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84 암천향(暗天鄕) =========================================================================
나는 십이율주 일행과 함께 행동하는 도중에 슬며시 순어구를 손에 잡았다. 그리고 망량에게로 대화를 시도했다. 순어구는 마음속으로도 대화하는 게 가능했다.
[ 망량.]
[ 잘 들리오.]
[ 지금 상황은...]
나는 망량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망량이 옆에 있던 제갈사와 뭔가를 의논하는 듯 하다가 내게 순어구를 통해서 말했다.
[ 백웅. 제갈사가 짜증내고 있소.]
[ ......]
뜨끔하는 기분이 든다.
[ 하지만 아직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되오. 우선은 율주를 따라서 봉인을 하고 위험하면 언제든 비등을 써서 탈출하기를 권하오.]
[ 알았소.]
[ 또 한 가지, 제갈사의 전언인데...]
나는 제갈사의 조언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소.]
파앗
대화를 하는 동안 어느 새 나를 포함한 십이율의 정예들은 풍백이 만들어낸 바람의 통로를 통해서 해적섬에 당도해 있었다. 혈도단이 한때 지배했던 이 곳은 내가 완전히 쓸어버린 탓에 인적없이 썩은 시체와 해골만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십이율주는 삼사에게 명령했다.
"바로 쳐들어간다. 길을 열어라."
그러자 운사(雲師)가 앞으로 나와서 양손을 뻗은 채 뭔가 주문을 외웠다. 운사의 주문이 끝나자 갑자기 해적섬 앞바다가 천천히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바다의 바닥이 드러날 정도가 되고 말았다. 수평선까지 계속해서 갈라지던 바다는 이윽고 완전히 하나의 길을 만들어내고 만 것이다.
엄청난 술법!
타다닷
그리고 십이율의 정예들이 길을 따라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의 뒤를 따랐는데, 갑자기 양옆으로 갈라진 바닷물 속에서 괴이한 음영이 튀어나와서 우리를 공격해 왔다.
[ 키악! ]
슈칵
대응은 즉각적이었다. 십이율 풍원류(風原流)의 문주가 눈에 보이지 않는 암기를 사용해서 습격자를 일격에 해치워 버렸다. 그는 사방으로 솟구치는 청혈(靑血)을 보자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청혈에는 독이 있는게 분명한지, 괴물에게서 피가 흩뿌려진 바닥은 흉칙한 소리를 내며 매캐한 연기를 피워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죽은 놈은 이족(異族)이었는데, 내가 예전에 보았던 어인(魚人) 족속이었다. 그 모습을 힐끔 본 십이율주가 말했다.
"해신의 일족 중 전사계급은 몸 속에 독혈을 머금고 살아간다. 놈들을 해치울 때는 피가 튀지 않게끔 해라."
"존명!"
촤앗!
아니나 다를까 십이율 정예들이 달려가는 길의 양옆에서 어인족들이 각각 삼지창, 창, 도끼, 검 따위를 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십 마리가 뛰어서 공격해 오는 모습은 장관이었고, 앞길에도 미리 어인들이 걸어나와서 길을 꽉 채우며 막았다. 숫자는 최소한 일천 단위일 것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질려서 말했다.
"뭐 이렇게 많습니까?"
내가 천뢰인을 실은 검강으로 순식간에 다섯 마리의 목을 끊어냈으나 적의 숫자에 비하면 티도 나지 않았다. 예전 수십만 군대가 부딪히던 전장에 온 느낌이었다. 십이율주는 내 말에 담담하게 대꾸했다.
"순혈 어인 놈들은 생후 2년만 지나면 바로 전투가 가능한 성체가 되니까. 적어도 병력이 일만 마리는 있을걸."
퍼벅 하는 소리와 함께 어인들이 곤죽이 되어서 터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방어술법을 자기 주변에 걸어놓은 걸로 보였다.
까가강!
쉬칵
[ 크에에엑.]
"죽어라 괴물들!"
십이율 문주들과 만하령문의 정예들도 하나같이 초절정 이상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예를 발휘해서 수십 배가 넘는 어인병을 상대로 압도하듯 싸웠다. 하지만 숫자가 불리하다는 건 변함없었기에 나는 고함을 쳤다.
"그냥 삼사의 술법으로 저 멀리에 있는 도시에 즉시 들어가면 안됩니까?"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도시 근처는 해신의 마력으로 보호되기 때문에 직접 앞에 가서 결계를 해제해야 해."
그렇게 말한 십이율주가 갑자기 자신의 은하구절편을 꺼내들었다.
위이잉
"하백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모조리 얼려버려라!"
은하구절편이 청은빛을 뿜어내며 명동했다. 신기를 한껏 곧추세운 은하구절편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더니, 이내 크게 나선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쩌저정!
"......!!"
순식간의 일이었다. 빙룡(氷龍)이 공기를 통째로 얼려버리더니, 이내 수평선까지 나 있는 길의 외벽을 모조리 얼려버리고 말았다! 바다의 벽에서 튀어나오던 어인들은 뛰어오른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서 땅에 떨어져 버렸고,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던 어인대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어인동상이 되고 말았다.
휘오오오
괴물들이 몽땅 얼어버린 대지는 기괴하기까지 했다. 신기한 것은 그 난전 중에서도 십이율주는 아군에게는 전혀 빙기로 공격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적아가 뒤엉켜 싸우는 중에서도 공격할 놈만 선별할 수 있다는 게 대단했다.
' 엄청난 위력이다...'
나는 은하구절편의 힘에 전율했다. 아무리 그래도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바다를 통째로 얼려버린다는 것은 호법사자의 천령단을 순간적으로 상회하는 힘을 뿜어낸다는 뜻이었다. 은하구절편이 시동되면 천하무적의 위력 그 자체였다.
"가자!"
퍼벅
콰칭
십이율의 정예들은 하은천이 얼려놓은 괴물들을 무기로 쳐서 없애며 하은천을 뒤따라가기 시작했다. 얼어버린 적을 없애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는 것이다. 나도 거들어줄 겸 내공을 끌어내서 한번에 수십 마리씩 박살냈는데, 놀랍게도 어인들은 속까지 얼어서 완전히 깨지듯이 죽고 말았다. 순식간에 장기나 피까지 얼려버릴 정도의 극한의 한기라는 뜻이었다.
나는 경공으로 날듯 뛰어가면서 순어구를 통해 망량에게 은하구절편의 위력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망량은 꽤 놀란 듯 대답했다.
[ 그건 보패로도 보이기 힘든 위력이오. 은하구절편은 특수한 신기인 것 같군.]
[ 하은천이 이런 능력을 연발할 수 있겠소?]
[ 본인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모를 것 같소만... 굳이 주문을 영창한 걸 보면 아마 횟수제한이 있을거라 생각되오.]
도중에 혈도단주가 말했던 인신공양의 제단이 보였다. 그 제단 주변에는 여기저기 인골(人骨)이 파묻혀있는 게 보여서, 어인들이 인간을 참혹하게 산 채로 잡아먹은 정황이 보였다. 십이율주는 그 제단을 보고는 냉막하게 말했다.
"깨부숴라."
"네."
콰앙!
십이율 문주들이 강기를 써서 대번에 커다란 제단을 부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제단에서 시꺼먼 연기가 흘러나와서 어디론가 향했는데, 십이율주는 그 연기를 따라서 다시 한 번 바닷길을 만들며 진입로를 만들었다.
이윽고 우리는 혈도단주가 이야기했던 어인족의 도시에 도달했다. 심해라서 그런지 시꺼먼 어둠이 펼쳐져서 술법사들이 불빛을 소환해서 시야를 밝혔다. 뒤따라오던 십이율 문주 중에서 창룡문주가 자신의 도(刀)를 어깨에 걸치며 질린 듯 중얼거렸다.
"양측 벽의 높이가 엄청나군... 여기는 대체 얼마나 깊은 심해인 거요?"
그 말에 옆에 있던 호국동맹주가 힐끔 높이를 올려보더니 말했다.
"어림잡아서 깊이가 십오 리는 넘을 것 같소."
창룡문주가 기겁했다.
"세상에... 이 괴물놈들은 어떻게 이런 심해 밑바닥에서 도시를 만들어서 살 수 있는거요?"
"그러니까 괴물인 거겠지."
십이율 문주들이 생전 처음 보는 괴이한 풍경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십이율주가 삼사에게 말했다.
"결계는 내가 깰 테니 너희는 한 놈도 탈출하지 못하게 새로운 결계를 짜라."
"존명."
"그리고 십이율 문주들과 만하령문의 정예들은 들어라."
십이율주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자,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이 안에 있는 모든 괴물들을 씨알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여버려라. 놈들의 새끼든 알이든 전부 없애야 한다. 괴물 하나가 살아있으면 양민 열 명이 그 괴물에게 죽을 거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십이율 문주들은 부복하며 우레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존명!!"
"존명!!"
"존명!!"
콰앙
십이율주가 엄청난 기세를 담아서 은하구절편을 후려치자, 투명한 막에 둘러싸여있던 거대한 이계도시의 결계가 부숴지고 말았다. 그리고 십이율 문주들과 만하령문의 정예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도시 안으로 진입해서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다.
[ 꿰에에엑!]
[ 꿰엑!]
어인들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덤벼들거나 도망쳤지만 이 자리에 모인 전원이 대단한 무위를 지닌 고수들이었다. 어인의 기초신체능력이 강하다 한들 초절정고수가 이렇게 떼로 몰려있으면 항거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만하령문의 술법사들이 여기저기서 상위술법을 동원해서 그들을 보조했으니 한치의 빈틈도 생기지 않았다.
나는 여기저기서 청혈이 흩뿌려지며 어인들의 목과 사지가 날아다니는 학살현장을 지켜보았다.
십이율주가 다가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
"학살은 싫어하나?"
"괴물을 죽이는게 왜 학살입니까? 청소라 생각합니다."
"나와 생각이 같군."
"다만 이런 식일 거라면 차라리 고려의 군대를 끌고오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군요."
내 솔직한 감상은 학살보다는 효율성에 치우쳐져 있었다. 왜냐하면 얼추 보이는 도시의 어인들은 적어도 일만 단위인데, 아무리 이쪽 전력이 강하다 해도 수십 명이 수만 마리를 도살하는 건 체력적으로 지치는 일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수천 수만의 고려군대를 불러오는 게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자 십이율주가 말했다.
"이건 초전(初戰)이며 의식이야."
"의식이라뇨?"
"십이율 문주들은 이족과 싸운 경험이 풍부하고 강한 무인들이지만 정작 해신이라고 하는 이족의 수령과 결전을 벌일 각오가 덜 되어 있어. 수도 없이 적을 베어넘기면서 저 놈들과 우리가 [전쟁]을 하고 있다는 인식을 박아놓는 거지."
"인식..."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래 싸울수록 이족의 사악한 기운에 정신이 타락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전투의 광기와 피의 연회로 정신력을 도야시켜서 타락을 막는 거야."
"그렇군요..."
나는 십이율주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인족도 이족이라서 인간을 공포로 미치게끔 하는 무형의 기운을 지니고 있어서, 아무리 강한 고수라 해도 그들을 오래 마주치다보면 정신에 이상이 생기기 쉬웠다. 그래서 십이율주는 정신에 외상이 오는 것을 학살의 광기로 막아버리겠다는 작전을 세운 것이다. 이족의 사악한 기운을 여러번 느껴본 나로서는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뭐. 이제 슬슬 효율성을 추구할 때가 되었나..."
사방에 일천 마리 이상의 시체가 널부러지자 십이율주가 하늘을 향해 손을 들며 외쳤다.
"봉황이여! 이 땅의 어둠을 정화하라!"
하늘이 열린다.
동시에 암운으로 가득찼던 하늘 속에서 오색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신령스러운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은 내가 상상했던 봉황의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고, 새 모양을 한 빛덩어리라는 표현에 좀 더 가까웠다. 이윽고 봉황은 천공에서 떨어지더니 어인의 도시 한가운데에 충돌했다.
후와아악
[ 끄에에엑!]
[ 끼아아악!!]
봉황이 떨어진 자리에서 거대한 빛의 파도가 퍼져나가면서 사방에 있던 어인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빛의 파도에 닿인 어인들은 전신이 펑펑 터져나갔고 어떤 놈은 잿더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또한 어인들이 만든 사악한 건축물도 부숴지고 말았다.
신기한 것은 그 빛의 파도가 인간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이었고, 도리어 빛에 휩싸이자 체력과 영기가 회복되는 기분이 들었다.
"......!!"
나는 급히 화요와 화룡신검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봉황이 뿜어낸 빛의 파도가 화룡신검에 강하게 스며들었고, 화룡신검이 점차 힘을 되찾는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역시 같은 천계의 신수라서인지 힘의 상성이 좋은 듯 했다.
' 곧 눈을 뜰 것 같아...'
이번 싸움에서는 화룡진인이 덜 회복되었는지 눈을 뜨지 않았지만 앞으로 눈을 뜰 게 확실해 보였다. 나는 화룡신검의 회복에 집중하며 적들을 베어넘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싸웠을까?
대략 반 시진이 지났을 때 전투는 마무리되었다. 십이율 고수들은 돌아다니면서 어인유생이나 새끼들도 자비없이 모두 마무리하고 있었다. 작업이 끝나자 십이율주가 나를 쳐다보았다.
"봉인을 해야 해."
나는 십이율주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룡신검을 크게 치켜들었다. 그리고 전국옥새의 힘을 뽑아내서 화룡신검에 집중시키며 힘을 일깨웠다. 그러자 잠시 후 화룡신검에서 거대한 화기가 뿜어져 나오면서 점차 힘이 증폭되는 게 느껴졌다.
십이율주는 화룡신검의 영기를 전달받으며 삼사와 함께 봉인작업에 들어갔다. 봉인은 그로부터 반 시진이 지나서야 끝났다. 십이율주는 한숨 돌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제 하나. 앞으로 이 일대에서는 어인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다섯 번 더 이렇게 해야 합니까?"
"그래. 다만 이번이 처음이라서 좀 힘들었을 뿐이지."
우리는 첫 어인도시를 봉인한 후 곧장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다음 목적지는 탐라도라고 하는 고려의 섬 근처였는데 이 곳에도 어인들이 들끓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봉황의 힘을 받아 화룡신검을 회복시키며 봉인에 힘을 빌려주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다섯 군데를 봉인하자 거의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꼬박 여섯 시진동안 쉬지도 않고 계속 어인과 싸우면서 전투를 반복했기에 사람들은 모두가 지쳐 있었다. 수만 마리의 어인을 쉬지 않고 도살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 오늘은 쉴려나...'
나는 잠시 쉬었다가 토벌행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십이율주는 사람들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걸 알아채고는 말했다.
"회복시켜야겠군."
"네?"
십이율주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땅에 손을 뻗었다.
쩌엉!
그러자 십이율주의 몸이 사방으로 녹색 빛을 뿜어내었는데, 잠시 후 녹색 빛의 광원이 떠올라서 사람들을 감쌌다. 녹색 빛이 잦아들자, 놀랍게도 피폐해져 있던 십이율 문주들과 만하령문의 고수들이 단번에 체력이 완전히 회복된 듯 했다.
나는 황당해서 물었다. 나도 체력과 내공이 한꺼번에 회복되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어떻게 한 겁니까?"
내가 많은 술법지식을 갖고 있지만 이렇게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회복시키는 술법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지선 망량의 지식에도, 태평요술에도 없는 술법이었다. 십이율주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신단수는 전세계에 있는 땅의 용맥(龍脈)과 통해 있으니, 이 땅의 용맥을 찾아내서 신단수와 임시로 연결한 거야. 그렇게 하면 이렇게 멀리 있어도 신단수의 힘을 끌어내 쓸 수 있지."
"......."
"뭐 신단수 근처에서 쓰는 것보다는 약할 수밖에 없지만."
말은 쉽지만 용맥의 힘을 끌어오는 것 자체가 대술법사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보통의 술법사는 용맥의 힘을 끌어오는 게 아니라 용맥 위에서 수련만 해도 감지덕지인 것이다. 게다가 그걸 신단수와의 매개체로 쓰는 건 엄청난 경지였다.
' 설마 지금까지 봉황을 소환한 것도...'
나는 지금 대단한 걸 알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이율주의 말대로라면, 그는 땅에서 싸우는 한 무적에 가깝다는 소리다! 땅만 있으면 신단수의 힘을 언제 어디서든 끌어와서 쓸 수 있으니 가공할 기적같은 술법을 영창할 수 있으며, 게다가 뜻대로 회복도 할 수 있었다. 백련교주의 원영신에 못지 않은 능력의 소유자가 분명했다.
나는 또 한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 절대 신시 근처에서 십이율주와 싸우면 안 돼!'
신시 근처에서라면 십이율주의 힘이 최대가 될 게 분명하므로, 설령 삼사가 없다 하더라도 그는 무적일 것이다. 내가 머릿속에 정보를 우겨넣는 동안에 십이율주가 말했다.
"시작한 이상 단번에 몰아쳐서 끝내버려야 돼. 시간을 주면 해신이 본격적으로 끼어들기 시작할테니까."
"이미 다섯 개의 도시를 부수고 수만 마리의 어인을 끝장냈으니 충분히 빌미를 준 거 아닙니까?"
"아니. 그 도시들은 전 대양에 퍼져있는 놈들의 도시 중 일각에 불과해. 큰 타격을 준 게 아니야."
"......"
"놈이 이곳 상황에 관심을 갖고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마무리하자."
나는 십이율주에게 말했다.
"해신은 어디 있는 겁니까?"
"나도 몰라. 무작위로 도시를 옮겨다니며 그 곳에서 깊은 잠에 든다는 것만 알고 있어."
"흠..."
예전에 내가 비등의 환영을 보았을 때는 혈도단 근처의 도시에서 해신이 잠들어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 갔을 때는 해신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십이율주가 해신과 싸울거라고 해서 말하지 않고 있었지만, 십이율주의 말대로라면 각 도시마다 해신이 머무는 기간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마지막 어인의 도시로 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도시를 쳐서 어인들을 학살하고 봉인을 끝냈는데, 갑자기 화룡신검이 울기 시작했다.
찌르르릉
[ ... 연자여!]
화룡진인이 깨어나서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급히 대답했다.
[ 깨어나셨습니까?]
[ 그 동안 점점 의식이 깨어나서 그대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완전히 회복될 것이다.]
[ 잘 되었군요.]
[ 그대는 실로 대영웅이다. 인간을 위해서 해신의 일족을 토벌하려 하다니!]
뭔가 감탄하듯 말한 화룡진인이 말을 이었다.
[ 하지만 지금은 그 선택에 책임질 때가 온 것 같구나.]
[ 무슨 말씀이십니까?]
쿠구구구...
구구구구구...
갑자기 폐허가 된 어인도시에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그 진동은 마치 살아있는 것이 꿈틀거리듯, 고요하게 진공을 메우면서 알 수 없는 압박감을 가져다 주었다. 흑암 속에서 술법사들이 빛을 소환해서 시야를 밝히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빛도 일순간에 꺼져 버렸다. 마치 더욱 거대한 힘이 일대를 뒤덮은 듯 했다.
어둠이 천천히 걸어오는 것 같다.
사람들은 분위기에 압도되어서 할 말을 잃고 서 있었다.
"......"
십이율주가 말했다.
"왔군..."
무엇이 왔다는 말인가?
내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화룡진인이 말했다.
[ 연자여. 오늘의 전투는 천상천하의 역사에 남을 대전(大戰)이 될 것이다. 그대가 나의 연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 네?]
[ 여동빈!!]
쉬익
갑자기 검선 여동빈의 환영이 내 앞에 나타났다. 여동빈의 환영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데, 그 답지 않게 긴장한 듯한 얼굴이었다. 여태껏 백련교주나 수호자 앞에서도 긴장한 적이 없었던 여동빈이 긴장이라니?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전조가 다가오는 걸 깨달았다.
[ 나의 스승이시여. 정녕 저 존재와 싸워야 하겠습니까? 저 자가 얼마나 엄청난 존재인지는 스승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동빈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러자 화룡진인의 환영이 여동빈 앞에 나타나며 싱긋 웃었다.
[ 하하! 너와 나는 세상을 멸할 거룡(巨龍)도 쓰러뜨리지 않았느냐?]
[ 하지만 이건... 천지의 균형을 바꿀 대사건입니다.]
[ 나는 내 제자인 너를 믿기에 이 자리에 불렀다. 이 스승을 도와주지 않을 생각이냐?]
[ ......]
여동빈은 꺼지듯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 도와 드리지요.]
나는 여동빈에게 급히 물었다.
[ 여동빈! 무슨 말입니까? 대체 무슨...]
쉬쉬쉬쉬쉭
여동빈과 화룡진인의 영이 동시에 내게 강림했다. 그리고 나는 화요와 화룡신검을 양 손에 든 채 최대한의 전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서 화룡진인이 여동빈에게 말하는 게 들렸다.
[ 신급 주살과 마법은 내가 감당하겠다. 여동빈 너는 천둔검법으로 놈을 해치워라.]
[ 천 년 만이군요.]
[ 후후!]
쿠웅...
쿠웅....
서서히 어둠의 발걸음이 다가왔다. 그 발걸음이 이윽고 소리를 멈췄을 때, 나는 세상의 저편이 어둠으로 메워지며, 그 크기가 수십 리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거인이 우리의 시야를 한번에 사로잡는 걸 알아차렸다. 어찌나 큰지 내가 영계에서 보았던 연금술사의 화신조차도 눈 앞의 저 거인에는 미치지 못할 것 같았다.
거인은 어둠 속에서 비늘을 꿈틀거리며 조용히 우리를 내려다 보았다. 단지 시선일 뿐이었는데도 이 자리의 대부분이 압도당하며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심지어 역전의 고수인 십이율 문주들조차도 마치 파닥거리는 생선처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저 거인의 존재감이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심연이 인간을 잡아먹는다.
그렇다.
저것은 - 필멸자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
태초부터 신으로 태어난 자.
그렇기에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대적할 수 없다.
이 자리에서 멀쩡한 것은 십이율주, 삼사, 그리고 나 뿐이었다. 삼사 중 한명이 공간술법을 이용해서 우리 외의 나머지를 갑작스럽게 어디론가 집어넣어버렸고, 하은천이 은하구절편을 꺼내들었다.
하은천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신(海神)이 벌써 올 줄은 몰랐는데."
[옛 지배자] 해신과의 첫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