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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488화 (488/1,615)

00488  암천향(暗天鄕)  =========================================================================

나는 망량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는 비등과 목갑, 화요를 꺼내며 순어구로 의지를 전달하는 행동도 했다. 나는 목갑을 뒤적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여기 흑요석이..."

"아아, 믿겠소. 당신은 틀림없는 백웅이군."

망량은 한숨을 쉬었다.

"긴가민가 했소. 갑작스럽게 당신과 연결이 끊어진데다 난데없이 나이를 먹은 모습으로 나타나서 알아보기 힘들었소. 그나마 예전모습이 남아있어서 혹시나 했을 뿐 보통이라면 믿기 힘든 일일 거요."

"음..."

"흑요석으로 기억을 전송해주시오."

간략한 사정설명은 했으나 역시 흑요석만큼 상황을 쉽게 전달하는 방법은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동안 있었던 기억을 담아서 망량에게 전달했다. 내 기억을 들여다본 망량이 말했다.

"우선 십이율주와 만나지 않고 이곳으로 온 것은 좋은 판단이오. 그리고... 해신을 처치하다니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위업이오."

망량은 살짝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 표정관리를 잘 하는 망량이 이야기를 하면서 놀랄 정도로 내가 해낸 일이 굉장하다는 뜻이었다. 내심 우쭐해서 광대뼈가 올라가고 있을 때 망량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전욱이 준 사도의 권능이란 게 대체 무엇이오?"

나는 그 질문에 고민하며 대답했다.

"... 잘 모르겠소. 어떻게 쓰는지 몸과 직감이 기억하고 있긴 하지만, 이 능력의 실체를 명확히 알 수가 없소. 단지 지금까지 내가 전생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이자, 이동은 물론 전투에도 쓸 수 있다는 것밖에 모르겠군."

"일월산 오거천문에서 수련했던 기억이 사라져 있는 이유는?"

"그것도 모르겠소. 정신을 들고 보니 현실로 돌아와 있었소."

"......"

망량은 팔짱을 끼며 생각을 거듭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제갈사 숙부와도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군. 갑시다."

나는 망량을 따라서 제갈사에게로 갔다. 제갈사는 초상기인을 잔뜩 만들어놓고 그들의 몸뚱이에 주문(呪紋)을 새기고 있었는데 마법의 한 종류 같았다. 한창 작업중이던 제갈사가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백웅이냐?"

"바로 눈치채셨군요."

"모습은 좀 달라졌지만 너와 같이 올 놈이 백웅밖에 없으니."

나는 제갈사에게 흑요석으로 기억을 전해주었다. 제갈사는 기억을 전해받고는 놀란 듯 말했다.

"... 세상에. 이거 실화냐...? 진짜로? 진짜 잡은 거야?"

"직접 봤잖아."

"......"

망량보다 제갈사의 정신적 충격이 더 큰 듯, 그는 잠시동안 멍하니 넋을 놓았다. 그러더니 미친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하!! 세상에! 인간 따위가 [옛 지배자]를 잡을 줄이야!! 으하하하하하하!!!"

그는 내 어깨를 붙잡고 미친듯이 흔들었다.

"유비? 조조? 한무제? 항우? 주원장? 다 필요없어! 네가 바로 역사 최고의 영웅이다!! 으하하하하."

"자, 잠깐..."

"크흐흐흐..."

제갈사는 눈가를 살짝 훔치더니 광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천여 년 이상 이어져내려온 중화의 명가인 제갈가의 천재들조차 대라신선 하나를 감당치 못해서 좌절했는데 너는 수백 배의 위업을 이뤄버렸구나. 넌 정말 대단한 놈이다."

"헤헷. 운이 좋았지!"

"어 운이 좋았지. 수천 년 중화의 영웅들은 다들 목매달고 자살해야 해. 너같은 둔재도 해내는 일을 못 해냈으니."

"......."

내가 한껏 치켜세워지자 기분좋아서 한 마디 하자 바로 초를 치는 제갈사였다. 내 표정이 일그러지자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튼 지금은 축하하지. 최고의 결과가 나온 셈이니까."

"이번 일로 천계에서 뭔가 시비를 걸지는 않을까?"

"그럴 리는 없어. 놈들은 삼황오제의 부하나 다름없으니 윗선에서 마무리된 얘기를 가지고 사도에게 시비를 걸 순 없겠지."

나는 힐끔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그런데 뭐하려고 초상기인을 이렇게 많이 만든 거야?"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생에서 보던 것 중에서 초상기인을 가장 많이 제작한 것만 같았다. 언뜻 보기에도 20여체를 훨씬 뛰어넘은 데다가 남녀노소를 가릴것 없이 다양한 모습이었다. 제갈사가 내 물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급하게 제물로 바치려고 만들었다."

"왜?"

"왜긴 왜야? 네놈이 갑자기 순어구 통신도 끊기고 해신과 싸웠을 가능성이 농후한데 그 싸움에서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이나 하겠냐? 죽을 게 뻔한지라 초상기인을 양산해서 [옛 지배자]에게 네놈을 구해달라고 빌 생각이었다."

"아..."

옆에 있던 망량이 거들었다.

"급하게 만든다고 제갈사 숙부는 장령곡의 모든 재산을 써 버렸소. 그가 모아놓은 모든 술법의 재료와 보물들은 다 여기에 소비되었소."

그런 건가.

나는 [옛 지배자]의 힘을 빌려서라도 날 구하려 한 제갈사에게 고마워서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크크. 장령곡의 재산따윈 중요한 게 아니야.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던 해신이 쓰러졌다는 게 중요한 거다."

제갈사는 킬킬거렸다.

"앞으로 어인족은 당분간 중원과 고려 일대에서 자취를 감출거고 어인도시는 쇠락할 거다. 그들에게 복종하고 있던 인간노예들은 혼혈의 피를 숨기고 살아가게 되겠지. 이는 천하제일의 명군이 명재상과 함께 천하를 다스려도 얻을 수 없는 평안이다. 네 덕분에 향후 십 년간 수십 만 명의 인간이 구원받을 거다."

"... 그런가."

해신이 쓰러진 건 굉장한 사건으로 보였다.

"사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나도 예측을 할 수 없군. 인간에게 [옛 지배자]가 당해서 죽은 것은 유사이래 최초로 벌어진 일이야. 거대한 혼란이 닥쳐올 건 분명해."

나는 제갈사의 말에 문득 궁금해서 물었다.

"[옛 지배자]는 삶도 죽음도 없는 존재라서 죽이는 게 불가능하지 않았나? 어째서 해신은 죽일 수 있었던 거지?"

아무리 여동빈이 스스로 봉인이 되어서 해신의 힘을 약화시켰다 해도 이상한 일이다. 내가 과거에 얻었던 전생지식중에 그런 게 있었다. [옛 지배자]인 밀림의 지배자에게 찾아가서 흉신을 죽여줄 수 있는지 의뢰한 기억이 나는 것이다.

[ 당신의 권능으로 흉신(凶神)이라 불리는 존재를 죽음에 빠뜨릴 수 있는지요?]

[ 그건 다른 문제이다…… 르 뤼에의 지배자……. 그 존재는 혼돈의 직계……. 태초부터 삶도 죽음도 존재하지 않는 초월자……. 그자에게 반전의 권능을 적용시키는 것은 법칙상 불가하도다.]

그랬다.

신이란 삶도 죽음도 존재하지 않는 초월자이기에 반전의 권능을 적용시킬 수 없다. 삶과 죽음이란 개념이 무(無)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해신은 어떻게든 해치워버렸기에 밀림의 지배자가 말했던 것과 모순이 되었다.

그러자 제갈사가 피식 웃었다.

"그건 해신이 물질계 태생의 [옛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야?"

"[옛 지배자] 사이에도 위계가 존재하고 권능의 수준이 천양지차라는 건 알고 있지?"

"그래."

제갈사의 말이 느긋하게 이어졌다.

"[옛 지배자]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물질계에서 탄생한 존재와 머나먼 신좌(神座)에서 탄생한 존재... 해신은 전자이기 때문에 [옛 지배자]중에서도 격이 아주 낮아. 왜냐하면 물질계에 태어났다고 하는 건 신의 영혼을 가졌으나 필멸자의 육체를 가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

"뭐 그래도 신의 영혼을 가졌기 때문에 해신이 이번에 죽는다 하더라도 수천 년 후에는 부활하게 될 거다. 다만 그런 불완전한 [옛 지배자]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죽음을 피할수는 없다는 거지. 이건 해신 뿐만이 아니라 물질계 태생의 많은 [옛 지배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약점이다."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듯 했다. 나는 제갈사의 말을 듣고 하나하나 다 기억하려 애쓰다가 질문했다.

"머나먼 신좌에서 탄생한 [옛 지배자]는 영혼 뿐만이 아니라 육체도 불멸(不滅)한다는 건가?"

"그래. 그런 존재는 극소수야. 내가 알기로는 [옛 지배자] 중에서도 10개체를 넘지 않아. 성골(聖骨) 중의 성골이라고 해 둘까?"

"......"

"혼돈의 직계로 꼽히는 흉신(凶神)이 대표적인 예지. 그런 놈은 애초부터 죽음이 존재하지 않기에 결코 쓰러뜨릴 수가 없는 거다. 그런 존재보다 더 강한 건 신을 초월한 신이라 불리는 외신(外神)밖에 없어."

"제길..."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 목표는 수백년 후 부상할 르 뤼에를 막고 그 지배자인 흉신을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해신을 쓰러뜨리면서 느꼈던 것은, [옛 지배자]와 싸우려면 칠요 2개로는 턱도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칠요를 3개는 해방해야 해신과 싸워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해신보다 훨씬 강하며 죽음이라는 약점도 없는 흉신을 쓰러뜨리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 칠요를 다 모을 수밖에 없겠군."

"그게 정답이다."

제갈사가 훗하고 웃었다.

"나머지는 다 부차적인 문제야."

나는 제갈사와의 대화를 마치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제갈사가 내 상태에 대해서 물었다.

"백웅 너는 지금 본래보다 20년은 나이를 먹은 것 같은데 좀 어때? 전투력이 혹시 내려간 것 같으냐?"

나는 제갈사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아. 내 내공수위때문에 육체의 강함은 어차피 그리 중요하지 않고, 되려 몸이 성장해서 싸우기는 더 편해졌어."

"술법능력은?"

"어... 그건 봐야 알겠는데."

"한 번 알고있는 술법을 펼쳐 봐라."

나는 제갈사의 요구대로 내가 알고 있던 화염술과 은신술, 그리고 이혼대법이나 태평요술을 차례대로 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화르르륵!!

"어어...!!"

나는 장령곡의 장원에서 화염술을 펼치다가 갑자기 크기가 삼 장이나 되는 부채꼴모양 화염이 펼쳐지자 당황했다. 당초에 생각했던 위력과 너무 달랐기에 이대로라면 장원을 통째로 불살라버릴 위기였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망량이 수인을 맺으며 말했다.

"빙(氷)."

그러자 서늘한 기운이 사방에 내려앉았다. 내가 방출한 화염이 잦아들어가더니 한참 후에나 멈추었다. 얼음의 술수로 내 화염술을 막은 망량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굉장하군. 나는 방금 전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막았는데 그 불꽃을 쉽게 끌 수 없었소. 이제 그 화염술은 당신의 주 공격술법으로 사용해도 될 것이오."

"어... 어떻게 된 거지?"

예전에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 화염술을 쓰면 기껏해야 삼 척짜리 불꽃이 확하고 퍼져나가는 정도였다. 위력이 단번에 몇 배나 증폭해버려서 내가 당황해하자 망량이 말했다.

"당신이 삼황오제 전욱에게 선물을 받았다는 증거요."

"선물?"

"당신은 전욱이 펼친 만귀전의 연회에서 음식과 술을 먹었소. 그 대가로 노화하여 20년은 늙어버렸지만, 그만큼의 음신지력(陰神之力)을 얻게 된 것이오."

"하지만 음신지력은 음에 속하니 양(陽)의 술법인 화염술이 강해지는 건 이상하지 않소?"

"음신지력은 태음(太陰)이니 보통의 인간도사는 아무리 수련해도 얻기가 힘든 특수한 영력. 그렇기에 당신의 술법력이 단번에 높아지게 된 것이오. 태음은 보통의 음양을 초월하는 속성이기도 하오. 또한 그 화염술은 원래 미호가 가르쳐준 요괴전용의 술법이기에 음신지력이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밖에 없소."

"......!!"

"또한 당신은 희소하기 그지없는 태음의 술수를 배울 기초가 생긴 것이오. 신선이 아닌 이상, 인간세상에서 태음의 술법을 쓸 수 있는 자는 아마 없을 것이오."

나는 망량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귀전에서 얻은 음신지력!

그게 웬만한 보패의 영력에 상응하는 술법력을 내게 가져다준 것이다. 내가 반문했다.

"만일 내가 그 연회에서 열 접시 스무접시를 먹어서 늙어죽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소?"

"바로 그게 전욱이 바라는 바였겠지. 당신이 만귀전 소속의 대귀신이자 사도가 되었다면 인간일 때보다 훨씬 자유롭게 사도의 권능을 쓸 수 있게 되고 수십 배는 강해지게 될 테니까..."

"......"

"뭐 당신이라면 죽는 순간 전생능력이 발동했을테니 그렇게 될지는 의문이긴 하오."

그리고 나는 다른 술법도 펼쳐보았는데 하나같이 위력과 시전시간이 향상되었다. 내가 크게 기뻐하자 망량이 핀잔을 주듯 말했다.

"순수위력은 올라갔지만 술법의 이해가 적어서 수인이나 주문을 축약시킬 수가 없구려. 만족하지 말고 좀 더 술법수련을 해야하겠소."

"알았소."

나는 이혼대법 또한 펼쳐보았는데 내가 초상기인을 이혼대법으로 조종하는 걸 본 제갈사가 말했다.

"이제야 이혼대법이 칠 성(七成)에 이르렀군."

"정말이냐?"

"배교의 교주가 인정하는 거다. 네 녀석은 이제 충분히 영혼을 육체에 집어넣을만한 수준이 된 거다."

이혼대법의 칠 성!

그것은 내가 앞으로 초상기인을 본격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지금까지는 육성에서 지지부진했기에 초상기인을 조종할 수 있어도 짧은시간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제대로 다룰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혼백을 쉽게 고착시키고 이동시킬 수 있으니 급할 경우 초상기인으로 아예 갈아탈 수도 있을 것이다.

제갈사가 뭔가 불만스러운듯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음신지력이 좋긴 좋군. 내 생각으로는 앞으로도 십 년은 용맹정진해야 육 성의 벽을 뚫을거라 생각했는데 태음의 힘으로 한번에 난관을 뚫어버렸어."

"으헤헤."

"좋아하지 마라. 대성까지는 한참 멀었으니까."

퉁명스레 말한 제갈사가 말했다.

"술법은 이 정도면 됐다. 무공도 한번 점검해봐야겠어. 격전을 치르면서 네가 망아지경에서 얻은 무공이 어느 정돈지 알아봐야 할 거 아냐?"

일리있는 소리다. 나는 제갈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천신경의 술수를 써 봐라."

우웅

나는 천신경의 술수를 발동했다. 그러자 광대한 범위에 퍼져 있는 영혼의 기척이 느껴졌다. 예전에는 이십 리 정도가 한계였는데 지금은 범위가 구십 리로 늘어난 듯 했다. 제갈사가 말했다.

"개중 가장 강해보이는 무사의 영혼을 불러내어서 초상기인에 넣어라."

"내가 하면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는데."

이혼대법의 수준이 올라갔다고 해도 장시간 유지하기는 힘들다. 대성의 경지가 아닌 이상 집중하지 않으면 금세 영혼이 육체에서 떨어져나갈 것이다.

"혼백은 내가 안정시킬테니까 해 봐."

"알았어."

나는 제갈사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강력한 무인의 영혼을 초상기인에 집어넣은 다음 나와 모의대련을 시켜보려는 거였다. 이렇게 하면 굳이 바깥세상에 나가서 쓸데없는 인과를 만들지 않아도 전투경험을 쌓는 게 가능했다.

우우우...

' 이 자로 할까?'

범위가 넓어져서 그런지, 나는 구십 리의 끄트머리에 강대한 무인의 영혼이 존재하는 걸 발견했다. 다른 영혼과 비교해서도 크고 강력했으며 새파란 불길같은 걸 내뿜고 있었다. 척 봐도 강력한 영혼이었으므로 나는 즉시 그 영혼을 끌어왔다.

[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는가?]

그 영혼은 상당히 옛시대의 사람인듯 갑옷과 무기가 후줄근해 보였고 특이하게도 뺨에 글씨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 형벌이라도 받았나?'

아무튼 강력한 무인인건 틀림없었으므로 그에게 말했다.

"당신을 저 인형에 집어넣을 것이오. 나는 당신과 무예를 겨뤄보고 싶소."

[ 그게 그대의 요구인가?]

"그렇소."

스으으

키가 크고 건장한 체구의 초상기인에 고대무장의 영혼이 깃들었다. 그는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서며, 미리 준비되어 있던 각종 무기들 중에서 커다란 방천극을 골랐다. 거병을 한손으로 든 그는 내 앞에 마주서며 말했다.

[ 싸움은 오랜만이군.]

"당신의 이름은 뭐요?"

[ 내 이름은 영포(英布)!]

"헉..."

나는 그 이름에 찔끔하는 기분이 들었다.

' 영포라 한다면 초패왕 항우의 밑에 있다가 배반해서 유방의 밑으로 간 용장이 아닌가?'

상대인 영포는 역사에 이름이 크게 남아있는 무장이자 명장이었다. 비록 항우를 배반했다는 오점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그의 무력은 초한시대에서 손꼽힐 정도로 강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나라 개국삼걸에 못지 않은 영웅이었다. 반란을 일으켜서 유방에게 팽 당하긴 했지만 어쨌든 대단한 인물인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영포. 당신은 초패왕 항우를 직접 만나본 적 있겠지."

내 질문에 영포가 언짢은 듯 대답했다.

[ 그대는 나를 배신자라 매도할 생각인가?]

"그런 게 아니오. 내가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나 또한 항우를 직접 본 적이 있기 때문이오."

[ 무엇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항우가 예전에 내게 강신했던 이야기를 그에게 간략하게 해 주었다. 그러자 영포는 경계하는 기색을 풀고 말했다.

[ 확실히 나는 항우의 밑에서 병력을 부리며 오랫동안 싸웠다. 그에 대해서 웬만큼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로 항우의 무력은 가히 초월적인 것이었소. 당신은 어찌 그런 인물을 배신할 생각을 했소?"

[ 너무 강해서 아무도 필요치 않을 정도였으니까!]

"무슨 말이오?"

영포는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 그대 말대로 항우는 성좌의 힘을 받아서 아무렇게나 싸워도 무조건 이겼다. 그놈이 전장에서 칼을 한 번 휘두르면 수백 명이 단번에 죽어나갔다. 하지만 그 가공할 무력과는 반대로 인성은 아주 빌어먹을 놈이었지. 나는 항우 밑에 있다가 잘못 밉보이면 즉시 죽을거라고 생각해서 유방 쪽으로 간 것이다.]

나는 본론을 꺼냈다.

"난 그게 이상한 것이오. 유방이나 한신, 소하가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 해도 그들은 어차피 인간일진대 어떻게 항우같은 괴물에 대항한 것이오?"

[ 그 자들도 괴물이었으니까!]

"무슨 소리요?"

[ 유방은 천계 적룡(赤龍)의 화신이었고 한신, 소하, 장량도 성좌의 힘을 이어받은 존재였다. 뿐만 아니라 장량은 인간이면서 성좌의 화신이며 대라신선이었지. 그 시대는 별의 힘을 이어받는 자들이 날뛰던 시대였다. 난 충분히 승산이 있다 생각해서 유방의 편에 섰고 결과적으로 유방이 승리한 거다.]

"......!!"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지금의 내 힘을 그 영웅들과 비교해 줄 수 있겠소?"

[ 크하하! 천신경으로 부려먹는답시고 내 자존심을 팍팍 깎아내리는군. 그대는 악마인가?]

"......"

[ 좋다.]

콰아앙!!

다음 순간, 영포가 초상기인의 몸으로 거대한 방천극을 내게 휘둘러 왔다. 나는 방천극을 정면으로 받아냈지만 몸이 약간 밀릴 정도의 충격이 덮쳐와서 반걸음을 물러서야만 했다. 나는 영포의 강격에 담긴 위력에 놀랐다.

"아니...?"

이상한 일이다. 영포는 고대의 인물이라서 체계화된 무공을 익히지 않았을텐데도 마치 초절정고수를 연상시키는 강격을 내뿜은 것이다. 내가 의아해하자 영포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 나는 항량에게서 십 년간 초 왕가의 비전무공을 배웠다. 날 얕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까강

까가강

나는 영포와 한참동안 공격을 주고받았다. 영포도 대단한 실력이긴 했지만 내가 칠대절학을 운용하면 쉽게 이길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영포에게 한치도 밀리지 않고 뇌신검무로만 싸웠는데, 확실히 뇌신검무는 제례용 무공이라서인지 그렇게 효율적이지 않았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 뭔가 좀 아닌데.'

나는 해신의 목을 베어내는 마지막 순간에 뇌신검무에 잠재되어 있던 가능성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다시 뇌신검무를 쓰면서 그 가능성을 끌어내려 하고 있었는데 뇌신검무가 실용성이 부족하다는 것만 재확인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영포도 깨달았는지 도중에 방천극을 멈추며 말했다.

[ 뭐하러 힘을 아끼는거지? 그대는 나를 훨씬 뛰어넘는 실력이거늘.]

"이 검술의 한계를 보고싶어서 부른 겁니다."

[ 위기의 순간에 대오각성이라도 하고싶은 건가? 전장에서는 할 수 없는 사치스런 생각이군.]

영포는 나를 조롱하듯 말하며 재차 공격해 왔다.

' 쳇, 어쩔 수 없군...'

나는 칠대절학을 운용하며 영포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삼보절기가 아주 자연스럽게 펼쳐지며 영포의 공격을 모두 회피했고 굴공참으로 손쉽게 그의 간격을 잡아낼 수 있었다. 영포는 십 초 만에 수세에 몰렸고, 결국 내 검극이 영포의 목젖에 닿였다.

영포가 말했다.

[ 진작에 이럴 것이지.]

그는 내 잠재력을 한눈에 파악한 듯 했다. 고대의 영웅답게 그의 무공도 초절정의 위에 달해있었기 때문이다.

"모욕을 줘서 미안합니다."

[ 내게 그들과 비교해서 평가해달라고 했지?]

"네."

[ 그대의 무공은 유방이나 한삼걸(漢三杰)과 비교해도 훨씬 위에 있네. 한신이라 해도 그대와 검술로 싸우면 질 것일세. 내 시대에 그대만한 검술의 달인은 딱히 없었어.]

영포는 호평을 한 후 쓴소리를 했다.

[ ... 항씨 부자(父子)를 제외하면 말이지.]

"항량과 항적이 검의 달인이었습니까?"

[ 초나라 왕가의 직계비전무공을 이어받았으니 당연하지. 월녀검(月女劍)에 버금가는 절세무공이다. 성좌의 힘을 제외하고라도 항우는 그대에게 무공으로 지지 않을 것이다.]

"......"

나는 문득 월녀검이라는 말에 생각나는 게 있었다.

'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

어쩌면 절세검술을 하나 더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소득을 얻었음을 느끼며 그에게 포권했다.

"고맙습니다."

나는 영포를 돌려보내고는 옆에서 관전하고 있던 제갈사에게 말했다.

"방금 생각났는데..."

"월녀검법 얻으려고 그러지?"

마치 예상했다는 듯 말하는 제갈사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동방무결을 호위하던 백원쌍마(白猿雙魔)가 춘추전국시대 월녀검의 전승자일테니 놈들을 갈구면 월녀검법을 얻어낼 수야 있겠지.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그게 꼭 필요하냐?"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넌 이미 월녀검법과 대등 이상인 절세무공을 몇 개나 갖고있잖아. 지금 전욱이 시킨 일을 하기도 바쁜데 쓸데없는데 신경쓰지 마."

나는 민망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알았어."

"그나저나 결과적으로 네 무공은 크게 늘지 않았다는 소리인가?"

제갈사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나는 해신과 싸우기 전보다 한 단계 진보했어. 삼보절기를 완전히 깨우쳤다고 확신하는데다가 검의 흐름도 예전보다 자유로워졌어. 하지만..."

"하지만?"

"뇌신검무를 펼치면서 느꼈던 그 일체감이 느껴지지 않아."

그게 문제다. 나는 이제 강호의 고수들 중에서 단연 손꼽힌다고 자부할 수 있는 무위를 얻었으나, 뇌신검무에 숨겨져있던 힘을 다시 발현해낼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지막 순간에 해신의 목을 칠 수 있었던 건 그 정체불명의 힘이었으므로 아쉽기 그지없었다.

신을 죽일 수 있는 잠재력.

그 힘을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옆에서 듣고있던 망량이 말했다.

"그 문제의 해답은 우리가 줄 수 없겠구려. 무공에 있어서는 백웅 당신은 뇌신류의 장로급 이상이니, 당신에게 조언을 줄 수 있는 무술의 명인은 따로 있을 거요. 최소한 당신을 뛰어넘는 초고수가 필요하오."

"그 말은..."

망량이 훗하고 웃었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무공을 가진 자에게 물어봐야하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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