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02 암천향(暗天鄕) =========================================================================
분명히 소교주다. 그의 이름이 독고설이란 것부터, 묘하게 예의있는 말투도 그를 연상시켰다. 그의 실제 나이는 꽤 있었지만 강대한 수신류 무공을 익힌 영향인지 나이를 거의 먹지 않은 모습이었던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난생 처음 보는 괴상망측한 외모의 이족이었다. 저게 정말로 소교주라는 말인가?
내가 머릿속에서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을 때 자칭 '교주' 독고설이 말했다.
"아... 잠시... 잠시..."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 존재가 기침을 뱉는 듯 했고, 갑자기 목 부분만 성인
인간의 그것으로 변모했다.
' 자신의 몸을 변형시킬 수 있는 건가?'
잠시 후 내가 알고 있던 소교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잘 왔어요. 나도 조만간 백웅 당신을 찾아갈 생각이었죠."
"... 백련교주는 여기 죽었소. 당신이 교주라고?"
"그는 나의 아버지..."
스르륵
"......!!"
독고설이 쭈글쭈글한 손가락을 움직여서 백련교주의 시체를 가리키자 갑자기 풍화되어 버렸다. 난데없이 먼지와 모래로 변해서 폭삭 주저앉으며 형태조차 사라져 버렸다. 언뜻 보면 둔갑술 때문에 변한 것 같았지만, 그게 아니다.
나는 내게 존재하는 사도의 권능 덕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그게 순식간에 엄청난 '시간'이 경과했기 때문이라는 걸 직감했다.
' 뭐지?'
독고설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 그는 편해질 겁니다. 그에게 존재하던 파멸의 운명을 내게 귀속시켰으니 불행 중 다행이죠. 그리고 내가 그의 뒤를 이어 백련교의 수장이 된 것이니 백웅 당신은 나와 이야기합시다."
파멸의 운명을 귀속시켰다...?
나는 그 말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 정말로 불행 중 다행인건 저 놈이 바로 공격하지 않고 얘기하려 하는 거군...'
나는 이 상황에서 최대한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저 '자칭 교주'가 무슨 짓을 왜 저질렀는지 정도는 파악해야 했다. 나는 머릿속에서 신중하게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
"이곳에 있던 원로원과 수신류 고수들은 어떻게 된 거지?"
"시간의 흐름으로 되돌아 갔지요."
죽였다는 말인가.
' 아냐, 이게 중요한게 아냐.'
나라고 해도 방해가 되는 놈들은 죽였으리라. 파고들면 한도끝도 없었고, 상대방이 내 질문을 귀찮아할 우려가 있었기에 재빨리 더 중요한 질문으로 넘어갔다.
"독고설 당신이 엄청난 존재라는 건 느낄 수 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힘을 손에 넣은 거지?"
"......"
그의 쭈글쭈글한 얼굴이 내 쪽을 향했다. 그 순간 나는 그 빛나는 눈동자 속에서 상상을 초월한 광기가 내 뇌리로 새겨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머릿속이 요동치면서 그대로 신체가 흐물거리며 터질 것만 같았다.
너무나 사악하고 극악한.
신비(神秘)의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무한의 광기.
성좌에서 악의가 쏟아져 내려오는 절망감.
현실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시가 느껴졌고, 그 모든 것이 나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 뭐... 뭐야 이건!!'
객관적으로 보면 웃기고 기괴하게 생긴 모습에 불과하지만 놈과 시선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손발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상대가 뿜어내는 존재감 만으로도 나는 사고의 영역을 봉쇄당한 기분이었다.
"크윽."
하지만 애써 정신을 차려서 놈을 노려보자, 독고설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역시... 굉장한 정신방어력을 갖고있군. 아무리 삼황오제의 사도라지만 인간으로써 태초의 시선에 저항하는 게 가능한가?"
"방금 나를 공격한 거냐?"
"아뇨. 단지 응시했을 뿐이죠. 필멸자들은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가버리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한 독고설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의 나는 백련교주이자... 백련교주의 하나뿐인 자식이었던 독고설이며... 머나먼 시간의 흐름에서 불려온 '위대한 존재'. 그 모든 것이 혼재되어 자아를 이루고 있지요. 머지않은 시일 내에 독고설의 자아가 사라지겠지만, 그 전에 그의 염원을 화신(化神)으로서 이뤄주고 싶군요."
"......"
길게 이야기했으나, 나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어둠의 지식으로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 ... 그렇군...'
놈은 [옛 지배자]의 화신!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도 알지 못하는 [옛 지배자]가 독고설의 몸을 빌려 현신한 게 틀림없었다. 본체가 아니니 본체만큼 강하지는 않겠지만, 옛 지배자의 화신은 그 자체로 재앙이자 횡액이었다.
나는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 지금부터 몇십 년 전의 일이었네……. 나는 어떤 신적인 존재와 마찰을 빚어 싸울 일이 생겼지. 정확히는 그 존재와 겨루어서 그의 물리적 실체를 파괴했네. 그 존재가 강력하긴 했으나 내 상대는 아니었어.]
[ 하지만 그자는 난데없이 영혼째로 날아가더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그 이후 내 아들인 소교주에게 끔찍한 저주의 괴질이 씌워졌지.]
[ 무생노모(無生老母). 본교가 모시는 위대한 신의 이름이지. 창세주인 무생노모(無生老母)께서는 미륵을 이 세상으로 보내서 자신의 흩어진 자녀들을 거두어들여 진공가향(眞空家鄕)에 귀의시키고 평화로운 천년왕국이 인간세계에 실현될 것이라 약속하셨네. 이 백련교의 교리를 알고 있는가?]
[ 사실 나는 괴질을 치유하기 위해 내가 아는 한 가장 강력한 술법사에게 조언을 구하러 간 적이 있었네. 그때 그 술법사도 나를 도울 수는 없다 했으나 천행(天幸)이라 말했었지.]
[ 옛 지배자의 마력(魔力)이라면 백련교 전체를 파멸시킬 저주를 내릴 수도 있으나, 무생노모의 가호 덕분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는 말이었네. 그래서 나는 무생노모께 가장 큰 공양과 공덕을 바칠 방법이 무엇인가 생각하던 중, 신화의 위력을 품고 있는 백련교의 설화수인 용화수라면 적합할 거라 생각한 것일세.]
백련교주는 과거 내게 말했었다. 서역(西域)에서 푸른 눈의 이방인이 찾아와서 자신에게 무명제사서를 얻는데 조력해 달라고 했었는데 교주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랬더니 옛 지배자의 화신을 소환하길래 교주가 자신의 힘으로 그 화신을 때려잡았고, 그 직후 소교주인 독고설에게 괴질이 발병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백련교주는 그 괴질을 치유하기 위해서 동방무결 일행을 남만으로 보냈다. 용화수를 찾아서 무생노모에게 바치기 위한 이유라고 했었다. 더불어 용화수 그 자체가 괴질의 치유에 도움이 되지 않느냐는 기대감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
그렇다면 설마...
나는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백련교주는 서역의 마도사가 소환했던 [옛 지배자]의 화신을 쓰러뜨린 게 아니었던 거군. 그는 그저 미뤄뒀던 거야."
"많은 걸 알고 있군요."
"그가 내게 말해줬어."
"그런가요."
여상한 목소리로 대꾸한 독고설이 말을 이었다.
"맞아요. 그 때 분명히 내 화신의 육체는 백련교주와의 전투에서 파괴되었지만 내 영혼은 불멸이었죠. 그리고 그 마도사가 마지막까지 영혼을 바치며 부탁했기에 그의 핏줄에게 빙의했습니다."
"빙의라고...?"
"마도사의 원(願)은 백련교주의 일족을 파멸시켜달라는 저주. 그래서 백련교주가 위대한 아버지의 힘을 빌려 나를 억누르고 있었죠."
"뭐?! 그 말은..."
나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백련교주가 원영신으로 널 봉인하고 있었다는 건가?"
"봉인이라니, 듣기 거북하군요. 아무리 '아버지'의 옥좌의 힘을 빌렸다고는 해도 인간의 힘에 불과하죠. 나는 언제든 힘을 써서 나올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일개 마도사의 부탁에 그렇게까지 힘을 쓸 이유가 없었을 뿐."
언짢은 듯 중얼거린 독고설이 말했다.
"나는 이 세상의 일에 원래 관심이 없었어요. 하지만 얼마 전 바다의 수문장이 쓰러지며 인과율이 크게 요동쳤죠. 놈이 죽어서 백련교주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전면에 나왔어요."
그의 흉측한 얼굴이 히쭉 웃는 듯 했다.
"잘하면 크툴루를 제치고 '종언(終焉)의 때'에 가장 먼저 계시를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설 수도 있으니."
"계시?"
"더 이상은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아무리 사도라고 하지만 미천한 인간일 뿐이니."
"... 그렇군."
나는 놈을 노려보았다.
"넌 독고설이 아니야. 독고설인 척 하고 있을 뿐이지."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잖아요? 나는 자비로우니까 인간의 원념을 이뤄줄 뿐."
그렇다.
내 눈 앞에 있는 건 독고설도 백련교주도 아니다.
그저 과거부터 이어진 저주로 인간에게 빙의한 [옛 지배자]의 화신이 독고설의 인격을 따라하고 있을 뿐이다. 그 말은, 눈 앞에 있는 놈은 결코 인간이 아니며 이족 중의 이족 - 그것도 [옛 지배자]의 의지를 대행하는 화신이라는 뜻이다.
' 해신이 쓰러져서 원영신의 계약이 약해진 틈에... 저 놈은 부활해서 백련교 수뇌부를 몰살시켜버린거야.'
상황을 파악한 나는 무사시에게 전음을 보냈다.
[ 무사시. 도망칠 수 있을까?]
[ 늦었다. 저 놈은 벌써 뭔가 수를 썼는데 느끼지 못한 건가?]
[ 뭐?]
[ 최대한 싸워보겠지만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 죽을 거다.]
담담한 무사시의 전음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윽고 쭈글쭈글한 태아의 모습을 한 '독고설'이자 [옛 지배자]의 화신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벌레같은 인간을 사도로 택한 삼황오제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군요. 화신과 달리 사도가 죽는다는 건 자신의 힘도 약해진다는 뜻인데... 하긴 그렇게 인간을 좋아하니까 칠요를 만들면서까지 종말의 때를 유예한 거겠지?"
파앗
나는 다음 순간, 빠르게 무사시 쪽으로 이동하면서 무사시를 데리고 비등으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비등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고, 나는 별 수 없이 사도의 권능을 시전하려 했다.
"큭!"
사도의 권능도 먹히지 않는다!
그 대신에 이 공간 전체가 크게 물결치며 일렁이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사도의 권능을 썼다는 걸 느꼈는지 놈이 웃었다.
"후후후, 재밌군요? 당신에게 권능을 준 건 전욱인가 보군요."
"뭐가 재밌다는 거야!"
"그가 다루는 권역은 나와 같으니... 어느 쪽의 소체가 뛰어난가의 대결이겠군요. 하하하."
그러자 미야모토 무사시가 한발짝 앞으로 나섰다.
쿠웅
그가 진각을 크게 내려찍자 상대방의 시선이 무사시에게로 향했다. 무사시는 자신의 이천일류(二天一流) 최강의 자세를 취하며 눈을 반개했고, 나직이 말했다.
"벤다!"
하지만 벤다는 말과 달리 무사시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저런 경고조차 하지 않고 공격하는게 정상일 텐데 무사시의 지금 행동은 무슨 의미일까? 내가 곤혹스러운 눈으로 무사시를 쳐다보자 옛 지배자의 [화신]이 말했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필멸자군요. 과연 할 수 있을까요?"
"벤다!"
"그럼 부디."
스윽
놈이 무사시를 향해서 한 발짝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일그러지는 광경이 내 눈에 보였다. 사방에 떠다니던 먼지며 핏자국 같은 것이 말 그대로 공간 속에 얼어붙은 듯 멈추었고, 오로지 움직이는 것은 한때 인간의 형태였던 광류(光流) 뿐이었다. 그 빛의 흐름은 무사시의 형태를 하고 있었고, 무사시는 한차례 검형(劍形)을 만들며 공간을 십자로 그었다.
이건 심적권청과는 다른 현상이었다. 심적권청은 단지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지며 찰나의 시간을 느끼는 것 뿐이지만, 무사시는 심적권청으로 느끼는 경계를 초월하며 빛의 흐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촤악
크게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태아의 모습을 하고 있던 화신의 팔이 잘려나가며 허우적거리는 듯 했다. 명백히 치명상이었고, 그 부상은 무사시의 일 초(一招)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 이, 이긴건가!!'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화신은 몸을 허우적대면서도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하!! 인간 따위가 시간의 단면을 읽어내어 베었는가? 이게 필멸자에게 허용된 힘인지 궁금해지는구나. 재미있어!"
푸콰콱
재차 무사시가 눈에 비치지도 않는 광섬(光閃)을 발출했는지 화신의 몸뚱이가 수백조각이 되어서 터져나갔다. 아무리 봐도 무사시의 압승이었기에 나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무사시에게 다가갔다.
"해냈군! 당신은 신의 화신을 쓰러뜨렸..."
"... 도망쳐."
무사시는 내 말을 끊으며 무겁게 말했다. 내가 그를 쳐다보자 무사시는 절망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저건 인간이 쓰러뜨릴 수 없어..."
슈르르륵
슈르르르륵
아무것도 없는 허공.
그 곳에서 먼지나 점토같은 게 일렁이며 빠르게 요동쳤다. 그 점토는 이윽고 시체잔해를 흡수하면서 커지더니, 순식간에 화신의 원래 모습을 회복했다. 끔찍하게 생긴 쭈글쭈글한 어린아이같은 모습이었다.
"......!!"
불사신?!
순식간에 부활한 옛 지배자의 화신이 말했다.
"백련교주와 싸우던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나도 진심으로 끼어들 생각이니, 그대들은 운이 없군요."
화신의 손가락이 미야모토 무사시를 가리키는 순간이었다.
슈르륵
그게 끝이었다.
동영 최강의 절세고수로 불리던 미야모토 무사시는 그대로 먼지가 되어서 사라졌다. 유언을 남기기는 커녕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엄청난 시간이 흐르며 미야모토 무사시가 있던 공간만 풍화되어 버린 것이다.
"으, 으아아..."
나는 너무나 허망한 결말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설마 미야모토 무사시가 한방에 당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 도, 도망쳐야...'
하지만 도망칠 수 있을까?
저런 신적인 존재를 상대로?
우우웅
내가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단말을 통해서 장삼봉의 영혼이 내게 강림하는 게 느껴졌다. 내 몸을 차지한 장삼봉은 침중한 기색으로 전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위대한 자여... 그대들에게 선악은 유희에 지나지 않소이까? 그 힘으로 가련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도 좋을 것을..."
옛 지배자의 화신은 히쭉 웃으며 말했다.
"신과 인간의 중간에 있는 자여. 너희는 개미를 죽일 때 자비와 도덕을 말하는가?"
"... 알고는 있었으나, 그대들은 실로 사악한 존재군..."
침음성을 흘린 장삼봉이 손을 들어서 상대에게로 겨누었다.
그 모습은 무당파의 무공, 태극권(太極拳)의 기수식이었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걸었다.
[ 연자여. 나는 무쌍패(無雙覇)로 최대한 버틸 것이오. 허나 패배는 피할 수 없으니, 그대는 자신의 술수를 이용해서 이 자리에서 도망치시오...]
[ 장삼봉 진인. 그건 불가능...]
장삼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 더 이야기할 시간이 없소. 그럼 작별이오.]
그리고 내 시야가 암전되며 서서히 묻히기 시작했다.
......
시간이 흐르고 있다.
나는 점차 눈을 떴고, 어느 새 낮이었던 시간이 크게 흘러서 밤의 달이 천공에 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한때 백련교주의 교주전이었던 장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건물들이 모조리 모래가 되어버렸고, 근처에 있던 산이나 강도 싸그리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둘의 전투로 백련교는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전신이 앙상마른 해골처럼 마른 상태로 겨우 서 있었다. 내공은 예전에 고갈되었고, 팔문까지 연 듯 기혈도 다 부숴져 있었다. 아마도 장삼봉 진인의 강신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서 내가 몸을 돌려받은 것이리라.
전신에 격통과 두통이 덮쳐오면서 서 있기가 힘들었다. 뭔가에 당했는지 팔뚝이 쪼글쪼글하게 말라붙어 있다.
내 앞에는 [옛 지배자]의 화신, 자칭 독고설이 서 있었다. 그 존재는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 그 선인(仙人)에게 경의를 표하지. 그 자는 영겁에 거하는 태아인 나를 상대로 자기자신을 지켜내었다.]
"......"
[ 실로 훌륭한 기예였어.]
대답할 여력도 없다.
하지만 명백히 달라진 걸 느끼고 있다. 아까까지는 인간의 말로 경어를 쓰고는 있었지만 하등한 벌레를 바라보는 시선이었지만, 지금은 거만한 영언을 쓰고 있어도 존중하는 말투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상대방은 장삼봉 진인이 버텨낸 사실 자체를 매우 높게 평가하는 모양이었다.
[ 평등한 종언을 내려주겠노라...]
스르르륵
놈의 손가락이 내게 향하는 순간 내 몸이 모래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귀와 코가 순식간에 신경째로 분해되는 기분이 끔찍했다.
놈의 시선과 손가락이 향하는 곳은 일순간에 무지막지한 시간이 흐르게끔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일천 년이나 일만 년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체나 필멸자는 결코
놈의 손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말도 안 되는 능력이지만 바로 이런 게 [옛 지배자]의 권능일 것이리라.
더 이상은 살아날 수 없다는 걸 직감하고 눈을 감았다.
아아.
이게 내 22번째 죽음이구나...
[ 권능 발현.]
키리릭 키릭
뭔가가 되감기는 소리가 들렸다.
"......"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미야모토 무사시와 함께 텅 빈 백련교의 부지에 서 있었다.
"왜 그러지?"
뭔가 악몽을 꾼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방금 전에 느꼈던 게 악몽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대로 앞으로 걸어가면 반드시 직면하게 될 현실이다.
"... 으으으으으윽!!"
부들부들
나는 그 자리에 쓰러져서 손과 발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방금 전에 느꼈던 그 무시무시한 신적 존재의 공포가 내 몸에 박혀 있었다. 존재감만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진정한 [옛 지배자]의 힘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허억, 허억, 허억."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미야모토 무사시에게 말했다.
"도, 돌아갑시다. 안 그러면 죽어."
"흠 그렇군. 너한테 경고해 줄 생각이었는데."
그렇다는 건 이 시점은 아직 무사시에게 흉하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인 건가? 그렇다면 백련교 교주전으로 순간이동한 직후일 것이리라.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 이제야 조금 기억났어...'
내가 오거천문에서 열에게 5년간 수련받았던 사도의 권능.
그 권능을 사용하는 방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까지는 너무 강력한 능력이라서 인과율 때문에 봉인되어 있었지만, 강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를 만나면서 그 기억봉인이 풀린 셈이다.
그렇다.
나는 방금 전 그 권능을 사용해서 [옛 지배자]의 화신을 만나기 직전으로 시간을 되돌려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전욱의 권능 또한 시간을 조종하는 권능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