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2 암천향(暗天鄕) =========================================================================
나는 장삼봉에게서 육합에 근거해서 칠대절학의 가르침을 받다보니 이청운이나 교주에게서 배울 때와는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 마치 원래 이래야하는 것 같은 느낌이야.'
사실 가르침받는 내용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그저 육합의 운행을 참조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어두운 동굴을 걸어가는 듯한 기분에서 벗어나서 환한 대낮의 길을 걸어가는 듯 했다. 지금까지는 칠대절학의 연계를 천재성과 감각에 의지했다면 이제는 체계적인 흐름에 따라서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덕에 나는 겨우 하루의 시간이었지만 그 동안에 잘 이해가 되지 않던 칠대절학의 연계에 대해 크게 이해가 늘어나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칠대절학의 팔대가능성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장삼봉은 팔대가능성을 언급하며 난색을 표했다.
[ 팔대가능성은 칠대절학이지만 칠대절학이 아니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 그것은 그대가 수십 년 동안 이어온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뇌신류의 기재들과 함께 벼려낸 별개의 가능성. 나는 무를 익혀오는 동안 그런 조합이 가능할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었소. 말하자면 진소청이나 이청운은 이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낸 것이오.]
나는 황당해서 반문했다.
"이청운이나 교주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장 진인께서 모든 걸 안배해 놓으신줄..."
[ 물론 태극과 육합을 연구해서 그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은 나요. 하지만 그걸 '열 수' 있는 자는 그 자체로 천고의 기재라 할 수 있지. 수련했으면 알겠지만 아무거나 섞는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잖소.]
"그건 그렇습니다만..."
언뜻 육대절학 중 아무거나 비결을 섞으면 신공절학이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하나의 무공에 존재하는 비결이 심오하고 현묘했다. 가장 단순한 조합인 지주명왕조차도 태극요지유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결코 창안할 수 없었으리라.
[ 팔대가능성이라 칭하는 무공들은 이미 내가 창안한 원류에서 독립할 수 있는 별개의 신공절학인 것이오. 사실은 내 후대인 무당파의 전인들이 개발하길 바랬건만...]
장삼봉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 ... 그렇기에 팔대가능성을 내가 가르쳐서 그대를 극성의 경지로 이끌 수 있다 자신할 수 없소.]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배우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입니다."
[ 음...]
"가르침을 주십시오."
지금의 내가 팔대가능성을 제대로 수련하기 위해서는 스승의 도움이 필요했다. 문제는 제대로 내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건 백련교주나 이청운, 혹은 인위적으로 성장한 진소청 정도였다. 셋 다 지금 접촉하기엔 문제가 있었기에 죽으나 사나 장삼봉 진인의 가르침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장삼봉 진인에게서 새벽동안 팔대가능성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았다.
' 역시 훤히 알고 있군.'
장삼봉 진인은 말로는 가르쳐주기 어렵다 했으나, 실제로 내게 가르쳐주는 걸 보면 아주 쉽고 편하게 일러주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교육자 본인이 그 지식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어야 했다. 장삼봉은 팔대가능성을 대성했으며 심화경지까지 꿰뚫고 있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팔대 가능성을 모두 통달하다니.
이것이 투선 장삼봉!
장삼봉이 밝아오는 아침해를 보며 말했다.
[ 헌데 팔대가능성이라고 부르려니 어감이 좋지 않구려. 이 훌륭한 무공들을...]
"다른 이름을 지어주시렵니까?"
[ 그게 좋겠소.]
"진인께서는 이름을 지어주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창안자이자 종사에게 자격이 없다면 누구에게 있겠는가? 내가 순순히 장삼봉에게 이름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자 장삼봉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 팔선신공(八仙神功)이 어떠하겠소?]
나는 그 말에 이채를 띄며 그를 바라보았다.
"도가 팔선을 생각하신 건지?"
[ 그렇소.]
장삼봉은 뭔가 쑥쓰러운 듯 말을 이었다.
[ 내가 어렸을 적부터 그들을 동경하여 도학에 몸을 담게 된 것이니, 그들의 명호를 붙이고 싶구려.]
그러고보니 장삼봉은 여동빈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이었다. 수백년 전의 인물이긴 하지만 당나라 때만큼은 아니었다. 그렇게 치면 장삼봉이 여동빈보다 후배뻘이라고 할 수 있는데, 투선끼리는 딱히 연공서열을 두는 분위기가 아닌 듯 했다.
"알겠습니다."
장삼봉이 정한대로 앞으로는 팔대가능성을 팔선신공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내가 내심 다짐하고 있자 장삼봉이 말했다.
[ 헌데 무공수련에 집중할 수가 없소?]
"아... 그게..."
[ 마음이 딴 데 있구려.]
역시 투선의 감각은 속일 수 없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누군가를 만날 기한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일이 신경쓰입니다."
[ 흐음... 어차피 하루아침에 큰 성취를 얻을 순 없소. 해야할 일을 먼저 하고 수련을 하시길 바라오.]
"네."
그리고 나는 남은 시간동안 명상을 하며 내 정신과 체력을 최고조로 다듬은 후, 약속의 날이 되자 새벽같이 장령곡을 떠났다. 중대한 일을 앞두고 있으면 수련보다는 자신의 상태를 다듬는게 훨씬 낫기 때문이다.
파앗!
나는 비등이 아니라 사도의 권능을 써서 한씨세가로 왔다. 비등을 쓰는게 더 맘편하긴 하지만 권능에 빠르게 익숙해져야 앞으로 편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씨세가의 정원에 도착하자 그 곳에는 한백령이 나무다리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름대로 일찍 출발한 것이었는데도 그녀는 이미 옷가짐을 다 차려입고 있어서, 약속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백령이 나를 보자 말했다.
"설마 그대가 용의 화신?"
"그렇소."
"말도 안 되는 소리군. 하루아침에 소년에서 청년으로 변했단 말인가?"
한백령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역시 하루아침에 모습이 바뀌었다는 게 상대방에게 결코 납득될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망량조차도 믿기 힘들어했으니 타인인 한백령은 말할 것도 없었다.
"믿든 아니든 나는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오. 백련교주의 암살과 협력에 대해서 당신이 요청한 대답을 들려주기 위해서."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자 한백령은 흠칫하더니 말했다.
"웃기는 소리... 대역인 주제에 너무 뻔뻔한게 아닌가?"
"나는 나요."
스윽...
나는 화요를 뽑아서 그 힘을 끌어냈다. 그러자 강렬한 화염의 기운이 흘러나오며 사방에 넘실거렸고, 한백령은 실재하지 않는 환염(幻炎)에 눈살을 찌푸렸다. 화요의 힘을 과시한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믿을지 아닐지는 당신 마음이오. 믿지 않겠다면 나는 이만 돌아가겠소."
"잠시만."
한백령이 손을 들어서 나를 멈춰세웠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당신이 설령 대역이라 해도 용의 화신과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거라 믿겠습니다."
그녀는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떠나서 내 세력과 접촉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철저하게 손이득을 가린 결정이었다.
"맘대로 하시오."
"어찌하여 그런 모습이 된 건지?"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나는 신적인 존재들과 연관될 일이 많소. 이 모습은 단시간에 나이를 먹어버린 것이오."
"... 그걸 믿으라니."
"못믿어도 어쩔 수 없소. 내 말이 사실이고 당신이 나라면 타인에게 어떤 방법으로 이 괴사를 설명하겠소?"
"어쩔 수 없군요."
한백령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아무튼 그 때의 대답을 들려 주십시오."
한백령은 내게 백련교주를 죽이기를 의뢰했다. 그리고 그 일에 필요한 약점과 정보를 아끼지 않고 주기로 했던 것이다. 나는 이미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책사들과 논의해 왔으므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조건이 있소."
"어떤 조건입니까?"
"풍신류(風神流)를 설득해서 동맹으로 만드시오."
"......"
"그리고 유림까지도 아군이 되어야 하오."
제갈사의 계책을 내놓자, 그의 예상대로 한백령은 낭패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만큼 내가 내놓은 제안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곤란한 것이었으리라. 그녀는 내 말에 대꾸했다.
"굳이 이 일에 그들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소. 풍신류를 배제했다가 그들이 차후에 교주의 편을 들면 어떻게 하오? 그리고 유림과의 동맹을 굳건히 하지 않으면 낙양에 행사하는 영향력도 크게 줄어들 것이오."
"그런 건 교주를 쓰러뜨리는 것과 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사소한 일입니다."
"흠."
한백령의 말이 맞았다. 내가 대꾸한 내용들은 하나같이 변명에 가까웠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일도 할 수 없는 자와 손을 잡을 생각은 없소."
"......!!"
"당신이 사소하다고 칭하는 일처럼, 백련교주를 없애는 일 또한 내게 필수적인 일이 아니오. 내가 얻는 이득에 비하면 과할 정도로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일이지. 그래서 그 대사를 치르기 위한 기본절차를 해달라는건데 그리 어렵소?"
"능력을 보이란 말씀이십니까."
"해석은 자유에 맡기겠소."
한백령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보겠습니다."
"좋소."
나는 한백령의 일이 성사되면 의성 상관혁을 통해서 소식을 전달받기로 했다. 나는 한백령에게 말했다.
"검마의 쌍검술 성취는 어떻소?"
"그는 수련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아... 그렇..."
"하지만 벌써 기본기를 모두 터득했습니다."
내가 놀란 눈으로 한백령을 쳐다보자 그녀가 말했다.
"원래부터 한 분야에서 정점에 가까웠던 달인이니 예상했던 일이지요."
나는 검마의 수련장소로 가서 그를 만났다. 검마는 새벽에 나와서 명상을 하고 있었는데 내 방문을 받자 께름칙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은 누구지?"
"백웅입니다."
갈수록 검마의 표정이 뚱해졌다.
"백웅은 소년이오."
"나이를 먹었습니다."
"크하하!!"
검마는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마치 말할 가치도 없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내심 서운함을 느꼈으나, 나라고 해도 일순간에 20년 이상 나이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미친사람 취급할 것이다. 검마나 한백령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별 수 없이 검마에게 다가가서 흑요석을 내밀었다.
"제가 저라는 증명입니다."
"믿을 수 없군. 그게 내게 세뇌나 현혹을 걸려는 함정이 아니라는 보장이 어딨지?"
검마는 나를 크게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도리어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한백령이 말했다.
"검마! 시간낭비할 때가 아니다. 귀인을 내쫓겠는가 아니면 이야기를 하겠는가?"
"한백령."
"드잡이질하지 말고 선택하라."
한백령은 내가 진짜든 아니든간에 자기 문파의 중지(重地)에 외인이 오래 머무르는게 싫은 모양이었다. 한백령의 재촉에 검마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받아보지."
파앗
"헉!"
검마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읽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경계를 약간 풀며 내게 전음을 보냈다.
[ 의심해서 미안하군.]
[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한백령에게 보여주기 위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근래의 성취가 탁월하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인지라."
나는 겉으로는 그와 이야기를 하는 척 하면서 진짜 대화는 전음으로 했다.
검마가 말했다.
[ 아주 많은 일이 있었겠군. 나도 조만간 이 수련장에서 나가야 할 것 같네. 조만간 세상이 격변할 테니.]
[ 언제쯤이 좋으시겠습니까?]
[ 당초예상은 이 년이었으나 좀 더 앞당겨보겠네. 한백령에게서 사범의 자격이 있다고 인정받는다면 자네에게 쌍검술을 가르칠 수 있겠지.]
[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검마가 쌍검술을 수련할 시간에 그냥 칠대절학을 파고들었다면 훨씬 큰 성취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가 되었든 내가 쌍검술을 사용해야하기 때문에, 그는 나를 위해서 시간의 낭비를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게 마음의 빚이라는 걸 알고 있으므로 검마에게 나중에 충분히 보상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 조언을 해주자면 선지자를 찾아가 보게.]
[ 선지자요?]
[ 책사들이 자기 일에 바빠서 미처 생각지 못한 모양인데 현재 이족의 정보와 동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선지자일세. 그에게 바칠 공물을 마련해서 정보를 얻게.]
[ 아!]
[ 큰 환란에 대비하려면 이족이 지닌 이족의 정보가 가장 필요할지도 모르네. 그럼 힘내게.]
나는 한씨세가를 나와서 진랑곡으로 갔다.
' 신열과 싸우고 있을 망량이 걱정돼.'
나는 망량이 거하고 있는 영지로 향했다. 그리고 바위 위에 누워있는 망량의 상세를 살폈는데, 망량은 내가 찾아왔는데도 마치 기절한 듯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전신에 열기가 없고 안색이 파리해져 있어서 죽은 사람 같았다. 의식이 없는게 분명했다.
"망량!"
나는 당황해서 그의 손목을 잡았는데, 그 순간 후끈한 열기가 손목을 타고 내 안으로 침투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 막강한 영기(靈氣)는 단숨에 내 명을 끊어버릴듯이 용트림질을 했는데 그 순간 장삼봉이 자신의 신기를 끌어올려서 나를 그 영기에서 보호해 주었다.
장삼봉이 말했다.
[ 연자여. 이 자의 몸에는 엄청난 신기가 맴돌고 있소. 이대로 두면 죽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