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23 암천향(暗天鄕) =========================================================================
삼황오제 전욱의 강림!
나는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태껏 만귀전에서 인간세상을 관조해오던 높디높은 삼황오제가 사도의 육체를 빌어서 나타날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전욱의 존재감은 내 몸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으며 나는 그의 정신 한켠에서 생각만을 할 수 있는 처지였다.
전욱의 강요에 긴나라가 말했다.
[ 그런 건 모른다!]
전욱은 껄껄 웃었다.
[ 하하하하. 날 재밌게 해 주는가.]
전욱이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자 긴나라의 몸뚱이가 뒤틀린다. 뿌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단말마가 울려퍼졌다.
[ 아아악...!!]
긴나라의 몸을 꼬챙이처럼 꿰뚫고 있던 암창이 회전하며 그의 내장을 갈아버리고 있었다. 심지어 암창에서 뾰족한 가시가 뻗쳐나와서 긴나라를 갈가리 찢어버리는 중이었다.
후두둑
긴나라의 영체가 갈기갈기 찢겨서 흩날렸다. 그러나 전욱은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내 몸을 빌어서 주먹을 쥐었다.
[ 아직 멀었다.]
우웅
[ 흐악... 아악...]
그러자 긴나라의 영체가 시간을 거꾸로 되돌아오듯 복원되었다. 핏자국조차 말라버린 대지에는 고통만이 남았다. 긴나라는 뭔가 말하려는 듯 했으나 전욱이 재차 암창을 날려서 그의 눈을 꿰뚫어 버렸다.
[ 끄아아악!!]
긴나라는 비틀거리며 혹독한 고통에 버티려는 듯 했다. 그러나 전욱은 그 희망을 짓밟듯 손가락을 다시 상하로 그었고, 긴나라의 팔죽지가 잘려나가며 양쪽 팔이 허망하게 떨어져 버렸다.
철퍽하는 소리와 함께 팔이 떨어짐과 동시에 긴나라가 내장을 토해냈다.
[ 우욱...]
[ 보기 더럽구나.]
전욱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퍼엉!
다시 한 번 긴나라의 몸뚱이가 실타래처럼 꼬여서 뒤틀리더니 혈편이 되어 터져버렸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파괴의 향연을 바라보며 그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도대체 무슨 수를 쓰는 거지?'
전욱이 하는 거라곤 그저 주먹을 쥐거나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팔진도로 우리 일행을 괴멸시킬뻔 했던 긴나라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벌레를 갖고놀듯 압도적이었기에 공포마저 느껴졌다.
저것이 삼황오제의 권능이란 말인가?
도저히 상리나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이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전욱은 잔혹했다. 지금도 긴나라를 되살리면서 이번에는 무형의 힘으로 긴나라의 목을 쥐어서 터뜨리고 있었다.
퍼버벅
긴나라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가 땅에 떨어졌다. 전욱은 땅을 굴러다니는 긴나라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 시간은 넉넉하니 부디 오래 버티거라.]
긴나라는 다시 전욱의 뜻으로 재생되었다. 그는 반쯤 미쳐버린 듯 필사적으로 외쳤다.
[ 우리가! 팔부중이 전부 모이면! 아무리 너라도...]
그 말을 들은 전욱이 손가락으로 파괴를 행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전욱이 말했다.
[ 바라던 바다. 부디 불러모으거라.]
[ ......]
[ 버러지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기도 귀찮으니까...]
퍼엉!
긴나라의 머리가 터졌다. 전욱은 말을 이었다.
[ 하긴 네놈들 중 하나는 인간 따위에게 죽었으니 기대도 안 되는군.]
전욱의 잔혹한 고문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인가.
폭력과 피빛이 난무하며 온갖 참상으로 긴나라가 사망했다.
변화가 생긴 것은 50번째 죽음이 지나쳤을 때였다. 긴나라는 피바다 속에 쓰러져서 팔다리를 잘린 채 힘겹게 말했다.
[ 그... 만둬...]
[ 왜 그러느냐. 네 충성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가?]
[ 이런 짓을 한다고... 창힐님께서 뜻을 돌리지는 않는다...]
[ ......]
[ 크흐흐...]
긴나라가 갑자기 이죽거렸다.
[ 하긴... 황제의 손자로서 대신(大神)이라 으스대고 다녔는데... 정작 황제 공손헌원은 네게 진의를 가르쳐주지 않고 창힐 님께 전수하셨으니... 질투가 나겠...]
[ 흐음. 개소리 마라.]
전욱은 듣기 싫다는 듯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 억... 윽...]
우드득
긴나라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의 전신피부에서 울긋불긋한 기포가 올라오며 오색빛을 내었고 이내 흉측한 모습으로 변했다.
[ 크아아아악...]
긴나라는 극도의 고통을 느끼는 듯 눈알을 데굴거렸는데 그 눈알조차도 크게 부풀어 있어서 역겨운 기분이 들었다. 마치 벌레처럼 땅에서 꿈틀거리는 긴나라를 쳐다보던 전욱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 자칭 창힐의 책사라 하면서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군. 하긴 화신 정도는 우리에게 붙잡힐 수 있다 생각했을테니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가?]
전욱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전욱이 긴나라를 내려다보더니 중얼거렸다.
[ 역시 내가 너무 일찍 나와버렸어. 이 한심한 놈 때문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더니 전욱이 재차 말했다.
[ 백웅. 너 말이다.]
응?!
지금 나를 의식하고 전욱이 말을 건 것인가?
[ 넌 역시 이질적인 존재다. 내가 강림한 순간 사도의 의식과 영혼은 즉시 소멸해야 정상일진대 너는 아직도 정신의 한켠에 남아있구나.]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하지만 이런 경험은 분명히 겪어본 적이 있었다. 과거 수요가 자동해방되었을 때 [옛 지배자]가 내 몸에 강림해서 날뛴 적이 있었다. 그 때도 나는 지금처럼 정신의 한켠에 밀려났을 뿐이었다. 전욱의 강림때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전욱은 내 기억까지는 읽지 못하는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 본디 나는 너를 통해 이 세상을 관조하다가 천제가 내려올 때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통제하려 했다. 네게 권능을 줘서 인과율의 부채를 감당했던 것도 그 때문이지. 너는 조용히 자기자신을 지키면서 천제가 내려올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거였단 말이다. 호신(護身)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만한 힘을 줬지 않은가? 헌데 너와 네 동료들은 정말로 제멋대로 움직였다...]
저벅
저벅
전욱은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벌레처럼 기어다니며 고통받는 긴나라를 아랑곳하지 않고 천제단 위로 올라갔다. 제단 위에 올라간 전욱은 감회어린 눈으로 제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 이 경계는 바로 내가 만들었다. 황제의 명으로. 바로 내가 혼돈의 시대를 종식시킨 자이다.]
[ ......]
[ 헌데 네 녀석은 방금 이 위업을 파괴하려 했다.]
나는 전욱의 말에 항의했다.
[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대로라면 다 죽을 셈이라서 발악이라도 하려 했습니다.]
[ 다 죽으면 권능을 발현시켜서 이 도전을 피하면 되는 거였다. 네 선택을 변명하지 마라.]
[ 시간을 되돌리면 어차피 이 경계도 되돌아오는 거 아닙니까?]
[ 아니.]
[ ......?!]
전욱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 이 경계는 마치 살얼음과 같은 것. 수많은 신의 권능과 계약이 얽혀 있으므로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 정도로는 복구할 수 없다. 너는 삼황오제가 위업이라 표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르는 모양이군.]
[ 그, 그 말은... 시간복구의 권능을 써도 파괴된 천제단의 경계는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겁니까?]
[ 그게 바로 내가 너를 막으러 이 자리에 온 이유지. 너희가 전멸하는 건 상관없지만 천제단은 결코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 복구시킬 순 있겠지만 괜히 일을 늘릴 필요는 없다.]
[ ......]
[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삼황오제도 꽤 화가 나 있지.]
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 이럴 수가...'
바로 머릿속에서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왠지 방금 전욱이 한 말에는 엄청난 의미가 숨어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전생자로 살아오면서 얻게 된 직감이라고 해도 좋았다. 내가 혼란스러워하든 말든 전욱이 말했다.
[ 이제 됐다.]
[ 뭐가 됐다는 겁니까?]
[ 더 이상 너를 시켜서 지상을 정탐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 같군. 이제부터는 내가 마무리를 하겠다.]
덜컹
나는 가슴속이 확 내려앉는 걸 느꼈다.
[ 마무리라니요?]
스스스스
[ 수요여. 해방되어라.]
전욱이 내 목갑에 있던 수요를 꺼내서 손에 들었다. 그는 가볍게 어둠의 힘을 불어넣었는데, 그 힘이 막대해서인지 수요에 씌워져 있던 봉인이 즉시 풀려버리고 말았다.
파칭
순식간에 신기(神器)가 막대한 힘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전욱은 만족스러운 듯 수요의 검신을 쓰다듬었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는 소름이 돋았다.
수요해방!
인간이나 필멸자는 봉선의식으로 온갖 발악을 해도 될까말까한 일이었지만 칠요의 창조자인 삼황오제는 숨쉬듯이 해방하는게 가능한 모양이었다. 전욱은 수요를 하늘로 향하며 말을 이었다.
[ 이것이 바로 삼황오제가 칠요를 사용하는 방법이다.]
쿠구구구...
당장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여태껏 마주쳤던 신적 존재들이 호풍환우에 지평선을 가르는 기적적인 위력을 보였던 것에 비하면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전욱의 신적 인지력(認知力)이 느껴지면서 내 감각이 세상의 만물에 확장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수십 리?
수백 리?
그 정도가 아니다. 전욱은 이미 이 중원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유기질과 무기질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감각은 미친듯이 확장되며 해저(海底), 운중(雲中), 성천(星天)까지 도달하는 듯 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인지라 나는 압도적인 정보량 때문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이것이 신이라는 존재가 평소에 느끼는 영역이란 말인가?
오오오오
전욱에게서 어둠의 힘이 뿜어져 나오며, 그의 양손에 들려 있던 화요와 수요가 크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신기의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외쳤다.
[ 도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
[ 나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나직이 말한 전욱의 말투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 네가 해신을 쓰러뜨렸을 때만 해도 기뻤다. 이제야 가면을 벗고 편하게 살 기회가 생겼다고 여겼기 때문이지... 온갖 존재들이 몰려들며 인과율이 혼돈으로 빠져드는 수라장에서 삼황오제의 힘으로 충분히 난관을 돌파할 자신도 있었다.]
[ ......]
[ 그러나, 도저히 네놈을 통제할 자신이 없구나. 너야말로 읽어낼 수 없는 혼돈 그 자체... 진정한 혼돈.]
왜 전욱은 나를 저렇게 평가하는 것일까?
내가 그렇게 읽어내기 힘든 행동을 했단 말인가?
[ 더 이상은 위험한 다리를 건널 수 없다. 다시 유예가 시작되겠지만 수천 년쯤이야 금방 지나갈 것이리라.]
위이잉
전욱이 그렇게 중얼거릴 때 갑자기 주변에서 차원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차원문에서 어둠의 형상이 제각기 나타났는데, 그 숫자가 총 다섯이었다. 어둠의 형상은 모습을 직접 비치지 않은 채 전욱에게 말을 걸었다.
[ 진심이오 전욱? 이게 최선인가?]
[ 다 몰려올 줄은 몰랐군.]
그 존재가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당신 혼자 결정하기엔 너무 큰 일이지. 우리에게 칠요를 사용할 충분한 이유를 설명하시오.]
[ 제곡(帝?). 흉신(凶神)이 혼란을 틈타 끼어들 기색이 있소. 그 자와 또다시 전쟁을 치르는 건 너무 성가신 일.]
제곡의 옆에 있던 어둠의 형상이 끼어들었다.
[ 나 소호(少昊)는 전욱의 뜻에 찬성한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귀찮은 일이 될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고작해야 인간 따위의 일인데...]
나는 그 말을 듣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 내가 지금 엄청난 자리에 있군...'
차원문을 열고 주변에 나타난 것은 바로 삼황오제!
그들이 자신의 화신을 보내서 임시로 회의를 열고 있는 중인 것이다. 나는 삼황오제의 회의를 옆에서 지켜보는 셈이었다. 잠잠하게 있던 자들 중 하나가 말했다.
[ 나 요순(堯舜)도 찬성한다. 지금의 인간들은 타락하여 돌봐줄 필요가 없다.]
전욱이 요순의 말에 비웃듯 대꾸했다.
[ 타락! 정말 인간스러운 발상이군. 선악은 유희에 불과하거늘 너무 역할에 빠진 게 아닌가?]
[ ......]
오제들끼리 의견을 내놓는 중인데도 이상하게 황제(黃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오제들은 삼황으로 짐작되는 어둠의 형상으로 시선을 모았다. 오제끼리의 의견조율은
찬성쪽으로 가닥이 잡혔기 때문이다.
삼황 또한 세 명이 아니라 두 명이 이 자리에 나와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 나 여와는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