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27 암천향(暗天鄕) =========================================================================
"......"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청룡무관의 숙소에서 눈을 떴다. 이 익숙한 장소는 아마 총사범의 거처가 틀림없었기에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소청을 마주쳤다. 진소청은 나를 보자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고인께선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고인?
문득 나는 이미 이광과 진소청에게 내 내공수위를 들켰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내공을 봤다면 내가 반로환동의 고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술깨고 냉정해져서 생각해보니 어처구니없는 실수라서 머리를 긁고 있자 진소청이 말했다.
"아무래도, 뇌신류의 고수이신 것 같은데 혹시 전승자 중 한 분이신지."
"내가 뇌령을 이루었다는 걸 알아봤군."
"그렇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 사정을 밝힐 처지가 아니오. 근자의 추태는 내가 곧 보상할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응?
나는 뜻밖의 소리에 진소청을 쳐다보았다. 진소청이 말했다.
"당신같은 고수가 의식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신다면 거대한 고민과 슬픔이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유파를 잃은 설움은 우리 뇌신류가 공유하고 있으니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
그 말에는 책략이 아닌 진심이 느껴졌다. 동시에 내심 아픈 기분이 들었다.
' 결국... 진소청도 죽었다.'
이번 생이 아니라 지난 생의 진소청은 삼황오제에게 덤벼들다가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론은 내 잘못된 선택 때문에 삼황오제가 강림했기에 생긴 일이었다.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으며, 나 자신에 대한 환멸이 몰아쳤다.
또 인연을 맺으면 또 사람들이 죽어갈 것이다.
각오했던 바이지만 지금은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 괜찮소. 마음만으로도 고맙..."
쐐애애액
갑자기 뭔가가 날아들길래 나는 빠르게 잡아채었다. 날아든 것은 바로 한 자루의 장검이었고, 그걸 던진 자는 저편에서 걸어오며 말했다.
"역시 대단한 실력인 듯 하군."
나는 그를 냉막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삼절 이광. 이게 무슨 짓이오?"
이광이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그대가 병장기도 없이 홀로 다니면 위험할 듯 하여 우리 무관의 수련검을 하나 선물하고 싶소."
"후..."
나는 더욱 싸늘하게 표정이 가라앉았다. 이광이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정체불명의 뇌신류 고수가 어떤 실력인지 시험해보고싶어서 근질근질할 것이다. 그리고 무례를 캐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돌리는 것이다.
' 아마 자기 실력으로 나와 싸우는 게 힘들거라는 걸 알아챈 거겠지.'
실제로도 나는 지금 이광과 싸우면 이길 자신이 있다. 진소청에게 가르침받았던 멸혼보 천광의 깨달음은 단순히 보법의 상승이 아니라 무공이 전반적으로 급증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나는 이광을 때려눕힐까 생각하다가 옆에 있는 진소청을 보자 마음을 고쳐먹었다.
' ... 진소청은 나때문에 죽었어.'
아직까지 그 일을 사과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섣불리 스승을 때려눕힐 순 없다. 나는 진소청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고개를 돌리며 이광에게 대꾸했다.
"호의 잘 받겠소. 그럼 무관의 번창을 기원하겠소."
"가는 거요?"
"그렇소만."
"가기 전에 극호에게 잠시 들렀다 가보시는게 어떻소? 하고싶은 말이 있다던데."
극호?
나는 호기심이 생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나는 장소를 전해듣고 극호를 찾아갔다. 극호는 관중에서도 커다란 숙박업소에서 술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누워 있었다. 아무리 고수라지만 그때 먹었던 술은 가공할만한 양이었으므로 주독에 걸린 모양이다. 극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이, 백웅... 역시 반로환동의 고수였나?"
"... 그럴지도."
"뇌신류 사람이라던데, 당신은 왜 그렇게 술을 마시고 싶었던 거야? 그렇게나 가슴아픈 일이 있었나?"
"......"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나도 마찬가지니까."
극호는 침대에 누워서 큭큭 웃더니 말을 이었다.
"웃기는 일이지. 내 사부가 풍신류에 살해당했는데, 나는 힘이 모자라서 술집 기둥서방으로 살고 있으니..."
"극호. 너는 이미 대문파의 장로급 실력일텐데."
"뭐야. 일견에 그런 것도 알 수 있나? 아직 대무도 안 해봤잖아."
나는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보면 안다."
"참나... 생각보다 더 대단한 분이셨군."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린 극호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광 사부는 내심 당신을 붙잡아두기 원하는 모양이더군... 내게 당신을 꼬드기라고 미리 말해두고 갔어. 지금 우리의 전력과 향후의 목표같은 걸 말해주라고..."
"그런가."
"당신이 반로환동한 뇌신류 고수니까 당연한 거잖아. 그렇지 않았다면 이광 사부가 사재를 털어서 술값을 보상하는 일도 없었을테고, 당신은 싸늘한 관부의 감옥에서 술이 깨었겠지."
"흐음."
"근데... 그냥 가. 가 버리라고."
나는 극호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고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가라고?"
"그래. 가고싶은 데 가버려. 어차피 여기도 마음 흐르는대로 온 거잖아."
"그렇긴 하지. 그런데 내가 안 도우면 너희는 복수하기 힘들어질텐데?"
내 물음에 극호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이대로라면 백련교에 복수는 못 해."
"......!!"
"이광 사부는 복수를 하겠다고 말하면서 지나치게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려. 그에게 있어서 복수는 목적이 아니라 그냥 이유일 뿐이니까, 어차피 질질 끌다가 아무것도 되지 않겠지. 혹은 섣불리 달려들다가 부나방처럼 스러질 뿐."
나는 극호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 이광의 내면을 잘 알고 있군.'
이광이 겉으로는 복수귀처럼 보여도 사실은 이중적인 면모를 품고 흔들리는 존재라는 사실. 그건 내가 몇 번이나 전생을 이어오면서 겨우 깨달은 점이었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극호에게 말했다.
"마치 너는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는군."
"난들 뭐가 잘났겠어? 단지... 지금까지 많은 걸 쌓아온 이광 사부와 달리 나한테는 남은 게 없을 뿐이야. 이광 사부가 죽어도 나는 계속 복수를 추구할 수밖에 없어."
"... 그렇군."
나는 극호의 눈빛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극호야말로 진정한 복수자다.
그는 상대가 누구든간에 외부의 상황이나 명분에 휘둘리지 않고 끝까지 복수의 의지를 관철하는 인물이었다. 실제로 과거 백련교에 실리를 위해 굴종하자고 했을 때도 극호는 단호하게 거부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건 언뜻 바보같은 행동으로 보였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의지가 꺾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황실에 대한 충성과 자기모순 때문에 갈등하는 이광과는 천지차이였다.
' 만일 극호의 실력만 받쳐준다면... 백련교는 크나큰 횡액을 당하게 되겠군.'
그렇게 예감한 내가 조용히 극호를 주시하자,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뭘 봐? 내가 그렇게 잘 생겼어?"
"뭐, 나보다는 잘 생겼군."
극호가 닭살돋는 표정을 지었다.
"으으... 농담을 진담으로 받지 마. 여자들한테 인기 없어."
"나는 네가 진담이라고 해서 상처받았다만."
"크크크."
나는 낄낄대는 극호를 쳐다보다가 생각에 잠겼다.
' 괜찮을지도.'
아니, 어쩌면 새로운 계기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약간 지쳐있다. 동료들의 죽음을 눈 앞에서 보았기에 피폐해져있고, 미치는 건 간신히 피했지만 어쨌든 힘들다. 극호가 같이 술을 마셔주는 그 순간 덕분에 조금은 나아진 기분이 들어서 그에게 보답을 하고싶다.
나는 생각을 끝낸 후 극호에게 말했다.
"극호. 나를 따라가겠나?"
"뭐?"
"나는 네게 백련교에 복수할 힘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해 주지."
그러자 극호는 당황했다.
"어... 나는 저기... 그쪽은 취미없는데..."
"... 남색(男色)을 말하는 게 아냐."
"농담이야, 흐흐흐."
경박하게 넘기려고 하는 극호였지만, 내 눈빛이 진지하자 더불어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상대방의 진심을 파악하는 눈치 정도는 있는 것이다. 그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침상 머리맡에 있던 창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하고 대련이나 한 판 해보는 게 어때? 그럼 내가 따라가도 될지 판단 할 수 있겠어."
"좋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겠지."
타닷
나와 극호는 높은 전각에서 뛰어내려서 성 밖으로 향했다. 서로가 초절정급 이상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시내에서 싸우면 큰 소란이 벌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성밖의 풀숲 근처까지 오자 극호가 말했다.
"진짜 엄청난 내공인 거 같은데 대체 뭘 하면 그런 내공이 생기는 거야? 영약을 밥처럼 퍼먹은 건가?"
"죽었다 살아나기를 스무 번 이상 하면 되겠지."
내 대답에 극호가 낄낄댔다.
"이제 보니까 농담도 꽤 하는구만."
"......"
나도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이윽고 나와 극호 사이에 대치상태가 생겼고, 극호가 선공을 가해왔다.
까가강
극호의 창은 제법 강맹했다.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는 잘 몰랐지만, 그는 분명히 기운을 제련해서 창염(槍炎)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강기도 사용하는 게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아직 나이와 깨달음이 부족하긴 했지만 틀림없이 손꼽히는 고수의 반열에 이르러 있었다.
극호의 나이를 생각하면 극호 또한 천재였다.
' 하긴 그러니까 향후 천하십대고수가 된 거겠지...'
나는 잡생각을 하면서 극호의 뇌령팔식에 맞서서 뇌룡신검으로 응대했다. 뇌룡신검의 초식이 기를 머금고 뻗쳐나가면서 완벽한 수비를 형성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원이라도 있는 것처럼 모든 공격이 튕겨나가자 극호가 뒤로 물러섰다.
"대단한데."
극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당신 이광 사부보다 더 강하군."
"극호. 비기(秘技)를 아낄 필요 없다."
"뭐?"
"무슨 말인지는 지금 알 수 있을 거다."
우웅
나는 빠르게 멸혼보를 써서 섬영과 함께 파고들었다. 이형환위같은 움직임에 극호는 재빨리 자신의 약점을 감추며 마주 멸혼보를 써서 피했다. 하지만 극호가 멸혼보를 쓰자, 나는 예전에 진소청이 내게 초근접전으로 따라붙던 기억을 떠올리며 더더욱 속도를 올렸다.
피이잉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며 나와 극호의 추격전이 계속되었다. 신법도 내공도 내 쪽이 훨씬 앞섰기에 극호는 나를 떨쳐내지 못했다.
"큭!"
극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공세로 전환하며 비기를 사용했다. 그리고 나는 그 틈을 기다리고 있다가 마주 비기를 사용했다.
멸혼보(滅魂步)
천광(天光)
꽈과광
천광의 비기가 맞부딪히자 허공에서 뇌전의 환영이 부딪히며 폭음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극호에게 틈이 생긴 걸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서 그의 명치 앞에 검극을 멈춰세웠다. 극호는 약점을 제압당하자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극호는 자신의 명치 앞에 닿여있는 검극을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의혹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어떻게 멸혼보 천광을...?"
"내가 쓰는게 그렇게 이상한가? 멸혼보를 쓸 줄 아는 건 네 사부 뿐만이 아니야. 청월 호법도 쓸 줄 알았지."
내가 그렇게 대꾸하자 극호는 툴툴거렸다.
"젠장. 자존심 다 망가뜨리는군. 그 비기가 내 유일한 밥줄이었는데."
"자, 내 무공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네가 원한다면 천광보다 더한 걸 줄 수도 있지. 엄청난 보물이라 해도..."
"......"
나는 슬며시 검극을 내리며 말했다.
"날 따라오겠나?"
그러자 극호는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왜 하필 나지?"
"......"
"스승인 이광은 나보다 훨씬 강하고, 내 사제인 진소청은 나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재능을 갖고 있다. 그 녀석은 진짜 천재야. 당신이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처럼 애매한 놈을 데려가 봐야 소용이 없을텐데."
"소용이 있다 없다를 함부로 정하지 마라. 천하의 쓰레기같은 재능을 갖고 있어도 언젠가는 강해질 수 있는 거니까."
나는 극호의 말을 일축하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넌 나와 같이 술을 마셔줬다.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그것만으로도 동료가 될 이유는 충분해."
"동료? 나를 부하로 만들려는 거 아니었나?"
"부하가 되고 싶다면 맘대로 해."
"크크크... 아냐. 보아하니 나랑 또 술을 마시고 싶은 모양이군."
극호는 껄껄 웃더니 자신의 창을 늘어뜨렸다.
"알았어. 따라가겠어. 내가 주도를 좀 가르쳐 주지."
나는 문득 생각나서 경고했다.
"말해두는데 내가 갈 길은 아수라장이다. 백련교주와 결전을 벌이는 정도는 산책하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험난할 건데, 그래도 올 거냐?"
"... 대체 뭔 짓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이대로 여기 처박혀 있는것보단 낫지."
"좋아."
나는 새로운 인연이 생겨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극호 또한 앞으로 내 동료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