔고 마지막으로 태공망이 등장했다.
[ 나는 태공망 강상(姜尙)이다. 역사상 이토록 많은 대라신선이 불려나온 적은 없었으리라. 나, 그대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싶지만... 그대들은 이례적인 존재인 만큼 선택권을 주려 한다. 내 가호를 받거나 다른 분의 가호를 다시 한 번 받을 기회를 주겠노라. 어찌하겠는가?]
이미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였다. 태공망 강상의 축복은 영수 사불상을 내려주는 것이었고, 다른 자의 가호를 다시 받을 기회는 가호중첩을 지우고 재선택을 할 권리였다. 원래라면 여기서 양자택일으로 고민했을 것이다.
' 미안, 천우진.'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선택을 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다음 차례를 넘겨 주십시오."
그러자 태공망 강상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
[ 다음 차례라고? 그대는 앞선 쟁쟁한 대라신선들보다 더 나은 가호를 알고 있단 말인가? 이래봬도 파격적인 제안을 한 것이거늘...]
"제가 원하는 대라신선을 소환해도 되겠습니까?"
[ 그런건 진작 말했으면 들어주었을 것이다. 누구를 원하는가?]
나는 드디어 이 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말했다.
"중화팔선(中華八仙)을 모두 불러 주십시오."
[ 뭣이...?]
"여동빈은 저와 단말이 연결되어 있으니 나머지 칠선의 가호를 받고싶다 이 말입니다."
[ 으음... 기다려라.]
슈욱
태공망의 신형이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는 난처한 듯 말했다.
[ 그대는 팔선이 하나라 보는 모양이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대라신선이다. 그들에게서 동시에 축복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방금 전 그들의 의사를 타진하고 왔는데, 개별소환에는 응하겠다고 했다.]
"그렇군요."
나는 칠선의 가호를 동시에 받을 수 없음에 아쉬움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팔선 중 종리권(鍾離權)을 불러 주십시오."
[ 알았다.]
파앗!
이윽고 내 앞에는 종리권이 강림해서 나타났다.
그는 다소 호방해 보이는 인상의 투실투실한 체구의 선인(仙人)이었다. 배불뚝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툭 튀어나온 몸에서 신선의 기풍같은건 별로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영기는 대라신선임을 확실히 느끼게끔 해 주었다.
종리권이 껄껄 웃었다.
[ 하하하하! 천하의 서왕모를 당혹시키고 수많은 대라신선의 구애를 뿌리친 쾌남이 나를 청했는가? 아주 영광이군.]
그는 다소 짖궂어보이는 말투를 가진 듯 했고 성격이 활달한 듯 했다. 다른 대라신선의 강림을 구애라고 표현한것만 해도 꽤 대담한 것이다. 나는 그를 조심스럽게 쳐다보다가 말했다.
"팔선 종리권이여. 나는 그대의 가호를 받기 전에 확인하고싶은 게 있습니다."
[ 하하하... 서왕모께도 감히 당돌한 질문을 한 이가 뭔들 못 하겠는가? 아주 마음껏 물어보게나.]
"당신의 가호는 무예의 재능(才能)을 늘려주는 게 맞습니까?"
[ 호오... 그걸 원한 건가?]
"네."
그렇다.
이번 생의 목표는 내 힘을 어떻게든 상승시켜서 절대지경에 도달하는 것! 절대지경으로도 신에게 상대가 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절대지경에 오르게 되면 칠요를 해방시켰을 때의 전력이 몇 배나 상승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의 내 재능으로는 절대지경에 도달하기는 커녕 초절정을 벗어나는 것만 해도 수백 년이 걸릴게 분명했다. 역사상 극히 한정된 극소수만이 도달했다는 전설의 경지에 도달하기에는 내 재능이 너무 딸렸다. 그렇기에 전생 도중에 선지자에게서 얻은 단서를 토대로, 종리권의 축복으로 무예재능을 향상시키려는 것이다.
종리권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 내 가호가 재능과 관련있다는 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그러자 종리권이 짖궂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 흐흠... 말해주지 않으면 나도 가호를 줄 생각이 없는데. 그냥 딴 팔선에게 차례를 넘겨버리겠다.]
뭐?!
지금까지 수기공양에서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아무래도 종리권은 자유분방한 기질이 강한 대라신선인 듯 했다. 꽉 막혀 있는 여동빈의 스승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
"여동빈은 본디 무예의 재능이 천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의 지도로 대라신선이자 투선의 경지에 올랐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가호가 재능을 향상시키는 게 아닌가 생각한 겁니다."
나는 괜히 선지자의 이야기를 꺼내면 분위기가 이상해질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적당히 얼버무린 내 대답을 들은 종리권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랬군. 뭐, 맞는 말이다.]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외쳤다.
"그, 그럼 내 재능을 상승시켜 주십시오!!"
지금껏 얼마나 재능이 부족해서 고생했던가!
종리권의 축복으로 재능을 향상받으면 앞으로 좀 더 순탄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나도 재능이 있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
종리권이 말했다.
[ 근데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다네. 정확히는 내 가호이자 고유술법은 재능을 상승시켜 주는 게 아니라구. 진짜야. 아마 대라신선의 가호 중에서도 상당히 구린 편에 속할걸?]
"네?"
[ 재능 상승이라...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받을건가? 후회 안해?]
묘하게 사기를 치는 듯한 말투였으나, 나는 더 생각지도 않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주십쇼!"
[ 좋다. 나 팔선 종리권의 축복을 내리겠노라.]
"아, 잠깐 뭔지 설명 좀..."
[ 난 바쁘다네!]
파아앗
그러나 종리권은 설명해주지 않고 그냥 섬광과 함께 떠나버리고 말았다. 수기공양 의식이 끝나버린 것이다.
나는 의식이 끝나자 망량과 함께 기진맥진이 되어서 생사불명이 된 천우진을 거처에 눕혔다.
' 천우진도 신열로 강화시켜야 하니까 일부러 처음부터 종리권을 부르지 않았지.'
이번에는 종리권의 차례가 추가되어서 조금 더 부담이 강해졌을테지만 아마 천우진이라면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망량이 천우진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리며 말했다.
"사제는 회복될 때까지 내가 돌보겠소. 백웅 당신은 일단 남은 일을 처리해 주시오."
"맡겨두시오. 근데 내 재능이 상승한게 사실일까?"
망량은 빙긋 웃었다.
"잘 모르겠으면 일에 나서기 전에 극호와 함께 수련을 좀 거치고 나가보는 게 어떻소? 수련을 하다보면 재능의 증감을 느낄 수 있을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