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499화 (498/1,615)

00499  암천향(暗天鄕)  =========================================================================

그 직후 망량은 '최초의 문자'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각지의 서고를 뒤지며 갑골문 해석에 몰두했고, 천우진은 제갈사의 봉인을 강화하기 위해 영력이 강한 곳으로 향하기로 했다. 망량이 내게 말했다.

"백웅. 우선 아라사 제국 지하의 비밀도서관으로 가시오."

"창힐에 대해 저술되어 있던 책을 가져오란 거요?"

망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뇌음사 때와 달리 그 책을 건드리는 건 창힐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소. 즉 창힐은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자신에 관련된 서적이나 정보에 반응하는 주술을 걸어두었으나, 선지자의 위대한 종족이 보유한 책 재고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했다고 보이오."

"흠..."

그럴 듯하다. 선지자에게서 정보를 얻어내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해두는 것도 좋겠다. 나는 망량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제갈사의 마력이 상상 이상이야."

떠나기 전, 천우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 보패로는 놈을 오래 봉인할 수 없다."

"산하사직도도 제갈사를 봉인할 수 없단 말이냐?"

"아까 거부반응을 봤잖나. 용적이 부족해. 아마 네가 갖고 있는 목갑도 마찬가지일테지."

퉁명스럽게 대답한 천우진의 말이 이어졌다.

"보패로 강력한 존재를 봉인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 세계 최고수준의 마도서를 4할이나 얻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제갈사의 순수한 마력이 극치에 이른 상태인지라 어쩔 수 없어."

제갈사가 그렇게 강해져 있었단 말인가?

천우진이 슬며시 산하사직도를 들어서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내 영력을 강화시켜서 최대한 막아보겠지만 그래도 열흘 이상은 장담할 수 없어. 길어도 열흘일테니 마음의 준비를 해 둬라."

열흘.

애매한 시간이었기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천우진의 말에 문득 뭔가를 깨닫고 반문했다.

"마음의 준비라니?"

"네 손으로 제갈사를 죽일 준비."

"......!!"

"지금 죽이는게 최상이겠지만 뭐."

천우진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제갈사가 마왕의 수하에 들어가게 되면 지금보다 열 배는 강해질 거다. 그 때가 되면 제갈사 자체가 재앙이 되겠지. 그 전에 화요로 제갈사의 숨통을 끊어서 그 힘을 흡수하는 게 낫다."

나는 천우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말했잖아, 난 그러지 않겠다고!"

"후. 전생자 백웅이여. 동료의 목숨을 지키겠다 이건가?"

"그래."

파악

천우진이 내 멱살을 떨쳐냈다. 내 내공을 무시하고 쳐낸 걸 보면 환신 특유의 술수를 사용한 듯 했다. 그는 짜증내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난 제갈사같은 마도사를 정말로 혐오하고, 네 녀석도 정말 구데기처럼 싫어하지만, 그런 태도는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뭐?"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거냐? 나 정도 되니까 제갈사를 보패에 열흘이나 봉인할 수 있는거지, 무명제사서같은 최상급 마도서의 마력을 4할이나 얻은 마도사는 이미 인간의 규격을 벗어난 존재다. 이 세상 그 어떤 봉인술도 거의 효력이 없어. 잘난 듯 말했으면 뭔가 방법을 제시해 보시지?"

"......"

내가 입을 다물자 천우진이 되려 으르렁거렸다.

"나는 제갈사 놈의 말대로 인신공양으로 최대효율을 추구하라고까진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면 죽여서 화요를 강화시키는게 낫다. 사형도 이미 이 방법을 생각했겠지만 자신의 혈육이니까 말을 못 꺼낼테니 내가 대신 말해주는 거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대체 뭐가 남는 거지?"

나는 힘겹게 대답했다.

"나는 앞으로도 전생을 하면서 동료의 목숨을 자원처럼 갈아넣고, 갈아넣고, 또 갈아넣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건가? 그건..."

"백련교주나 십이율주와 다를바 없다, 이 말이군."

"... 그래."

그러자 천우진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하! 지금의 넌 그 자들을 욕할 자격이 없어."

"무슨 소리야."

"그들에게는 신념이 있었다. 그리고 네게도 신념은 있지만 뭔가 중요한걸 착각하고 있군. 너는 제갈사를 위해서 아군의 목숨을 아끼려는 게 아니라 자기자신의 정신력을 보호하기 위해서 변명을 하고 있을 뿐이지."

"......!!"

"이해는 가지만 공감은 할 수 없어. 하지만 적어도 자신만의 대답은 준비해 둬라."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변명이 아닌 해답을 내놓으란 말이다."

휘익!

천우진은 다음 순간 사라져 버렸다. 자기 할 말만 폭포수처럼 쏟아내놓고 가 버린 것이다. 나는 그의 태도에 약이 올랐지만, 그 이상으로 가슴 속이 뜨끔해졌다. 천우진의 말은 지금까지 내가 심중에 품고 있던 모순을 건드린 것이다.

' 제기랄...'

동료와 인연을 지키고 인의(仁義)로 대의(大義)를 추구한다.

그게 이상적인 행위겠지만 지금 맞닥뜨린 것은 그런 이상론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마왕과 계약을 맺은 제갈사를 살리려고 하면 결국 창힐의 손에 놀아나는 패착이 되고 말 것이고, 그렇다고 딱히 봉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최선따윈 존재하지 않으며, 최악(最惡)이 아닌 차악(次惡)을 선택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문제는 지금 이 순간만이 아니다. 앞으로도 나는 전생을 하면서 동료의 목숨과 효율 사이에서 무수히 저울질을 해야만 할 것이다. 지금보다 더 답답하고 괴로운 양자택일도 계속 겪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때마다 선택해야만 한다. 천우진은 내 전생의 기억을 보았기 때문에 그 상황을 예상한 것이고, 지금 미리 내 마음을 결정해놓으라고 제 3자로서 칼같은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도 같은 고민이 반복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

변명이 아닌 해답.

나는 그 말을 읊조리며 선지자에게로 향했다. 일침은 일침이고 지금은 어찌되었든간에 조금이라도 더 움직여서 방법을 찾아나설 수밖에 없다.

파앗

나는 먼저 비등을 써서 아라사 제국에 있는 [위대한 종족]의 비밀도서관으로 향했다.

터엉!

"으윽?!"

하지만 나는 갑작스럽게 튕겨나오는 기분과 함께 모스크바 주변의 설산(雪山)에 내동댕이쳐졌다. 저만치에 성이 보이는 걸 보면 대략 십 리는 튕겨난 듯 했다. 이것은 예전에 겪었던 현상으로서 결계때문에 진입할 수 없는 경우였다.

' 비밀도서관에 예전과 달리 결계가 쳐져있군...'

[위대한 종족]이 갑작스럽게 변화한 상황 때문에 자신들의 지식창고를 보호할 필요성을 느낀 것일까? 단순한 마도구인 비등의 순간이동능력으로는 뚫을 수 없게끔 강력한 결계를 쳐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순어구를 써서 망량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자 한창 해석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망량이 말했다.

[ 백웅. 그럼 억지로 들어가지 말고 선지자와의 교섭에 나서시오.]

[ 사도의 권능을 쓰면 저 결계를 뚫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 겉에만 보호결계를 쳐둔 게 아닐 것이오. 내부에 수호자를 두었거나 혹은 책 하나하나에 추적술을 걸어두었을 가능성이 높소. [위대한 종족]처럼 지식에 대한 집착이 강한 종족이라면 그 정도는 하지 않겠소?]

[ 음. 그렇겠군.]

[ 억지로 빼낼수는 있겠지만 선지자와의 교섭을 앞두고 강도라는 인상을 주는 건 안될 일이오. 정 급하면 차후에 할 수는 있겠지만.]

[ 알았소.]

나는 아쉬움을 느꼈지만 망량의 말대로 지금은 비밀도서관에서 서적을 빼낼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비등을 써서 아스타나의 선지자 앞에 도착했다.

"선지자. 나는 백웅이다."

[ 호오... 삼황오제의 사도인가.]

인삿말이 달랐다. 지금까지의 전생에서 선지자는 난데없이 자신의 거처에 나타난 인간을 맞이하는 태도였으나, 이번에는 나를 보자마자 사도라고 파악한 것이다. 나는 선지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선지자여. 나를 아는가?"

[ 물론이지... 해신을 쓰러뜨린 대영웅이자... 삼황오제에게 선택받은 사도가 아닌가... 그대의 위업은 아주 소문이 자자하지.]

선지자는 상당히 호기심이 어린 태도였다. 나는 그가 아직까지 내게 찍어놓은 전생자를 감별하는 표식을 못 봤다고 생각하며 대꾸했다.

"나는 당신과 거래를 하러 왔다. 그리고 한 가지 말해두겠는데."

[ 무엇인가...]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전생자다."

[ ......!!]

선지자가 촉수를 꿈틀거리며 기이한 도형같은 걸 허공에 띄웠다. 자기만의 확인작업을 거친 듯 선지자가 신음성을 내었다.

[ 과연... 납득했다... 전생자이기에 찰나같은 인간의 수명으로 해신을 쓰러뜨릴 정도의 인과를 쌓은 거군... 그런데 왜 그걸 내게 말하는 거지?]

"알다시피 당신은 내게 표식을 찍어버렸으니까 숨기려 해 봤자지. 서로의 신뢰를 위해서 숨기지 않기로 한 것 뿐이다."

[ 크크... 나와 꽤 오랫동안 거래를 했던 모양이군... 내 성격을 알고 있는가...]

뭐가 즐거운지 선지자는 웃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 좋아... 용건을 말해라. 즐겁게 거래에 응하도록 하지.]

"내가 원하는 건 창힐의 정보. 그리고 마왕이 왜 발호했는지, 그리고 창힐의 화신을 제어할 수 있는 '최초의 문자'에 대해서다."

[ ......]

선지자가 꽤 길게 침묵하더니 말했다.

[ 나는 복잡한 판에 말려들었군... 이 판의 승자가 천하의 패권을 쥐는가... 흐음...]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던 선지자가 말을 이었다.

[ 내 개인적으로는 판단을 보류한다... 그대와 창힐... 어느 쪽이 이길지는 나로서도 예상할 수 없군... 편을 들어줄 수 없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정보를 팔 수 있는지만 말해."

[ 물론 거래할 수 있다. 적합한 대가를 제시한다면...]

"여기 있다."

스윽

나는 목갑에서 마수소환의 팔찌를 비롯해서 초상기인, 수정석비, 그리고 온갖 잡다한 보물을 전부 꺼냈다. 말 그대로 화요와 비등, 천암비서, 전국옥새같은 필수품 빼고는 다 꺼냈다.

' 지금은 이게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전부.'

이번 생에서는 이룬 게 많은만큼 초기에 쌓여있던 보물들이 상당히 소모된 상태이다. 보물을 소모하는 대신 온갖 가호와 이득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걸로도 꽤 부족한 감이 있긴 했지만 일단은 이걸로 최대한 정보를 알아낼 수밖에 없다. 선지자에게서 이번에 얼마나 정보를 알아내느냐에 따라서 결판이 나기 때문에 괜히 보물을 아낄 여유가 없었다.

내가 꺼내놓은 보물들을 쳐다보던 선지자가 말했다.

[ 아주 많이 갖고있군... 하지만...]

"하지만 뭐!"

[ 창힐은 나와 비밀보호 조약을 맺고 있다... 그래서 이 정도로는 그의 비밀에 대해 입을 열 수 없겠군... 그리 알고있는 것도 없지만...]

"뭐라고..."

[ 게다가 네가 가진 물건 중 일부를 제외하곤 그리 끌리지 않는군...]

나는 머리가 띵해지는 걸 느꼈다.

"비밀보호 조약이라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

선지자가 촉수를 꿈틀거렸다.

[ 그럴 리가... 아주 오래전에 나와 창힐이 맺은 조약이다... 그는 자신의 비밀을 지키는데 아주 비정상적인 집착이 있었지... 그래서 나를 비롯해서 자신의 비밀을 캐내거나 알아낼만한 존재들을 찾아가서... 모조리 함구하도록 수를 썼다... 나와는 대등한 조약을 맺었지만... 그 때 창힐에게 살해당하거나 봉인당한 자도 꽤 있었지...]

"......"

나는 순간 전국옥새의 기능을 발동시키려 할 때 갑작스럽게 준관리자의 권능으로 전국옥새의 힘이 봉인되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팽조는 자신이 탐색당할 것 같자 급히 전국옥새에 봉인을 걸었는데, 거기에서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비밀을 지키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팽조와 창힐이 동료라면 창힐 또한 팽조와 같은, 아니 그 이상으로 자신의 비밀을 지키려고 집착할 것 같았다.

' 거짓말같진 않군.'

저 말대로라면 창힐과 팽조는 중화세계나 서방에서 암약하면서 철저하게 자기자신을 숨기며 살아온 것이다. 그것도 수천 년 동안이나! 하지만 그들은 보통 대라신선이 아니라 사도급 이상의 존재일텐데 뭐가 두려워서 그렇게까지 비밀을 숨기며 살아온 것일까?

"잠깐 기다려 줘. 생각 좀 해 보고."

[ 천천히...]

나는 선지자를 기다리게 하고는 팔짱을 꼈다.

' 아직 희망은 있어.'

선지자가 비밀보호조약이라고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놈은 기본적으로 정보상에 가까웠다. 대가가 크다면 조약을 깨버리고 정보를 판매할 수 있는 놈이며, 나는 전생하면서 그런 놈의 성향을 파악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내가 제시한 보물들은 놈이 배신할만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 뿐이다.

선지자의 입을 열게 할 방법은 있다. 하지만 나는 적지 않게 망설여졌다.

' ... 전국옥새를 바쳐야 하나?'

정말 고민된다.

전국옥새의 가치는 보통 보패 10개분에 이르므로 대번에 선지자의 닫힌 입을 열게 해 줄 것이다. 하지만 전국옥새는 엄청난 영력을 공급해 줌으로서 내게 강림한 대라신선이 강대한 적과 싸울 수 있게 하는 동력이기도 했으므로, 전국옥새가 없을 경우 설혹 내게 장삼봉 진인이 강림해서 싸운다 해도 오래가지 못해서 내 잠력을 끌어쓰다가 자폭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국옥새까지 바쳐서 정보를 알아낸다면 앞으로 강대한 사도급 적과 싸울만한 동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당연히 크나큰 손실이었으므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선지자. 후불로 하겠다."

[ 후불이라고...?]

"지금 내놓은걸 다 바치고, 부족한 정보의 대가는 나중에 주도록 하지. 지금 당장 가진 게 부족해서 말이야."

선지자가 놀란 듯 말했다.

[ 흐음... 후불이라고... 살면서 내게 후불을 제안한 자는 없었다.]

"못 받아들일 이유라도 있어? 네가 말한대로 나는 해신을 쓰러뜨릴 정도의 영웅이라고. 게다가 나는 삼황오제의 사도! 이번 사태가 지나가면 100년이든 200년이든 걸려서라도 네게 충분한 대가를 지불할 것을 약속하지."

[ ......]

과연 후불제안은 받아들여 질 것인가?

잠시 후 선지자가 말했다.

[ 불가(不可).]

"왜?!"

나는 당혹해서 말했다.

"난 충분히 갚을 능력 있어! 내가 전생자라는게 무슨 뜻인지는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 능력과 명성, 자격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 넌 삼황오제의 사도이기도 하고... 하지만 전생자라는 게 바로 후불을 거부한 이유다.]

"무슨 뜻이지?"

[ 전생자는 죽었다가 다시 시작하면 끝이지... 네가 후불을 신청해놓고 수틀리면 사망해버리면... 난 절대 후불의 나머지를 받을 수 없지... 그렇지 않은가... 사령술로 네 영혼을 불러올 수 있을지는 신조차도 모르고...]

"......"

[ 또한 지금 상황은... 네가 난데없이 돌연사하기 최적의 상황...]

선지자가 곱지 못한 기색으로 나를 노려보는 듯 했다.

[ 너는... 먹고 튈 위험이 너무 높다... 우주에서 가장 높지... 넌 무조건 선불이다...]

무조건 선불!

나는 그 말을 듣자 머리가 띵해졌다. 확실히 나 자신이 전생자이니 그런 생각을 안 해 봤지만, 내가 전생자라는 걸 아는 입장에서는 저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멍하니 있자 선지자는 품평하듯이 늘어놓아져 있던 보물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 하지만... 창힐 본인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마왕이 발호한 이유... 마왕의 목적... 최초의 문자에 대해서 정도는 알려줄 수 있겠군... 그 정도라면 대가가 남겠어...]

"정말이냐?"

[ 나 또한 너희의 대립이 흥미진진할 거라 예상한다... 가능한 객관적으로 제시해봤으니 이런 교환은 어떤가...]

나는 고민했다. 그리고 말했다.

"좋아."

전국옥새를 바치거나, 미해방 상태의 수요나 월요를 바쳐서 억지로 정보를 끌어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차후의 생에서 해도 되는 일이고 지금 칠요를 선지자에게 줘버리면 천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아직까지 내게 비장의 수는 남아있으므로 주변정보부터 듣기로 한 것이다.

' 정 안되면 강도라고 인식되는 한이 있어도 비밀도서관에서 서적을 빼내서 창힐의 정보를 얻고 말겠다.'

선지자가 말하기 시작했다.

[ 우선 마왕이라 불리는 그 존재가 발호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늘 중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 인과율 때문에 인간의 몸을 강탈해서 유희를 즐기는데 그쳤지... 하지만 얼마 전 누군가가 그 자에게 접근해서 인과율을 무마할 수 있는 지보(至寶)를 마왕에게 건네주었다...]

"지보? 보패인가?"

[ 그건 잘 모른다... 하지만 인과율을 무화(無化)시키는 보물은 천상천하를 통틀어도 찾기 힘들다... 천계에도 한두개 있을까말까 싶은데... 마왕이 어떤 보물을 손에 얻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당사자만이 알고 있겠지...]

"흐음."

[ 또한 그 움직임은 창힐의 화신인 팔부중(八部衆) 중에서... 긴나라(緊那羅)라고 불리는 존재가 의도한 것...]

"긴나라라고."

나는 선지자에게 물었다.

"긴나라는 얼마나 강하지? 어떻게 생겼고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지?"

[ 그건 앞서 말한 비밀보호 조약때문에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긴나라는 팔부중 가운데서 가장 변신술에 능하고 인간형에 가까우며... 팔부중의 두뇌 역할을 한다... 또한 내가 알기로 긴나라는 이미 마왕과 긴밀한 친분관계가 있었다고 알고 있다...]

"으음. 좀 이상한데?"

[ 뭐가 이상한가...]

"팔부중은 창힐의 화신이잖아. 그러면 다들 한마음 한뜻인 거 아냐? 두뇌 역할이라는 말이 좀 이상한데."

[ 흐흐... 화신은 관념체(觀念體)다. 비단 창힐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화신들은 본체와 달리 자기만의 의지를 지니고 있지... 독립된 인격체로서 살아가고 있다... 단지 그들의 본질이 변하지 않을 뿐.]

"흠!"

이건 뜻밖의 정보다.

화신의 의지가 꼭 본체인 창힐의 의지와 일치하지는 않는 것이다. 물론 명령을 내리기 때문에 본체에게 따르고 있겠지만 생각보다 먼 관계로 보였다.

' 그 말대로라면 팔부중은 각각 다른 인격을 가진 놈들이 8명 모여있는 셈이군.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뭉친 집단에 가까워.'

내가 생각하고 있는 동안 선지자의 말이 이어졌다.

[ 짐작하고 있겠지만... 너와 네 일행이 창힐의 역린을 건드렸기에 그가 즉각반응한 건 확실하다... 이미 너희의 전쟁은 시작됐지...]

"최초의 문자에 대해서도 알려줘."

[ 최초의 문자는... 그건 창힐이 신대(神代)에 문자를 만들었던 사건과 관련이 있지...]

잠시 뜸을 들이던 선지자가 말했다.

[ 백웅이여... 무릇 생명과 의지가 있는 존재가... 문명을 발달시키는데 문자(文字)가 필수적이라 보는가...]

나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당연한 거 아냐? 문자가 없으면 지식과 정보를 기록할 수도 없고 소통할 수도 없잖아."

[ 아니... 꼭 그렇지는 않다... 우주의 여러 지성체 중에는... 문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주술만으로 문명을 발달시킨 존재들도 많지... 뿐만 아니라 문자의 위험성 때문에 일부러 문자를 크게 발달시키지 않은 자들도 많이 있다.]

"문자가 위험해?"

[ 문자란... 이름(名)을 품고 있으며... 이름은 존재를 정의하기 때문이지...]

이름이 존재를 정의한다?

알쏭달쏭한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선지자의 말이 이어졌다.

[ 창힐은 그저 인간에게 한자를 만들어준 것 뿐만이 아니라... 모든 대륙의 모든 인종에게 언어의 원형과 기원을 만들었다... 그것은 문명의 발달속도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그 자체로 인간이라는 족속에게는 제약이 걸린 셈.]

"그러니까 그 제약과 위험성이 뭐냐니까."

[ 창힐의 가호를 받은 자는... 해당언어권 내에서는 절대적인 지배력을 발휘하지... 문자가 인간의 무의식에 간섭해서 영혼째로 복종시키는 것이다... 문자를 움직여서 간접적으로 존재의 이름을 지배하고... 그 지배력으로 본질마저 장악해 버리는 것.]

"......!!"

문자로 이름을 지배한다는 건가!

[ 이것은 고대부터 완벽하게 짜여진 지배구조... 너희 인간의 문자가 창힐에게 예속됨으로써... 가축에게 채워진 목줄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선지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창힐은 자신이 계속해서 인간을 지배하길 원한건가."

[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너희 인간의 문자가... 지독히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대주술의 결과물이라는 건 확실히 말해두지...]

"아무튼 그렇다 치자고. 그래서 최초의 문자는 한자(漢字)라는 거야?"

[ 아니... 그렇지 않다...]

"그럼?"

선지자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 내가 알기로 창힐이 인간의 문자를 만들었지만... 그 행위를 용인하고 허용한 것은 황제(黃帝) 공손헌원이다. 그리고 창힐이 황제를 알현하여 문자를 만들기를 간청했는데, 그 때 황제는 창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 "우리가 약속을 지키고 있음을 증명하는 글자를 먼저 만들어라. 그리고 내게 바쳐라"라고...]

"......?"

약속?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걸까?

그리고 '우리'라는 건?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선지자의 말이 이어졌다.

[ 그러자 창힐이 난색을 표하며 그런 글자는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기 어렵다 했지... 그러나 황제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고 했고... 어쩔 수 없이 창힐은 원래 만들었던 문자를 폐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지... 그리하여 바쳐진 문자에 황제는 만족하였고... 나머지 하위문자를 만들도록 허락했다... 그 이후에 한자(漢字)나 기타 문자들의 원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뭔가... 어렵군."

[ 나 또한 천계의 정보를 입수하던 중 우연히 알게 된 일이다... 이건 우리의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비사(秘事).]

"황제는 그런 글자를 왜 만들라고 한 건데?"

[ 난 모른다... 황제는 모든 삼황오제 중에서 가장 비밀에 싸인 존재... 어쩌면 같은 삼황오제조차도 그의 속내를 헤아리지 못할지도 모르지.]

"흐음..."

[ 아무튼 그때 만들어져서 황제에게 바쳐졌던 문자가 바로 '최초의 문자'. 창힐은 그 최초의 문자에 자신의 신성을 쏟았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 문자를 대하면 약해지게 된다. 그의 수하나 화신 또한 마찬가지지...]

"흠. 창힐이나 그의 권속 외에는 그 문자의 효력이 없는 건가?"

[ 그렇다고 알고 있다...]

뭔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비사(秘事)다. 나는 당연히 창힐이 주도적으로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황제가 요구한 것이었다. 그것도 뭔가 명확한 이유를 가지고 창힐에게 만들라고 시킨 것과 다름없었다. 창힐은 적당히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한자의 원형도안만 황제 앞에 가져갔겠지만 뜻밖의 잔업을 했던 것이리라.

또한 저 일화에서 알 수 있는 건 황제는 분명히 창힐을 발 아래로 두고 있으며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는 존재였다. 창힐의 간교한 꾀로 휘두르는 게 불가능한 절대군주가 틀림없었다.

황제 공손헌원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왜 그런 글자를 만들라고 했던 걸까?

나는 퍼뜩 생각이 나서 말했다.

"그렇다면 최초의 문자가 뭔지 알고있는 건 황제 공손헌원이라는 건가?"

[ 그렇다...]

"최초의 문자가 기록된 문헌은 없어?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던가..."

선지자는 약간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 미안하지만... 그런건 없다... 우리 종족은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수집하고 있지만... 그 최초의 문자는 만들어지자마자 황제에게 바쳐진 것이므로... 책에 기록되었을 리가 없지... 우리 종족조차도 도서관에 그건 수집할 수 없었다.]

"......"

[ 다만... 황제와 동렬에 있는 삼황오제는 모두 그 문자를 알고 있으며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가!"

나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보통이라면 이게 무슨 단서겠냐고 하겠지만, 지금의 내겐 다르다.

' 나는 삼황오제 전욱의 사도!'

심지어 그의 밀명을 받아서 처리하고 있으며 연회에도 초대받았고 그의 권능을 받아서 5년간 수련까지 했던 것이다. 인간 중에서 나보다 전욱과 친한 존재는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전욱에게 잘 부탁한다면 그 '최초의 문자'라는 게 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선지자가 말했다.

[ 아직 대가가 남았다... 적당한 부탁을 하면 들어주지.]

선지자는 바가지를 씌우는 경향은 있었지만 대가가 남을 경우 확실하게 정산해 주는 깔끔함도 지니고 있었다.

' 게다가 지금 대답해준 걸 보면 아닌 척 하면서 상당히 많은 정보를 흘렸어. 저 놈은 중립을 유지하는 척 하면서 나와 창힐이 대립하는 걸 즐기고 있군... 역시 비밀보호조약은 말 뿐이야.'

저런 성향은 나중에 또 이용해먹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선지자의 제안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두 가지 질문을 하고싶은데."

[ 해라...]

"먼저, 이 화요에 깃든 화룡진인이 부상당했어. 그녀를 해신의 마력에서 빨리 회복시킬 방법이 없을까?"

[ 잠시 보자...]

선지자는 화요의 검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 강대한 화염의 기운으로 화요를 활성화시키는 수밖에 없겠군... 화요가 불의 힘을 상징한다지만 외부에서 도와주면 더 좋겠지... 인간계에서 찾을 수 있는 최강의 화염을 찾아라.]

"그렇군."

[ 다른 질문은...?]

나는 제갈사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말했다.

"제갈사가 맺은 계약을 끊을 방법이 없을까?"

[ 마왕이 죽던가... 그게 아니라면 마왕이 알아서 해제시켜주는 수밖에... 영혼째로 만마전에 종속되는 계약은 타인이 풀어줄 방법이 없다.]

"... 정말 방법이 없을까?"

[ 답은 정해져있으니 대답만 하라는 거냐...?]

"그, 그런건 아닌데."

[ 몇 번을 물어도 안되니 다른 질문을 해라...]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 그럼 내게 마도서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줘!"

[ 음...?]

"격이 낮은 거라도 좋아. 괴어(怪語)를 읽을 수 있게 해줘."

선지자는 뜻밖의 요구인듯 당혹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말했다.

[ 꼼수로군...]

"......"

[ 뭐 좋다... 이 정도는 봐주도록 하지...]

파앗

잠시 후 선지자의 촉수에서 빛이 뻗어나오더니 내 몸에 적중했다. 나는 초록빛이 내 몸에 머물다가 머릿속으로 갑작스럽게 정보가 밀려들어오는 걸 느꼈다. 잠시 후 나는 대단한 양의 정보가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선지자가 말했다.

[ 기초적인 능력만 넣어두었다... 그걸로 못 읽어도 책임은 못 진다.]

"대가는 이걸로 끝인가?"

[ 그렇다.]

선지자가 히쭉 웃는 듯 했다.

[ 모쪼록 재밌는 전쟁을 보여주시길...]

괴이한 이족 특유의 웃음소리와 함께 선지자가 장내에서 사라졌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이 해석능력으로 내가 얻은 뇌음사의 마도서를 해석해보는 수밖에 없다.

"차악이면 어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을 달성하려 하고 있으므로 그럴듯한 논리만 가지고는 끝까지 갈 수 없을 게 뻔했다. 무리를 연발하고 억지만 계속 부리는 한이 있어도 나는 결코 꺾이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최악 중에서 차악을 선택하는 경우가 빗발치더라도.

앞으로 동료와 효율 사이에서 고민하는 경우가 많아지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신념을 가지고 끊임없이 행동하며 최선을 찾아내는 것 뿐이다.

나는 선지자에게서 되돌아와서 망량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전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마도서 해석능력으로 뇌음사의 고서(古書)를 해석 가능한지를 살펴보았다.

우웅

"읽힌다!"

마도서의 괴어는 인간의 언어나 문자체계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렇기는 커녕 이족만이 해석가능한 본질적인 주언(呪言)에 가까웠다. 예전에 마도서의 괴어를 인간학자가 해석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던 망량선사의 말이 즉시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잘 됐구려."

망량은 크게 기쁜 기색으로 말했다.

"창힐이 뇌음사의 서적유출에 반응했다는 것은 이 내용에 반드시 그에게 치명적인 비밀이 수록되어 있다는 뜻이오. 반드시 이 마도서에서 찾아 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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