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83 암천향(暗天鄕) =========================================================================
십이율주와 함께 신단수에서 내려온 후, 나는 그에게서 무공연원에 대해서 들었다.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
십이율주가 말을 이었다.
"내 무예는 거기서 출발했다. 자아를 탈피해서 소우주(小宇宙)를 직접 마주치게 되면서 벽이 사라졌고."
"태극이무극... 무공의 이름입니까?"
"... 백웅 네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건지 모르겠군. 형태가 없는 것에 굳이 형태를 만들어야 하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게 시작인데."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십이율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한꺼풀 벗기 전에는 무공 얘기는 안하는 게 낫겠군."
"방금 건 절대지경의 무론(武論)입니까?"
"으으..."
십이율주는 뭔가 질린 듯한 신음성을 내다가 말했다.
"너는 절대지경이라고 경지를 속편하게 구분짓지만 그건 단지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해. 구분하기 좋으라고 세상사람들이 붙인 것 뿐이라고. 절대지경이라고 불리는 그 문턱을 넘어선 자들은 무류(武流)도 천양지차인데다 무궁무진하기에 꼭 집어서 설명할 수가 없어."
"......"
"스스로 경계를 만들지 마. 그건 자멸의 길이니까."
어쩐지 꾸짖음을 들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게 절대지경 고수의 말이라 생각하니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 말에 어떤 현기가 숨어있는지 지금의 내 수준으로는 측정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 어려워...'
절정지경에서 초절정으로 넘어올 때보다 더 거대한 벽이 나를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다. 이래서 이청운이 내게 칠대절학의 가능성만을 전수하고 굳이 절대지경의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거였을까? 절대지경을 구분짓는게 되려 벽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는데서부터 출발해야 할 듯 하다.
십이율주가 말을 이었다.
"뭐 그리고 술법은... 만하령문 삼사한테서 배웠고 그 외에는 독학으로 이것저것 습득했지? 내 술법스승은 삼사야."
나는 그 말에 힐끔 삼사라고 불리는 운사, 우사, 풍백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십이율주 곁에 시립해 있으면서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었다. 십이율주의 말대로라면 저 자들이 십이율주에게 술법을 가르쳤다는 말인 듯 했다.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삼사와 당신의 나이는 몇 살입니까?"
십이율주가 내 질문에 이죽거렸다.
"여자의 나이는 물을 수 없어도 남자 나이는 물어볼 수 있다는 거냐."
"그게 아니라..."
"직접 물어볼까? 운사! 우사! 풍백!"
"네."
삼사가 공손하게 대답하자 십이율주가 질문했다.
"각각 나이가 어떻게 돼?"
삼사가 차례대로 대답했다.
"삼천사백오십칠 세."
"동일합니다."
"동일합니다."
"......"
이게 무슨 말인가? 저 자들이 삼천사백여 년을 살아왔다고?
내가 황당해서 그들을 쳐다보았지만 그들은 아무리 봐도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고, 신선처럼 영체가 아니었다. 아무리 반로환동하여 수명을 늘린다 해도 일천 년을 넘겨서 살아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았는데, 삼천 년 이상 살아온 존재가 눈 앞에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십이율주가 납득하며 말했다.
"뭐 그렇겠지. 은주시대의 시발기(始發期)에 너희가 강림했을테니."
"네."
십이율주는 내 쪽을 바라보았다.
"삼사는 인간이 아니야. 신대(神代)에 환웅(桓雄)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온 신령(神靈)이지. 그래서 인간의 수명으로는 잴 수 없으며 영생불사하는 존재다."
"하지만 저들은 영체가 아닙니다. 인간의 육체를 갖고 있는데요?"
내가 의혹을 표하자 십이율주가 말했다.
"환생(還生)했으니까."
"... 네?"
"네 말대로 신령은 정신체라서 매개체가 없으면 물질계에서 오래 머물수도 없지. 반드시 매개체가 되는 강령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삼사는 자신들의 근원을 지상으로 옮겨왔으므로 지속적으로 환생을 반복하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물질계에서 유지시키고 있어."
"......!!"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문득 항우의 말이 떠올랐다.
[ 달기와 싸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름 재미있었다. 그래서 선물로 한 가지 더 가르쳐주고 가겠다.]
[ 아니... 뭘 가르쳐주셔 봐야... 저는 이미 죽은 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 네게는 망각의 인(印)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환생(還生)할 확률이 높다.]
[ 망각의 인? 그게 뭐죠?]
[ 모든 정명자는 윤회의 고리에서 망각하게끔 각인이 영혼에 새겨져 있다. 다만 아주 가끔 그 각인이 사라져 버리거나 애초에 없는 놈이 있다. 그런 놈은 기억을 지닌 채 환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 분명히 그랬다. 항우는 이 세상에 환생자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존재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망각의 인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망각의 인이 없는 자는 기억을 지닌 채 환생하는 게 가능했다.
' 그렇다면 삼사는 신령의 힘으로 의도적으로 망각의 인을 지우며 환생하고 있다는 소리군.'
아쉽게도 망각의 인을 판별할 술법은 내게 없다. 게다가 전시안을 써서 망각의 인을 보려고 해도, 팽조 때문에 현재 전국옥새의 기능이 닫혀있는 상태라 영력을 끌어내는 것 외에는 활용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저 강아지탈 너머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문득 생각나서 십이율주에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율주의 나이를 안 들었습니다만."
"내 나이? 올해로 서른 둘이었던가."
"......"
"못 믿는 눈치군. 하긴 탈을 쓰고 있으니까 잘 모르겠지."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것도 이상한데, 왜 전신탈을 쓰고 있는 겁니까?"
"뒤틀린 인과의 흐름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지."
똑같다.
예전에도 나는 그에게 왜 전신탈을 쓰고 있는지 질문한 적이 있었고, 이번에도 뒤틀린 인과의 흐름을 언급하며 똑같이 대답한 것이다. 이번에도 그냥 넘기면 천추의 한이 될게 분명했기에 나는 죽을 각오를 하며 재차 그에게 물었다.
"뒤틀린 인과의 흐름이란 게 뭡니까? 설마 저를 만나는 게 불길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십이율주가 불쾌해하거나 분노할수도 있지만 짚고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별로 의미있는 게 아니라 생각해서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저 자가 나를 만날 때만 강아지탈을 쓰는 게 분명했다. 내가 그를 쳐다보자 십이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
"나는 중대사가 있을 때는 반드시 천기를 읽으며 점을 친다. 나와 삼사의 술력이 합쳐지면 웬만한 미래를 읽을 수가 있지. 그리고 이번에 너와 만나게 된다는 점괘에는 뒤틀린 인과의 흐름이 나를 해할 것이며, 그 흐름은 거대한 기회를 품고 있으리라는 결론이 나온 거야."
십이율주는 물을 마시고는 말했다.
"그래서 너를 더 만나보고 싶었지. 그 흉점은 기이한 점이 있었거든."
"기이한 점?"
"거대한 인과의 흐름 속에서 불길함이 또아리를 틀고 나를 만나러 오지만, 희한하게도 그 불길함을 머금은 너는 그 어떤 점으로도 읽히지 않는 무(無)였거든. 흉점을 끌어안은 자는 흉인(凶人)일 수밖에 없는데 너는 그 어떤 점술사도 읽을 수 없는 혼돈(混沌)이었단 말이지."
"......"
"아무튼 그런 까닭에 나는 너를 만나는 동안에는 결코 이 탈을 벗을 수 없어. 이 탈이 나를 인과에서 지켜줄 거라고 점괘에 나왔으니까. 탈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네가 품고 있는 흉(凶)이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없는거지."
그랬던 건가.
나는 이제야 십이율주가 그동안 나를 만나며 탈을 썼던 이유를 알게 되자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십이율주는 거기까지 이야기하고는 내게 말했다.
"이제는 나에 대해서 말할만큼 말한 것 같은데 네 무공내력도 알려줘야지?"
"네."
나는 뇌신류의 무공을 배웠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물론 칠대절학에 대해서 드러나게 되면 십이율주의 표적이 될게 분명했으므로 따로 말하지 않았다. 십이율주는 하수의 무공에는 그다지 관심없는지 따분하게 듣고 있다가 말했다.
"알았어. 네가 어린 나이에 강력한 무공을 성취한 이유는 천년설삼을 복용한데다가 뛰어난 뇌신류 스승의 가르침이 있어서라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렇다 치고 용의 힘은 어떻게 된 거지?"
나는 화룡진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차피 십이율주는 내가 칠요를 갖고있다는 걸 기정사실화하고 있기에 더 숨겨도 의미없으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황궁에서 화룡진인을 불러내어 싸웠던 이야기까지 하자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화룡진인은 언제쯤 부활할 수 있지?"
"일이년 내에 활력을 되찾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렇군. 그래도 뭐... 확실히 큰 전력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십이율주가 말했다.
"자 그럼 공동십이율주로서 제안하지. 오늘부터 당장 해신토벌에 나서자고."
"어떻게 말입니까? 저는 아무 계획도 듣지 못했습니다만."
"계획은 간단해."
십이율주는 팔짱을 끼며 '계획'을 설명했다.
"내가 파악하기로 이 반도와 대륙, 동영 일대의 바다에는 해신(海神)의 근거지가 총 6곳이 있어. 그 6곳은 육망성(六望星)의 형태를 이루며 강한 마력의 근원지가 되고 있지. 나는 지금부터 너와 함께 그 어인의 도시를 차례차례 뭉개러 갈 것이다."
나는 십이율주의 말에 문득 생각이 났다.
' 음. 그러고보니 해적섬 근처에...'
나는 전생직후에 늘상 혈도단 해적들을 토벌하면서 그곳에 있는 보물들을 가지고 오곤 했다. 그러던 중 해적섬 근처에 해저도시가 있으며, 그 곳에 이족(異族) 어인(魚人)들이 드글거리며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인간을 인신공양하는 사악한 장소이기도 했다.
내가 십이율주에게 조심스럽게 해적섬 주변이 의심스럽다고 이야기하자 그가 말했다.
"알아. 그 곳도 의심가는 곳이었으니까."
"잠깐..."
나는 그의 말에 기가 막혀서 외쳤다.
"알고 있다면 왜 해적 혈도단을 토벌하지 않은 겁니까? 그 놈들은 육지인들과 상선을 약탈하면서 극악무도한 짓을 일삼았단 말입니다!"
내 말은 지극히 당연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혈도단에 대해 알고 있는데도 왜 십이율주는 토벌하지 않은 것인가? 내 질문에 십이율주가 대꾸했다.
"십이율 문파 중 한둘만 동원해도 그런 해적놈들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겠지. 하지만 해신의 세력들은 우리 십이율이 움직이는 걸 예의주시하고 있어. 우리 십이율의 정예가 움직여서 해적놈들을 토벌할 경우, 그 어인놈들은 기껏 파악한 위치에서 다시 자신들의 근거지를 옮겨버렸겠지."
"......"
"너라면 깊이가 수십 리나 되는 광대한 바다의 밑바닥을 일일이 뒤지면서 이족의 본거지를 찾아낼 수 있겠냐? 나로서는 놈들을 한번에 쓸어버려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놔둘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렇긴 하다.
또한 그 말대로라면 내가 따로 움직여서 혈도단을 쓸어버린 건 어인들이 십이율의 행동으로 보지 않았기에 도시를 이동시키지 않았다는 소리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서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대의를 위해 버린 힘없는 백성들은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수백 명 씩이나!"
내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직까지도 노예가 되거나 죽었을 것이고, 새로운 노예가 또다시 해적들 손에 고통받고 있으리라. 십이율주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안 된 일이군. 하지만 나는 해신을 쓰러뜨리는 게 더 중요해."
"......!!"
나는 정나미가 다 떨어지는 걸 느꼈다. 내가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를 참아내자 십이율주가 말했다.
"백웅. 의분(義憤)은 좋은 거야. 분노가 없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지. 하지만 죽어서 패배하고 나면 그 분노에 어떤 가치가 있지?"
"가치라니요?"
"패배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무슨 수를 쓰더라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해야만 하지. 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뭔가를 회상하듯 중얼거리던 십이율주가 말했다.
"됐어. 이런 대화는 무의미해. 어쨌든 너는 나와 거래를 했으니 지금 당장 움직여 줘야겠다."
"제가 뭘 하라는 겁니까?"
"봉인(封印)!"
슈슈슈슈슉
갑자기 십이율주가 손을 치켜들자, 내가 서 있던 장원의 근처에 십이율 문주들이 모두 나타났다. 전부 한 번씩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 교주가 호법사자를 소환하는 것 같은 술법인가?'
내가 그들을 둘러보자, 십이율주 하은천이 냉막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해신의 본거지 6군데를 차례대로 없애러 갈 거다. 백웅 너는 화룡신검의 힘이나 칠요의 힘을 써서 그 곳의 마력을 봉인해 주면 돼."
가능한 일이다. 설령 화룡신검이 눈을 안 뜨더라도 전국옥새나 화요의 힘을 끌어내면 가능할 것이다. 나는 걱정스러워서 물었다.
"너무 급하지 않습니까?"
"충분한 힘이 있는데 뭐가 급해? 너도 나름대로 바쁘니까 빨리 내 일을 도와주는 게 좋지 않아?"
"......"
하은천이 씨익 웃었다.
"참고로 6군데를 다 봉인했을 때부터 진짜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