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505화 (504/1,615)

00505  암천향(暗天鄕)  =========================================================================

파앗

나는 비등을 써서 한씨세가로 갔다. 권능을 써서 올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불안감 때문이었다. 또한 이 불안감은 열에게서 수련받은 5년 사이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기에 생긴 것이었다.

' 함부로 사도의 권능을 쓸 순 없지...'

나는 열에게서 오거천문에서 일월(日月)의 기운을 다스리며 시간의 흐름을 통찰하는 수련을 했었다. 열은 그 때 오거천문 앞에 정좌해서 기운을 모으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 오거천문은 제왕의 비처(秘處)이며 현세로 통하는 문이기에 누구도 함부로 올 수가 없었죠. 하지만 이 곳은 일월의 기운이 그 어떤 장소보다 강력하므로 빠르게 시간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시간의 힘을 다루게 되면 시간을 멈출 수도 있는거요?]

[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란 건 원래 필멸자들의 개념과 달리 현재, 과거, 미래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섞인 혼돈이야말로 시간이기 때문에 [멈춘다]는 개념은 틀렸습니다.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 ... 저기, 잘 이해가 안 되오만... 실제로 나는 시간을 멈추는 능력자를 본 적이 있소.]

내가 은발의 초상기인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열이 말했다.

[ 그건 시간이 멈춘 게 아닙니다. 멈춘 것처럼 보인 것 뿐이죠. 그 자의 특수능력입니다.]

[ 자기만 엄청 빠르게 움직였던 건가?]

[ 사도여. 그대는 시간의 본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면 입을 닫는게 만화(萬禍)를 면하는 대책입니다.]

[ ......]

어쩐지 고급스럽게 까인 것 같았다. 열의 말이 이어졌었다.

[ 그대가 이 곳에서 시간의 힘을 터득하고 나면 인간세상에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겠지요. 허나 그 모든 사용은 자숙(自肅)하며 필요한 곳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 어차피 회귀의 권능은 3번 제한이라고 하지 않았소?]

[ 다른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사용하는 모든 권능의 부채는 전욱께서 부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한 열은 왠지 이목구비 없는 암흑의 면상을 내게 들이대며 노려보는 듯 했다.

[ 명심해 두십시오. 능력의 사용이 도를 넘어서면 전욱께선 그대를 더 돌보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사도라고 하지만 삼황오제에 비하면 하찮은 존재! 자숙, 또 자숙하며 능력을 신중하게 사용하시길.]

[ 알았소.]

그 때의 기억이 선명하다.

말하자면 내가 현세에서 사용하는 사도의 권능이란 건 고스란히 빚처럼 되어서 전욱이 인과율을 부담하게끔 되어 있었다. 원래 인간세상에 허용되지 않는 수준의 강대한 능력이기에 인과율에 위배되지만 전욱의 신격이 그 부담을 대신 처리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권능을 너무 펑펑 쓰고 다닌다면 전욱이 나를 미워해서 그냥 내쳐버릴 위험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기억을 되찾은 후로 가능하면 권능을 아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순간이동이나 몸회복 정도는 큰 부담이 아닐테지만 쓸데없이 권능을 낭비하다가 필요할 때 못 쓰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육통이나 체력고갈은 그냥 자연회복으로,

간단한 이동은 웬만하면 모두 비등으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한씨세가에 도착하자 왠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폐허가 된건 아니었지만 가솔들의 숫자가 크게 줄어 있었고 화신류 무인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평소에 드글드글하던 빈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한씨세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최심부로 향했다. 그리고 늘 한백령이 있던 조그마한 정원으로 갔는데, 그 곳에는 한백령 대신에 한진성이 서 있었다. 내가 기척을 내자 한진성이 내 쪽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한진성. 한백령은 어찌되었소?"

한진성은 크게 괴로운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덕분에 백련교의 숙청은 피했으나 금제당하여 현재 용비천의 손에 있으십니다."

"......!!"

용비천?!

나는 일이 꼬인 걸 깨닫고 한진성에게 말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시오."

"교주는 원래 본단으로 가주님을 압송하려 했으나 용비천이 자신이 제어하겠다고 강하게 주장해서 그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풍신류측에서 은밀한 곳에 그 분을 감금했다는 것밖에 모릅니다."

"......"

"심지어 현재는 본단에서도 아무런 지령이 내려오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습니다..."

설명하는 한진성의 안색은 분노와 무력감 때문에 창백해져 있었다. 평상시에 극도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는 한진성이 표정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안좋은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화신류의 종사가 타 무류에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로 감금당한다는 건 크나큰 굴욕이기 때문일 것이리라.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한백령을 구해내겠소. 풍신류와 직접 담판을 지어주지."

"진심이십니까?"

한진성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감돌았다.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저희는 이미 교주에게 모든 재산과 세력을 빼앗기고 화신류의 주력고수들이 모두 금제당했습니다. 그런 위험한 일을 해주셔도 저희가 보답드릴만한 게 없습니다..."

"그런 건 생각지 마시오. 나는 한백령과 같은 배를 탔으니 끝까지 함께 하려는 것이오."

그러자 한진성은 진심으로 감격한 듯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감사합니다! 가주님을 구해주신다면, 저 한진성은 모든 걸 바치겠습니다."

"흠, 그렇다면 물어볼 게 있는데..."

"뭐든 물어보십시오."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상징성이 강한 보물이 필요하오. 내게 그런 걸 줄 수 있겠소?"

"따라오시지요."

그리고 한진성은 비밀방으로 향해서 내게 보검 용연을 냉큼 건네주었다. 내가 생각한대로 움직여준 것이다.

' 보검 용연이 있으면 봉선의식에 써먹기 좋겠지.'

천하에서 손꼽히는 명검인 만큼 충분히 제물로서의 가치가 있다. 나는 보검 용연을 목갑에 챙겨넣으며 말했다.

"그럼 나는 한백령을 구하러..."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응?"

"보물이라 하면 한가지를 더 알고 있습니다."

한진성의 눈이 빛났다.

"용문석굴의 빈양남동(??南洞)의 열다섯번째 불상의 뒤쪽 벽을 부수고 안에 들어가 보십시오. 그 곳에 여러가지가 비장(秘藏)되어 있습니다."

"응? 용문석굴?"

"우연히 찾게 된 비고동입니다. 모쪼록 도움이 되셨으면..."

아무래도 자신이 몰래 감춰두고 있던 보물창고인 모양이었다.

"고맙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용문석굴으로 이동했다.

파앗

용문석굴의 빈양남동의 여기저기에 조각되어 있는 불상들을 차례대로 세어보다가 열다섯번째 불상 앞에 도달했다. 그 불상은 하품중생의 인을 맺고 있는 관세음보살상이었고 상당히 볼품없고 작아 보였다. 주변 벽을 살펴보았지만 역시 특이한 기색은 없었다.

' 흐음, 어디.'

콰앙!

나는 주먹에 힘을 모아서 불상 뒤편의 벽을 쳤다. 그러자 간단하게 위장되어 있던 얇은 벽이 부서졌고, 벽 뒤편에 비밀통로가 있는 걸 발견했다. 비밀통로는 산 내부를 깎아내어서 만들었는지 상당히 길었고 나는 비밀통로 안쪽에 세 개의 방이 있는 걸 발견했다.

"......!!"

백금(白金)인가?!

찬연한 은빛같았지만 잘 들여다보면 방 하나가 통째로 금광을 내뿜고 있었다. 한없이 은광에 가까운 금빛을 보유하고 있는 건 바로 백금이라고 불리는 특수한 금속이었다. 놀랍게도 반경 일 장 크기의 내부동혈에 거의 꽉찰 정도로 백금이 금괴의 형태로 마련되어 있었다.

"누, 누가 이런 걸 놔뒀지?"

엄청난 양이었다. 이것만으로 큰 조각상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이 백금괴가 있으면 앞으로 돈걱정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음 방을 보았는데, 그 곳에는 언월도 한 자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언월도?'

특이하게도 청룡(靑龍)이 손잡이에 양각되어 있는 거대한 언월도였다. 사람의 키보다 훨씬 커 보였으며 무게도 상당한 편이라서 웬만한 장정도 절대 한 손으로는 들 수 없을것만 같았다. 아니, 웬만한 힘으로는 들 수조차 없을 것이다. 이건 일반적인 언월도보다 적어도 스무 배는 무겁다! 이렇게 커다란 언월도는 처음 보아서 신기한 마음에 손에 잡았다.

쿠궁

언월도를 손에 잡는 순간 강렬한 패기와 투기가 내 몸에 들어차는 걸 느꼈다. 그리고 웬 기다란 수염을 한, 대추처럼 붉은 얼굴의 키 큰 무장이 환영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그 무장은 나를 한번 쓸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 주인으로 인정받은 건가?'

아무래도 이 언월도는 생전에 굉장히 강력한 무인이 사용하던 장비같았다.

나는 언월도를 목갑에 수납한 후 마지막 세 번째 방으로 갔다. 그 곳에는 총 다섯 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모든 책이 하나인 무공비급이 놓여 있었다.

"백변신투(百變神偸)."

나는 종이를 팔락거리며 무공비급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무공비급인데도 불구하고 한진성이 따로 갖고나오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거... 도둑용 무공이잖아."

그랬다. 무공 [백변신투]에는 창시자가 남긴 수많은 변용술이나 변장술, 그리고 도둑만이 쓸 수 있는 비장의 소매치기 수법이나 경공술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내용도 많고 충실한 것에 비해서 나는 읽으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 내가 여태껏 익혀온 절세무공에 비하면 너무 조잡해.'

직접 전투에 쓸만한 박투술이나 암기술도 수록되어 있긴 하지만 기껏해야 이류무공 수준이다. 재능이 뛰어나다면 백변신투의 무공으로도 일류급 무인이 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내게는 무의미한 것이다. 칠대절학에 비교하는 게 모욕이었고, 화신류를 비롯한 사대무류의 무공에도 현저히 미치지 못했다.

물론 내가 전생하던 초기에 얻었다면 매우 요긴하게 쓰였겠지만 이제 와서 이런 도둑용 무공을 열심히 익힐 필요가 있을지 회의감이 든다. 이제 와서 도둑의 경공술이나 소매치기,

변장술을 익혀서 뭐한단 말인가?

"......"

나는 고민하다가 어쨌든 쓸데가 있을지도 모르기에 백변신투의 무공을 수납했다. 나는 보물이 감춰져 있던 동혈을 힐끔 뒤돌아보며 생각했다.

' 아마 한진성도 우연히 저 장소를 발견했고 자신의 비밀 자금줄으로 쓰고 있었던 모양이군.'

언월도나 백변신투는 한진성의 위치상 거의 쓸모가 없어서 놔둔 것일테고, 그에게 있어서는 백금괴가 최대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리라. 아무튼 내게는 큰 소득이 되었기에 나는 비밀동혈을 나와서 밖으로 향했다.

파앗

내가 곧장 향한 곳은 황산파였다. 본래 용비천을 찾고자 한다면 백련교 본단으로 가는게 빠르겠지만, 현재 그 곳에는 [옛 지배자]의 화신이 있다. 공연히 어슬렁거리다가 마주치면 위험하기 때문에 일단 용중일을 건드려보기로 한 것이다.

황산파의 장문인이 거하는 곳에 나타나자 그 곳에는 황산파의 사대장로들이 있었다. 사대장로들은 낮도깨비처럼 내가 나타나자 깜짝 놀라며 외쳤다.

"아, 아니."

"넌 누구냐!"

나는 그들을 힐끔 쳐다보다가 말했다.

"용중일. 할 말이 있으니까 나와라."

당장 눈 앞에는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다. 가장 안쪽의 방, 문 너머에서는 강렬한 기풍이 느껴졌다. 그것은 과거에 맞닥뜨렸던 용중일만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기세였다. 사대장로들이 서서히 검을 빼어들며 의문의 침입자를 공격할 준비를 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저벅

"잘 왔소, 화룡의 화신."

용중일이 나와 대면하듯 걸어나왔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둘만 얘기하고 싶은데."

"그러지."

용중일이 손짓을 해서 황산파 사대장로를 물렸다. 나는 그와 단둘이 되자 이죽거리며 말했다.

"황산파에 풍신류 고수들을 불러들여서 자신을 보호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는 않는군."

"그럴 필요가 뭐가 있겠소? 어차피 날 죽일 수 있는 자라면 수준이하의 무인은 무의미할진대."

내가 은연중에 황산파와 풍신류의 관계를 암시했는데도 용중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인정하는 기색이었다. 마치 내 앞에서는 그들의 밀월관계를 숨길 필요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가 말했다.

"하고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군."

"용중일. 나는 한백령을 풍신류에서 감금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 한백령을 내놓는다면 순순히 물러가겠다."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 용중일이 말했다.

"한백령을 내놓으면 내게 뭘 해줄 것이오?"

"그건..."

"농담이오."

엉?

뜬금없는 태도변화에 내가 황당해하자 용중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 한백령의 거취로 당신같은 자와 교섭해봤자 내게 이득될 게 없지. 한백령은 산동악가(山東岳家)의 밀실에 억류되어 있으니 찾아가시오."

"산동악가라고? 그들이 풍신류의 부하였나?"

산동악가라면 산동 제일의 명문세가이자 뛰어난 창술을 보유한 무림세력이었다. 그 이름이 높기에 오대세가에도 비견되는 큰 조직이었다.

"그렇소."

나는 용중일을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이지? 그게 사실이라손 치더라도 지금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내가 힐난하듯 묻자 용중일이 조용히 말했다.

"백련교가 망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소만."

"......!!"

"그리고 세상의 일이 이미 내 손을 떠났다고 생각하고 있지. 난 곧 황산파를 접고 은거할 것이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후후..."

용중일은 허탈한 듯 웃더니 말했다.

"백련교 본단에서 소식이 들려오기를, 현재 교주를 비롯한 수뇌부가 전면침묵중이오. 그리고 혈영곡이 날뛰면서 정천맹도 박살날 것이고."

"......"

"이걸 받으시오. 이걸 보여주면 산동악가에서 순순히 한백령을 풀어줄 거요. 괜히 우리를 들쑤시고 괴롭히지 마시오."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용중일이 내게 튕겨낸 것은 비취반지였다. 비취반지의 안쪽을 잘 들여다보니 風이라는 글자가 안에 새겨져 있었다.

"당신이 뭐하는 자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음 생에나 봅시다."

용중일은 그 말을 하고는 휙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를 제압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예전에 싸워봤던 바로는 용중일은 아마 절대지경의 초입에 이르는 고수일 것이다. 섣불리 시비를 걸 수 없는 상대였고, 게다가 순순히 한백령의 거취를 말해준 이상 괜히 건드릴 이유도 없었다.

' 흠, 저놈은 뭔 생각인지 모르겠어.'

나는 속으로 탄식하며 산동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빠르게 산동악가를 찾아가서 산동악가의 가주에게 말했다.

"나는 이 비취반지의 권위로 말하겠소. 한백령을 풀어주시오."

그러자 산동악가의 가주는 크게 당황하다가 말했다.

"서... 설마 소종주(小宗主)께서 그런 명령을..."

"머뭇거릴 시간 없소."

"알았습니다."

그는 나를 용중일의 사자라고 확신했는지 산동악가의 은밀한 내부건물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부지하감옥으로 들어갔는데, 횃불이 켜지자 안쪽에 묶여있는 한백령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백령은 내가 찾아오자 말했다.

"왔군."

구타나 능욕을 당한 흔적은 없다. 아무래도 교주가 나와의 약속을 지킨 듯 했다. 그리고 한백령이 당할 수가 없는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 천령단은 그대로인 것 같군."

퍼억!

내 말이 끝나는 순간 한백령의 양손과 양발을 억제하고 있던 사슬이 터져나가 버렸다. 뒤에서 보고 있던 산동악가의 가주가 창백한 안색이 되었다.

"세, 세상에 특제 한철으로 만든 걸..."

무한의 내공 천령단을 옥죌 수 있는 금속 따위는 세상에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백령에게 말했다.

"언제든 산동악가를 몰살시키고 나갈 수 있었을텐데 왜 여기에 가만히 있었던 거요?"

한백령이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교주가 화신류의 목숨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반항하면 몰살당할테니 가만히 있을수밖에요."

"그랬군. 나와 함께 나갑시다."

"뭔가 상황이 달라진 것 같군요. 교주가 나를 풀어줘도 된다고 한 것입니까?"

"교주는 죽었소."

그 말에 한백령은 어이없는 듯, 하지만 분명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 라고요?"

"그러니까..."

퓨웅!

내가 설명하기도 전에 한백령의 손에서 지강(指?)이 뿜어져 나가서 내 등 뒤에 있던 산동악가의 가주를 일격에 절명시켰다. 그 또한 상당한 절정고수였는데 한백령은 마치 파리 잡듯이 죽여버린 것이다. 심지어 그의 미간을 꿰뚫을 때까지 표정변화조차 없어서 그는 자신이 죽는지조차 몰랐으리라.

"이게 무슨 짓이오."

"그런 극비정보를 듣는 귀가 많아서 좋을 건 없습니다."

"음..."

너무나 냉혹하지만 실리적인 판단. 나는 한백령이 갇혀있었다 해도 예전 성격 그대로인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교주가 죽은 상황, 그리고 교주를 죽인 초월적 존재, 그리고 소교주에 대한 것을 한백령에게 말해줬다. 한백령은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질린 듯 말했다.

"설마 그런 존재였을 줄은..."

"혹시 당신이 내게 전에 얘기해줬던 교주의 '약점'이란 게 소교주를 말하는 게 아니었소?"

"맞습니다."

한백령은 담담하게 말했다.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소교주가 죽으면 교주 또한 죽는다는 관계를 알아낸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교주가 그런 괴물로 변한다는 건 저도 몰랐군요."

"나 또한 처음 알게 된 거요."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한백령. 어차피 이대로라면 백련교는 멸망이오. 이제부터 나와 손을 잡고 내 일을 도와주지 않겠소?"

"당신의 부하가 되란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봐도 좋소. 내 휘하로 들어온다면 화신류의 안전을 보장해 주겠소."

한백령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파앗

나는 산동악가를 비등으로 빠져나와서 한백령에게 화요를 내밀었다.

"이게 뭔지..."

"부탁이 있소."

나는 한백령을 강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의 화신지혼(火神之魂)을 끌어올려서 이 화요를 불태워 주시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