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86 암천향(暗天鄕) =========================================================================
거문고 소리가 들려온다.
황혼이 흐르는 듯한 미세하면서도 찬연한 소리가 내 귓가에 흘렀다. 나는 장중하면서도 고아하게 내 마음과 귀를 사로잡는 음향에 서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내가 어떤 이상한 건축물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여긴...?'
나는 이 곳이 더없이 기이한 장소라는 걸 알아챘다.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다. 하늘이 절반의 음양(陰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왼쪽 하늘에는 맑은 햇빛이 비치는 창공(蒼空)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오른쪽의 하늘에는 보름달이 휘황하게 비치며 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또한 좌우로 밤낮이 갈려있는 기준은 바로 내가 서 있는 이 건축물이었다. 신기하게도 절반으로 갈려있는 세계의 선(線)이 내가 서 있는 곳에 그어져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보는 양식의 이 건축물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는데 아무래도 커다란 문(門)으로 보였다.
어떻게 된 거지?
여긴 어디지?
나는 분명히 대라멸진을 써서 해신과 동귀어진 했을 텐데?
내가 곤혹스러워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 사도(使徒)시여.]
파앗
내 앞에 갑자기 어둠과 함께 관복을 입고 있는 웬 괴인이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그 괴인은 인간이 아니라 전신이 뭉글거리는 시꺼먼 구름으로 이루어진 듯 했다. 언뜻 전욱과 비슷해 보였지만 다른 점은 그가 머리에 이고 있는 제관과 복색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격이 높은 존재로 보였다. 나는 입을 열어서 물었다.
[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라?
방금 내 입에서 나온 건 육성이 아니라 영언(靈言)이다. 그렇다면 이 곳은 물질계가 아니라는 말인가? 내가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나를 사도로 지칭한 괴인이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저는 오거천문(吳?天門)을 관리하고 있는 열(?)이라 합니다.]
나는 그 지명과 이름을 산해경에서 본 적이 있었기에 깜짝 놀랐다.
[ 여... 여기가 오거천문이라고?]
오거천문은 일월산(日月山)에 세워진 삼황오제 전욱의 업적으로서, 해와 달, 별과 같은 천체의 운행을 관리하는 장소라고 알려져 있었다. 내가 정말로 놀란 이유는 일월산과 오거천문은 [세상의 끝]에 존재한다고 하며 존재하는지 어떤지도 불확실한 상고시대의 신화였기 때문이다.
내 반문에 열이 대답했다.
[ 그렇습니다. 이 곳에 해와 달이 수렴하게 되어 있습니다.]
[ 나는 죽은 겁니까?]
나는 먼저 그것부터 확실히 하기로 했다. 신선이나 도사들조차 신화로 여겼던 일월산 오거천문에 와있으며 내가 영언을 말하고 있는 이상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내 질문에 열은 잠시 얼굴을 꿈틀거리다가 말했다.
[ 이 곳은 사후세계와 관련이 없는 부서입니다.]
[ ......?]
[ 저를 따라오십시오. 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였다. 애초에 인간이 아니니 표정을 읽을 수도 없었지만 열은 나를 철저히 공적인 관계로 대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나는 혹시나 해서 내 몸을 살펴보았는데 역시 몸에 갖고다니던 천암비서나 비등같은 물건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따라가오? 전욱의 부하임을 자처하며 나를 속이려는 자가 아니라는 걸 어찌 믿을 수 있소?]
[ 마음대로 하십시오. 스스로의 힘으로 오거천문을 통과할 수 없다면 그대는 우주가 멸망할 때까지 이 곳에서 떠돌 테니까요.]
[ ......]
문득 삼황오제가 머무는 세계가 현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차원일 가능성이 높다는 지식이 떠올랐다. 열의 말은 허언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 문을 열어두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스윽...
열은 고개를 돌려서 오거천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이내 그의 모습이 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문의 내부는 혼돈으로 일그러진 섬광이 튀어오르고 있어서 안쪽의 모습이 어떤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 아무래도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군.'
나는 일단 열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 상태에서 가만히 있어봐야 뭔가 달라지는 게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거대한 오거천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거천문은 폭이 오 장에 높이가 십여 장에 이르는 엄청나게 거대한 문이었으나 이상하게도 들어가는 순간 빨려들어서 좁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문을 나왔을 때, 나는 웬 궁궐 안에 들어왔다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곳곳에 부유하고 있는 귀신(鬼神)들이 보였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보통 귀신과는 달리 신령스러운 영기를 몸에 두른 채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모습이 기괴할 뿐 사악한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 이쪽입니다.]
꿀꺽
나는 열의 뒤를 따라가면서 침을 삼켰다.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고대의 귀신들은 일개 잡귀와는 차원이 다른 소신격(小神格)들이었다. 겉모습은 허섭스러워보여도 그들이 실제로 지니고 있는 힘은 대라신선급 혹은 그 이상일 게 분명했다. 게다가 나를 지금 안내하고 있는 열에게서는 그런 귀신들보다 훨씬 강대한 신력이 느껴져서, 이 곳이 삼황오제 전욱의 궁궐이라는 걸 절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만귀전(萬鬼殿).
상고시대부터 이어져 오는 삼황오제의 터전이었다.
귀신들은 여기저기에서 나와 열을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이내 관심을 잃고 자기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놈들은 기(棋)를 하고 있었는데 인간세계의 기와는 달리 무려 좌우로 10줄이 더 많았다. 전반적으로 태평하게 놀고먹고 있는 분위기였다.
열이 계속해서 걸어가는 걸 따라갔는데, 나는 한동안 지루하게 방을 통과하는 게 거듭되자 이상해서 질문했다.
[ 열.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요?]
[ 왕께서 기다리는 어전으로 갑니다.]
[ 하지만 벌써 방과 대청을 수십 개나 넘었잖소?]
나는 명제국 황제가 거처하는 궁궐도 돌아다녀 봤지만 이 정도로 넓지는 않았다. 열을 따라서 지금까지 적어도 40개 이상의 방을 넘은 것 같은데 아직도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열이 내 말에 대꾸했다.
[ 99의 궁방(宮房)을 넘어서 세 개의 관문을 통과합니다. 반쯤 왔으니 걱정마십시오.]
[ ......]
엄청난 넓이였다. 하나하나의 방이 적어도 오 장의 크기였으니 말도 안 될 정도로 넓은 궁궐인 것이다. 도중에 열의 말대로 산만한 크기의 거인 수문장이 보였는데, 수문장은 열을 보자 꾸벅 인사를 했다.
' 열의 직급은 굉장히 높은 것 같군.'
지금까지 방을 통과하면서 열은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인 적이 없었고, 반대로 열을 만나는 모든 귀신들은 공손하게 그에게 인사했다.
신화시대의 전승대로라면 당연한 일이다. 열은 전욱의 손자이자 최고대신인 려(黎)의 아들이었다. 대라신선인 팽조와 동급이라고 볼 수 있었으며, 게다가 전욱과 같은 차원에서 중책을 맡고 있다면 그 이상 갈 수 없는 왕족이었다. 당연히 막강한 존재이리라. 다만 열의 모습은 산해경에 기록된 것처럼 다리가 머리에 붙어있지 않았기에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질문했다.
[ 산해경에 기록된 것과는 다른 모습이시군. 산해경이 틀린 건가?]
[ ... 그 때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 무슨 말이오?]
[ 신에게 외양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수수께끼같은 대답을 한 열은 그 일에 대해서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듯 했다. 나는 그렇게 한참동안 열을 따라서 걷고 또 걸었고, 마침내 거대한 어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쿠궁
넓이가 가히 십여 리는 될 법한 광활한 공간! 이건 건물이라고 칭할 수가 없었으며 하늘과 땅 전체를 궁궐로 삼는 듯 했다. 그리고 나는 맞은 편에 엄청난 크기의 암흑 거인이 옥좌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는 걸 알 수 있었다.
암흑의 거인은 예전에 봉선의식에서 보았을 때와 같은 고대의 복식을 입고 있었다. 그 때 보았던 모습을 수백 배나 확대시킨 듯한 모습에 나는 숨을 죽였다. 그리고 옥좌의 양옆에는 수천이나 되는 고대의 귀신들이 도열해서 정적과 위엄을 지키고 있었다.
열은 앞으로 나가서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 왕이시여. 사도를 데려왔나이다.]
[ 잘했다, 열. 다시 오거천문으로 돌아가거라.]
[ 삼가 명을 받들겠나이다.]
쉬익
열은 대답이 끝나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역시 신적인 존재라서 순간이동의 술수 정도는 숨쉬듯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열이 사라지자 어정쩡한 모습으로 가만히 서 있었는데,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던 거대한 존재가 슬며시 웃는 듯 했다.
[ 잘 왔다. 나의 사도여.]
역시 그렇다.
나는 고대의 예법을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는 한에서 예법을 떠올리며 그에게 부복했다.
[ 전욱(?頊)을 뵙니다.]
[ 그래.]
눈 앞에 있는 것은 삼황오제 전욱이 분명했다. 어찌된 일인지 모르지만 나는 차원 저편 너머에 있다고 하는 삼황오제 전욱의 만귀전에 불려온 것이다. 나는 지금 전욱의 기분이 나빠보이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도리어 기뻐보였다. 그래서 그에게 질문했다.
[ ... 저는 왜 여기에 있는 것입니까?]
얼떨결에 오거천문의 관리자인 열을 따라서 만귀전의 어전까지 왔지만 왜 여기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질문에 전욱이 대답했다.
[ 내가 너를 불렀기 때문이다.]
명쾌한 대답이다. 예상이 현실이 되었지만 나는 한층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에게 말했다.
[ 저는 죽을 위기라 생각했습니다만... 여기는 저승입니까?]
[ 하하하하. 이 곳은 저승이 아니다. 만귀전에 귀신이 가득하나 이 곳은 저승과 동떨어져 있다.]
전욱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 나의 사도 백웅이여.]
[ 네.]
[ 아주 큰 일을 했다.]
[ ......]
나는 그가 해신의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삼황오제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자 전욱의 말이 이어졌다.
퍼엉
다음 순간 내 앞에는 호화로운 산해진미가 차려졌고, 좌우에 도열해 있던 귀신들 앞에도 마찬가지로 차려졌다. 전욱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 우선 식사나 들도록 하지.]
[ 오오!]
귀신들이 환호했다. 전욱이 흥이 났는지 말을 이었다.
[ 맛있게 들라.]
쩝쩝
그리고 수천 명의 귀신들은 맛있게 자기 앞에 있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군주의 명에 따르는 거라면 다소 게걸스럽게 먹어도 괜찮은 듯 했다.
[ 악사들은 연주하라.]
디리링
어전 한켠에서 수십 명의 귀신 악사들이 고대의 거문고나 악기를 연주하며 청아한 음색을 내기 시작했다. 아까 들었던 거문고 소리는 여기에서부터 울려퍼진 것인가 싶었다. 나는 음악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굉장한 실력의 소유자라는 건 음색에서부터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도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젓가락을 들어서 고기요리를 한 점 집어들었다.
' 어? 이거!'
향긋한 맛이 입 안에 퍼져나갔다. 여태껏 먹어왔던 음식 중에서도 최상이라고 단연 말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절품요리였다. 생전 처음보는 요리지만 형태따위는 상관치 않을 정도로 맛있는 것이다.
이건 무슨 고기일까? 돼지고기나 소고기나 닭고기 같지 않았다. 식감과 포만감이 단연 압도적이었다. 나는 그 맛에 현혹되어서 몇 가지 음식을 더 집어먹었는데 하나같이 진미였다.
내가 맛있게 먹고 있자 전욱이 말했다.
[ 네가 행한 해신 토벌은 삼황오제 대부분이 지켜보고 있었다.]
[ 우흐헉.]
나는 술 한 잔을 부어서 자작하고 있던 중 뱉을 뻔 했다. 난데없이 이게 무슨 말인가?
내가 젓가락과 술잔을 놓고 그를 쳐다보자 전욱이 말을 이었다.
[ 본디 우리는 [옛 지배자]와 칠요의 계약을 맺고 상호불가침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의 사도인 네가 칠요를 가지고 해신과 충돌하기 전 여러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특히 여와께서는 너를 죽여서 칠요의 수호자로 만들자는 의견까지 내놓으셨다.]
[ ......]
[ 나와 대적했던 공공처럼 말이지.]
진심으로 무섭다.
여와가 마음먹고 삼황오제와 천계가 실천하면 나는 다리잘린 거북이 꼴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공공처럼 칠요의 수호자가 되어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영영 지박령 신세가 되는 건 틀림없이 비참하리라.
[ 하지만 내가 여와의 제안을 거부했고, 우리는 '그들'과 접촉해서 의견을 조율했다. 그리고 그 결과 해신은 죽어도 싸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 네?]
[ 놈은 약속의 때를 빌미로 너무 나대고 있었다. [옛 지배자]들도 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싶어했지. 이해관계가 일치했기에 놈들과 우리는 해신을 없애는데 동의했고 너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 으음.]
해신은 [옛 지배자]에게 미움을 사고 있다는 십이율주의 말은 사실으로 보였다. 적어도 해신 토벌에 관해서 십이율주가 내게 거짓을 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 네가 완전히 위기에 몰리면 인과율을 감수하고 조력해 주려 했으나 그럴 필요까진 없더군.]
그렇다면 해신을 없애도 별로 문제가 없다는 것인가? 나는 차분하게 전욱의 말을 듣다가 머릿속을 정리하며 말했다.
[ 십이율주라는 자는 근처의 어인도시를 멸하며 빠르게 해신의 세력을 줄이려 했던 것 같습니다.]
[ 그랬겠지. 그게 필멸자로서 최선의 방법이리라. 그러나 해신도 일단은 [옛 지배자], 놈의 지각력은 온 대양에 뻗어있으므로 오래지 않아 그 시도를 눈치챘을 것이다.]
[ 실패할 수밖에 없었단 말입니까?]
[ 운이 없었던 거지. 우연히 해신이 그 근처에서 잠들어 있다가 허겁지겁 달려왔을 것이다.]
난데없이 해신을 맞닥뜨린 건 운의 문제였나.
나는 '약속의 때'라는 게 뭔지 궁금해서 그에게 질문했다.
[ 약속의 때라는 게 무엇입니까?]
[ 그것은 대신(大神)만이 공유하는 비밀이니 네게 말할 수 없다.]
단호하게 잘라끊은 전욱이었다. 나는 전욱이 저렇게 칼같이 말하면 더 이상 캐묻지 못할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아무래도 약속의 때라는 건 굉장히 중요한 비밀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