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10 암천향(暗天鄕) =========================================================================
쿠웅
열의 말이 끝나자 오거천문이 닫혔다. 나는 다시 밀어보려 했으나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마치 십만근의 철벽과 같은 무게가 손끝에 느껴졌다. 내공을 돋우면 십만근이라 해도 못 움직이는 건 아니겠으나, 이건 오거천문의 관리자가 나를 거부한다는 뜻이라서 힘을 올려봤자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 어쩔 수 없지. 우선은 물러나자.'
나는 봉래산을 벗어나기로 했다. 혹시 비등을 사용할 수 있는지 시험해봤지만 역시 비등은 사용불가였기에 권능을 써서 봉래산을 나왔다.
슈욱
칠성단에 도착하자, 나는 제단 앞에 앉아있던 천우진에게 말했다.
"천우진! 혹시 강해졌냐?"
그러자 천우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개풀뜯어먹는 소리지?"
"......"
아닌가보군.
나는 천우진에게 봉래산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천우진이 말했다.
"나는 아니니까 다른 놈이 전욱의 축복을 받았겠군."
"누굴까?"
"일단 복귀하자."
파앗
나는 천우진과 함께 장령곡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장령곡으로 돌아오자 기이한 은빛이 중앙에서 맴돌고 있는게 보였다. 마치 나풀거리는 듯한 은광(銀光)이 흘러나오는데 신령스럽기까지 했다.
키이이잉
가까이 가 보니, 그 곳에는 맑은 은령(銀靈)처럼 빛을 뿜어내는 거대한 구미호(九尾狐)가 허공에 떠 있었다. 그리고 구미호의 옆에는 망량과 진소청, 검마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호!"
보나마나 저건 미호였다.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으로 되돌아간 것이리라. 내가 소리를 지르며 가까이 다가가자 망량이 나를 제지했다.
"백웅. 느껴지지 않소?"
내가 망량을 힐끔 보자 그가 말했다.
"미호의 영기가 급격히 증폭하고 있소. 건드리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일단 지켜봅시다."
"갑자기 저렇게 된 거요?"
"그렇소. 하지만 미호의 기가 안정되어 있어서 저게 나쁜 현상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관찰하고 있던 중이오."
그러자 옆에 있던 천우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 전욱의 가호를 저 구미호가 받았군."
"무슨 소리인가 사제?"
"자세한 건 이 놈한테 들으시오."
나는 동료들에게 흑요석을 통해서 봉래산의 기억을 공유했다. 그리고 망량이 깜짝 놀란 듯 말했다.
"세상에... 삼황오제가 직접 가호를 내릴줄은."
옆에서 듣고 있던 검마가 불쑥 말했다.
"그런데 왜 하필 미호지?"
"......"
그건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분명 전욱은 내가 창힐탐색의 임무를 하는데 있어서 힘이 필요할거라 생각하고 동료를 강화시켜준 것이다. 그런데 왜 미호에게 그 힘을 줬는지 마땅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곰곰히 생각하던 망량이 말했다.
"내 추측은 이렇소."
사람들의 시선이 망량에게 쏠리자 그가 말했다.
"아마, 전욱이 백웅에게 직접 힘을 주지 않은 이유는 백웅이 사도이기 때문일 것이오."
"무슨 소리요 망량?"
"칠요의 해방을 원하고 주도하는 건 현재 바로 백웅 당신이오. 그리고 그 때문에 삼황오제가 모여서 당신을 견제하기로 합의한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전욱은 속마음이 어떻든간에 여와나 다른 삼황오제의 눈치가 보여서 사건의 중심에 있는 당신에게 직접 강력한 힘을 줄 수는 없는 거요. 그런 힘을 얻었다가는 당신이 더 적극적으로 칠요부터 해방하려 들게 뻔하니까."
"아!"
"하지만 전욱도 바보가 아니니까 이대로라면 창힐의 행적을 찾기는 커녕 신적 존재에게 살해당하기 십상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소. 그래서 당신의 동료에게 힘을 줘서 임무수행에
필요한 수준을 맞추고자 한 거겠지."
그럴듯하다.
나는 망량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다가 말했다.
"아직 그 동료가 미호인 이유는 말하지 않았소."
"그건 아마, 그녀가 천계 출신이기 때문일 거요."
"......?"
"미호의 출생은 천계이며, 그녀는 원래 사도 달기의 꼬리 중 하나였소. 동시에 쫓겨나기는 했지만 서왕모(西王母)의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받던 존재이기도 하지. 그렇기에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중에서 삼황오제 입장에서는 가장 가깝게 느껴졌을 거요."
나는 망량의 말을 듣고 좌중을 둘러봤다.
확실히 진소청이나 검마는 무의 천재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하지만 뭔가 납득이 되지 않아서 말했다.
"그럼 망량 당신이나 천우진은? 천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잖소."
"나나 사제는 망량선사의 제자잖소. 삼황오제는 망량선사같은 강력한 신격과 연이 닿아있는 자에게 자신의 힘을 주고싶지 않을 거요."
"아, 그렇군."
"아무튼 그렇게 본다면, 지금 미호의 몸에 감돌고 있는 건 전욱의 음신지력(陰神之力)이라는 말이 되겠구려."
망량은 부러운 눈빛으로 은광을 내는 미호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얼마나 강해질지 짐작도 되지 않소."
나는 미호를 지켜보았다. 확실히 그저 강한 대요괴 정도라고 생각했던 미호의 요력이 예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위압감 마저 느껴질 정도이니 미호가 강해지고 있다는 건 틀림없었다.
"언제까지 저렇게 있는 거지?"
"음신지력의 힘을 흡수하는 중이라면, 아직까지 한참 남았으리라 예상되오."
"흠..."
"그 동안에 우리는 할 일을 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를 미호 앞에서 의논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의견을 낸 것은 검마였다.
"백웅. 삼황오제의 뜻이 그렇다면 지금은 따를 수밖에 없네. 칠요는 놔두고 창힐의 화신을 찾는데 전력을 다하는게 좋겠네."
"혈영곡이나 백련교를 놔두자는 말입니까?"
"가만 안 놔두면 어쩔건가? 어차피 토벌할 힘도 없는데."
"......"
"다행히 십이율주가 이 본거지에 방어벽을 설치하고 갔네. [옛 지배자]가 직접 쳐들어오는 건 방지할 수 있지. 차라리 이렇게 된거 천하의 정세가 흐르는 걸 지켜보면서 창힐이나 찾아보세."
맞는 말이다. 그렇다기 보다는 지금 상황에서 그 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분위기를 살피던
망량이 말했다.
"백웅. 우선 십이율주가 월요를 해방했는지부터 알아봅시다."
파앗
나는 망량의 말대로 무사시를 대동하고 강화도 마니산으로 갔다. 그러자 그 섬이 온통 뒤집어엎어져서 폐허가 되어 있고, 그 잔해에서 두 명의 승려가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서산대사! 유정!'
모를 리가 없다. 그들은 십이율주에 의해 월요 봉인지를 지키는 역할로 임명된 자들인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십이율주 백웅입니다."
그러자 서산대사는 자연스럽게 내게 인사했다.
"들은 대로군. 반갑소. 빈승은 서산이라 하오."
공동 십이율주가 생겼으며, 그게 나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모양이다. 나는 서산대사에게 물었다.
"하은천이 이곳에서 월요를 가져갔습니까?"
"......"
서산대사는 어쩐지 언짢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그리 이야기하고싶지 않구려."
"대사. 나는 십이율주로서 이곳에 있었던 일을 들을 권한이 있습니다."
"후! 권한이나 권위의 문제가 아니라..."
그는 답답한 듯 말했으나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서산대사의 제자, 유정이 말했다.
"하은천이 여태껏 이 첨성단을 우리에게 맡겼으면서도 월요의 봉인지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불현듯 나타나 수호자와 싸워서 승리하고 월요를 가져갔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이에 큰 배신감을 느끼고 계십니다."
"유정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거라."
"새로운 십이율주여. 하은천은 음험한 자이니 그가 섣부른 사단을 내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유정은 순해보이는 자였으나 강단이 있었다.
' 하긴 하은천이 속였으니 배신감을 느낄만도 하지.'
아무리 칠요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이런 외딴곳에 수련자를 가둬놓고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건 심한 짓이었다. 나는 씁쓸한 눈으로 그들을 보다가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그가 월요의 수호자와 어떻게 싸웠는지를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알았소."
서산대사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말했다.
"그는 월요의 제단에 피를 흘려서 수호자를 소환한 후, 은하구절편으로 잠시동안 격렬하게 싸웠소. 그러다가 웬 언월도를 소환해서 실타래를 풀었고, 그 매듭이 풀리는 순간 수호자의 힘이 급격히 약해지며 시공의 저편으로 강제 소환되는 모습이었소."
"언월도..."
"싸움은 빠르게 끝났소. 길어도 반 시진..."
나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 그래, 자령언월도야!'
낙양 암경무투대회의 우승상품이자 현재는 십이율주의 소유가 되어있는 마도구(魔道具)! 내 19번째 전생에서 백련교주가 그 자령언월도의 능력을 사용해서 강대한 사도 달기를 되돌려보낸 전적이 있었다. 제대로 사용법을 알고 있는 십이율주가 자령언월도를 써서 수호자를 퇴치하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불확실한 게 있다.
도대체 자령언월도의 정체가 무엇인가?
아무리 마도구라지만 사도나 수호자같은 마왕급 존재를 되돌려보낼 정도의 힘을 감추고 있다는 것인가?
정확한 능력은?
'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19번째 전생에서 교주에게 좀 더 확실히 자령언월도에 대해서 물어볼걸...'
나는 내심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대신에 서산대사에게 자세히 캐물었다.
"그건 자령언월도라고 하는 마도구입니다. 아마 매듭을 풀어서 위력을 발휘했을 텐데, 그가 총 몇 개의 실타래를 풀었습니까?"
"흐음... 잘 생각이 안 나는데..."
서산대사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유정이 말했다.
"제가 봤습니다. 네 타래였습니다."
"네 타래라..."
과거 백련교주가 달기를 퇴치할 때는 9개의 타래 중 5개를 썼다. 그리고 이번에 월요의 수호자를 퇴치할 때는 4타래를 쓴 것이다. 달기와 월요의 수호자 사이의 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나는 의혹이 생겼다.
' 뭐지? 어떻게 십이율주는 마왕급 존재의 힘을 가늠할 수 있는 거지?'
자령언월도의 원리는 간단해 보였다. 총 9개의 타래 중에 원하는 숫자의 타래를 풀면, 그에 비례해서 위력이 강해진다. 하지만 이 원리는 참 오묘한 것이, 만일에 적게 풀면 위력이 약해서 봉인을 할 수 없고 너무 많이 풀면 아깝다.
[네 타래가 남았으니 나머지 다섯 타래를 채우는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걸리겠구나. 그러나 사도를 물리친 댓가로는 아주 싸군.]
그래, 백련교주는 자령언월도를 사용해서 달기를 물리쳤을 때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자령언월도의 실타래는 한번 풀어버리면 다시 묶을때까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걸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낭비할 수 없을 텐데 어떻게 해서 상대방의 힘을 가늠해서 정확한 봉인을 할 수 있는 걸까?
내가 고민하는 이유는 십이율주가 딱 상대방의 힘과 위격에 맞춰서 자령언월도를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현 시점에서 십이율주 하은천은 결코 월요를 얻는 일을 포기할수도 없고 실패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보통은 안전을 추구하기 위해서 조금 낭비한다 할지라도 많은 실타래를 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마치 이 정도면 될거라고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딱 맞는 수준의 봉인을 가했다는 게 너무 마음에 걸렸다.
혹시... 나는 십이율주의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건가?
내가 고민하고 있자 서산대사가 말했다.
"하은천이 말했소. 만일 그대가 이곳에 찾아온다면 신시로 오라고..."
"대사. 이제 이 강화도를 버리고 떠나실 겁니까?"
"그럴 생각이오. 천지가 복잡하고 두려우니, 육지에서 많은 중생들을 구해야 할 것이오."
"부디 건승하시길..."
파앗
나는 서산대사와 헤어져서 곧장 신시로 갔다. 그리고 구름다리를 타고 하은천의 본거지로 들어갔는데, 하은천은 커다란 의자에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백웅."
"월요를 해방했소?"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하은천이 피식 웃는 듯 했다.
"아니. 못 했어."
"왜 그렇소?"
"그러는 너도 수요를 해방한 것 같진 않은데?"
"......"
"뭐 그런거야. 내가 근자에 듣기로는 삼황오제 쪽이 슬슬 현세에 관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더군. 그렇다면 섣불리 해방을 요청하는 건 안될 일이야. 아무리 나라고 해도 몸을 사려야 하니 당분간은 월요를 가지고만 있을 생각이다."
마치 모든 걸 알고있는 듯한 말투다. 나는 하은천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알 수 없어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 위험해보이지는 않지만 섣불리 그에게 말려들면 큰 손해를 볼 것만 같은 직감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본격적인 용건을 꺼냈다.
"십이율주. 당신은 어떻게 천계의 정보를 알 수 있는 거요? 그쪽 정보를 알 수 없다면 당신처럼 딱 맞춰서 행동할 수는 없소."
"글쎄다~ 내가 그걸 알려줄 이유가 있나?"
"나 또한 공동 십이율주요."
"하하. 안 되지. 왜냐하면 내가 천계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건 십이율주라서가 아니니까 말이야. 이건 내 개인적인 능력이야."
나는 그가 거부하자 골이 나서 으르렁거렸다.
"내게 전면적으로 협력해주기로 해놓고 이러기요?"
"하하! 미안하지만 이건 안되겠어. 이건 내 목숨과 직결되어 있거든. 네가 나라면 삼황오제의 사도에게 그런 비밀을 알려줄 수 있겠어?"
껄껄 웃은 하은천이 말을 이었다.
"용건이 없으면 이만 가줬으면 해. 나도 천계의 발호를 대비해서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거든."
"당신은 마왕과 혈영곡은 걱정되지 않으시오?"
"후후후! 재밌는 말을 하는군. 내가 왜 그걸 걱정하지?"
"놈들이 낙양의 대결계를 깨면..."
그러자 하은천이 호들갑을 떨었다.
"허억! 정말 큰일이군. 무서워. 그런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삼황오제의 사도가 짠하고 나타나서 해결해주지 않을까?"
"......"
이 새끼 나를 놀리는거냐!
나는 속으로 열받았지만 하은천이 금세 너스레를 떨었다.
"뭐 농담이고 마왕은 별로 걱정할 필요 없지 않을까?"
"중원무림의 문파들이 학살당할 거요. 혈영곡은 지금 정사파를 가리지 않고 습격하고 있..."
내가 혈영곡에 대해서 입수한 정보를 말하자 하은천은 팔짱을 꼈다.
"그~러~니~까~ 그건 너네 문제라고. 내가 왜 이역만리의 칼쓰는 깡패들이 뒈지는 문제까지 걱정해줘야 하냐? 내가 그렇게 오지랖이 넓어 보여?"
"윽..."
"설령 민간인이 다치거나 죽는다 해도 내가 알 바는 아냐. 어쨌든 너희 지나족은 삼황오제의 가호를 받는 한 멸망할 일은 절대 없는데다가, 인구수가 워낙 많으니 한 백만 명쯤 뒈져도 티도 안 나잖아? 식량문제도 해결되겠네."
"...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하하하, 농담이지~ 농담."
금세 웃어대지만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십이율주가 말했다.
"네게 전면적으로 협력해줄 순 있어. 하지만 정말로 그들과 정면충돌할 생각인가? 그런 생각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네가 진심으로 그들과 싸우겠다면야 협력해 주겠지만."
"......"
나는 십이율주를 떠보는게 무의미하단 걸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소. 지금 현재는 그들을 감당할 힘이 없소."
"나도 마찬가지야. 지금 덤비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 어리석은 짓이야. 제대로 토벌할 준비가 될 때나 내게 연락해 줘. 단독으로 움직이는 건 사양이니까. 알겠지?"
"......"
"뭔가 벌어지기도 전에 제압할 수 있는 건 압도적인 힘을 가진 놈이나 할 수 있는 전략이야. 우린 그게 아니니까 좀 더 일의 경과를 지켜보는 게 어때? 어쩌면 두 놈이 공멸(公滅)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그게 아니면?"
십이율주는 왠지 인형탈 뒤에서 웃는 듯 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한 가지 조언해주지. 마왕이든 [옛 지배자]든, 그들이 원하는 건 우리 생각보다 훨씬 구체적인 것일수도 있어... 그들은 이 땅에서 뭔가를 찾고있는 것 같아."
스스스
십이율주의 신형이 사라졌다. 나와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으므로, 나는 별 수 없이 신시를 떠나서 장령곡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어쨌든 지금은 은인자중하자는 합의를 본 거군.'
본래는 마왕을 쓰러뜨리든 아니면 이이제이를 시도하든 할 생각이었지만, 현실적인 한계를 직면했기 때문에 하은천과 나는 힘을 비축하고 관망하기로 한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현실적인 선택이다.
장령곡에 돌아오고도 꼬박 이틀 가까이 지나서야 미호의 상태에 변화가 생겼다.
파아앗!
가공할 은광이 터져나옴과 동시에 원래 몸체보다 세 배는 커다란 구미호가 고개를 들었다. 미호는 자신의 영력을 갈무리하려는 듯 꼬리에 힘을 집중했는데, 이윽고 꼬리 세 개가 영체처럼 변해서 불꽃으로 일렁였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또다시 두 개의 꼬리가 영체로 변했는데 오미(五尾)가 흔들리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쿠구구구...
우우웅
힘이 공명하면서 또 하나의 꼬리가 나왔다. 이로써 육미(六尾)다.
"......!!"
나는 미호의 모습이 잠시 흐릿해지며 기포덩어리같은 게 맴도는 느낌이 들자 깜짝 놀랐다. 미호가 제대로 눈에 비치지 않았다. 분명히 눈 앞에 있는데 형태를 명확히 관찰하기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금모옥면(金毛玉面)!
' 이, 이 현상은?'
틀림없다.
달기를 마주쳤을 때의 그 느낌이다.
[검선이여. 저 하얀 거품덩어리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거품덩어리가 아니다. 너무나 강력한 요력(妖力)을 지니고 있어서 격하(格下)의 존재는 그 모습을 관찰하는 것조차 허용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예전에 여동빈이 설명해줬던 현상.
그것은 너무나 강대한 요력을 보유한 존재가 현세에 나타날 경우 힘이 미치지 못하는 자는 그 대요괴의 실체를 관찰할수도 없다는 거였다. 물론 지금 미호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미호의 몸 주변에 흔들리는 아지랑이는 갈수록 짙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설마 미호의 요력이 달기에 근접하고 있다는 뜻인가?
파아앗
미호가 서서히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반인반요의 모습에서 좀 더 인간형에 가까워진 듯 했으나 훨씬 날카롭고 아름다운 형태였으며 은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또한 미호의 꼬리가 여섯 개로 변해 있었다.
미호는 내게 반가운 듯 말했다.
"백웅! 내가 더 강해졌느니라."
"미... 미호. 어떻게 된 거야? 무슨 변신을..."
내가 미호에게 묻자 미호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모르겠다. 하지만 꿈을 꾸는 것 같았고, 꿈을 꾸는 와중에 서왕모께서 내게 말씀하셨어.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거라고."
"서왕모가?"
"아하하."
미호는 기분이 너무 좋은지 깡총대다가 나를 확 안았다. 내가 당황해서 미호를 내려다보자 그녀가 깔깔거렸다.
"백웅. 이제부턴 내가 널 지켜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