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3 암천향(暗天鄕) =========================================================================
"이건 의술로 치료할 수 없는 분야인데..."
나는 곤란함을 느꼈다.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망량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지금 그의 상태는 몹시 위험해 보였다. 이대로 놔두면 망량이 객사할 위기였으므로 나는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의술은 신열같은 신비현상을 치료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장삼봉에게 물었다.
"장 진인께서는 이 현상의 해결법을 모르십니까?"
[ 임의로 내가 그의 몸에 강신해서 신기를 다스려줄 순 있겠으나...]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 그럴 경우 그의 정신력이 버티지 못하고 충격사할 것이오.]
"헉! 대체 왜..."
[ 대라신선이 강령하는 존재감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오.]
"음..."
나는 장삼봉의 말을 듣자 납득할 수 있었다. 애초에 대라신선들의 힘의 잔재가 신열이었고, 그걸 버티지 못해서 망량이 생사를 오가고 있는 상태이다. 그 상황에서 대라신선처럼 강대한 정신체가 몸에 비집고 들어오면 망량의 정신이 타버릴 수도 있다.
"다른 술법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모르십니까?"
[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그리고 나는 우도를 연마했기에 술수에 관해서는 잘 모르오.]
"끄응."
그럼 제갈사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 하지만 제갈사는 마도사인데...'
술법사 특유의 강령부작용인 신열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
그래도 일단은 제갈사를 찾아가야 한다. 내가 갖고 있는 술법지식, 태평요술이나 천신경에는 딱히 신열을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선 망량의 술수지식을 쓸 수 있다면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 수준이 현격히 낮아서 해석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장령곡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장령곡에서 제갈사는 늘 있던 자리에 있지 않았고, 지금은 자리를 비운 듯 했다. 시비에게 질문하자 시비가 대답했다.
"주인님은 급한 일이 있어서 외출하셨습니다."
하필 이럴 때...
나는 제갈사가 있다면 이혼대법으로 초상기인에 망량의 혼을 넣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건 어찌되었든 차선책이며 사후처리다. 망량이 죽어가고 있는 이 현상을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다음 해결책으로 십이율의 도움을 받는 게 생각났다. 십이율에는 술법을 전문으로 하는 문파들이 있으니 신열을 회복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급히 몸을 옮겨서 해동밀천(海東密天)의 본거지로 향했다.
파앗!
"아닛?"
난데없이 해동밀천의 천주가 있는 장소에 나타나자 근처에 있던 술법사들이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있던 해동밀천의 천주는 힐끔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 당신은 누구지?"
"나는 얼마 전 당신들과 함께 싸웠던 백웅. 또한 십이율주요."
"어이없는 소리를..."
그는 비웃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옆에 끼고 있던 반라의 여인의 몸을 더듬으며 말했다.
"꺼지쇼. 나는 큰 싸움을 치른 후라 휴식을 취해야 하니."
나는 그에게 망량의 사정을 설명할까 싶어서 입을 뻐끔거렸지만 이내 다른 생각이 들어서 입을 다물었다.
저 놈이 치료해줄지 아닐지도 모르고 치료할 능력이 있다는 확신도 없다.
그런데 설득에 힘을 쏟으며 시간을 낭비하고 이쪽의 비밀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해동밀천주와 이렇게 아웅다웅하는 시간 자체가 낭비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믿든 아니든 상관없소. 다만 그대가 나를 백웅이라 믿든말든 한가지 알고싶은 게 있소."
"우리 문파의 중지에 들어와서 무슨 행팬지 모르겠군. 그래 질문을 들어나 봅시다."
"대라신선의 연속된 강신으로 인한 신열을 받은 무격(巫覡)이 있다면 그 자의 신열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써야 하겠소?"
"쿠쿠쿡."
해동밀천주가 재밌다는 듯 말했다.
"내가 그걸 왜 알려줘야 하오?"
"가르쳐준다면 보답하겠소. 내가 가진 걸 털어서라도..."
"흐흐. 딱히 필요없소만... 것보다 당신 정말 못 생겼군."
"뭐?"
내가 어이없어서 반문하자 해동밀천주가 껄껄 웃었다.
"아니다. 거 예쁜 여인이라도 내게 바친다면 생각 좀 해 보겠소. 그럴 능력이 있다면야..."
유들거리며 말하는 해동밀천주를 본 나는 이를 으득 물었다. 역시 이 녀석은 나와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이대로 이야기를 이어가봤자 희롱만 당할 뿐이다. 나는 해동밀천주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은 일파의 수장이며 그 나이를 처먹고도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중한지 모르는 거요? 왜 섣불리 남과 원한을 지려 하는 것이오?"
"엉? 못생긴 놈이 이야기해서 안 들리는데?"
이 자식이 정말...
나는 한번 더 꾹 눌러참으며 경고했다.
"당신은 방금 내게 모욕한 걸 크게 후회할지도 모르오."
"크하하! 맘대로 해보시지."
"알았소."
파앗
나는 해동밀천주를 뒤로 하고 빠져나왔다.
저 놈은 반드시 내 전생(轉生)에 걸쳐 후회하게 만들어 주고 말겠다.
하지만 지금은 내 원한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진랑곡의 바위에 누워서 갈수록 안색이 파리하게 변해가는 망량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지금은 백약을 써도 무효일 것 같아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 때 문득 생각이 났다.
' 천우진의 도움을 받을까?'
사형이 죽을 위기라면 도와주지 않을까? 나는 생각난 김에 급히 망량을 데리고 천우진이 있는 망량선사의 마을로 향했다.
"천우진! 망량이 위급하오. 도와주시오."
스르륵
그러자 천우진이 환술결계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신열은 사형이 자초한 일이오."
나는 뜨끔하는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명분으로 볼 때 이건 망량의 자업자득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신열을 버텨내지 못한 걸 천우진에게 따질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망량을 살려야 했기에 얼굴에 철판을 깔고 외쳤다.
"그래서 치료해줄 수 없다는 거요? 망량은 당신의 사형이오!"
"... 당신이 얼마나 어이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소?"
천우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보통의 강신술사는 대라신선 하나를 받아들여도 목숨이 오락가락하게 마련이오. 그런데 일부러 대라신선을 열 번 가까이 받아들여서 그 막강한 신열으로 술력을 증폭시키려 한다니... 9할 9푼의 술법사들이 사형의 생각을 알게 되면 미친놈이라 매도할 것이오."
"하지만 당신은..."
"내가 뭐?"
"......"
나는 천우진이 신열을 딛고 더 강해졌던 모습을 직접 보았었다. 망량 또한 천우진이 신열을 견뎌낸 걸 보았기에 이런 모험을 시도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걸 천우진에게 말해봤자 헛소리로 치부될 것이다. 애초에 천우진은 신선급 술법사인지라 신열을 받아들여도 버텨낼 수 있는 바탕이 있었기에 따져봤자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제발 부탁하오. 이대로라면 망량이 죽소. 그가 죽게 내버려둘 생각이오?"
"... 사형은 스스로 감내하겠다 했소. 자기가 한 말에는 책임을 져야지."
"빌어먹을! 생떼쓰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이대로 망량이 죽으면 그 마음의 빚은 어찌한단 말이오? 당신은 망량을 죽게 만든 선택이 옳은 것이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야기할 수 있소?"
"개새끼가."
어?
난데없이 욕이 튀어나오자 나는 천우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딱딱해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이 사형에게 쓸데없는 바람을 불어넣어서 죽을 모험을 하게 만든 거잖아! 네가 사형의 인생을 책임지기로 해놓고 능력이 부족하니까 기껏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내 도움이 없으면 안 된다고? 넌 대체 뭐하는 개새끼냐고 이 씨발새끼야!!"
그는 내게 반경어를 집어치우고 대놓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칠요의 주인이면 다냐? 사형은 네놈 맘대로 휘둘러도 좋은 사람이 아냐! 책임질 능력도 없으면서 헛된 대의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너같은 새끼를 가리켜서 무능력한 개새끼라고 하는거다!"
"윽..."
나는 구구절절 욕을 먹으니 정신이 혼잡해졌다. 천우진이 나를 혐오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망량이 신열을 받은데 내 책임까지 있다고 하니 대답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침묵하자 천우진이 말했다.
"좋아. 사형을 살려주지."
천우진의 눈빛에 살의가 강하게 감돌았다.
"대신 화요를 내놔!"
"뭣?!"
천우진이 나를 경멸하듯 쳐다보며 이죽거렸다.
"왜 싫으냐? 사형의 목숨하고 칠요를 비교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칠요가 이득이겠지 보통은? 세상을 구하셔야 하잖아."
"이봐..."
"이 거래가 싫으면 당장 꺼져! 개병신새끼."
"......"
천우진의 욕설을 들으며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 저 녀석, 자기 분노를 못 이겨서 막 내뱉고 있어.'
하도 매도를 당한 일이 많아서인지 천우진에게 쌍욕을 먹고 있는데도 머릿속은 냉정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천우진이 자신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서 휘둘리고 있는 상태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런 상태에서 섣불리 대응하면 천우진의 분노를 더욱 증폭시킬 뿐이다.
화요를 내놓으면 지금 해신의 마력에서 회복하고 있는 화룡진인은 더욱 위중한 상태에 빠질 것이고 앞으로 내 전력은 엄청나게 약화될 것이다. 억지로 수요를 해방시키지 않는 한, 나는 무공이 조금 센 무림인에 지나지 않을 것이리라. 그런 걸 생각하면 천우진에게 화요를 내놓는 선택은 결코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허리춤에 있던 화요를 들어서 천우진에게 내밀었다.
"가져가라."
그렇다 해도 지금은 망량을 선택하겠다.
그 말에 천우진이 황당한듯 말했다.
"... 진심이냐?"
도리어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듯한 반응이었다.
"그래."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칠요는 또 얻을 수 있지만 망량의 목숨은 그렇지 않아. 칠요를 갖고 싶다면 가져가!"
"......"
"하지만 네가 망량을 살려주지 않는다면 오늘의 일은 결코 잊지 않을 거다."
아무리 전생을 하며 망량을 만나기를 반복한다고는 하지만, 나는 망량의 목숨을 지나가는 것으로 치부할 수가 없다. 망량의 가치와 칠요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비교하면 당연히 후자가 압도적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망량을 살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 가치 때문에 내 인연을 버리는 건 비인외도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번 생은 이 선택때문에 더욱 험난해지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나는 내 주변의 인연을 보호할 것이다.
그러자 천우진이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미친새끼... 대체 니가 뭐길래... 얼마나 잘났길래... 빌어먹을..."
그는 한참동안 부들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감정의 격랑이 크게 휩쓸고 지나가는 듯 했다. 그리고 천우진은 감정을 정리한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후 - 좋아."
천우진이 망량의 몸에 손을 뻗었다. 그는 망량의 명치에 검지와 중지를 갖다대더니 무언가 주문을 외웠고, 이윽고 새파란 기운이 뻗어나와서 망량의 몸을 감쌌다. 그 빛이 잦아들자 망량은 서서히 눈을 떴다.
"으... 여긴..."
망량은 신열이 진정된 듯 몸을 일으켰다.
"임시방편으로 구천현녀의 힘을 빌려 안정시켰소."
천우진은 그런 망량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사형은 대체 뭘 하고 싶은거요?"
"사제."
천우진이 강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신열을 이용해서 강해진다는 건 미친 생각이오. 그건 정신력만으로 이겨낼 수 있는 현상이 절대 아니오. 신열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나가는 강신술사가 수도 없이 많다는 걸 모르는 사형이 아닐텐데."
"......"
"저 병신새끼가 뭐길래 사형이 그렇게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된건지 모르겠소."
망량은 생각을 정리한 후 대답했다.
"... 사제. 사제의 꿈은 술법으로 신의 경지에 이르러서 스승님께 도달하는 거였지."
"그렇소."
"나도 마찬가지야. 일차적으로는 세상의 혼란을 바로잡고 정의를 지키는 것이지만... 그 길의 끝은 결국 [옛 지배자]나 세계를 지배하는 신격에 도달할 수밖에 없어. 내가 추구하는 길과 사제가 추구하는 길은 마찬가지인 거라네."
"......"
"[옛 지배자]는 이 세상의 삶과 죽음을 모두 지배하고 있어. 우리는 가축에 불과하며 죽어서도 파멸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지. 이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야."
망량은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그리고 백웅은 [옛 지배자]를 쓰러뜨렸지. 나는 백웅이야말로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인류에게 한 줄기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네."
"그럴 리가..."
천우진은 어이가 없는 듯 말했다.
"저 자가 쓰러뜨린 해신이 엄청난 존재이긴 하지만 [옛 지배자] 중에는 그놈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신격이 많이 있소. 해신 하나를 쓰러뜨렸다고 그런 소리를 할 수는 없소. 뭣보다 해신을 쓰러뜨렸다 해도 종말의 때에는 아무 영향도 없소."
"하지만 유사이래 누구도 하지못한 일인 건 사실이지. 수천 년 중화역사의 그 어떤 영웅도 시도조차 하지 못했어."
"......"
천우진이 대답하지 못했다. 확실히 내가 해신을 쓰러뜨린 위업은 환신조차도 입을 다물게 할 정도인 게 틀림없었다. 망량은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고 강변했다.
"백웅이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했다면 진작에 했을 것이네. 나는 그의 의지를 존경하고 있기에 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를 돕고싶은 것일세."
침묵이 이어졌다.
"줘 봐."
갑자기 천우진이 내 손에서 화요를 낚아챘다. 그는 한동안 물끄러미 화요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도로 내 얼굴에 내던졌다.
파악
내가 화요를 잡아채자 천우진이 말했다.
"널 따라가겠다."
뜻밖의 말이었다.
"뭐?"
"방금 전 거래로 그 화요는 내 거야. 하지만 당장 해야할 일이 있다고 하니 당분간 갖고있어라."
천우진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네놈을 따라다니다가 사형이 개죽음당하는 꼴은 못 봐. 네놈이 천지모르고 나대다가 뒈지면, 그 때 화요를 가져가겠어."
이러니 저러니 말은 돌렸지만 나는 그의 말 뜻을 알아들었다.
그래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따라오라고."
지금껏 망량선사 수호와 귀찮음을 빌미로 마을에 박혀 있던 천우진이 나를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