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09 암천향(暗天鄕) =========================================================================
파앗
최치원이 가르쳐준 곳은 탐라도에 있는 칠성단(七星檀)이었다. 이 칠성단은 신기하게도 제단 주위에 일곱 개의 불빛이 일정한 궤도로 떠다니고 있었고, 나는 예전에 들렀던 탐라도의 끝자락에서부터 칠성단의 위치를 찾아서 반 시진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 최치원이 말해준 정보가 떠올랐다.
[반도의 남쪽에 있는 섬, 탐라도는 옛적에 탐라국이었으며 독립된 왕국이었소. 그리고 탐라국의 국왕은 성주(星主)라고 불렸으며, 고대 탐라의 초대국왕이 칠성(七星)의 성좌를 타고나서 성좌의 힘을 쓸 수 있었다고 하오.]
저벅
나는 제단으로 한 걸음을 옮겼다.
[탐라성주는 대대로 강한 영력을 타고나서 칠성단에 자신의 힘을 축적하는 의식을 치렀소. 그리고 축적된 칠성단의 영력은 전설의 삼신산(三神山)으로 가는 통로를 열어주고, 주변의 해로(海路)를 보여주며, 어업을 안정시켜서 풍요를 이끌어냈지. 진시황에게서 불로불사의 비밀을 찾으라는 명령을 들은 서복은 이 탐라성주의 전설에 주목했던 거요.]
[탐라성주가 운영하는 칠성단이 삼신산으로 가는 통로를 열어준다는 거군.]
[ 그렇소. 당연히 서복은 봉래산에 가기 위해서 이 반도의 남쪽 섬에 올 수밖에 없었겠지. 그리고 서복이 2천 명의 동남동녀와 보물을 탐라성주에게 바치며 칠성단을 열어달라고 교섭했고, 그는 마침내 삼신산 중 하나인 봉래산으로 갈 수 있었을 거요. 하지만 그가 봉래산에 도착해서 본 것은 그야말로 지옥...]
최치원이 꺼지듯 한숨을 쉬었다.
[생전의 나는 여기까지 행적을 좇던 도중 칠성단의 유적에서 서복의 수기를 발견했소. 서복이 본 봉래도의 지옥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지. 심지어 서복이 봉래산에서 탈출할 때 번져나온 마기(魔氣)때문에 탐라도에 재앙이 닥쳐왔었다 하오. 그래서 탐라도 사람들은 대륙사람들을 매우 싫어하는 경향이 있소.]
[으음...]
[칠성단의 위치와 구동방법을 알려주겠소. 하지만 구동에는 매우 강한 영력이 필요하니 충분한 준비를 하기 바라오.]
[탐라성주에게 부탁할 순 없겠소?]
내 질문에 최치원이 쓴 웃음을 지었다.
[탐라도는 내가 죽은 후 고려에 복속되었고 이후 속령이 된지 수백년이 흘렀소. 그 와중에 탐라성주는 권력을 잃고 핏줄도 실종되었지. 현 시점에서 정통한 탐라성주가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니 힘으로 칠성단을 여는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래서 나는 충분히 힘을 가지고 왔다.
나는 회상을 끝내며 내 옆에 있던 천우진에게 말했다.
"천우진. 어때?"
천우진은 홀린듯 사방에 펼쳐져있는 쐐기문양이나 기괴한 언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뭔가를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듯 했다.
"... 놀랍군. 이건 성좌의 힘이 담긴 유적이야. 굉장히 정밀한 술법체계로 안정되어 있어. 언제 만들어진 거지?"
"초대 성주가 만든 거 아니겠냐."
"아냐. 이건 인간이 만든 유적이 아니다. 어쩌면 탐라국의 초대성주는..."
그렇게 중얼거린 천우진은 칠성단의 주변 벽을 쓸며 말을 이었다.
"통로를 열 수는 있을 것 같다."
"좋았어."
우우우우
천우진이 힘을 끌어올리며 제단 전체에 영기를 돋우었다. 한참동안 웅얼거리며 주문을 외우던 천우진이 전방으로 손을 뻗으며 외쳤다.
"급급여율령!"
파앗
나는 빛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색다른 장소에 서 있는 걸 알아챘다.
'금오도?'
언뜻 금오도에 도착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엄청나게 높은 절벽의 끝자락에 내가 서 있었고, 아래에는 운해(雲海)가 펼쳐져 있으며 기암괴석이 사방에 가득했다. 하지만 이윽고 사방에서 엄습해오는 강력한 마기에 나는 몸을 움찔했다.
"음... 내려가 볼까."
나는 혹시나하는 마음에 일단 투명해지는 술수를 사용해서 천천히 만장단애를 타고 내려갔다. 그렇게 대략 사십여 장을 쭉 아래로 내려오자 서서히 지상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운해 아래의 세상은 시커먼 기운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지상에 도착하자 바닥이 질척거리는 늪처럼 되어있으며 끔찍한 악취를 내뿜는 독연(毒淵)이 여기저기에 흐르는 게 보였다.
꾸으으아아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괴상하게 생긴, 팔이 다섯 개 달리고 꼬리가 두 개인 짐승이 번들거리는 피부를 들썩이며 돌아다니는 게 보인다. 늪지대 여기저기에 비슷한 짐승의 등짝이 수면 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게 보였다. 덩치가 아주 커서 이 장은 될 법한 거대마물이었기에 나는 이 곳이 위험지대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 일단 여기를 벗어나자.'
저 괴물을 처치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나는 멸혼보를 응용해서 늪지대를 벗어났다. 그리고 혹시나 선인이나 지성있는 존재가 있는지를 찾아서 봉래도를 정처없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나는 고대양식의 거대한 도가건물을 멀리서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멀리서 볼 때는 기풍있는 외관이었는데 접근하면 할수록 건물 여기저기에 괴이한 점액이 말라붙어 있고 심상치 않은 사악한 기운이 맴돌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건물 내부로 진입했을 때, 나는 목불인견의 참상에 입을 벌리고 말았다.
"......!!"
여기저기에 선인(仙人)으로 보이는 존재들이 기둥에 묶여서 신음을 흘리거나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중 몇명의 피부와 몸뚱이에는 꿈틀거리며 알이 박혀 있었으며 벌레같은 게 돌아다니는게 보였다. 또한 근처에는 커다란 알이 모인 곳이 있었고 그 알에서 깨어난 듯한 조그마한 어인(魚人)이 기어다니는 듯 했다.
'해신의 일족... 새끼군.'
그렇다면 이 곳은 부화장이다. 나는 개중 여성으로 보이는 선인의 배가 불러있는 걸 발견하자 인상을 찌푸렸다.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해신의 일족에게 학대당하며 오랫동안 고통받아 왔으리라. 원래는 매우 아름다운 외모였을 듯 하지만 오랜 학대동안에 그녀는 미쳐버린 듯 텅빈 눈으로 아, 아 하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어떤 일이 그동안 있었는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해신이 봉래도를 침략해서 이 곳을 부화장 겸 노예를 학대하는 장소로 쓴 듯 하다. 나는 선인들이 불사의 존재이기에 죽지도 못하고 수백 년동안 고통받아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마 나라도 이런 식으로 수백 년을 지내면 미쳐버릴 것이리라.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검을 휘둘러서 근처에 있는 어인족 새끼들을 베었다.
슈콰콱
끼익! 끼이익
십여 마리 가량의 새끼들이 순식간에 죽어나갔다. 그리고 나는 알덩이들을 모조리 발로 깨부숴서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새끼처리가 끝나자 나는 선인들을 묶고 있는 끈끈한 점액이나 포승을 모조리 잘라내어서 선인들을 구해내었다.
"......."
"이보시오. 내 말 들리시오?"
"......"
하지만 구해낸 선인들은 하나같이 텅빈 눈으로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미쳐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구해낸 스무 명 가량의 선인을 모아놓고 대화를 계속 시도했지만 반응이 없자 한숨을 쉬며 뒤로 돌아섰다.
그 때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뒤... 뒤쪽... 청령관(靑靈館)... 도주(島主)..."
나이 있어 보이는 선인이 미쳐버린 와중에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 확실히 이 건물 뒤편에 또 하나의 건물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나는 그 선인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으나 본능적으로 말한 것인 듯 더 이상은 아무런 이성적인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콰앙
나는 이윽고 청령관이라고 하는 뒤편 건물의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어두운 도관의 가장 안쪽에 뭔가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안쪽으로 걸어들어가는 동안에 백골이 된 어인의 시체가 많이 보였다. 죽은 지 오래된 듯 했다. 최근에 죽은 어인도 많이 있어서 시체로 이루어진 복도를 걷는 느낌이었다. 잠시 걷자 어두운 내부에 수천 장의 부적이 둥둥 떠다니는 게 보였다.
파지지직
파지지지직!!
내가 근처에 오자마자 엄청난 뇌력(雷力)이 발산하며 부적 하나하나에서 공격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그 뇌전을 재빨리 회피했는데, 보통 실력으로는 피할수도 막을수도 없으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한두 번 피한 게 끝이 아닌지 이윽고 뇌전은 위력을 배가시켜서 계속 날아들었다.
콰과광!
콰광!
'자동방어결계인가?'
아무래도 바깥에 쌓여있던 어인들의 시체를 보면 비단 이 근처만이 아니라 침입자를 완전섬멸할 때까지 뇌전을 뿜어내는 결계로 보였다. 그것도 수백 년간 어인족들이 이곳을 공략하지 못한 걸 보면 아마 저 결계의 술사는 굉장한 실력으로 짐작되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는 일.
나는 결계 안쪽을 향해 화요를 겨누며 크게 내공을 담은 사자후를 외쳤다.
[나는 삼황오제 전욱의 사도, 백웅! 봉래도의 생존자를 구하려 왔으니 나를 공격하지 마시오.]
꽈릉!
하지만 그 대답으로 상급술수에 버금가는 뇌전의 벽이 내게로 날아들었다. 나는 급히 멸혼보로 피해냈으나, 멸혼보로도 피하는 게 아슬아슬할 정도로 크고 빠른 공격이었다. 나는 갈수록 공격이 거세지는 걸 깨닫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 이러다가 여기서 죽겠군.'
아직도 결계의 뇌전은 강해질 여지가 커 보인다. 괜히 어인족이 이 결계를 수백년간 못 뚫은 게 아닐 것이리라. 나는 결계를 뚫는 모험을 할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후퇴할지 갈피를 못 잡아서 끙끙거렸다.
그 때였다.
[전욱의 사도라고? 정말인가?]
중후한 영언이 들려왔다. 나는 결계의 주인이 회신을 보낸 걸 깨닫고 기뻐하며 대답했다.
[그렇소.]
[나는 봉래도의 도주인 이흥패(李興?)다. 삼황오제의 사도가 이제서야 우리를 구원하러 왔단 말인가?]
그 말에는 불신과 경악이 묻어 있었다. 나는 이흥패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지선 망량의 기억 속에서 해답을 찾아내고 경악해서 반문했다.
[이흥패라면, 당신이 구룡도의 사성(四聖)이란 말이오?]
[봉신대전 당시에는 그랬다. 이후 연등도인의 제자가 되었고 봉래도주로 발령받았다.]
구룡도의 사성 이흥패!
그는 봉신대전 당시에 뛰어난 무명(武名)을 드날렸던 선인이었으며 현 시점에서는 대라신선이었다. 신마가 날뛰는 봉신대전은 엄청난 규모의 전쟁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뛰어난 전공을 세울 정도의 절교(絶敎) 출신 선인이었다면, 지금의 실력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리라. 봉래도주 이흥패라면 어지간한 투선 못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가 분명했다.
나는 이흥패에게 물었다.
[바깥세상의 동정을 알고 있소? 해신이 죽어 틈이 생긴지라 봉래도를 구원하러 왔소.]
[해, 해신이 죽었다고... [옛 지배자]가?]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렇게 버젓이 쳐들어올 수 있었겠소?]
봉래도주 이흥패는 믿기지 않는 듯 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사도여. 이리로 오라. 결계를 잠시 해제하겠다.]
우웅
공기가 떨리더니 허공에 떠 있던 부적에 감돌던 뇌기가 꺼졌다.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부적을 쳐다보며 청령관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환하게 밝혀진 안쪽 광경을 보자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거의 해골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봉래도주 이흥패의 현재 모습은 앙상말라 있었고 뼈에 가죽이 달라붙은 듯한 모양새였다. 그가 선인이라서 물질적 육체보다는 영체에 가깝다는 걸 생각하면 경악스러운 외견이었다. 차라리 즉신불에 가까웠다.
내가 경악한 눈으로 이흥패를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 해신에 저항해서 내 모든 힘을 발휘해서 결계를 펼쳤으나, 아무리 내가 구룡도의 사성이라 해도 해신에 맞설 결계를 펼치려면 소멸을 각오해야 하는 것... 나는 이미 틀린 몸이오.]
그는 내게 경어를 썼다. 사도라는 걸 인정하고 나를 존중하는 것이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겁니까?"
[그렇소. 난 이 결계에 모든 걸 바쳤소. 결계를 해제하는 순간 산산히 부숴져 영멸할 것.]
"으음..."
[사도여. 어떤 일이 바깥에서 벌어졌는지 내게 알려 주시오.]
나는 해신을 토벌한 경위를 이야기해 주었다. 이흥패는 그 말을 듣고 생각하더니 말했다.
[부탁이 있소. 나는 몰라도 나머지 봉래도의 선인들을 구출해서 천계에 데려다 주시오.]
"그들은 오랜 학대와 고문 때문에 모두 미쳐버렸습니다."
[구천현녀(九天玄女)라면 그들을 치유하여 구원할 수 있을 터... 부탁이오.]
"......"
나는 착잡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원래라면 신비한 봉래도의 도주로서 대라신선의 권능을 맘껏 누려야 할 봉신대전의 영웅이 이런 참혹한 꼴로 소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과거 해신이 얼마나 잔인하게 깽판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삼신산은 봉래도 뿐만이 아니라 영주산과 방장산도 있는데, 설마 그곳도..."
[그건 모르겠소. 해신과 그의 일족은 불시에 쳐들어왔소. 나는 바깥일을 전혀 모르오.]
"그렇습니까."
[사도여. 그대는 단순히 우리를 구하러 온 것만은 아닌 것 같군. 원하는 게 무엇이오?]
나는 봉래도주 이흥패의 질문에 대답했다.
"오거천문으로 가서 제 군주를 알현하려 합니다."
[오거천문의 입구가 봉래도에 있다는 걸 용케 알았군...]
"어디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알았소. 그 장소는...]
이흥패는 오거천문이 있는 장소를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두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반황주(拌黃珠)를 가져가시오.]
"보패를..."
[어차피 나는 소멸할 몸... 해신에게 보패를 빼앗기기 싫다는 오기로 버티고 있었소. 그대가 유용하게 써 주기를 바라오.]
"알겠습니다."
나는 봉래도주 이흥패에게서 반황주를 받아들었다.
파사사삿
그 순간, 이흥패의 해골같은 몸뚱이가 모래처럼 변해서 무너져내렸고 사방에 가득하던 수천 개의 부적이 힘을 잃고 떨어져 내렸다. 그는 보패 반황주의 힘과 대라신선의 힘을 함께 써서 이 결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 가시오."
나는 이흥패의 잔해를 씁쓸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척 봐도 이 보패 반황주는 봉신대전때부터 활약했으며, 구룡도 사성의 명성을 만들어낸 강대한 보패이다. 이런 반황주를 가지고도 해신의 손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밖에 할 수 없다니!
'어쨌든 보패를 얻었어. 이걸 유용하게 쓰자.'
나는 선인들을 목갑에 집어넣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넓은 봉래도를 지나쳤는데, 여기저기에 어인들이 말라죽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내가 딱히 싸우려 들지 않아도 놈들이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하는 기색이었다.
끼익 끼익
어인들이 나를 발견하자 삼지창이나 장병기를 들고 쫓아오려는 기색이었으나 제풀에 지쳐 그만둘 정도였다. 어인족의 선천적인 신체능력이 인간보다 뛰어나다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지금의 놈들은 약해져 있었다.
'물고기가 물 밖에서 말라죽어가는 것 같군.'
하지만 그럴만도 할 것이다. 이 봉래도는 원래 선인들이 사는 이계였는데 해신이 자신의 마력으로 억지로 어인족이 살기 좋도록 바꿔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 해신이 죽어가면서 그의 마력이 사라지니 봉래도가 지니고 있던 원래의 선기(仙氣)가 가득차며 어인족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봉래도의 어인족들은 내가 손을 안 써도 알아서 전멸할 것으로 보였다.
타닷
나는 이윽고 봉래도의 가장 북쪽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곳은 다른 장소와는 달리 주변에 어인족의 기척이나 끔찍한 늪지대, 물기 따위가 전혀 없었다. 대신에 강력한 귀기(鬼氣)가 감돌고 있는 오 장 크기의 거대한 관문이 세워져 있었다.
이것이 만귀전 오거천문(吳?天門)의 입구!
여기로 들어가면 열이 관리하는 일월지가 나올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긴장하며 천천히 오거천문을 밀었다.
쿠구구궁...
거대한 천문이었지만 마치 공기를 밀어내듯 가볍게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을 다 열었을 때, 반대편에는 익숙한 모습이 나를 마주 쳐다보고 있었다.
[ 의외군요. 그대는 어찌하여 이곳에 왔습니까?]
"열(?)."
삼황오제 전욱의 현손이자 그의 명을 받드는 만귀전의 고위관리, 또한 오거천문의 관리자인 열이 시꺼먼 암흑의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인간형을 띄고는 있었으나 살이나 뼈가 없었고 오로지 어둠으로만 이루어진 존재인 열은 귀기어린 기세로 내게 말했다.
[ 5년간 당신에게 권능을 가르치며 말했을 겁니다. 그대에게 사도의 권능을 위임하지만, 결코 함부로 만귀전의 위엄을 손상하거나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헌데 굳이 봉래산까지 찾아와서 오거천문의 입구를 열다니 무슨 짓입니까? 그대가 사도가 아니라 필멸자였다면 묻지도 않고 이 자리에서 소멸시켰을 겁니다.]
"그 전에 묻고 싶은게 있는데, 왜 전욱님은 저 해신족 놈들을 가만 놔둔거요? 문 앞에서 알짱거리는 놈들을..."
[ 천계 선인놈들이 어찌되든 우리 만귀전이 알 바가 아닙니다. 또한 해신도 주군을 두려워해서 감히 이쪽으로는 범접하지 못했지요. 서로 무시하고 있던 관계입니다.]
"그렇군."
[ 사도 백웅이여. 정녕 그 문을 넘어 만귀전으로 올 생각입니까?]
열이 나를 노려보는 듯 했다. 그는 분명히 적의를 품고 있었다.
고오오오
나는 움찔했다. 과거 오거천문에서 수련받을때는 잘 몰랐는데, 현세의 몸을 갖고 그를 마주하자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열 또한 신화시대의 강자이며 신의 혈족, 그렇기에 엄청난 힘을 지닌 존재였다.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나는 전욱님을 알현해야만 하오. 꼭 여쭈고 싶은 게 있소."
[ 그럼 제게 말씀하십시오. 주군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왜 직접 알현하지 못하게 하는 거요? 날 막는 것처럼 보이는군."
[ 그대가 아무리 사도라고 해도 만귀전을 제집처럼 들락날락하는 건 안될 일. 용건을 말하고 가 주십시오.]
뭔가 이상하다.
열은 뭔가 이유가 있어서 내가 만귀전으로 들어가는 걸 막는것으로 보였다.
' 제길... 하지만 추궁할수도 없고...'
어찌됐든간에 열은 팽조나 창힐과 동급 이상의 존재다. 중급 신격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쩌면 열이 달기나 마왕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 열과 정면승부해서 이기는 건 지금으로서는 절대 무리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열에게 말했다.
"얼마 전 봉선의식을 치르는데 이런 괴사가 있었소..."
나는 내가 겪었던 뜻밖의 죽음에 대해서 말했다. 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잠시 기다리십시오.]
파앗
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잠시 후 내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말했다.
[ 주군께서 말씀하시길, 칠요의 추가 해방은 여와의 명으로 금지되었다 하십니다. 얼마 전에 발생한 불상사는 여와께서 진노하여 칠요를 해방하려고 봉선의식을 치르는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신 겁니다.]
"뭐, 뭐라고? 그게 정말이오?"
여기서 여와가 나온다고?
하긴 칠요의 해방에 매우 부정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는 여와라면 그럴만도 하다. 내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열의 말이 이어졌다.
[ 앞으로 필멸자의 봉선의식은 금지됩니다. 부디 그 점을 유념해 주십시오.]
"... 납득이 가지 않소."
[ 뭐가 말입니까?]
"지금 지상이 개판이란 건 전욱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소? 그렇다면 사도인 내가 더 큰 힘과 권능을 가져야 전욱의 위엄을 지킬 수 있지 않겠소! 왜 내가 칠요를 해방하는 걸 금지하는지 모르겠구려."
내가 항의하자 열이 담담하게 말했다.
[ 그 또한 주군께서 답변을 주셨습니다.]
"뭐라고 하셨소?"
[ 시킨 일이나 잘하라고 하셨습니다. 시킨 일은 지금 주어진 힘으로도 충분하고, 칠요의 해방은 도를 넘는 것이라 말씀하셨지요. 칠요해방은 이미 삼황오제 분들께서 협의하여 금지라고 정해놓은 상태입니다.]
"......."
시킨 일.
그건 분명히 창힐의 행적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창힐의 8화신인 팔부중의 행적까진 찾아냈지만 놈들의 실체를 알아내려면 지금의 힘으로는 틀림없이 부족하다!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외쳤다.
"부족하오! 이대로는 팔부중을 못 찾아낸단 말이오. 진짜라니까."
[ 징징거리는군요.]
"징징이라 봐도 좋소. 하지만 내게 힘을 줄 때까지 물러나지 않을 거요."
[ .......]
열은 말없이 다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그가 말했다.
[ 이제 되었으니 가십시오.]
"뭐가 되었단 말이오?"
열은 전에 없을 정도로 짜증스러워하는 어조로 말했다.
[ 너무 징징거리길래 주군께서 그대의 동료 중 하나에게 큰 힘을 주셨습니다. 이제 임무를 달성하기 전에 더는 찾아오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