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16 암천향(暗天鄕) =========================================================================
제갈부는 아직도 장령곡의 비처에 갇혀 있었다. 다만 망량이 처우를 개선한듯 예전처럼 삼순구식해서 피골이 상접한 상태는 아니었고 담담해보이는 표정이었다. 제갈부는 우리를 발견하자 경계심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날 죽이려고 왔나?"
그러자 망량이 말했다.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 괜히 떠 보는군."
"......"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유룡집(遊龍集)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소?"
그러자 제갈부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 예상밖이군. 그걸 왜 묻지?"
"질문에 대답이나 하시오."
"너도 알고 찾아왔겠지만, 알만큼은 알고 있지. 제갈가의 후손으로서 성실히 수학했다."
"그렇다면 이 문양에 대해서 알고 있겠지."
스윽
망량은 미호가 그린 문양을 제갈부에게 보여주었다. 제갈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망량이 이미 다 알고 왔다는 걸 확신했기에 괜히 부정하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망량이 말을 이었다.
"나는 유룡집을 짧은 시간밖에 배우지 못했소. 하지만 제갈부 당신은 아버지의 후계자로 키워지면서 오랜 시간동안 공부했지. 이 문양에 대해서 좀 더 아는 게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 주시오."
그러자 제갈부가 코웃음을 쳤다.
"후... 솔직하게라... 애초에 선택지조차 없는데 아주 사람을 갖고 노는구나. 어차피 거절한다고 해도 이혼대법으로 내 넋을 빼앗아서 강제로 털어놓게 할 거 아니냐? 뭐하러 이런 귀찮은 짓을 하는 거지?"
"......"
두 형제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망량은 아무 감정 없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실상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 백웅. 나는 제갈부도 동료로 만들고 싶소.]
망량은 이곳에 오기 전 내게 말했었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자 망량이 연거푸 말했던 기억이 난다.
[ 지금은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흘러가며 적의 수준이 높아져서 실감할 수 없지만 제갈부가 동료가 되면 앞으로 편해질 것이오. 그는 틀림없는 중원제일기재이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한번만 그를 시험해 보겠소.]
망량은 제갈부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제갈부가 타고난 재능을 자부하며 동생인 그를 멸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오를 떠나서 망량은 제갈부의 능력과 재능을 인정하고 있는 듯 했다.
망량이 보고싶은 것은 무엇일까?
내가 둘의 대치를 보고 있자, 제갈부가 천천히 말했다.
"나도 그 문양이 뭔진 모른다. 이혼대법을 걸든말든 맘대로 해라."
"정말 모르오?"
"맘대로 하라고 했지. 나한테 이런 식으로 캐묻는게 무슨 소용이 있지? 어차피 네가 듣고싶은 말을 해줄 생각도 없고 거짓말을 해도 검증할 방법이 없을텐데."
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넌 정말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군."
"......"
망량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제갈사가 나서서 이혼대법으로 그를 심문했지만 역시 그가 모른다는 것만 확인되었을 뿐이다. 제갈사는 고개를 떨구고 있는 제갈부가 뭐가 마음에 안드는지 뺨을 철썩 때린 후 망량에게 말했다.
"제갈유룡을 붙잡아서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겠군요."
"하여튼 형님 조심성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친자식에게도 다 털어놓지 않으니."
제갈사의 말대로였다. 망량은 제갈부가 적어도 10년은 유룡집을 공부했을거라고 하는데 그런 제갈부조차도 문양이 무슨 특별한 의미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제갈유룡은 그 문양을 평생 자신이 무덤에 가져갈 비밀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심문이 끝나고 돌아와서는 망량이 내게 말했다.
"마왕은 어떻게든 쓰러뜨렸으나 이제는 상황을 관조해야한다고 생각하오."
"내 생각도 같다."
옆에서 제갈사가 거들었다.
"백련교에 거하는 [옛 지배자]의 화신과 싸우는 건 너무 위험부담이 크지. 마왕은 아무리 신적 존재가 되었다 해도 근본이 인간마도사였지만, 그 놈은 진짜배기니까. 미후왕이 쓰러뜨려주길 기대할 수밖에 없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물었다.
"천제까지 대략 한 달 남은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예전과는 상황이 달라."
제갈사가 손깍지를 끼며 말했다.
"도리어 이 천제는 인간의 존속을 위해 필요할지도 모르지."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의 천제는 감히 [옛 지배자]를 끌어들인 인간에 대한 징벌적 의미가 강했지만, 이번에는 네가 해신을 쓰러뜨려버렸기에 그런 의미의 천제가 될 수 없다. 천제란 건 쉽게 말하자면 천계가 지상에 강림하는 것인데, 해신이 사라져서 인과율이 혼란의 도가니가 된 지금의 중원에는 도리어 잘 맞을지도 몰라."
"......"
"그래서 천제를 그냥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다. 큰 변수가 될 수 있는 마왕을 처치했으니까 더 쉬워질지도."
그런 생각은 해 보지 못했다.
지금까지 천제는 모든 것의 파멸을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무조건 막으려 들었는데, 군마(群魔)가 횡행하는 아수라장에서는 도리어 이득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정신이 퍼뜩 들어서 제갈사에게 말했다.
"... 그렇다 해도 인간이 학살당할 가능성은 여전히 있잖아. 천제로 내려온 대라신선들이 인간을 봐줄 리가 없어."
"어쩔 수 없지. 네 말대로 수십만 명의 인간이 신선의 손에 살해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누구한테 당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갈사가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너도 백우선의 미래예지를 통해서 [옛 지배자]의 사도가 우글거리는 나인교(螺湮敎)의 행태를 봤겠지. 흉신의 사도든... 다른 [옛 지배자]의 권속이든 그런 것들이 본격적으로 발호하기 시작하면 인간은 무조건 인권(人權)을 잃어버리고 가축이 된다. 천계는 인간을 징벌하기 위해 본보기를 보이겠지만 말살이나 가축까지는 아닐 가능성이 높아."
"으음..."
"천계의 군세가 내려와서 인간세상에 주둔하며 인간의 명맥을 지켜준다는 말이다."
나는 제갈사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차피 피하지 못할 일이라면 그나마 순한 쪽에게 지배당하는 걸 택하자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때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호가 말했다.
"과연 그럴까?"
좌중의 시선이 미호에게 쏠렸다. 미호는 약간 싸늘한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서왕모께선 인간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어. 뿐만 아니라 내가 봤던 천계의 최고위층은 대부분 인간을 마지못해 살려두는 느낌이었고."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미호 정말이야?"
"그래. 삼청은 몰라도 그 바로 아래의 대라신선들은 인간의 문명에 회의적인 자들이 많았어."
미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으며 말했다.
"딱히 하고싶진 않으나 일이니까 한다... 라고 해야할까? 나는 잘 모르겠지만 대라신선들은 그 위치에 임명되는 순간 피할 수 없는 과업이나 숙명이 지워지는 것 같았어. 그래서 순수하게 인간을 좋아해서 지켜준다는 신선은 굉장히 드물다."
"으음..."
"백웅 너와 인연이 이어진 여동빈, 화룡진인, 장삼봉이 특이한 부류라고 할 수 있느니라."
미호의 말은 큰 의미가 있었다. 미호는 천계 최고위층인 서왕모 곁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대요괴이기 때문에 지금의 관점은 천계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했다.
"그 대라신선들도 날때부터 천계출신인 경우는 거의 없을거 아냐? 대개 등선해서 천계에 간 거라면 인간일텐데 왜 인간을 회의적으로 보는 거지? 보호하고싶어야 하는거 아닌가."
"...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백웅."
미호는 괴이쩍은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인간의 문명이 왜 좋단 말이냐? 저들 좋을대로 동물을 사육하고 도살해 잡아먹고, 소나 말은 쉴새도 없이 부려먹히지 않느냐? 돼지는 본디 똑똑한 생물인데도 살코기가 맛있다는 이유로 대량으로 양식당해서 해체당한다. 온갖 방법으로 잡아먹히지. 살아남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서 다른 존재를 멋대로 해치는 게 인간 아니냐? 그리고 자연의 생태계를 자기 욕심대로 파괴하면서 해악만을 저지르는 게 인간이다."
"......"
"동식물 출신으로 선좌에 오른 자들은 거의 대부분 인간에 대한 증오감을 품고 있으며, 인간출신 또한 희로애락애오욕을 줄이고 객관적 시선에서 인간을 바라보면 회색 시선을 띄게 된다. 요괴들이 괜히 인간을 해치는게 아니지."
"으음."
이것이 요괴가 보는 관점에서의 인간인가.
"인간은 그리 긍정적인 존재가 아니니라. 어째서 천계에서 인간을 보호하는 정책을 유지하는지 모를 정도로."
미호의 말에는 언뜻 나도 공감할 수 있었다.
' 나도 인간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나는 내 주변의 동료들은 아끼고 좋아하지만, 인간 전체를 좋아하는 겸애가 내게 있는 건 아니다. 나 또한 울타리 이외에는 두루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인 것이다. 하지만 떼몰살을 당하는 건 다른 문제였기에 이렇게 인간을 구하려고 활동하는 중이었다. 멸망의 굴레에서 나만 피할수가 없기에 기왕 하는거 다같이 구하려는 것일 뿐이다.
제갈사가 손을 휘휘 저었다.
"다 아는 얘기는 하지 말자고. 이 중에 인간이 개새끼만도 못하다는걸 모르는 놈도 있나? 다 아는데 딱히 의식해봤자 바뀌는게 없는 문제니까 논할 필요도 없어."
"그렇긴 하지."
"아무튼 지금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자중하는 편이 좋겠어. 다만..."
"다만?"
"5곳의 천제단은 한번 더 확인해보는 편이 좋겠군."
제갈사의 말대로다. 현 시점에서 천제단에서 봉선의식을 치를 수 없게 되어 가치가 다소 떨어졌지만, 그래도 나중에 천계가 지상으로 강림하게 되는 장소다. 그런 장소의 동정을 살피는 건 중요한 일이 분명하다.
"미후왕이 습격하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미후왕이 우리를 경계하는 이상 따로 다니는 건 위험하다. 이번만 해도 신시에서 난데없이 맞닥뜨리는 바람에 전멸당할 뻔 한 것이다. 미후왕의 변덕으로 피해없이 빠져나왔다지만 다음번에 마주쳤을 때도 그런 운이 작용할지는 몰랐다. 내 말에 제갈사가 대답했다.
"정 위험하다면 우리가 직접 나가는 것보다는 인형을 사용하는 게 낫지."
"인형?"
"나와라."
제갈사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백(魄)을 끌어당기는 술법이었다.
저벅
저벅
제갈사가 이혼대법을 써서 조종하자, 비밀의 방 한켠에 누워있던 인영이 비척거리며 걸어나왔다. 그 인영은 총 다섯 명이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자 상황을 이해했다.
"초상기인(超上奇人)."
"이것들은 지난번에 제물로 안바치고 따로 보관해뒀던 최상급품이다. 공들인 것들이라 대충 만든 초상기인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성능도 좋지. 무공과 술법을 약간만 입력해두면 탐색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을 거다."
"초상기인한테 비등을 줘서 탐색시키라는 거냐?"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이다. 제갈사가 말했다.
"그게 낫지. 네가 직접 이동하다가 함정에 걸리거나 미후왕을 또 만나면 어떻게 할거냐? 백웅 너는 우리의 대장이니까 함부로 나다니는 걸 자제할 필요가 있어. 네가 잡히면 그 순간 끝이니까."
"흐음. 초상기인이 비등을 쓸 수 있을까?"
"비등하고 순어구를 줘 봐."
나는 제갈사에게 비등과 순어구를 넘겼고, 제갈사는 그들 중 아름다운 소녀모습을 한 초상기인에게 두 개를 모두 주며 말했다.
"비등을 써서 항산의 천제단에 가라. 그리고 거기서 순어구로 상황을 보고해라."
"네."
파앗!
이윽고 미소녀 초상기인이 비등을 써서 순간이동했고, 나는 순어구의 다른 쪽을 손에 쥐었다. 그러자 잠시 후 초상기인의 목소리가 순어구를 통해서 들려왔다.
[ 항산의 천제단에 도착했습니다.]
[ 적이나 요괴, 마물은 없나?]
[ 보이는 범위 내에는 없습니다.]
[ 돌아와.]
[ 네.]
파앗
금세 초상기인이 귀환했다. 그리고 명령하자 내게 비등과 순어구를 순순히 돌려주었다. 제갈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때? 간단하지?"
"그렇군... 하지만 비등은 한 개야."
"2인 1조로 한번씩 보내면 그만이야. 혼자보다 효율적인데다가 상황을 살피기에도 적합하지. 설혹 함정이나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큰 손해는 아니겠지. 두 명이 당해도 세 명이 남아있으니까."
"......"
공격당해서 초상기인이 파괴당해도 생명체가 죽은 건 아니라는 인식인가.
물론 그게 효율적으로는 옳을지 몰라도, 나는 아직도 망설임이 있었다.
' 과연 초상기인에게 자기의지가 정말로 없는 걸까?'
백발의 소년, 그 초상기인은 분명히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초상기인의 틀을 벗어나서 나인교의 대주교이자 흉신의 사도로 각성했다. 그렇다면 초상기인에는 단순히 쓸만한 인형임을 벗어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창조자인 제갈유룡조차 잘 모르고 있는 함정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제갈사의 책략이 최선이다. 나는 제갈사의 책략에 동의했다.
"그렇게 하지."
작전이 정해진 후에는 제갈사가 내게 흑요석을 대량으로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다. 제갈사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무공의 지식, 지선 망량의 기억 등등 모든 것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담은 흑요석이 있어야 초상기인에게 무력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보통은 초상기인에게 무예나 술법을 직접 가르쳐서 학습시키는 것 같지만 우리는 흑요석의 술법이 있으니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할 필요는 없지. 흑요석으로 직접 기억을 흡수시키면 훨씬 빨리 강해질거야. 흑요석에 쓸데없는 네 전생기억을 삭제하고 나머지 용량에 지식만을 우겨넣으면 그럭저럭 될 것이다."
"초상기인이 자아를 가져서 배신할 확률은 없을까?"
제갈사가 킬킬댔다.
"그럴 확률이 있으면 더 흥미롭겠군. 허나 팔괘의 힘으로 인위적으로 양생한 인형일 뿐일진대 그런 일이 생길리가 없잖아. 사막에서 자력으로 꽃이 피는 것과 같은 확률이야."
"흐음..."
우우웅
다섯 명의 초상기인은 흑요석을 받고 약 한 시진동안 몸을 꼼지락거리면서 자신들이 받은 기억을 확인하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시험해보듯 하나하나 무공초식이나 술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심 놈들이 단숨에 무공을 대성할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쉬쉭!
' 어설프군.'
초상기인 한두 놈이 뇌신류의 뇌룡신검을 펼치는 게 보였지만 자세도 호흡도 엉성했다. 뿐만 아니라 무술의 묘의를 얻었다고는 전혀 볼 수 없었다. 다만 술법의 경우는 상당히 정확하게, 아니 나보다 훨씬 높은 위력으로 시전하는 게 보였다. 제갈사는 그 모습을 보고는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초상기인은 무공과 별로 상성이 좋지 않아. 기본적으로 역천(逆天)의 술법이라서 기와 의념을 근간으로 하는 무공에는 쉽게 적응할 수 없지. 하지만 술법에 있어서는 단번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준다."
"무공은 잘 못하니 술법사로 키우기 쉽다는 건가?"
"그렇긴 한데..."
제갈사는 약간 말꼬리를 흐렸다.
"이것도 제조기술이 숙련되고 좀 더 발전하면 어찌될지 모르지. 기초이론이 워낙 좋아서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니, 앞으로는 무공의 천재로 거듭나는 특급 초상기인을 제작할 수 있을지도."
"아무튼 무공과 술법이 어설퍼서 지금 내보내기는 좀 힘들겠는데?"
"단숨에 적응할 수는 없지. 며칠 동안 수련을 시키고 나서 정찰에 보내자."
그렇게 말한 제갈사가 내게 말했다.
"하는 김에 백웅 네가 무공을 초상기인에게 지도해."
"엥? 흑요석으로 이미 기억을 다 전수했잖아."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배우는 건 흡수율이 달라. 네가 직접 가르쳐서 쓸만한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게 낫겠지."
"알았어."
나는 꽤 재밌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앗
나는 초상기인들에게 검을 잡고 외쳤다.
"호흡을 다스리면서 뇌룡신검과 뇌신검무를 펼쳐!"
초상기인들은 아무 표정 변화도 없이 내 지도에 따라서 무예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나는 예전에 이광한테 배울 때 생각이 나서 왠지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초상기인들이 내 명령대로 따르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로부터 약 사흘 동안 초상기인들의 무공에 미진한 점을 하나하나 고쳐주었다. 신기하게도 초상기인들은 내가 지적한 점은 서툴지만 어떻게도 고치는 것 같았고, 오래지 않아 놈들은 뇌신류 무공을 웬만큼 쓴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갔다와라!"
그리고 충분히 수련이 되었다고 여기자 나는 초상기인 정찰조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정찰은 한나절동안 계속되며 천제단 주변을 탐색하다가 수상한 점이 있으면 보고하라는 게 기본명령이었다.
[ 항산의 천제단, 확인완료했습니다. 수상한 점은 없습니다.]
첫 정찰은 항산으로 했는데 항산은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나머지 4악이 문제였다.
' 화산에는 화산파, 숭산에는 소림사, 형산에는 형산파...'
천제단 주변에 어떤 경비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물론 화산이나 형산의 천제단은 별 경계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괜히 시비가 걸리면 귀찮아진다. 내가 고민하자 제갈사가 말했다.
"그냥 보내. 혈영곡이 정천맹을 붕괴시켰으니 화산파든 형산파든 천제단에는 신경도 못 쓸걸. 구파일방 대부분이 멸문위기일텐데 뭐... 그리고 소림사는 정찰 안해도 된다."
"응?"
"혈영곡이 소림사에는 아무런 피해를 못 줬다고 하더군. 그쪽은 안전해."
나는 제갈사의 말대로 정찰을 보냈다.
[ 화산의 천제단, 확인완료했습니다. 수상한 점은 없습니다.]
[ 형산의 천제단, 확인완료했습니다. 수상한 점은 없습니다.]
2악의 정찰은 무난하게 잘 끝났다.
나는 이대로 모든 정찰이 무난하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
"답신이 없군."
태산(泰山)의 천제단을 정찰시킨 두 명의 초상기인이 실종되기 전까지는.
분명히 초상기인은 주기적으로 이쪽과 순어구로 통신하며 태산을 정찰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이상한 소리와 함께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태산의 천제단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태산에 뭔가 있다.
"가 봐야겠어."
"아니, 안 돼."
"뭐?! 이대로 내버려두면 순어구와 비등을 잃어버리는 건데..."
"그러니까 그것보다 중요한 게 네 목숨이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한 제갈사가 말했다.
"원래 희생양으로 쓰려고 내보낸 것들이야. 죽는다고 이상할건 없지. 네가 위험에 처하는 대신 그곳에 함정이 있다는 걸 알아냈으니까 이득이야. 위험을 발견했으면 피해야지 굳이 함정으로 달려드는 건 바보짓 아닌가?"
"......"
옆에서 듣고 있던 천우진이 말했다.
"태산의 천제단 근처에 누군가가 함정을 치고 잠복하고 있었나 보군."
"그게 누굴까?"
"내가 천리안의 술수를 써서 알아보겠다."
파칭!
천우진이 반황주를 손에 들고 천리안을 썼다. 천우진은 보패를 얻고 나서 영력이 증폭되었는지 이전보다 훨씬 강해진 듯 했다. 그는 한동안 천리안으로 태산의 근황을 살펴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아무것도 안 보이는군."
"어? 무슨 소리야? 함정이 있을텐데."
"그러니까, 내 천리안에도 잡히지 않을 정도로 교묘하게 함정이 쳐져 있다는 소리다."
"......!!"
"엄청난 술사가 태산에 잠복해 있어. 초상기인을 이용해서 위험을 잘 피해갔군."
도대체 태산에 숨어있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제갈사가 말했다.
"됐어. 저런 저질낚시에 낚이는 게 바보지."
"하지만 비등과 순어구가..."
슈아악
그 순간 제갈사의 손 위에 비등과 순어구가 떠올랐다.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무명제사서의 상위마법 중 하나를 부려서 나와 보물을 연결해뒀지. 회수했다."
"......"
제갈사는 내게 보물을 던져주며 말했다.
"백웅. 이걸로 더 확실해졌다. 우리 말고도 천제가 열리는 틈을 노리려는 놈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