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29 암천향(暗天鄕) =========================================================================
예전에는 못 느꼈는데 확실히 망량의 초가집은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이 들어와있으면 꽤 좁은 느낌이 들었다. 극호는 앉아있기 버거운듯 그냥 일어섰고, 망량이 말했다.
"지난번에는 정말 많고 많은 일이 있었구려."
"그랬지."
"하지만 결국 절대적인 힘의 부족을 어찌할 수 없었던 거군..."
"......"
씁쓸하게 중얼거린 망량이 말을 이었다.
"그럼 이번 생에는 가능한 한 몸을 사리면서 당신 스스로가 절대지경에 이르는 걸 목표로 합시다."
"나도 그게 좋을거라 생각하오."
절대지경!
그 경지에 도달하면 십만대군을 홀로 감당할 수 있으며, 투선과도 맞서싸울만한 역량을 손에 넣게 된다. 역사상 몇 도달한 자가 없는 궁극의 경지에 올라서게 된다면 앞으로 운신할만한 폭이 넓어지게 될 것이다.
나는 망량에게 삼황내문을 꺼내서 주었다.
"이걸 받으시오."
"고맙소."
"망량. 수요공양의식이 끝난 후에는 천계의 등용문에 오르려 하오?"
망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난할거라 생각하오."
"가는 김에 이번에도 천우진에게 흑요석을..."
"아니. 그건 안 되오."
망량이 고개를 저었다.
"우진이는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특출나게 강하오. 이전 생에서도 상황이 우여곡절끝에 꼬이다보니 받아들이게 된 것 뿐, 본래라면 흑요석처럼 수상쩍은 마법의 기물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오. 설령 사형인 내가 설득한다 해도 불가하오."
"음... 그렇겠군."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지만 망량의 입으로 직접 확인하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역시 천우진을 동료로 넣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천우진을 위압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없다면 다짜고짜 흑요석을 주고 동료로 만들 수는 없는 듯 했다.
망량이 힐끔 서 있던 극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로 그를 동료로 할 작정이오?"
"그렇소."
"이 험난한 수라의 길에 끌어들이는 것 자체를 원망할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의 기억을 거두어서 돌려보내겠소."
"흑요석의 술법은 그런 것도 가능하오?"
"고급수법이긴 하지만 있소."
그러자 듣고 있던 극호가 신경질적으로 주저앉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당신들 둘이서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놈의 기억이란 거 줄려면 빨리 주시오.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를 견디는 것처럼 지루한 일도 없으니까."
"하하핫, 호한(豪漢)이로군."
망량은 껄껄 웃더니 말했다.
"그럼 극호. 내가 백웅의 동료로서 하나 물어봐도 되겠소?"
"선배의 훈육이란 건가? 뭐 새겨듣지."
"당신은 이광이란 자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야 현 뇌신류에서 제일가는 고수이고 주장(主將)이며 가장 복수해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지. 종사의 후계이기도 하고."
현재의 극호가 이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인 듯 했다. 망량이 주의깊게 극호의 안색을 살피더니 말했다.
"만일 나나 백웅이 이광을 베라고 당신에게 말한다면 따르겠소?"
"......!!"
극호의 표정이 굳었다.
"당신도 짐작했겠지만 백웅은 보통 사람이 아니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일지도 모르지. 그가 당신에게 힘을 주고자 하면 당신은 호법사자조차 뛰어넘는 힘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는 거요. 그래서 이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오."
"왜 이광 사부를 벤다는 거요? 원한이라도 있소?"
"그 또한 백웅의 기억을 전해들으면 알 수 있을 것이오."
"......"
극호는 한참을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벨 수 있소. 그게 백련교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렇군. 잘 알았소."
망량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말했다.
"백웅. 적당한 무공과 영약을 준 후 극호를 뇌신류로 돌려보내시오. 그와는 함께 할 수 없소."
"......"
스스스스
앉아있던 극호의 살기가 서서히 높아지는 걸 느꼈다. 나는 그가 언제 출수해서 망량을 베어버릴지 몰랐기에 긴장하며 극호를 견제했다. 자칫했다가는 무공도 익히지 않은 백면서생인 망량의 목이 극호에게 따여버릴 것이다. 지금의 나에 비해서는 약하다고 해도 극호 또한 강호에서 손꼽히는 초절정고수이며 뇌신류이기 때문이다.
"잠깐 진정해."
극호에게 경고한 나는 망량에게 물었다.
"왜 그러오? 왜 극호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지?"
"방금 전, 극호는 백련교를 벨 수 있다면 뇌신류 종사의 후계인 이광조차 벨 수 있다는 뜻을 말했소. 그건 달리 말하자면 백련교를 없앨 수 있다면 뭐든 이용할 수 있다는 의지."
망량은 한없이 차가운 눈으로 극호를 쳐다보았다.
"극호에게 아무리 세상의 이면을 설명한다고 해도 그는 백련교에 대한 원한을 잊을 수 없을 거요. 비단 자신의 스승을 해친 용비천을 죽이는 것에 끝나지 않고, 복수의 불길이 되어 백련교주... 나아가서는 모든 것을 없애기 전에는 분노가 사라지지 않겠지."
"......"
"내 말이 틀렸소 극호? 당신은 백련교와 타협하는 걸 조금도 인정할 수 없지 않소? 그래서는 동료로 받아들일 수 없소. 자신의 뜻과 어긋나면 언제든 백웅의 뒷통수를 칠 테니까."
그러자 극호는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지? 스승이 눈 앞에서 갈가리 찢기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도망쳤던 무력감을 알기는 하는 건가? 네가 뭔데 날 판단하는 거냐고."
쿠웅
순간적으로 나와 극호의 기장(氣場)이 부딪혔다. 일전에 술대결 덕분에 내공이 한단계 올라섰고, 해적과의 실전으로 더 날카롭게 상승한 감각 덕에 극호의 실력이 늘어난 것이다. 아직까지는 내가 그를 옭아맬 수 있지만 더 나아가면 그와 생사결을 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망량은 그 살기를 받고도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누군들 죽이고 싶은 사람이 없겠소? 나도 백웅도 찢어죽이고 싶은 원수가 있소이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지.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오. 극호 당신은 순수한 복수에 집착해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부류라는 게 문제란 것이오!"
"잘도 말하는군."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보시오. 10년만 백련교와 타협하면 그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는 계책이 있다면, 당신은 그걸 받아들일 수 있소?"
"......"
극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정의 뜻이라는 건 그의 살기가 가라앉지 않은 것에서 명확히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당신도 복수를 해야하는 의지가 강하니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겠지."
"그렇다."
망량의 말이 이어졌다.
"정 그렇다면 풍신류 호법사자 용비천을 죽이는 걸로 모든 복수를 끝내겠다고 이 자리에서 맹세하시오. 지금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후생(後生)에서도."
"무슨 말이지? 후생이라니?"
"당신이 백련교와 타협할 수 없듯 우리도 섣불리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과 타협할 수는 없소이다."
극호가 얼굴을 찌푸렸지만 나는 망량의 제안이 옳다고 여겼다. 그래서 극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극호, 약속하지. 용비천으로 끝내겠다고 맹세하면, 용비천만큼은 반드시 잡게 해 주겠다."
극호는 한결 누그러진 기색으로 말했다.
"백련교 전체에는 복수해서는 안될 이유라도 있는 건가?"
"너무 복잡한 문제가 꼬여있어서."
"흐음..."
그는 한동안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내 원수는 용비천 뿐이다. 그 놈만 죽이면 그 이상은 원하지 않겠어."
"잘 생각했다."
스윽
나는 극호에게 흑요석을 내밀었다. 극호는 그게 기억을 전송하는 술법이란 걸 눈치챈 듯 잠시 망설이다가 받아들었다. 이윽고 나는 극호에게 내 전생의 기억을 전송했고, 극호는 전신을 작살맞은 물고기처럼 파르르 떨었다.
"......!!"
극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내 전생기억이 상당한 양인듯 허우적거리는 느낌마저 있었다. 한참 후 극호가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세... 상에..."
"극호. 이제 내 말뜻이 이해되오?"
"빌어먹을. 내가 엄청난 도박판에 발을 담궜군."
극호는 욕지기를 내뱉더니 말했다.
"다 미친 놈들이군. 이 짓거리를 몇번씩이나 하고 있는 거지?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거냐? 그렇게 무시무시한 놈들과 싸우면서도..."
"......"
"백웅."
극호가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 날 내 스승을 찢어죽였던 용비천을 없애버리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내 복수심으로도 너처럼 신에 대적하면서 수십 번의 죽음을 견딜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널 움직이게 하는 건 대체 뭐냐?"
"음..."
극호의 질문은 의외였다.
무엇이 지금 나를 움직이게 하고 있냐고?
그건 바로 직전의 회차에서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던 내게는 큰 의미로 다가오는 질문이었다. 망량도 그 질문이 궁금한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기에 대꾸했다.
"아직 칠요도 다 못모았고, 절대지경도 도달하지 못했고, 술법도 대성하지 못했잖아."
"... 뭐? 겨우 그런 이유?"
"할만한 걸 다 해보기 전까지는 포기할 수 없어."
"할만한 걸 다 해봤다 치자. 그래도 힘이 부족하면?"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그때부터는 노력해서 신(神)이 되고 말거야."
"신이라..."
"신의 경지에 도달해도 구원할 수 없는 게 인간이라면 그 땐 어쩔 수 없겠지. 그래도 그 때까지는 포기하지 않아."
"......"
극호는 물론이고 망량도 내 말을 듣자 황당해하는 표정이었다. 극호는 허탈하게 웃더니 말했다.
"허참... 내가 정말 엄청난 녀석과 술친구가 되어버렸군."
"어쩔래? 지금이라도 포기할거냐?"
"아니."
극호가 자신의 창을 꽉 쥐며 말했다.
"좋았어. 이렇게 된 거 같이 가자고. 그 끝이 천상이든 지옥이든..."
대화가 끝난 후, 망량이 말했다.
"백웅. 일단 수요수기의 재앙이 닥쳐올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 수요공양의식부터 치릅시다."
"알았소."
파앗
나는 극호에게 흑백련을 줘서 내공을 상승시킨 후, 그가 칠대절학과 팔선신공을 내부에서 연마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망량과 함께 수요를 들고 망량선사의 마을로 갔다. 천우진에게는 괜한 이야기를 했다가 나중에 거부반응이 올 수 있었으므로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고, 망량이 천우진을 설득해서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 역시.'
마을 안으로 들어오자 익숙한 수면욕이 덮쳐온다. 나는 예상하던 바였지만, 그 순간 여동빈을 단말을 통해 불러서 소환해 두었다.
[ 연자여... 어?]
스르륵
여동빈이 얼빠진 소리를 내는 사이에 나는 잠들었다.
' 여동빈. 당신도 한번 망량선사를 만나 봐...'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익숙한 오솔길.
그 너머에서 망량선사가 고양이의 모습으로 차분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내 옆에는 여동빈의 신령이 둥둥 떠 있었는데, 그는 왠지 당혹한 듯한 모습이었다.
[ 여긴...]
[ 내 공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여동빈.]
망량선사가 여동빈에게 말을 걸었다.
[ 천 년 만이지?]
여동빈은 상황을 파악한 듯 했다. 그리고는 씁쓸하게 말했다.
[ 그렇군. 간만에 대선사(大仙師)를 뵙니다.]
처억
여동빈은 망설임 없이 예를 갖춰서 검은 고양이, 망량선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보자 다소 놀랐다. 여동빈이 이렇게 공손한 태도를 갖춘 것은 그의 스승이었던 화룡진인 외에는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망량선사가 날 보며 말했다.
[ 깜찍한 짓을 하는군. 나와 여동빈을 만나게 하고 싶었던 건가?]
"뭐... 그렇긴 한데..."
[ 나와 그는 만난 적이 있지. 그가 화룡신검을 처음 얻고 퇴마행을 하던 시절, 종종 내 도움을 받곤 했다.]
"......!!"
나는 약간 놀라서 말했다.
"그럼 이 마을에 여동빈의 사당이 세워져 있는것도 우연이 아니란 말이야?"
[ 그래. 당시 여동빈이 내 의뢰를 몇 가지 처리해줘서 그 공덕으로 그의 사당을 만들어 둔 것이다.]
여동빈이 꿇어앉아있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 대선사여. 제 얼굴이 붉어지니 그만해 주십시오.]
[ 흐음. 너는 요즘 별래무양한가?]
[ 천계의 투선에게 할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못다한 무극(武極)을 보기 위하여 매일 일로정진하고 있습니다.]
[ 열심히 살고 있군. 장하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던 중 번뜩 생각나는 게 있어서 망량선사에게 질문했다.
"이봐! 물어볼 게 있어!"
[ 뭐냐?]
"무신(武神)이란 놈은 대체 뭐지? [옛 지배자]인가? 아니면 고대신? 뭐하는 놈이길래 투선이나 절대지경의 고수들한테 홀연히 나타나는지 혹시 알고 있어?"
[ ......]
"너는 엄청난 신이잖아. 그럼 알고 있을 거 같은데."
내 말에 망량선사는 물론 여동빈의 이목도 내게 집중되었다. 특히 여동빈은 어떻게 그걸 아냐는 듯 놀라워하는 표정이었다.
[ ... 연자여. 대선사께 결례를 그만두도록 하게.]
[ 아니. 간만에 흥미로운 질문이군.]
[ 대선사.]
[ 무신이라... 그래... 그 놈이 있었지.]
망량선사가 폴짝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말했다.
[ 그 놈은 현재, 과거, 미래... 모든 곳에 존재한다. 어설픈 [옛 지배자]보다는 훨씬 신다운 신격이라 할 수 있지. 그런데 그 놈이 신인가 하면 그건 확실하지 않아.]
"무슨 뜻이야?"
[ 놈이 담당하는 분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망량선사는 발으로 자신의 목 뒤를 긁으며 잠시 몸을 털었다.
[ 무(武)라고 하는 추상적인 것을 과연 우주의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는지가 문제지. 대부분의 신격은 시간, 공간, 존재, 소멸, 혹은 수토지화풍 같은 담당구역이 있으나... 무(武)가 거기에 속하는지는 알 수 없어. 그렇기 때문에 놈의 존재는 같은 신격으로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다고..."
[ 여동빈이 차라리 나보다 잘 알 것이다.]
이어진 망량선사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 왜냐하면 그는 생전에 직접 몇십 번이나 무신을 대면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