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25 암천향(暗天鄕) =========================================================================
[ 호오... 어쩌겠다는 거냐? 인간 마도사 따위가.]
제갈사는 내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백웅. 듣고 있냐?"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대로 만귀전에 소속되어서 세상의 멸망을 피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나랑 현이가 생각하기에는 전욱님께서 사도의 육체를 그대로 가져가실 확률이 너무 높아서 말이지. 이대로는 그냥 무력하게 관망하는 것밖에 안된다."
그 말에 전욱이 재밌다는 듯 껄껄 웃었다.
[ 하하. 재밌는 추측이구나.]
"그렇지 않습니까, 전욱이시여. 당신들 삼황오제는 인간을 정화한 후 다시 인간의 매질과 창조공식을 수득해서 재창조하겠지요. 당신들은 마도의 종사(宗師)이며 아득한 과학(科學)의 주인이기도 할 터. 그렇다면 구인류의 잔재인 백웅을 지상에 놔둘 필요 따위는 없지 않습니까?"
전욱은 의외라는 듯 제갈사를 바라보았다. 인간 따위가 자신의 계획을 알아차린 게 놀라운 듯한 눈빛이었다.
[ 그렇다. 이 정화가 끝나면 구인류를 천계가 청소할 것이다. 나는 내 사도를 만귀전에 데려갈 것이고.]
"진심으로 인간을 멸망시키시려는군요."
[ 너희는 찰흙으로 빚어진 인형과 다를 바가 없다. 다시 만들 때는 더 완성도 높게 제작할 생각이다.]
나는 전욱의 말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
' 삼황오제의 본질이란 건 이런 거였나...?'
그래도 전욱은 내게 잘 대해주고 인간에 대해 호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의 관점 또한 [옛 지배자]와 별로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전욱의 말이 너무 단호했기에 의심조차 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제갈사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시단다. 삼황오제는 정말 대단하시구만. 그래서, 우리는 넋놓고 당하고만 있어야겠냐? 만귀전에서 천년만년 귀신으로 살면서 인육(人肉)을 즐기는 괴물의 삶이란 게 과연 즐거울까? 난 상관없지만 우리 친구들은 별로일 거 같아."
[ ......]
"백웅. 우리는 저항하겠다. 너를 구해내고, 인간의 의지를 관철하겠다."
퍼억
제갈사가 지체없이 단검을 들어서 자신의 심장에 찔렀다. 선혈이 비산하며 그의 상반신이 피로 물들었는데, 그 끔찍한 광경 속에서 제갈사는 히쭉 웃었다.
"하하하하하! 이번 생은 재밌었다! 또 놀자."
안 돼!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제갈사의 심장에서 뭉게뭉게 어둠의 힘이 솟아오르더니 허공의 한 점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어둠의 차원문이 갑작스럽게 열리면서 수많은 눈과 눈동자가 어둠 저편에서 이쪽을 주시하는 게 보였다.
제갈사의 시체가 서서히 빨려들어간다.
나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이번 생에서도 제갈사가 자살하는 걸 막지 못한 것이다. 그것도 나 때문에!
' 빌어먹을!!'
그와 동시에 어둠 저편의 존재가 전욱에게 말을 걸었다. 전욱은 그 존재를 의식해서 동료들을 건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무명제사서와 마도사의 영혼을 대가로 받았다... 너는 이 자들을 건드리지 못한다...]
전욱은 성가시다는 듯 대꾸했다.
[ 밀림에 처박혀 있던 성골(聖骨)께서 웬일로 무거운 발걸음을 하셨나.]
[ 후후... 오제 전욱이여. 인과율을 계산할 수 있다고 여기는가?]
[옛 지배자]인 '밀림의 지배자'가 껄껄 웃으며 차원문 너머에서 촉수를 뻗었다.
[ 황제라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넌 황제가 아니다. 너는 그럴만한 역량이 되지 못한다.]
휘리릭 휘리릭
천지를 뒤덮을 듯 거대한 촉수가 삽시간에 시야를 뒤덮었다. 그러자 전욱은 노하며 힘을 끌어냈다.
[ 은둔외톨이 따위가... 얕보지 마라!]
내 몸이 팽창한다. 내 몸의 본질은 그대로지만 전욱의 신체(神體)가 직접 만귀전에서 강림하며 거대한 어둠의 거인으로 변신했다. 어둠의 거인은 촉수를 향해 손을 뻗으며 잡아뜯었고, 뜯겨나간 촉수들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쿠콰쾅
대신격의 충돌! 그들은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며 엄청난 마력을 숨쉬듯이 사용하고 있었다. 천지가 어둠에 일그러지며 차원이 산산히 가루가 되어 부숴져나갔다.
전욱과 같은 신의 감각을 공유하고 있는 지금은 확실히 보인다.
' 힘과 속도가 아냐.'
신격의 싸움은 물질계에서 사용하는 힘이나 속도의 단위를 쓰지 않았다. 물리법칙에 구애받거나 제약받지도 않았다.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자기 멋대로 시간을 조종하고 형언할 수 없는 저주와 술수를 부릴 수가 있는 것이었다. 예전에 황궁의 [옛 지배자]에게 독고준이 저항하지도 못하고 당했던 이유는 바로 시간조작에 당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크기나 겉보기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권능에 따라 결판이 나는 것이다. 필멸자의 경우에는 신이 시공간을 조작하는 능력에 저항할 방법이 없다면 이야기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하지만 전욱은 사도인 내 몸을 통해서 인과율의 부담을 줄이고 있는데다 해방칠요를 두 개나 들고 있어서인지 손쉽게 쌍검을 휘두르며 '밀림의 지배자'가 뻗어낸 촉수를 해치우고 있었다.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전욱이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격렬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내 정신이 아득하게 끊어지려 하고 있을 때 저 너머에서 망량의 외침이 들려왔다.
"백웅!!"
망량과 천우진이 술법으로 결계를 만들었고, 그 결계를 받은 미호와 검마, 진소청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나는 금세 망량의 작전을 알아챘다.
' 삼황오제 전욱에게 일격을 먹일 생각이야!'
무모하다!
절대지경의 무사시조차도 전욱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지 않았는가? 하물며 진짜 몸을 인세에 강림시킨 지금은 무모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셋은 자신들의 힘을 압축시키며 일점돌파를 시도했고, 마치 송곳같은 기세로 전욱의 몸뚱이로 날아들어 왔다.
전욱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두르려 했다. 나는 그 행동 한 번에 아군이 몰살당함은 물론 직선거리에 있는 모든 인간도시가 파괴되어서 수백만 명이 살상당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 안 돼!!'
나는 모든 의지를 다해서 전욱을 막으려 했다.
그 순간, 전욱이 손을 멈칫거렸다.
[ 음... 파천의 가호... 성가시군.]
나는 파천의 가호의 도움을 받아서 전욱의 한 수를 봉쇄했지만 상황은 계속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퍼엉
"커헉, 백웅... 깨어..."
처음으로 사망한 것은 검마였다. 그는 전욱의 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나동그라지며 즉사해 버렸다. 직접공격을 당한 게 아니었지만 신력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필멸자의 육체로는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다음은 진소청이었다.
퓨웅
진소청은 나와의 거리가 십여 장 정도 남았을 때 한 자루의 창에 신명을 머금고 쏘아져 왔는데, 그의 돌격은 순식간에 다시 육 장의 거리를 압축시켰다. 순간적이지만 절대지경의 깨달음을 집약시켜서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는지 진소청의 창극이 산산히 부숴져 나갔다.
"... 여기까진가..."
유언을 남긴 진소청 또한 빛의 폭풍 속에 휘말려서 사라져 버렸다.
"백웅."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미호가 자신의 꼬리를 신화(神化)시키며 날아왔다. 전욱의 피부 근처까지 도달한 미호의 전신피부가 검게 물들고 있었다. 그러나 음신지력의 힘으로 저항하며 내 눈앞에까지 도달한 미호는 결국 내 손을 꽉 붙들었다.
미호의 얼굴이 눈 앞에 보인다.
그녀는 내 손을 붙잡은 채 웃었다.
"널 지켜주겠노라... 다음 생에서라도."
안 돼.
안 돼.
안 돼!!!
다음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 미호의 몸이 마지막 영기를 모두 내뿜으며 자폭해버린 것이다. 그녀의 생이 빛나며 내 정신이 박살나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전욱은 뜻밖에 자신의 심장 근처까지 도달한 미호의 폭발에 피해를 입었는지 잠시 비틀거리는 기색이었다.
[ 크으... 뭐지? 설마 필멸자가 내 본체에...?]
전욱은 당하고도 믿을 수 없어하는 기색이었다. 아마 음신지력의 폭발때문에 삼황오제에게도 충격을 줄 수 있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그런 반응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 왜...'
이번 생은 이미 진 것이었다.
그 사실은 몰리고 몰리다가 결국 천제를 기다리게 된 시점에서 모두들 직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태산을 공격해서 긴나라를 없애려 한것도 발악에 가까운 시도였다. 이 상황에서 전욱에게 저항해봤자 사후의 고통만 길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 동료들은 전욱에게 붙잡힌 나를 구하고자 목숨을 던져서까지 싸웠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긴나라도 이길 수 없는데 삼황오제를 이길 수 없는 건 뻔한 일인데도.
망량이 이쪽을 향해 외치는게 들렸다.
"백웅!!"
그는 이미 살기를 포기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의지력은 꺼지지 않은 채 내게 외쳤다.
"가능성은 보여줬소. 그러니... 그러니까..."
망량이 비틀거린다. 그는 더 이상 삼황오제의 신력을 견디지 못하고 몸이 붕괴되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내질렀다.
"포기하지 마시오!!"
그 외침을 끝으로 망량과 천우진 모두가 가루가 되어서 흩날렸다. 전욱이 귀찮다는 듯 기운을 한 번 내뿜은 것만으로도 그들이 소멸해버린 것이다.
"......"
설마.
우리의 힘이 삼황오제에게 어디까지 통하는지를 내게 보여주기 위해, 그 미미한 정보를 전해주기 위해 죽음을 자처한 것인가? 어차피 죽는 거라면 이후의 전생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신에게 대적한 것인가? 삼황오제와의 전투경험이라는 걸 전하기 위해서?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 아.'
나는 잠시 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동료이기 때문이다.
동료이기 때문에, 구하려 한 것이다.
다른 모든 이유보다도 모두가 그 각오로 내게 달려든 것이리라.
다른 건 부차적인 이유에 불과했으리라.
울고 싶다.
미쳐버리고 싶다.
' 안돼...'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또 다시 모두가 죽게끔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나 자신의 무력감이 한스러웠다. 그렇다고 깽판을 치면서 복수하기에는 적이 너무나 거대한 존재였고, 지금 나는 내 자아를 추스리기만도 힘들었다.
천하에 대적할 자 없는 초월자 - [옛 지배자]급 존재를 대적한다는 건 이런 것인가.
분노와 무력감과 절망감이 혼돈 속에서 뒤엉켰다.
그리고 문득, 지금의 나와 같은 절망을 느낀 자가 얼마나 많았을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실로 많았으리라.
항거할 수 없는 힘 앞에서 무릎꿇은 약자는 사막의 모래알보다 더 많았으리라.
그 처절한 분노와 절망의 역사가, 바로 내가 살고 있는 현실 그 자체였으리라.
나는 내심 이를 악물었다.
' 포기하면 안 돼.'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난 모든 걸 잃었다.
모든 걸 잃었으니까 할 수 있는게 있다.
' 조금만 더 빨리 결정할 수 있었다면...'
나는 극도로 후회하는 와중에도 내면에서 크게 외쳤다.
[ 밀림의 지배자여! 나는 원합니다.]
상대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 무엇을 원하는가?]
저 놈은 내 19번째 전생에서 제갈사의 영혼을 먹어치우고 내 삶을 농락했던 놈이다. 그래서 절대 고개 숙이기도 싫었고 굴복하기도 싫었다. 지금껏 반전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런 심정적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치졸한 자존심을 접고 오로지 파멸만을 향해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영겁토록 지옥불에 타버려도 좋으니 동료들의 복수를 하고 싶다.
여기서 내 전생이 끝장나도 좋다.
이 도박이 성공하기만을 바란다.
[ 내 모든 것을 바치겠으니 삼황오제를 없애주십시오.]
밀림의 지배자는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저 놈은 내가 모든 걸 포기할 때만을 기다리고 이 자리에 찾아온 것이리라.
[ 좋다... 너의 절망이 아주 보기좋...]
이대로 이용만 당하다가 죽는 건가...
저 놈이 삼황오제나 전욱을 이기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좋으니까 전욱이 파멸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쿠구구궁
그 순간이었다.
[ 아니?!]
전욱이 깜짝 놀랐다. 놀란 건 그 뿐만이 아닌지, 촉수를 뻗으며 전욱과 싸우고 있던 밀림의 지배자도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 우주에 이런 건 존재할 수 없어! 이건 영혼이 아니...]
퍼버버벙
이상한 일이었다. 밀림의 지배자의 촉수덩어리들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그가 거하던 밀림이 통째로 혼돈에 불타기 시작했다. 그 불길은 심지어 [옛 지배자]조차 감당할 수 없는지, 밀림의 지배자는 급히 자신의 몸뚱이를 부상시켜서 불을 피하는 기색이었다.
끼아아악
암천향의 일각이 공간째로 무너지는 게 눈에 보였다. 밀림의 지배자를 모시던 새같은 봉사종족들이 학살당하는 게 보였다. 혼돈이 기어오르며 거칠게 생명체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파멸을 불러오는 전조처럼 보였다.
밀림의 지배자는 파멸의 상흔을 묵묵히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 시간의 중심이 닫혔다.]
전욱은 크게 당황했다.
[ 이 놈!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난데없이 시간이 요동치면서, 그가 발을 딛고 있는 시공간이 크게 불안정해졌기 때문이다. 대신격이 자신의 권능으로 제어하고 있던 시간이 복구와 파멸을 거듭하며 혼돈으로 회귀한다.
퍼벙
동시에 전욱은 자신의 팔뚝이 터져나가는 걸 지켜보자 멍하니 중얼거렸다.
[ 내가... 이 내가 시공의 혼돈을 감당할 수 없다고...? 아니... 그건...]
휘오오오
우주홍황에서 '무언가'가 이 대지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절대적인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후 밀림의 지배자는 뭔가를 깨달은 듯 말했다.
[ 지금 이 순간, 큰 굴레가... 움직인다...!!]
번쩍
섬광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것이 나의 22번째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