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12 암천향(暗天鄕) =========================================================================
저건 무슨 말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마왕 벽지상을 공격할 이유도 명분도 차고 넘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놈은 마치 의외의 기습을 당한 마냥 대꾸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일단 생각을 뒤로 미루고 놈에게 말했다.
"네가 낙양의 대결계를 부수고 천하를 혼란에 빠뜨리려 하는 건 놔둘 수 없다."
"아하하... 삼황오제의 사도인데 정의를 추구한다고? 우스운 소리군. 이 세상에서 [옛 지배자]보다 나을 게 없는 거악(巨惡)의 대변인이?"
"네가 뭘 안다고 그러냐?"
내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벽지상은 여인 특유의 높은 목소리로 웃더니 말했다.
"사도여. 나는 네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
"뭐?"
"지금껏 이 대륙을 염탐하면서도 도저히 기회가 나지 않아서 인간여자의 몸을 빌려 유희를 즐기고 있었지. 그런데 네가 해신을 없애준 덕에 편해졌구나."
나는 이를 으득 악물었다.
"... 네 녀석, 인간의 몸을 강제로 뺏은 거냐?"
"이상할 게 뭐가 있지? 이게 배교의 초대교주가 영생(永生)하는 법이다."
그렇다.
저 놈의 몸뚱이는 원래 '벽지상'이었던 중원의 여인이다. 그리고 놈은 원래 육체가 없는 상태라서 벽지상의 영혼을 강제로 빼앗고 자신이 그 몸을 차지한 것이다. 문제는 저런 식으로 마왕에게 당한 사람이 유사이래 몇 명이나 될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인과율을 무마하고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뭐지?"
내 질문에 마왕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얘기해줄 이유가 없다."
나는 놈을 노려보았다.
"그럼 마왕인지 뭔지 몰라도 각오해라!"
놈을 해치워야 만사가 풀릴 것이다.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이다!
"후후후..."
슈와아악
벽지상의 몸이 서서히 쓰러진다. 그리고 그 눈코귀입에서 시꺼먼 흑연이 뿜어져 나오더니, 마치 허공에 살아있는 연기가 넘실거리는 것 같았다.
[ 어디 해신을 쓰러뜨린 실력을 볼까?]
콰앙!
그 순간 내 몸이 번개처럼 움직이더니 허공에서 화룡이 솟구쳐서 폭발음을 내었다. 마왕이
기습공격을 가한 것을 막아낸 것이다. 내게 빙의한 화룡진인이 반사적으로 화요를 휘두르며 외쳤다.
[ 이 검으로 정의를 실천하리라!]
동시에 망량과 천우진이 결계를 발동시키며 자신들의 보패를 꺼내들었다. 반황주의 빛이 뿜어져 나오며 망량의 오화칠금선이 발출한 열기가 내 등에 적중했다.
화르륵!
그러자 갑자기 화룡진인의 능력이 급격히 높아지는 게 느껴졌다. 오화칠금선은 같은 화염속성의 보패라서 화룡진인의 힘을 회복시켜주는 공능이 있는 것이다. 화룡진인은 능력이 높아진 상태로 그대로 화요에 깃들었다.
우웅
동시에 장삼봉의 혼이 내게 깃들면서 마치 해신토벌 때와 같은 상태가 갖춰졌다. 장삼봉 진인이 내 몸을 움직이고, 화룡진인이 화요의 힘을 극대화하며 주술을 막아주고, 뒤에 있는 망량과 천우진이 보패의 힘으로 우리를 도와주는 구조였다.
이 상태면 이긴다!
해신 토벌때에 못지 않은 전력이다!
내가 내심 자신하고 있을 때 흑연으로 변신한 마왕의 음습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퍼졌다.
[ 기천의 자손을 거느린 숲의 검은 암컷 염소시여... 들어주시옵소서...]
시작되었다!
화룡진인은 물론 장삼봉도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지금 놈이 외우는 것은 외신(外神)의 주문, 그 위력은 일개국가에 못지 않은 변황 일대를 삽시간에 이계로 만들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만일 저 주문이 끝까지 외워지면 아무리 화룡진인이라도 못 버틸 가능성이 높았다.
' 주문을 다 외우기 전에 쓰러뜨려야...'
화룡진인과 장삼봉이 움직이려던 바로 그 때였다.
퍼억!
갑작스럽게 놈의 안개형태가 흩어지더니 은하구절편이 공백을 뚫고 나왔다. 마왕은 귀찮다는 듯 흑연을 움직여서 구절편의 공격을 피했으나, 다음 순간 갑자기 허공에 삼사가 나타나서 삼재의 방위를 점하고 마왕을 둘러쌌다.
[ 아니?]
마왕이 당혹해하자 십이율주가 유들거리며 말했다. 그는 어느새 장내에 나타나 있었다.
"여어 반가워~"
[ 네 녀석...]
"설마 백웅 저 놈이 진짜 칠 줄은 몰랐는데 기왕 하는거 열심히 해야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한 십이율주 하은천이 은하구절편을 허공으로 내던졌다. 삼사가 동시에 결계를 펼쳤고, 하은천이 수인을 맺으며 말했다.
"은하구절편이여 힘을 발하라!"
번쩍!
백광이 일어나며 결계가 마왕의 영체를 단단히 묶었다. 망량과 천우진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결계에 자신들의 술력을 불어넣었다.
쿠구구구
갑작스럽게 소용돌이와 함께 막강한 봉인이 펼쳐지기 시작하자 마왕이 기가 막힌듯 말했다.
[ 나를 배신했느냐? 네가 정녕 나를 배신한 건가?]
뭐?!
마왕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서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십이율주는 히죽 웃었다.
"서로 믿는 관계가 되어야 배신이잖아?"
[ ......]
"서로 안 믿었으니 이건 배신이 아니라고. 새삼스레 왜 그러시는지."
[ 네놈...]
쿠구구구
결계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장삼봉이 검을 쥐고 있다가 내게 내면으로 말을 걸었다.
[ 연자여. 결계로 끝낼 수 있다면 우리가 더 놈을 흔들 필요는 없소... 괜히 방해만 될 것이오.]
[ 저대로 봉인 가능합니까?]
[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약화될 것이오.]
장삼봉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마왕을 포위한 결계는 막강했다. 삼사가 전력을 다해서 펼치는 결계에다가 망량과 천우진이 돕고 있었다. 마왕의 영체는 눈에 보일 정도로 급격하게 쪼그라들고 있었고, 심지어 방금 전에 외우던 주문도 포기한 듯 했다.
' 뭐야 왜 저렇게 약해?'
나는 잔뜩 준비하고 온 게 허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겨우 이 정도로 봉인이 가능할 줄이야? 하지만 화룡진인이 내게 경고하듯 말했다.
[ 긴장을 놓지 말라! 저 놈은 지금 진짜 힘을 보여주지 않았다.]
[ 진짜 힘?]
[ 저 정도로 봉인 가능했다면 마왕이라 불리지 않겠지. 놈은 나와 여동빈이 천 년 전에 봉인했던 종말의 거룡과 동급의 존재다.]
쿠르릉...
[ 크흐흐흐...]
아니나 다를까, 결계에 갇혀서 쪼그라들고 있던 마왕이 갑자기 다시 자신의 몸을 불려서 연기의 거인처럼 변화했다. 아까처럼 흑색 안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안개를 뭉쳐서 거인의 형상을 만든 것 같았다.
"......!!"
"놈의 힘이 회복된다...!!"
십이율주와 삼사의 안색이 납빛이 되고 망량과 천우진도 당혹한 표정이 되었다. 설마 지상최강급 술법사들이 이렇게 잔뜩 모여서 은하구절편까지 제물로 바치는데도 마왕을 가둘 수 없을 거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파앗
마왕은 안개거인처럼 변했다가 갑작스럽게 다시 인간 여인, 벽지상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는 영언도 쓰지 않고 깔깔대며 말했다.
"아하하하!! 너희는 정녕 필멸자 주제에 나를 봉인할 수 있다 생각했느냐? 신의 사도와 권능을 겨루던 나를? 수천 년간 힘을 쌓아온 나를?"
"......"
마왕의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나는 시몬 마구스, 신왕(神王) 데미우르고스로 예지된 자. 종언의 계시를 받아 아이온에 이를 존재!"
갑자기 놈이 주먹을 움켜쥐며 검은 안개로 변신했다. 시꺼먼 알갱이처럼 몸이 변하면서 허공에 스며들었다.
[ 검은 산양의 저주를 받을지어다!]
콰과광!!
동시에 결계가 깨졌다.
그리고 마왕은 갈수록 커지더니 이윽고 해신에 못지않은 크기의 거대한 어둠의 안개로 화했다. 안개는 엄청난 기세로 덮쳐오더니 세상만물을 흡수하려는 듯 쭉쭉 뻗어나갔다. 화요에 깃들어 있던 화룡진인과 장삼봉은 자신들의 힘을 끌어내어서 마왕의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점차 밀리는 기색이었다.
[ 하압!]
쉬잉
화룡진인과 장삼봉이 모든 힘을 다해서 신검합일의 기세로 어둠을 가르는 한줄기 빛이 되었다. 나는 엄청난 속도로 뭔가를 찔러가는 걸 느꼈지만, 이윽고 검극이 헛되이 허공을 스치는 걸 알 수 있었다.
[ 차원에 본질을 숨겼군.]
화룡진인이 분한 듯 중얼거렸다.
[ 으으... 준비가 되어있었다면 못잡는 놈이 아닐진대! 저 놈이 암흑의 저주를 쓰는 줄 알았다면 미리 보패와 술식을 준비해왔을 터인데...!!]
장삼봉이 한숨을 쉬었다.
[ 늦었소... 버티면서 역전을 노려야하오.]
나는 언뜻 두 대라선인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방금 전의 일격을 실패한게 굉장히 큰 절망으로 다가온다는 건 알 수 있었다.
' 어두워...'
나 자신 외에는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세상천지가 어둠에 잠긴 듯 하다.
재빨리 화룡진인이 화룡을 소환해서 주변을 밝히자, 망량과 천우진이 근처에서 겨우 결계로 버티고 있는게 눈에 보였다. 화룡진인이 급히 그들을 보호하려는 듯 앞으로 갔으나 두 술법사는 안색이 파리해져 있었다.
술법사들의 뒤에는 마찬가지로 무인들이 가사상태에 빠져 있었다. 무사시, 진소청, 검마는 급히 가부좌를 틀어서 저주를 몰아내려 하는 모양이었지만 독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기에 그들의 얼굴에도 시꺼먼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헉... 헉..."
"저주... 너무 강..."
술법사들 쪽은 약간 나았지만, 망량과 천우진은 이미 보패를 꺼내들고 있었다. 보패로도 이 안개의 해악을 막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이 검은 안개에는 강대한 저주가 깃들어 있는듯 망량과 천우진의 손발이 검게 썩어가고 있었다. 화룡진인은 그 저주를 치료하려는 듯 했으나 이내 낙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이런 저주는 치료 못 한다. 놈을 먼저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다.]
[ 쓰러뜨린다고요? 놈이 어딨습니까?]
[ ......]
화룡진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장삼봉이 침통하게 말했다.
[ 수백 리에 이르는 이 어둠 전체가 놈이오... 어둠 속에 있던 생명체는 모두 다 죽었을 거요. 영력이 다 떨어지기 전에 어둠을 통째로 날려야 하오.]
[ 가능하겠습니까?]
[ 무리요. 이건 외신의 주문이오. 아무리 화요천염이라 해도 힘이 부족할 것이오. 이대로는...]
장삼봉이 말을 멈췄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방법이 없다.
마왕이 빌린 외신의 권능이 너무 막강해서, 대라신선이 칠요를 들고 싸워도 놈을 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화룡진인이 절망하는 와중에 침착하게 말했다.
[ 승산은 낮겠지만 시도해보는 수밖에...]
후와악
화요의 힘이 화룡진인에 의해 끌어올려지고, 동시에 불꽃의 용이 뿜어져 나왔다. 이전에 연금술사 거인을 불태웠던 가공할 화력이 주변의 공기를 사르며 맑게 만들었지만, 어디까지나 내 몸 주변일 뿐이었다.
우오오오
우리가 있는 곳을 제외한 수백 장이 한꺼번에 화염으로 불타오른다. 화요의 힘이 갈수록 증폭되며 범위가 넓어졌지만 어둠을 통째로 없애기에는 힘이 많이 부족해 보였다. 아무리 어둠을 없애도 그 자리에 또다시 어둠의 안개가 밀려들어왔다.
화룡진인이 이를 악물었다.
[ 부족해...!!]
이대로 화요천염의 힘이 정점에 도달한다면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때까지 내 몸이 버텨줄지가 의문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면서 폐부까지 마왕의 저주가 저며드는 느낌에 몸서리가 쳤다. 피부 여기저기를 구더기가 뚫는 기분이었다.
"허억, 헉..."
다행히 잠시 후 숨을 몰아쉬면서 회복했지만, 힘을 많이 써서 체력이 빠진 것만으로도 저주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온다.
정말 엄청난 저주다.
나는 지금 화룡진인과 장삼봉이 빙의한 상태라서 사악한 힘에 대한 저항력이 극도로 높은데다가 전국옥새의 나머지 영력까지 뽑아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마치 종잇장을 뚫듯이 저주가 뚫고 들어오는 것이다.
이게 마왕의 저주!
나는 그제서야 마왕이란 놈을 잘못 판단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 이 놈은... 해신과 달라. 정공법으로 상대 못해...!!'
상대는 인간출신으로 마도의 궁극에 달한 자.
싸우려 해도 싸움 자체를 받아주지 않는다.
격으로 치면 해신보다 낮겠지만 이 놈은 외신의 권능을 빌려서 자기자신을 공격불가로 만들고 가공할 마법을 써서 상대를 공격하는 놈이었다. 압도적인 물리적 위력을 과시하던 해신과는 달랐다. 화룡진인과 장삼봉이 강력하다고 해도 사법에 대항할 방법이 없다면 이기는 게 절대 불가능하다.
특히 외신의 가호를 받아서 안개화되는 능력을 봉인할 수 없으면 공격 자체가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방금 인세 최강급 술사들이 떼로 모여서 봉인을 걸었는데도 봉인할 수 없었지 않은가?
' 어떻게든... 사법에 대항할 방법을...'
아무리 그래도 강력한 술법사, 보패, 결계, 화룡진인의 영력, 화요라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는데 안일한 생각이었던가?
아니, 안일한 생각이 아니다.
이 정도 전력을 갖춰왔는데도 마왕이 너무 강한 것 뿐이다.
확실한 건 우리 모두가 마왕의 역량을 오판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놈에게 맞는 전략을 들고오지 않으면 허무하게 전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 버텨야 돼... 조금만 더...'
다행히 나는 음신지력 덕택에 몸에 큰 이상은 없지만 이대로라면 동료들은 전멸하고 나 또한 고사하고 말 것이다.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
그 때였다.
"내 힘을 받거라."
"......!!"
따뜻한 기운이 등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은빛 보호막이 생겨나면서 나머지 동료들을 저주에서 풀어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한 마기가 골수에 침투해 있던 사람도 정신을 차린 듯 했다.
뒤를 돌아보니 미호가 내 등에 손을 댄 채, 날 쳐다보고 있었다.
"백웅. 아직 싸울 수 있느냐?"
"미호!"
미호가 자신의 힘을 본격적으로 발휘해서 주변의 마기를 몰아내기 시작하자 상황이 굉장히 호전되었다.
' 미호는 마왕의 저주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구나.'
원래부터 그런건 아닐 것이다. 전욱의 음신지력이 미호를 굉장한 경지로 올려놓은 것이다. 미호는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대요괴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한둘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자 미호가 결연한 눈으로 말했다.
"내 여우불의 힘을 화요에 보태겠다."
"알았어."
뒤에 있던 망량이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말했다.
"우리도 힘을 보태겠소."
망량과 천우진이 자신들의 보패를 들고 미호와 함께 내 뒤에 섰다. 그리고 세 사람의 장심이 내 등에 닿이는 순간, 화룡진인이 크게 눈을 뜨는 게 느껴졌다.
쿠와앗
[ 간다, 화요천염!]
지금까지보다 수십 배 거대해진 화염이 천룡의 기세를 담고 하늘의 지붕을 뚫는 듯 했다. 하늘에 거대한 불꽃기둥을 만들어낸 화요천염은 영계를 불태울때 처럼 살아서 꿈틀거리며 어둠을 불살랐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사방에 흩어진 어둠의 안개는 한번 불타버리자 재생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쿠구구구
화요천염이 완전한 화룡의 형태를 띄며 구룡(九龍)으로 분열했고,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한층 기세를 돋우었다. 이제 어둠의 안개는 걷히기 시작했고 일 리 이내는 완전히 시야가 트이는 모습이었다.
' 됐어!'
이 정도면 이제 저주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저주의 안개가 확실히 약해진게 내게도 느껴지고 있었다. 화요천염이 포효하며 약 일 각 동안 천지를 불태우자 이제 어둠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중이었다.
슈욱
[ 꽤 하는군...]
그 때 허공에서 마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 검은 산양의 주문에서 살아남다니... 아무리 대라신선과 칠요라 해도 이 정도의 힘일 줄이야.]
[ 놈!!]
장삼봉 진인이 노호를 터뜨리며 마왕을 공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듯 미야모토 무사시와 진소청, 검마도 놈을 공격했다. 본래라면 이 공격은 백련교주조차도 버거워할 합공이 틀림없으리라.
하지만 마왕의 모습은 금세 안개처럼 변해서 또 사라져 버렸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눈을 반개하더니 한 번 허공을 베었는데, 그러자 허공에서 핏줄기가 잠시 솟구쳤다.
생뚱맞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왕은 의외라는 듯 껄껄 웃었다.
[ 하하하. 아직도 모르겠나? 너희의 힘으로는 날 붙잡을 수 없...]
마왕이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덥썩!
우득
[ ......?]
마왕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럽게 은광(銀光)이 스쳐지나가더니 자신의 오른팔이 뜯겨나갔기 때문이다. 찰나지간에 마왕의 오른팔을 뜯은 것은 어느 새 반요의 형태로 변신한 미호였고, 그녀는 팔을 지상으로 내던지며 말했다.
"다음에는 머리다."
[ 뭣... 아니 어째서 재생이 안 되는...]
마왕은 자신의 오른팔이 다시 자라나지 않는데 의문을 느낀 듯 했다. 그러자 내 몸을 차지하고 있던 장삼봉이 빈틈을 발견한듯 안광을 폭사하며 미야모토 무사시와 함께 마왕을 합공했다.
슈칵!
[ 으아아.]
마왕이 다시 몸을 안개로 변하게 만들었으나 이내 비명을 질렀다. 장삼봉이 휘두른 화요가 놈의 어깨죽지를 베었고 무사시의 일참이 갈비뼈를 스쳤기 때문이다.
[ 지나치게 오만하군. 투선 앞에서 같은 수가 여러 번 통한다 생각했는가?]
장삼봉이 싸늘하게 말했다.
[ 이제 그대가 차원에 몸을 숨기는 기척 정도는 읽어낼 수 있다.]
"나도 대충 알겠군."
[ 그대는 여기서 도망치지 못한다.]
절대지경의 고수들은 아무리 마왕의 술법이라 해도 대항가능한 걸로 보였다.
포위당한 마왕은 분노한 눈으로 좌중을 노려보더니 말했다.
[ 잘난체 마라. 네놈들은 다음에 가만두지 않겠다.]
퍼억!
"날 잊으면 안 되지."
마왕이 다시 안개로 변해서 도주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하은천의 은하구절편이 날아들었고 마왕이 그 공격을 회피했다. 하은천 또한 삼사와 함께 생존해 있었다.
[ 어딜...]
하지만 장삼봉과 화룡진인이 엄청난 기세로 달려들어서 놈을 재차 화요로 난도질했고 미야모토 무사시도 거들었다. 게다가 미호가 마지막으로 백호조(白弧爪)로 놈의 목을 따 버렸다.
장삼봉이 땅에 내려앉으며 근엄하게 말했다.
[ 다음이 어딨나?]
푸슈슈슉
[ 으으으으...]
무시무시한 연격이 스쳐지나가자 안개가 피처럼 마왕의 몸에서 터져나왔다. 마왕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걸레짝이 되어서 몸을 푸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황당함을 느꼈다.
' 이... 이 사람들 전부 도망치는걸 가만 놔두지를 않는구나.'
십이율주, 장삼봉, 화룡진인, 미야모토 무사시, 미호!
다섯 존재들 모두가 얌전히 도망치는걸 보고 있을 위인들이 아니었다. 모두가 도망치는 자의 등에 칼을 꽂았으면 꽂았지 보내주지는 않는 것이다. 마왕은 지나치게 인간과 신선을 얕보고 있다가 호되게 당한 셈이었다.
부르르륵
갑자기 마왕의 몸이 다시 거대한 암흑거인처럼 변하더니 흩어지려 했다. 그러자 화룡진인이 미호에게 외쳤다.
[ 놓치면 또 외신의 주문을 쓴다. 천계의 구미호여! 함께 불태워버리자!]
[ 알았어!]
화륵!
화요천염과 여우불이 소용돌이 치며 아까보다 더욱 거센 기세로 마왕을 맹추격했다. 어둠이 하나 둘 비늘처럼 뜯겨나가며 한줄기 흑광으로 변한 마왕이 필사적으로 화염을 피하려 했으나 곧 따라잡힐 듯 했다.
[ 말도 안돼... 나 시몬 마구스가 이런 곳에서...]
콰과광
마왕은 유언을 남기고는 화요천염과 여우불의 겁화에 전소되어서 사라지고 말았다. 화룡진인은 적을 영멸한 것을 확신하는지 내심 웃는 게 느껴졌다.
[ 핫하, 죽어라!]
장삼봉 또한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는 기색이었다.
[ 후우... 힘든 상대였소. 모두의 힘이 아니었다면 타개할 수 없었을 거요...]
장삼봉의 말은 사실이었다. 만일 나 혼자 왔다면 마왕을 절대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자리에 모인 게 인간최강자, 대라신선, 칠요씩이나 되기에 겨우 잡아족칠 수 있었을 뿐이다. 설령 나 혼자 음신지력으로 버텨냈다 해도 결국 놓쳤으리라. 마왕이 인외의 신적 존재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 해냈어.'
나도 진이 풀리려고 해서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백웅. 너한테는 정말 놀라기만 하는군."
한숨 돌리고 있을 때 십이율주가 삼사들과 함께 이 쪽으로 걸어왔다. 우리 일행이 십이율주 하은천을 쳐다보자, 그는 이크 하는 몸짓을 하며 말했다.
"아 걱정 마. 싸울 생각 없어."
나는 하은천을 노려보았다.
"이번에도 당신은 비장의 한 수를 쓰지 않았군."
이번에도 해신 때와 마찬가지로 전멸할 뻔 했다. 미호의 힘이 강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화룡진인과 장삼봉이라 해도 저주를 버티지 못하고 지고 말았을 것이다. 본체인 내가 마왕의
저주를 당하면 파리목숨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급한 상황이었는데도 하은천은 자기 전력을 드러내길 주저한 것이었다.
"비장의 한 수라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나."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이쪽도 생각이 있소. 다음부터 당신은 신적 존재와 혼자서 싸워야 할 거요."
내가 엄포를 놓자 하은천은 전과 달리 크게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음... 이봐, 진정해. 내가 잘못했다고. 이유가 있어."
"이유?"
"그래.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내가 힘을 감춘건 미안하다. 그러니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한다."
하은천이 예전보다 강하게 이쪽의 협력에 집착하는 기분이 든다. 하긴 지금 하은천 입장에서 우리와의 동맹은 결코 포기할 수 없으리라. 더욱이 마왕을 토벌하는 위력까지 보여줬지
않은가?
나는 내가 갑의 위치에 있는 걸 알아채고 코웃음을 쳤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시오? 사람을 바보로 아는군."
"흐음. 원하는대로 만사 제쳐두고 와서 싸우는 자리에 참여해 줬잖아. 의리는 다 했다 생각하는데 말이지."
"됐소. 당신의 진심이란 건 잘 알았으니."
"......"
그러자 하은천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 [옛 대륙]."
좌중의 시선이 하은천에게로 향했다.
"나는 [옛 대륙]으로 가는 안전한 통로를 알고 있다. 그 정보를 가르쳐 주는 걸로 성의를 보이는 건 어떨까."
"그게 뭐요?"
"네 일행 중에 마도사가 있었지. 그 자와 상의해서 신시로 찾아와 줘. 그럼 이만!"
파앗
하은천은 삼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 어쨌든 이겼군.'
나는 감회어린 눈으로 폐허가 된 주변 광경을 보았다.
마왕 토벌에 성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