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6 암천향(暗天鄕) =========================================================================
나는 우선 창힐의 분신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뇌음사로 가기로 했다. 계획이 정해지자 망량이 내게 말했다.
"백웅. 뇌음사의 라마들은 중원인에게 상당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다고 알고 있소. 그 곳은 예로부터 중원과 잦은 분쟁이 있었던 지역이니 당연한 일이오."
망량의 말에 따르면 뇌음사의 라마들은 모두 무공과 밀법(密法)을 높은 수준으로 익히고 있는 무승(武僧)들이었고, 무림세력으로 분류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적대성이 높기 때문에 중원고수들과 적지 않게 다툼이 벌어지곤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게 좋겠소?"
"여러가지 계책이 있겠으나 모두 탁상공론. 우선은 그들에게 선물을 준비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게 상책이오."
"알겠소."
나는 예전에 제갈사와 함께 돌아다닐 때 변황 쪽에도 가본 적이 있었기에, 금세 그 근처로 찾아갈 수가 있었다.
파앗
' 이쯤에서...'
토번(吐蕃)에 있는 청장고원(靑藏高原)에 도착한 후, 나는 천신경의 술수를 써서 라마의 영혼을 찾아내서 소환했다. 불려나온 라마는 예전에 내가 부른 것과 같은 카란 라마였고, 그는 서장밀교의 중진이었던 고승이었다. 나는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인사했다.
"반갑소. 카란 라마."
과거 전생에서 카란 라마는 배화교의 성지를 내게 안내해준 적이 있었다. 물론 나는 구면이지만 카란 라마 입장에서는 나와 첫 대면이었다.
[ 음... 나를 알고 있는가? 천신의 술수를 쓰는 자여. 내게 무슨 부탁을 하려 하는 것이오?]
"나는 뇌음사에 가려 하오. 그 곳으로 안내해 주고 그곳 라마들과 이야기할 수 있게 그들의 말을 통역해서 대화해 주시오."
[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대의 부탁은 두 개요. 두 개의 불꽃을 꺼뜨려도 좋소?]
나는 이런 일에 천신경의 불꽃을 두 개나 쓸 생각은 아니었기에 손사래를 쳤다.
"그건 아니지. 그렇다면 길은 어떻게든 내가 찾아갈 테니 통역만 해주실 수 있겠소?"
[ ......]
카란 라마는 고심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 알았소. 특별히 하나의 불꽃으로 두 개 다 들어주겠소.]
"고맙소."
카란 라마는 꽤 후한 성격으로 보였다. 이윽고 카란 라마가 내 몸에 빙의해서 달리기 시작했고, 그는 대략 삼백 리에 이르는 길을 쉴 새 없이 가다가 어느 순간 방향을 틀어서 재차 오백 리를 달렸다.
' 멀군...'
곧이어 고원분지에서 꽤 내려와서 신비한 산맥(山脈)의 내부로 들어왔는데, 카란 라마는 그 산맥도 유유히 헤쳐나가며 자기만 아는 길을 달리는 듯 했다.
타닷
카란 라마는 이윽고 곳곳에 펼쳐져 있던 나무를 손바닥으로 치며 빙빙 돌듯 움직였다. 나는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궁금해서 물었다.
[ 뭐 하는 거요?]
[ 이 곳은 진법(陣法)이 펼쳐져 있어서 평범한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들어올 수 없소. 내 기억에 있는 해제방법대로 행해 보겠소.]
기문진식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건가?
확실히 뇌음사는 무림세력으로 보였다.
스스스
잠시 후 카란 라마의 기이한 움직임이 여덟 번의 회전을 거듭하자, 도처에 깔려있던 신비한 안개가 걷히고 조그마한 오솔길이 하나 드러났다. 카란 라마는 거침없이 그 오솔길을 따라서 밑으로 내려가다보니, 분지에 커다란 서장양식의 불사(佛寺)가 세워져 있는게 눈에 보였다.
[ 저게 바로 뇌음사요.]
[ 으음...!!]
카란 라마가 내 몸을 움직여 뇌음사의 정문까지 왔을 때였다.
"카핫!"
부우웅
갑자기 주위에서 다섯 개의 철장이 날아들며 나를 공격했다. 카란 라마는 자신의 경신법을 사용해서 그 공격을 피했는데, 하나하나의 공격이 상당한 일류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무형의 경기를 강하게 발현하는 걸로 봐서는 몇 년간 일류무공을 고련한 게 틀림없었다.
어느 새 주위에는 다섯 명의 라마들이 나와서 나를 포위하고 있었는데 선두에 있던 자가 외쳤다.
"웬 놈이냐? 감히 중원놈이 우리의 중지를 범하느냐?"
"죽여버리자!"
카란 라마가 빙의하고 있어서인지 그 서장말은 그대로 통역되어서 내게 들렸다. 카란 라마가 마찬가지로 서장말로 대꾸했다.
"나는 카란이다. 사정이 있어 칼파의 침묵을 기다리지 못하고 타인의 몸을 빌려 고향을 찾아왔다. 너희는 칼리유가를 함께 사는 영혼의 동포에게 칼을 겨누지 말라."
"아니?"
카란 라마가 한 손으로 자세를 잡고 인사했다.
"드와파라 까르끼."
술렁
카란 라마의 서장말이 유창해서인지 라마들은 눈에 띄게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그들 중 가장 신분이 높아보이는 라마가 앞으로 나와서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아무리 보아도 중원인이다. 그런데 어찌 비밀스러운 라마의 귀환인사를 알고 있는가?"
"이 몸의 주인은 중원인이지만 나는 영혼이 되어 그에게 빙의해 있다. 나는 알끼 라마의 고제자였던 카란 라마이니 내 신분을 현 주지에게 전하면 알 것이다. 나는 기다릴 테니 이야기를 전하라."
"음... 기다려라!"
잠시 안에 들어갔다 나온 라마들이 동시에 인사하며 말했다.
"따라오시오!"
나는 그들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웅전으로 보이는 커다란 건축물로 안내되어, 그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오종종한 외모의 조그마한 라마와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 라마를 대면하는 순간 크게 놀랐다.
' 헉... 무공수위가...!!'
굉장히 높다!
볼품없어보이는 외모이지만 저 조그마한 라마가 품고 있는 내공과 의형지기는 굉장한 수준이었다. 중원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힐 정도가 아닐까? 이 정도의 초절정고수가 새외에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장밀교를 대표하는 뇌음사의 주지이니 저 정도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뇌음사의 주지는 검버섯 가득한 얼굴을 들어서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대... 확실히 카란이군... 반갑네..."
카란 라마가 놀란 듯 말했다.
"요르한인가...!! 자네가 아직도 살아있었는가."
"크흐흐... 내 동기를 이렇게 보다니 반갑군."
가래끓는 목소리로 말한 요르한 주지가 껄껄 웃었다.
"영혼이 된 그대도 생각지 못한 모양이군... 하긴 내가 나이 이백팔십 세가 넘어서도 살아있을 거라곤 그대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야..."
"요르한... 그대의 수양이 위대한 경지에 이르렀구나."
"스승 알끼보다 오래 살았다네."
"정녕 오랜만이군."
스윽
두 라마가 서로 인사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심 혼란해졌다.
' 뭐? 저 뇌음사의 주지 요르한은... 이백팔십 세를 훨씬 넘었단 말인가?'
인간이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요르한의 공력과 수양은 내가 일견에 판단한 것보다 훨씬 높은 게 분명하다. 내가 놀란 감정을 추스리고 있을 때 뇌음사 주지 요르한이 말했다.
"카란... 그대는 위대한 술수에 사역된 모양이군..."
"그렇네. 이 몸의 주인이 뇌음사에 알아볼 게 있다 하여 찾아왔네. 부디 좋은 답변을 들려주시게."
"흐흠... 탐탁지 않아..."
요르한은 뭔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그 술수는... 종말의 때에 안식의 권리를 주는 술수... 허나 그 안식이 진짜인지 누구도 확인하지 못했지. 그게 달콤한 거짓말인지... 혹은 진실인지..."
카란 라마가 탄식했다.
"하아! 나도 마찬가지일세. 오랜 세월 황야에서 고행하며 신의 뜻을 알아보려 했으나 알 수 없었지. 허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으니 마지막 희망에 걸어볼 수밖에 없지."
"크흐흐... 업보... 업보로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잠시 후 요르한이 말했다.
"그 자에게 몸을 돌려주게... 원하는대로 질문에 답해주지."
"알았네."
쉬익
카란 라마가 내 내면으로 들어오고 내 자아가 전면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카란 라마가 소환해제된 것은 아니었고 그는 여전히 내 정신의 한켠에 남아서 서장말을 통역해주는 일을 할 듯 했다. 아니나 다를까 요르한의 말이 마치 중원말처럼 자연스럽게 통역되어 들려왔다.
"카란 라마를 사역하는 자여. 그대는 무슨 일로 뇌음사에 찾아왔는가?"
나는 카란 라마의 능력을 빌려 서장말로 대꾸했다.
"나는 고대의 존재, 창힐의 화신에 대해서 알아보려 찾아왔소."
"창힐..."
"내가 알기로는 창힐의 화신이 총 여덟이 있으며, 뇌음사에서는 그 화신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하여 알고싶어서 찾아왔소."
요르한 주지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물론 알고 있다..."
"알려주시오!"
"허나 그건 뭐하려고 알고 싶은가...? 그대는 창힐을 죽이려 하는가?"
나는 요르한 주지의 질문에 뭐라고 답할지 망설였다. 그러다가 대답했다.
"나는 삼황오제 중 전욱의 사도요. 그리고 전욱이 내게 내린 명령은 창힐을 찾아오라는 것이었기에, 분신의 행적을 알아내서 창힐을 찾을 생각이오. 죽이라는 명령은 따로 듣지 못했소."
보통이라면 이 대답을 미친놈 취급할 것이다. 중원무림에서는 삼황오제를 실존한다고 여기는 사람도 거의 없을 뿐더러 사도에 대한 개념도 전무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요르한에게 대답하는 걸 망설였지만 일단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내가 그를 속이려 한다는 인상이 심어질 수 있었기에 사실대로 말했다.
잠시 후 요르한 주지가 가래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 천지가 요동치며... 바다의 신이 쓰러진 대사건... 그것은 바로 신의 사도인 그대가 해낸 것이었구나."
"......!! 그대는 해신의 죽음을 알고 있소?"
"물론... 우리도 천기를 전해듣고 있으니까..."
요르한 주지는 내 사정을 잘 이해하고 있는 듯 했다. 단순한 무림세력 뇌음사의 수장일 뿐만 아니라 신비한 비밀에 대해서도 정통해있는 자였다. 아무래도 삼황오제나 사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걸로 보였다. 요르한 주지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
"그대는 정녕 위대한 영웅... 아낌없이 알려 주리다... 허나 그 전에 약속을 하나 듣고 싶소..."
요르한 주지는 내게 경어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나는 반문했다.
"무슨 약속?"
"화신에 대한 정보를 그대에게 전달하고 나면... 창힐은 우리 뇌음사를 뿌리째 멸망시키려 할 것이오... 그의 기휘(忌諱)를 범했기 때문..."
"......"
"허나 그건 두렵지 않소... 이 세상의 생과 사는 하나... 그대는 공연히 창힐과 충돌하려 하지 말고... 흔적을 알아내어 삼황오제에게 넘겨 주시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나는 요르한 주지에게 대꾸했다.
"만일 창힐의 화신이 그대들을 멸하려 뇌음사에 찾아온다면 그것이야말로 기회. 나는 그 분신을 붙잡아 쓰러뜨려 주겠소."
"... 그대는 창힐이 신(神)이라는 걸 모르는가...?"
"무슨 말이오?"
요르한 주지는 길게 탄식했다.
"신이란 존재와... 싸우려 드는 건... 그대의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오... 창힐의 화신이 직접 찾아오지도 않을 뿐더러... 창힐은 아무렇게나 세상을 움직여서 우리를 멸할 수 있소... 공연히 그의 끄나풀과 대적하다가... 영웅의 모든 정보가 낱낱이 밝혀져서... 창힐을 쓰러뜨릴 가능성이 사라져버릴 것이오."
나는 그의 말을 한번에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머리를 긁적였다.
"요르한. 나는 머리가 좋지 않아서 그대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소. 좀 더 쉽게 설명해 주시오."
"창힐의 화신은... 당신이 쓰러뜨린 해신처럼 전면에 나서는 일이 거의 없소... 그들은 이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부터 가장 밝은 곳까지... 제 집처럼 드나들면서... 인간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이해하면서... 모든 걸 조작할 수 있지..."
요르한 주지의 우묵한 눈이 내게로 향했다.
"창힐은 결코 힘을 힘으로 상대하려는 자가 아니오... 그는 천하에서 가장 교활한 존재... 영웅 그대가 모르는 사이에... 그대 또한 창힐의 마수에 걸려서 통제되고 있을지도 모르오..."
"으음."
"그렇기에 우리 뇌음사를 멸하려는 시도도... 결코 화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그들의 끄나풀을 잔바람처럼 움직이겠지... 과거 중원무림과 우리 뇌음사, 서장무림의 충돌 또한 창힐의 뜻대로 의도된 것... 그는 간교한 책략에 능숙하며, 또한 그것을 즐기는 존재라고 할 수 있소..."
"......"
"설혹 그대의 힘이 해신을 쓰러뜨릴 정도라 하더라도, 창힐의 화신과 정면승부할 기회같은 건 없을 것이오... 창힐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테니 더더욱 당신과 정면으로 싸우지 않겠지..."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에게 말했다.
"그러면 화신의 정보를 내게 줄 필요도 없는 거 아니오? 그런 놈이라면 화신의 정보가 무슨 의미가 있소?"
"있소... 지금부터 내 말을 듣고 나면 알 수 있을 것이오."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 건가.
"말해 주시오."
"창힐의 화신 여덟 명은 팔부중(八部衆)... 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이라고 불리오."
나는 요르한 주지의 말에 깜짝 놀랐다.
"팔부중! 그건 불교의 수호신 아니오?"
"그렇소... 말 그대로의 존재... 천축신화의 내밀한 부분에 관여하고 있는 그 팔부중들은 신화시대부터 존재해 왔소... 단지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창힐의 화신이란 점이 다를 뿐."
"......"
팔부중!
그들은 불교의 수호신으로서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렸다. 천인, 용, 야차, 건달파,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로 이루어져 있는 그 존재들은 사천왕을 모시며 불법을 수호하는 무력(武力)을 담당한다고 하며 종종 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나도 불교와 불경을 공부해서 이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설마 팔부중 그 자체가 창힐의 화신일 줄이야?
요르한 주지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 뇌음사의 서적에 전해지기를, 팔부중은 모두 변신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신화(神化)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오."
"신화?"
"물질계의 본질을 벗어던지고 정령체(精靈體)가 되어 강대한 권능을 사역하는 궁극적인 형태를 의미하오. 술법사의 극한 중 하나지..."
그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과거에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 그의 힘은 확실히 마력에서 비롯된 게 아니네. 신화(Theosis)의 힘이지.]
[ 아까 이반 4세에게서 느껴지는 힘이 마(魔)가 아니라 했었지? 그 말은 옳다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집착하다가 신화(神化)의 힘에 손을 대었기 때문일세.]
[ 설명한 그대로일세. 신화(Theosis)는 신의 경지에 한없이 다가가버린 인간을 동방정교회에서 칭하는 단어. 지금 이반 4세는 반신(半神)이라고 할 수 있지.]
과거 아라사 제국의 미친 제왕, 이반 4세와 충돌할 때 수도사 벨로프가 해준 이야기였다. 그쪽에서도 이반 4세의 상태를 신화상태라고 칭했고, 반신에 가깝다고 말했다. 마(魔)가 아니지만 한없이 강대한 정령체 상태로 변화해서 자연계의 힘을 사역하는 걸 신화라고 일컫는 모양이었다.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 빌어먹을...'
이반 4세는 병약한 인간이 변화했을 뿐인데도 칠요를 해방해야만 상대할 수 있는 강력한 존재로 변신했었다. 그렇다면 본래부터 창힐같은 신적 존재의 화신으로서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던 놈들이 신화하면 얼마나 강해진다는 걸까? 아무래도 팔부중은 꽤나 귀찮은 적이 될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직접충돌을 꺼리고 책략을 써 온다면 상대하기가 더더욱 귀찮을 게 틀림없다.
내가 침묵하는 동안에 요르한의 말이 이어졌다.
"앞서 말했듯 팔부중은 온갖 모습으로 변신하여 인간세상의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소... 그 자는 평범한 행인일수도 있고, 요염한 여인일수도 있고, 관리일수도 있고, 승려나 도사일수도 있고, 무림인일 수도 있소... 그들은 그렇게 수천 년동안 인간세상에서 암약하면서 인간을 관찰하여 창힐에게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하오."
"... 그렇게 변신하고 있다면 도대체 무슨 수로 찾아내야 하오?"
"두 가지 방법이 있소..."
요르한 주지가 말했다.
"그들의 변신능력을 깰 수 있는 강력한 법보나 보패, 무공, 주술로 그들을 직접 공격하든가... 그게 아니라면 최초(最初)의 문자(文字)의 힘을 빌려야 한다 하오..."
전자의 방법은 무의미했다. 애초에 변신했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직접공격은 역설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후자의 방법에 귀가 솔깃해서 물었다.
"최초의 문자라면?"
"창힐은 인류 최초로 문자를 발명한 존재요... 허나 문자의 발명은 인류에게는 재앙이었다 알려져 있으며... 도리어 창힐의 근원이 문자에 예속되게끔 했다 하는데... 그 때문에 창힐과 그의 권속들은 최초로 만들어진 문자의 힘에 약하다 하오."
"그 문자가 혹시 한자(漢字)요?"
"그건 알 수가 없소..."
"어째서? 창힐이 한자를 발명했을텐데."
요르한 주지가 대꾸했다.
"그걸 알 수가 없다는 것이오... 창힐이 발명한 게 비단 한자 뿐만이 아닐 가능성이 높기에..."
"......!!"
"그 자는... 인류의 역사를 초월한 신비(神秘)에 맞닿은 신적 존재... 최초의 문자가 무엇인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소..."
그 말대로라면 창힐이 최초로 만들어낸 최초의 문자가 무엇인지는 조사해봐야 알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최초의 문자'가 무엇인지 알아내야만 사황(史皇) 창힐을 비롯한 그 권속에게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오시오, 영웅이여..."
요르한 주지를 따라서 웬 서고로 가자, 그가 책 스무 권을 골라서 내게 주었다. 하나같이 복잡한 서장어와 범어로 되어있어서 해석하기 어려워보였다. 뿐만 아니라 종종 이족의 언어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나는 이족의 언어가 적힌 걸 보자 놀라서 말했다.
"이건 마도서?"
"신이 직접 작성한 건 아니고, 열화되고 열화된 인간마도사의 저작물이지만... 어쨌든 신대의 비밀이 담겨있소... 부디 잘 해석해서 창힐의 정보를 알아내 보시오."
"고맙소."
말하자면 창힐의 정보가 담긴 하급 마도서를 뇌음사에서 보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나는 요르한 주지에게 말했다.
"창힐이 함부로 이곳을 공격하지 못하게끔 수시로 들러보겠소. 최대한 보호해 드리겠소."
그러자 요르한 주지가 씁쓸하게 말했다.
"생사는 무의미... 공연히 신경쓰지 마시길..."
"......?"
요르한은 왜 생사가 무의미하다는 걸까?
나는 의문을 느끼면서도 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장령곡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갈사와 망량, 천우진 등에게 내가 얻은 소득에 대해서 말해주고 하급마도서를 비롯한 서적들을 보여주었다.
제갈사는 하급마도서를 훑어보다가 말했다.
"확실하군. 해석할 가치가 있겠어."
"얼마나 걸릴까?"
"글쎄. 마도서의 격이 낮다 해도 해석하는 시간이 딱히 적게 걸리는 건 아니거든... 직접 소통해서 봉인을 풀 생각이 아니라면 적어도 석 달은 걸리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제갈사가 말했다.
"창힐의 약점이 되는 최초의 문자에 대해 알아봐야겠어. 망량!"
망량은 제갈사의 부름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갑골문을 비롯해서 고대문헌을 해석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조금 기다려. 내가 이 마도서를 해석한 후에 시작하자고."
"선지자와의 거래를 최대한 유리하게 하시려는 거군요."
망량의 말에 제갈사가 말했다.
"그런거지. 그때까지는 망량 너는 강해진 신기를 바탕으로 천우진에게 술법을 배워라. 그리고 백웅 너는 슬슬 검마를 이쪽으로 빼 와."
"검마를?"
"예전 한백령이 그정도 평가를 했다면 검마는 이미 쌍검술을 터득했을거다. 그를 더 내버려두느니 이제는 확실한 전력으로 쓰자고."
제갈사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알았어."
나는 제갈사의 말을 듣고서 바로 한씨세가로 이동했다.
그러나 한씨세가에 도착했을 때 예상치도 못한 광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반갑군, 신의 사도여...]
쿠궁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느 새 한씨세가의 모든 식솔들은 제압당해서 묶여 있고, 한진성 또한 점혈당해서 꿇려앉혀져 있었다. 그리고 한씨세가의 가주가 앉는 의자에는 한 무면탈의 괴인이 턱을 괴고 앉아서 내 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
그의 옆에는 한백령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져 있었다. 한백령은 끝까지 저항한 듯 주변이 폐허가 되어 있었지만 중과부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백령의 등을 밟고 있는 것은 황금용가면을 쓰고 있는 수신류의 호법사자였다.
백련교주가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 난 그대와 동맹을 맺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