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15 암천향(暗天鄕) =========================================================================
장령곡으로 되돌아오자 나는 제갈사를 목갑에서 해방시켰다. 제갈사는 팔을 크게 찔러서 부상을 입었으므로 나는 재빨리 권능을 써서 치유하려 했지만 제갈사가 말렸다.
"놔둬. 사도의 권능을 쓸데없이 낭비하지 마."
제갈사의 의지가 강경했으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의술을 이용해서 자상치료를 했다. 그리고 미호나 무사시의 상태도 살펴봤는데, 무사시는 상당한 내상을 입은지라 내공을 이용해서 기공치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미호를 데려간 후 그녀에게 물었다.
"미호. 대체 어떤 죄를 짓고 천상에서 쫓겨난 거야?"
제천대성이 말했던 미호의 '죄'.
그것을 알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
미호는 크게 망설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백웅. 말해줄 수는 있지만 네게 말한다면 앞으로의 전생에서 네 동료들은 모두 내 죄를 알게 될 게 아니냐?"
"으음..."
"망설여지는구나."
확실히 그렇다. 그녀는 앞으로의 전생에서 자신의 죄가 다 까발려지는 셈이므로 말하기가 두려울 것이다. 누군들 자신의 원죄가 밝혀지는 게 달갑겠는가? 하지만 꼭 알아내야 하는 일인것도 사실이었다.
미호가 망설이고 있자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미호. 날 믿어."
"......"
"난 앞으로의 전생에서 네가 겪고있는 고민을 해결해 주겠어. 어떻게든 천상을 뒤집어엎어서라도 네가 천계에 돌아갈 수 있게 해줄게."
"백웅..."
그녀는 내 옷자락을 가녀린 손으로 꾹 붙잡았다. 나는 미호의 손목을 잡으며 미호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미호가 당혹해하면서도 내 눈을 물끄러미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한참을 갈등하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이지...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구나."
"칭찬이야?"
"흥."
약간 새침한 표정을 짓던 미호가 말했다.
"과거에 나는 서왕모 님과 함께 천상에 거하고 있었다. 그 때 나는 가지 말라는 금지(禁地)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그 곳에서 청조(靑鳥)를 죽이고 말았느니라."
"청조라면..."
"서왕모 님의 시중을 드는 푸른 새를 말한다. 평소에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둔갑해 있지. 서왕모님의 시녀라고 보면 된다."
"... 왜 그런 일을 한 거야?"
미호는 내 질문에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언제부터인가 서왕모님께서 나를 자주 보지 않으시고 금지에만 계셔서 질투가 났었느니라. 그래서 금지에 뭐가 있나 보러 갔었지."
"서왕모가 금지에만 있었다고?"
"그래."
확실히 미호는 서왕모를 어머니나 그 이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애정이 떨어지면 질투의 감정이 생기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그게 사람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라는 건 특이한 일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줘."
"서왕모께서 칩거해 계시는 금지는 요지(?池), 취수(翠水), 약수(弱水)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아, 혹시 서왕모님의 궁전을 알고 있느냐?"
"그래. 요지는 불로장생의 반도를 먹는 반도회가 열리는 장소잖아. 약수는 용조차도 건널 수 없다는 전승이 있고."
"맞다. 곤륜산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장소지. 난 천계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살았었느니라. 일개 지선 정도는 감히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미호는 약간 으스대는 말투였다.
' 뭐 자부심이 생길 만 하지.'
서왕모는 광성자 등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천계의 최고위 대라신선이며, 옥황상제나 삼청조차도 서왕모보다 위라고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황제 시대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고위신격이기 때문이다. 천계의 원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서왕모이기에 천계에서 가장 높은 장소에 궁궐을 짓고 지낼 수 있었으며, 거기에 함께 살던 미호는 자부심을 느낄만 했다. 미호가 지선보다 훨씬 높게 대우받았다는 말도 아마 사실일 것이다.
나는 약간 의아해서 물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서왕모가 불로장생의 반도(蟠桃)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미호
너는 반도 때문에 죄를 지은 게 아니었단 말이냐?"
"응?"
"그 동안 나는 네가 반도를 몰래 훔쳐먹어서 추방당한줄..."
내 말에 미호가 코웃음을 쳤다.
"흥! 반도 따위는 내가 먹고싶을 때 실컷 먹었다. 서왕모 님께서 하루에도 열 번씩 내게 반도를 주실 때도 있었고 수백 년간 맘대로 따먹어도 아무 말 없었느니라. 왜냐하면 아무리 먹어도 하루만에 금세 자라니까."
"......"
"세상에서 나보다 반도 맛을 잘 아는 자는 없을 것이다."
미호는 아련한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 때가 그립구나."
"그래서 금지에 침입했는데 청조는 왜 죽이게 된 거냐?"
"음... 그게 지금도 조금 이해가 안 되느니라."
미호가 망설이다가 말했다.
"서왕모님께서 틀어박혀 계시던 금지는 궁궐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었는데, 그곳은 갈수록 어두워지는 무저갱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해와 달의 문양이 반복되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문양이었지. 무저갱의 끝에 거의 다 왔을 때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었다고?"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까 나는 천계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 청조를 살해한 혐의, 그리고 금지에 침입한 죄로 재판을 받았다. 그 결과 천계추방형이 내려져서 천계에서 내쫓긴 것이다."
"......"
"이후 행적은 너도 알다시피 세상을 떠돌다가 동영에서 사람을 홀려서 권력놀이나 하게 되었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나는 미호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미호 네가 청조를 죽인 기억은 없다는 거지?"
"그래. 무저갱을 가면서 마주쳤던 기억도 없다."
"누명을 썼다는 거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느니라."
"서왕모가 왜 금지에 가는지 네게 이유를 말한 적은 없어?"
"없다. 그저 내게 얌전히 반도원에서 놀고 있으라고만 했는데, 그렇게 수십 년씩 흐르니 화가 났었다."
얼추 상황이 이해되는 것 같다.
' 얘기를 들어보길 잘한거 같군.'
왠지 지금 이야기는 앞으로의 진행에 큰 단서가 될 것 같다.
"미호. 그때 봤던 해와 달의 문양을 혹시 기억하고 있어?"
"기억한다. 억울해서라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스윽 스윽
미호는 내가 목갑에서 지필묵을 꺼내자 문양을 그렸다. 문양은 한두 종류가 아니었으며 무려 열여덟 종류나 되었는데 미호는 그 문양 하나하나를 상세히 그려내었다.
"기억력이 좋구나."
"난 원래 머리가 좋으니라."
"... 아 그래..."
아무튼 이건 좋은 정보였다. 그 외에도 나는 미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나는 뇌정경을 이용해서 빠르게 문양을 머릿속에 암기한 후, 문양을 그린 그림을 가지고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동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했다.
"나는 앞으로 기회가 생기면 서왕모의 비밀을 적극적으로 파고들 생각이오. 그리고 앞으로 미호의 죄를 논하지 마시오."
그러자 망량이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당연하오. 누명을 쓴 것에 불과하다면 동료로서 마땅히 도와야 할 것이오."
모두가 미호의 죄를 추궁하지 않는 것에 동의한 후, 미호가 그려온 문양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감상을 꺼낸 것은 검마였다.
"뭔지 모르겠군. 해와 달 말고 그냥 별이 섞여있는거같은데..."
진소청은 별 관심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제갈사나 천우진도 모르겠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아는 지식 중에는 없다."
"나도 모르겠군."
나는 의외라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전혀 본 적도 없는 건가?"
"모르는 건 모르는거야. 적어도 내가 아는 마도지식 중엔 없어."
천우진을 힐끔 쳐다보자 놈은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약한 소리를 하는 걸 그렇게 듣고 싶냐?"
"조금은."
이제 남은 건 망량이었다. 기대어린 시선이 망량에게로 향했는데, 망량은 그 문양을 아직까지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뭔가 감을 잡았기 때문에 집중해서 자신의 기억과 사고능력을 도야시키고 있다는 의미였다.
망량은 침묵 속에서 문양을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아까 검마 어르신의 감상이 맞을지도 모르오."
"응?"
"이건... 고대 성천도(星天圖)가 아닐까 싶소."
그러자 옆에 있던 천우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형.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하늘의 별과 운행을 그린 지도나 서책은 나 또한 많이 봤소. 하지만 내가 봤던 어떤 서책에서도 이 문양과 비슷한 건 없었소."
"나도 마찬가지다. 마도사 또한 술법사와 마찬가지로 성천의 운행은 필수적으로 공부하지. 내가 본 중에는 없는 것 같다."
제갈사가 말을 거들자 망량의 말에는 공신력이 점점 줄어들었다. 망량은 그 말에 일일이 반박하지 않고 계속해서 뚫어져라 문양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십익(十翼)."
"......?"
"주역의 경문은 너무 간단하면서도 심오해서 64괘의 괘사와 효사를 이해하기 어렵소. 그래서 공자(孔子)가 경문을 이해하기 쉽도록 주석을 달았다 하는데 그것이 바로 주역의 전문(傳文)이며 줄여서 역전이라 하오. 그 역전은 문언(文言), 단전(彖傳) 상하편, 상전(象傳) 상하편, 계사전(繫辭傳) 상하편, 설괘전(說卦傳), 서괘전(序卦傳), 잡괘전(雜卦傳)의 7종 10편으로 되어 있소. 그래서 이를 십익이라고 부르지."
나는 망량의 말에 십익의 기초편을 공부하던 때를 기억해냈다.
"십익은 나도 기본은 공부했소."
"그렇소. 비단 유학공부 뿐만 아니라 도학공부에도 큰 보탬이 되는 양서(良書)지."
망량의 설명이 이어졌다.
"십익을 토대로 주역을 이해하여 달통하면 바로 후천팔괘의 달인이 되는 것이오. 헌데 우리 제갈가문에는 거기에 추가로 두 편이 더 있소."
"응?!"
뜻밖의 소리였다. 내가 놀라서 망량을 쳐다보자 그를 주시하고 있던 제갈사가 말했다.
"맞다. 선조인 제갈량공명(諸葛亮孔明)이 지은 제갈량집(諸葛亮集)과 심서(心書). 거기에 제갈량은 몰래 자신이 연구한 팔괘의 해석을 집어넣어서 이익(二翼)을 추가시켰다."
제갈사는 고소를 머금었다.
"제갈량의 오만이지. 자신은 팔괘의 성취에 있어서 공자를 훨씬 뛰어넘었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리하여 제갈가문의 자손들은 팔괘주역을 공부할 때 십익이 아닌 십이익을 공부하므로 훨씬 성취도가 빠르지."
"......!!"
그런게 있었단 말인가?
나는 망량에게 물었다.
"망량. 당신이 내게 3년간 글공부를 시켜줄 때 그건 안 가르쳐준..."
"안 가르친 게 아니라 못 가르쳤소. 제갈량집과 심서에 수록된 팔괘해석은 평생 팔괘연구에 몰두한 자에게나 쓸모있는 심화과정. 갓 글공부 걸음마를 한 그 때의 당신에게 전해줄 만한 게 아니었던거요."
"......"
내가 입을 닫자 제갈사가 말했다.
"그래. 아무튼 십이익이 어쨌단거냐? 어차피 그건 너나 나나 다 공부한건데 내가 알기로 십이익 내에는 이런 문양이 안 나온다."
"숙부. 숙부께서는 열세 번째 서책의 존재를 알고 계십니까?"
"... 뭐?"
제갈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망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있습니다. 제갈가에서 새로이 만든 팔괘해석 십삼익(十三翼)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그런 게 있었다면 내가 모를 리 없다."
"아뇨. 모르실 수밖에 없습니다. 숙부께선 그 책의 저자를 천하에서 가장 싫어하니까요."
"뭐..."
제갈사는 망량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뭔가를 깨달은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짜증과 분노를 흘렸다.
"그렇군. 망할 형님이 만든 거야."
"맞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망량이 내 쪽을 돌아보며 설명했다.
"주작 제갈유룡. 내 아버지이자 숙부의 형님이며 현 중원대륙에서 제일가는 팔괘의 달인이 만든 팔괘해석집이 존재하오. 그것이 바로 십삼익(十三翼)이며, 팔괘해석의 총화가 담겨있소."
"......!!"
"나는 천문관으로 재직하던 짧은 기간동안 아버지의 호의로 십삼익을 직접 가르침받았소. 그 덕분에 나는 술법재능이 없어도 빠른 시간내에 기관진식과 팔괘의 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오. 물론 십삼익이 팔괘의 이해를 빠르게 한다고 해서 초현실적인 술법능력을 주는 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약했지만."
"그 십삼익의 제목은 무엇이오?"
"유룡집(遊龍集)이오."
그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나는 혹시하는 생각에 망량에게 질문했다.
"그 유룡집을 나한테도 가르쳐줄 수 있겠소? 나도 기문둔갑의 고수가 되고 싶소."
"당신이 64괘를 이해해서 중급 이상의 진법을 자유자재로 파해 가능하면 그때 입문해도 좋소. 산술과 수리, 천문, 명리를 두루 알아야 하므로 아직은 먼 일일 거요."
"음..."
하긴 그렇다. 망운진 같은 간단한 진법 정도는 파해할 수 있지만 내가 진법을 수련한 기간은 짧기 때문에 중급 이상의 진법은 무리였다. 적어도 3년은 용왕매진해야 입문이 가능할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 유룡집에서 이 문양들을 봤던 기억이 나오."
제갈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인과관계가 요상하군. 어찌 천계 서왕모의 제일 비밀스러운 금지에 새겨져 있던 문양이 유룡집에도 기록이 되어있단 말이냐?"
"그걸 나도 알지 못해서 지금 기억을 뒤지고 있었던 중이오."
망량이 문양을 한손으로 크게 쓸었다.
"유룡집에서 이 문양은 성좌의 유행(流行)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쓰였소. 광대한 우주홍황에서 특정한 몇몇 별자리가 있는데, 그 별자리가 특정한 시기를 맞이하면 크게 변동한다는 설명이었소."
"성좌라."
옆에서 듣고 있던 천우진이 말했다.
"사형. 그 문양에는 강대한 주술적인 의미가 존재하는게 분명하오. 그리고 제갈유룡이라는 자는 그걸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배우거나 관찰한게 틀림없소."
"......"
망량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우선 나보다 유룡집을 잘 알만한 사람에게 물어봅시다."
"누구 말이오? 제갈유룡은 현재 생사를 알 수 없는데."
"또 한 사람 있소."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보다 유룡집을 오래 공부했고, 술법과 무공의 기재이며, 한때 대천문관으로서 황궁의 주술사들을 통솔했던 존재가 바로 이 장령곡에 묶여 있잖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