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18 암천향(暗天鄕) =========================================================================
투마의 갑작스러운 제안. 검마는 당황하지 않고 응답했다.
"그리 하지. 나머지는 다 내 말에 따르겠는가?"
"물론이오."
기절한 흑마를 깨워서 마저 칠마의 동의를 받은 후, 검마는 투마를 따라서 어디론가 향했다. 인적없는 곳으로 향한 투마는 검마에게 말했다.
"검마. 내가 섬기는 주인은 백련교 풍신류(風神流)의 수장, 호법사자 용비천(龍飛天) 님이시오."
그러자 검마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 또한 이미 흑요석을 통해서 내가 얻은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알고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군."
"지금 내 주인인 용비천 님께서는 큰 곤란에 처해 있으시오. 무영련주가 내 주인을 만나서 도와주신다면 내 세력인 수라문(修羅門)의 모든 것을 바칠 것이고, 거대한 세력이 무영련의 편이 될 것이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뭔가 혹할 것이다. 하지만 검마는 현재 풍신류를 따위로 여길 정도의 거대한 흐름을 알고 있는 상태라서 냉담하게 반응했다.
"싫은데."
"......"
"나는 지금 용비천인지 뭔지를 통해서 세력확장이나 꾀할 때가 아니오. 아까 못 들었소? 내가 원하는 건 신강으로 향하는 상행을 봉쇄하는 거라고."
"왜 봉쇄하는 거요?"
"내가 말해 줄 이유는 없지."
검마는 그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난 지금 어설픈 수작을 받아줄 정도로 넉넉한 상태가 아니오. 목숨이 두 개쯤 되는 모양이지?"
"그, 그게."
"마도팔마 투마가 이 곳에서 잠들겠군."
스릉
검마가 검을 뽑아들자 투마의 눈빛이 진동했다. 설마 단도직입적으로 검마가 자신을 죽이려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투마는 생존본능을 끌어내서 갑자기 그의 앞에 꿇어앉으며 외쳤다.
"죄, 죄송하오! 감히 시험해보려 했으니 죽을 죄요!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오."
"흥..."
"이쪽 사정을 모두 상세히 말할터이니 제발 놓아주시오."
그러자 검마는 마지못해 손을 거두는 듯 대꾸했다.
"이야기해 보시오."
"내 주인이신 용비천님께서는 얼마 전 백련교 본단이 무너지고 전대교주가 사망했다는 걸 아시게 되었소. 그래서 중원에 남은 풍신류를 추스려서 은거하려 하셨는데 힘이 부족하여 불안감을 강하게 느끼셨소. 그러던중 무영련주가 마도팔마를 소집하길래 무영련과 손을 잡으라는 밀명을 내게 내리셔서, 예까지 왔소."
"손을 잡으라... 말은 그럴싸하게 하는군."
검마는 비웃듯 중얼거리고는 말했다.
"좋소. 나를 지금 즉시 그 용비천에게 안내하시오."
"왜... 왜?"
"나와 동맹을 맺고싶다는 얼굴을 한번 보고싶군."
"알았소."
휘익
검마는 이윽고 진소청과 함께 투마를 따라서 이동하기 시작했고, 천우진의 천리안은 거기에서 끊겼다. 그리고 순어구를 통해서 검마의 말이 내게 들려왔다.
[ 백웅. 나와 진소청이 용비천을 만나보겠네.]
[ 괜찮겠습니까?]
[ 괜찮네. 제갈사가 우리를 시험했던 이유를 알고 있잖은가.]
[ 위험하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 알았네.]
파앗
순어구의 통신이 끊겼다. 나는 걱정스러워서 제갈사에게 말했다.
"도와주러 가야하지 않을까."
"그럴 필요 없을거다."
"......"
너무 단호한 거 아니냐?
"그런데 검마는 정말 일을 잘 하는군. 과연 사파무림의 지존이라 해야하나? 두뇌도 명석하고 판단력과 유연성, 무력도 뛰어나다니... 내가 예전에 주군으로 모시려 했을 만 해."
제갈사는 감탄하더니 망량에게 말했다.
"현아. 넌 왜 무림에 투신하지 않았냐?"
그러자 망량이 대답했다.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넌 무공재능도 꽤 되는데다가 나를 뛰어넘는 동서고금의 잡식을 알고 있고 기문둔갑의 천재잖느냐? 칼밖에 쓸줄 모르는 무림의 멍청이들을 갖고놀 수 있었을텐데? 정천맹의 군사같은 걸 했으면 많이 출세했을 거다. 정천맹의 고수들을 잘 움직여서 마도팔문을 멸문시킬수도 있었겠지."
"그만 놀리십시오, 숙부."
망량은 한숨을 쉬었다.
"이 세상의 사악하고 어두운 이면을 짐작할진대 어찌 무림에 눈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너는 백웅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은인자중 외에는 아무것도 못 했지. 기껏해야 관리놈들을 세치혀로 농락하고 천문과 지혜를 빌려서 돈을 쌓았을 뿐... 그게 정천맹 군사가 되는 삶보다 나았다고 단정할 수 있냐?"
"......"
"나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은 이미 망했으니 아무런 기대도 안 했지. 오래된 생각이었다."
단정적으로 말한 제갈사가 갑자기 내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미리 말해두지. 지금까지의 너희는 타인을 압도하는 타고난 귀재(貴才)를 갖고도 재능과 시간을 허망하게 낭비했다. 그러니까 이 멍청한 빡대가리가 도와달라고 하면 사욕을 부리지 말고 일단 도와라, 알겠냐?"
나는 난데없는 제갈사의 말에 얼떨떨해서 말했다.
"제갈사. 갑자기 웬 미친짓이야? 나한테 그런 말 해서 뭐하게!"
"너한테 한 말 아냐."
"응?"
그러자 옆에 있던 망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숙부는 방금 전 후생(後生)의 우리 자신에게 충고한 거요. 당신이 죽을 경우 다음 전생에서 만나게 될 우리 자신에게."
"... 아!"
"초면에 흑요석을 쉽게 받아들이는 건 힘든 일이니 말이오. 이렇게라도 저항감을 낮춰야지."
"그렇군..."
제갈사가 이죽거렸다.
"이번 생에서 현이 네녀석은 나한테 지략으로 좀 뒤쳐졌지? 인정하냐?"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건 네 역량과 지혜가 나보다 뒤떨어져서가 아냐. 원래의 '망량'이 품고 있던 이상과 꿈에 억지로 백웅의 전생을 끌고가려고 생각하다보니 상황에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었던거지."
"압니다. 반면에 숙부는 원래부터 자기에 대한 애착이 없었으니 '모든 것을 전생(轉生)의 승리를 위해 버린다'는 발상으로 쉽게 전환하신 거죠. 전 황궁에서 나올 때부터 제 앞날 생각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크크크. 지금의 백웅은 초기의 망량이 조종할 정도의 송사리는 아니지."
제갈사가 낄낄대자 망량은 뭔가 각오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설령 이번생에 끝을 보지 못해도 다음에는 더 큰 성과를 내고 말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던 미호가 약간 심통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 희한한 놈들 다 보겠군.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뭐가 벌써 인생 다 산 것처럼 만담이나 하고 있느냐?"
제갈사는 히죽 웃었다.
"구미호 너도 미리 백웅한테 애정표현이나 해두는게 어떠냐?"
"뭐라고?"
"이제부턴 정말로 한치앞도 모르겠으니 미리 유언이나 남기자고."
미호는 제갈사의 말뜻을 알아들은 듯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미친 새끼! 광서생이란 별호 한번 잘 붙었구나."
"고마워라~"
미호가 내게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백웅. 신경쓰지 마라. 재수없게 유언같은 걸 미리 남기는 미친놈과는 상종하지 않는게 좋으니라."
"크크크크크."
"......"
하지만 나는 그들이 농담처럼 던지는 말에 전혀 웃을 수 없었다.
유언(遺言).
' 그래. 방금 망량과 제갈사는 내게 유언을 남긴 거야.'
망량도 제갈사도 농담이 아니라 진담을 한 것이다. 당장 바로 내일 상황이 어떻게 틀어져서 내가 죽고 새로운 전생이 시작될지 모르므로 할 말을 미리 해둔 것이다. 그리고 저 유언은 나중에 급사할 때 내 감정을 억누르고 냉정해지라고 미리 남긴 것이리라. 내가 손해를 덜 봐야 목표에 다가가는 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이다.
과연 이 길이 옳은가?
동료들이 다 죽을줄 알면서도 인류의 구원을 추구하는게 옳은가?
내가 원해서 가는 길인데도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이 감정은 [옛 지배자]나 강력한 존재를 맞이했을 때 드는 공포감과는 다른 것이었다. 어쩌면 바로 다음 순간 내 마음이 절망의 나락으로 빠질까봐 두려워하는 감정이었다.
"......"
아니다. 이렇게 약한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기왕 시작한 김에 나는 끝을 봐야만 한다. 이렇게 전생을 쌓아나가다보면 또 새로운 진실이 보이게 될 것이고, 그 결과를 통해서 나는 조금이라도 더 최선의 방법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멈춰버리면 지금껏 날 위해 죽었던 동료들의 죽음은 모두 개죽음이 되고 마는 것이다.
' 포기하지 않겠다.'
나는 각오를 다시 새겼다.
사신들의 파멸을 보고 말리라는 맹세는 반드시 지키고 말 것이다.
검마에게서 통신이 다시 들려온 것은 약 두 시진이 지나서였다.
[ 백웅. 들리는가?]
[ 어떻게 되었습니까?]
[ 음... 의외의 결과라고 해야할까. 일단 그쪽으로 가겠네.]
검마는 왠지 난처한 목소리였다. 나는 검마가 혹시 용비천의 암수에 당한게 아닐지 걱정되었다.
' 괜찮은 건가?'
내가 불안해하자 제갈사가 히죽히죽 웃었다.
"흐흐흐. 결판이 났느냐?"
"지금 온다는데."
"아주 재밌는 구경이 되겠군."
재밌는 구경?
내가 제갈사의 말 뜻을 깨달은 건 잠시 후의 일이었다.
쿠웅
"크윽... 나를 어쩔 셈이냐!"
"......"
나는 포승에 묶인 채 내 앞에 꿇어앉아 있는 인물의 얼굴을 확인하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질문을 일단 넘기고 믿기지 않는 얼굴로 검마와 진소청을 쳐다보았다.
"... 지, 진짜입니까? 이 놈을 이기셨습니까?"
그러자 진소청이 자신의 창을 어깨 뒤로 걸치며 말했다.
"백웅. 일대일은 아니었고 둘이서 합공해서 오백 초만에 붙잡았소. 그래서 좀 불명예스럽긴 하구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라..."
검마가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동안 장령곡의 밥만 축내는 것 같아서 미안했는데 이로써 밥값은 한 셈이겠지?"
"충분합니다. 아니, 넘칩니다."
나는 잡혀온 자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설마 용비천을 잡아오시다니."
내 눈 앞에 꿇려앉혀진 자는 바로 풍신류의 호법사자인 용비천이었다. 용비천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는 풍신류의 장로로 보이는 자들이 서너 명 더 잡혀와 있었다. 나는 그들의 면모를 확인하다가 검마에게 물었다.
"용중일은 없었습니까?"
"그렇네. 그는 따로 움직이는 모양이더군."
우리의 대화를 들은 용비천이 버럭 외쳤다.
"놈!! 그 아이를 건드리지 마라!!"
"흠."
나는 분노하고 있는 용비천의 얼굴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세상에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내 10번째 전생에서 그토록 공포스러웠고 압도적이었던 용비천이 무릎꿇려지다니!
'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나는 문득 용비천을 묶은 포승줄이 특수한 재질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검마에게 물었다.
"이게 설마 말로만 듣던 포룡승(捕龍繩) 아닙니까?"
"한번 던지면 용도 묶어버린다는 전설속의 밧줄을 말하는 건가? 하하... 이 밧줄은 그런
전설의 보패가 절대 아닐세. 그냥 튼튼한 밧줄이지."
"네? 하지만 이 놈은..."
"후후."
검마는 약간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전성기의 호법사자와 싸워서 승리한 게 아닐세. 이 놈은 엄청난 내공과 의념절기를 보여주었지만 그것 뿐... 내공을 무한(無限)으로 사용하지 못했지. 의념절기도 마찬가지고."
"네?!"
"우리 예상이 맞았단 말일세. 그래서 다소 모험이긴 했지만 이 놈을 붙잡기로 한 거지. 지금은 내 독문혈법으로 용비천의 기혈을 봉쇄했을 뿐일세."
예상대로라면 설마 그 가능성을 말하는 것인가?
나는 믿기지 않아서 눈을 껌벅거리며 조심스레 용비천에게 물었다.
"용비천. 너 설마... 천령단(天靈丹)이 사라진 건가?"
"......"
용비천은 눈을 질끈 감는 듯 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죽여라."
"으음..."
나는 침음성을 냈다.
' 한백령을 보고 짐작은 했지만...'
그렇다.
우리의 예상 - 무려 호법사자가 상대인데도 단 둘을 세상에 내보낼 수 있었던 자신감, 그리고 눈 앞에 잡혀온 용비천의 모습. 이건 한 가지를 의미하고 있었다. 바로 현 나인교, 구 백련교의 호법사자들은 모두 무한의 내공인 천령단의 힘을 잃어버렸다는 뜻이었다.
한백령은 해신을 해치운 후 자신의 화력이 떨어졌다고 내게 고백한 바가 있었다. 그렇다면 해신이 죽은 순간 계약이 파기되어서 신의 옥좌에 이어지는 무한의 내공이 점차 소멸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천령단에서 무한의 내공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용비천은 그냥 풍신류의 초절정고수에 지나지 않기에 진소청과 검마가 합공해서 쉽게 붙잡은 것이리라.
하지만 내가 계속 걱정했던 이유는 한백령만 그런지 다른 호법사자도 그런지 확실치 않아서였다. 만일에 독고준이나 용비천의 천령단이 건재하다면 아군을 죽음의 위기에 빠뜨리는 셈이기에 계속해서 확인했던 것이다. 아무리 진소청과 검마가 강해졌어도 아직 호법사자를 정면으로 상대해서 이길 수 있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제갈사가 활짝 웃었다.
"검마 아주 잘 했어! 이놈을 잡아왔으니 한가지 더 시험해볼 수 있겠군."
"시험?"
"후후. 일단 심문부터 해 볼까."
제갈사는 용비천과 풍신류 장로들에게 이혼대법을 걸어서 심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련교 본단의 붕괴 이후 용비천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상세하게 캐냈다.
제갈사가 캐물었다.
"천령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인가?"
"아니... 다..."
용비천은 넋이 나간 모습으로 대답을 이었다.
"원래 지니고 있던 천령단의 힘에서 2할 정도는 남아있다... 하지만 더 이상 무한의 내공은 아니며... 본래의 힘을 내지도 못한다..."
"넌 왜 그런지 이유를 알고 있었나?"
"전혀 모른다... 하지만 나 말고 다른 호법사자들도... 그럴거라 짐작했고... 더 이상 풍신류를 지킬 자신이 없어... 무림의 어둠으로 숨으려 했다..."
"흐음. 그랬던 거군. 시간이 지날수록 천령단은 소멸한다라..."
스릉
제갈사는 몇 가지 정보를 더 캐어내고는 장검을 뽑아들었다.
"좋아. 협력해줘서 고맙구만."
슈칵!
"제, 제갈사!"
나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제갈사가 거침없이 놈의 목을 장검으로 베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놀란 건 나뿐인듯, 나머지 모두는 이미 짐작했다는 듯한 눈으로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 끼어들어서 막을 수도 있었겠지만 제갈사의 행동에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아무도 막지 않은 것이다.
투두둥
용비천의 목이 바닥을 구르고 혈액이 분수처럼 비산했다. 제갈사는 그 참혹한 광경을 보고도 무심한 눈빛으로 말했다.
"혼(魂)이 움직이지 않는군. 내 소유야."
둥실
제갈사의 손 위에 새하얀 영혼덩어리가 떠 다니는게 보였다.
망량이 알겠다는 듯 말했다.
"큰 성과군요."
"그래."
제갈사가 자신의 얼굴에 튄 선혈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백웅. 이걸로 백련교를 구원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