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81 암천향(暗天鄕) =========================================================================
무사시는 천천히 내 뒤에서 걸어나와서 우리 셋 앞에 섰다. 그 움직임은 느리고 무경계한 것처럼 보였으나, 나는 내 실력이 천하고수 중 나름대로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자부함에도 무사시에게서 티끌만한 빈틈도 찾을 수가 없었다. 무사시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나는 동방 십이율주의 사자(使者), 미야모토 무사시. 정중하게 십이율로 너희들을 초대하기 위해 찾아왔다."
"정중하게?"
옆에 앉아있던 제갈사가 비웃듯 말했다.
"요즘은 살기부터 내뿜고 보는 걸 정중하다고 표현하나? 크크."
나는 제갈사가 무사시를 도발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대로 정면승부를 벌인다면 우리는 무조건 큰 피해를 입을 게 뻔하므로, 그를 동요시켜서 그의 마음속에 빈틈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사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죽이거나 싸울 생각이었다면 너흰 멀쩡히 앉아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
너무나 명약관화한 사실이었으므로 차마 반박하거나 대꾸할 수 없었다. 무사시가 일부러 기척을 내어서 망정이지, 그가 기척을 숨기고 있다가 난데없이 백련교주도 못 피하는 절대검기를 우리에게 뿌렸다면 몰살했을 게 분명하다.
쿠구구구
지금도 그렇다. 무사시의 위치는 내 등 뒤에서 앞으로 왔으나 여전히 나는 검을 뽑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사시의 검기(劍技)가 인간의 그것을 초월했다는 걸 여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억지로 힘싸움으로 몰고갈 틈이나 줄지 의문이었다.
내가 이를 악물고 있을 때 망량이 침착하게 말했다.
"십이율이 우리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오?"
"그것은..."
무사시는 뭔가 말할려다가 멈칫멈칫거렸다. 그리고 심각하게 고뇌하는 표정을 짓길래 우리도 모두 긴장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와중에 무사시가 말했다.
"... 혹시 동영어 할 줄 아는 자가 있는가?"
"......"
휘청
나는 어이가 없어서 쓰러질 뻔 했다.
' 중원말이 머릿속에서 꼬였던 거냐!'
무사시는 중원말을 그렇게 유창하게 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황당해하면서도 손을 들려 했는데 그때 망량이 재빨리 나 대신에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동영어로 말했다.
"내가 동영어를 잘 하오. 동영어로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오."
"그러지."
무사시는 헛기침을 하고는 동영어로 말했다.
"너희 중 가운데 있는 그 꼬마가 용의 힘을 발휘해서 악한 술법사를 처치한 건 내가 낙양에서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너희를 추적하며 십이율주에게 너희에 대해서 보고를 올렸는데, 십이율주는 너희를 꼭 보고 싶다면서 반드시 데려올 것을 내게 부탁했다."
망량이 수상쩍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그리 쉽게 추적할 수 없었을텐데? 하물며 이 장령곡을 어떻게 알아낸 것이오?"
망량의 말이 옳았다. 우리는 비등을 이용해서 낙양을 순간이동하며 돌아다녔으며, 그건 세간 무림의 추적술로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추적술의 귀재라 불리는 자들도 결국 이동흔적을 고도의 추리력으로 따라잡는 것이기에 순간이동은 어떻게 해도 추적할 수 없다.
그러자 무사시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너희 중 백웅, 망량 제갈현의 이름과 얼굴을 먼저 알아냈다. 그리고 망량 제갈현의 도움을 받은 인물들을 조사해서 어떤 인물인지 알아냈고, 그 친분관계와 무림세력을 조사했다. 그랬더니 제갈일족이 운영하는 세력이 2군데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진랑곡이 비어있는 걸 확인하자마자 장령곡을 조사하러 온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망량이 탄성을 흘렸다.
"하아! 그랬군..."
무사시는 뭔가 특별한 권능이나 절대지경의 힘으로 우리를 찾아낸 게 아닌 듯 싶었다. 그저 추리해서 의심가는 걸 뒤지던 끝에 맞아떨어진 것이다. 또한 무사시의 말은 한 가지를 시사하고 있었다.
무사시를 뒤에서 도와주는 정보단체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혼자의 힘으로 이토록 빨리 장령곡에 도달하지 못한다. 아무리 망량이 제갈일족이란 걸 알고 있어도 진랑곡이나 장령곡을 의심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양의 정보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보단체는 아마 십이율에서 암중에 운용하고 있는 조직일 것이리라.
망량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서 십이율에서 우리를 초대하는 이유가 뭐요?"
"간단하다. 십이율주는 너희의 힘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무슨 뜻이지?"
"너희가 황궁의 어둠을 쓰러뜨린 용의 힘이 진짜인지 알고싶은거다."
더 이상 자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속으로 셈을 굴렸다.
'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손을 뻗겠다는 뜻이군.'
우리의 거처를 파악한 상황에서 일부러 무사시가 십이율주의 초대를 전하러 왔다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었다. 무사시는 십이율주가 황궁에서도 아끼고 아껴뒀던 특위이기에 일부러 그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접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무사시의 힘은 숨겨두었다가 최후의 순간에 보여줄만한 비장의 패에 가까웠다.
단지 우리를 십이율로 초대하는 것 뿐이라면 그저 십이율의 부하급을 보내와도 상관없는데도 일부러 무사시를 보내온 이유는 하나였다.
무력시위!
자신의 휘하에 절대지경의 초고수, 미야모토 무사시가 있다는 걸 과시함과 동시에 우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무언의 협박에 가까웠다. 그것은 십이율주가 그저 흥미거리로 우리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압력을 행사하며 이용하려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골치 아프다.
이제야 수행기간을 잡고 힘을 키우려는 시점에서 십이율의 압박이 들어올 줄이야!
그것도 무사시씩이나 되는 존재가 떡하니 나타났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갈사가 동영어로 말했다.
"또 하나의 존재가 방금 나타났군. 저 자도 네 동료인가?"
그러자 무사시가 눈에 이채를 띄며 대답했다.
"그렇다."
"그 자도 모습을 드러내라고 해라."
무사시가 말없이 손짓을 하자, 그에게서 약 삼 장 떨어진 곳에서 슬며시 인영(人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쪽으로 걸어오던 그 자는 냉막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더니 자기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만하령문의 삼사 풍백(風伯)이다."
삼사(三師) 풍백!
십이율 최강의 술법사 중 한 명!
확실히 저 풍백은 내가 전생을 하면서 본 적이 있었다. 십이율주와 백련교주가 회담을 할 때 분명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삼사가 얼굴을 비칠 때 저 풍백도 종종 보였었다.
풍백은 깔끔한 외모를 하고 정갈한 신시의 의복을 입고 있는 깡마른 인상의 사내였다. 겉보기에는 그리 강해보이지 않았으나, 저 자 또한 환신 천우진에 비견되는 강력한 술법사인 것이다. 나는 풍백을 보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 저 두 명을 상대로는 백련교주조차 승부를 장담할 수 없어!'
이 자리에서 정면승부를 해서 이기기 위해서는 화룡진인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화룡진인은 현재 휴면상태에서 힘을 회복하고 있어서 내 부름에 전혀 응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여동빈을 부르기에는 상대가 마(魔)가 아닌지라 도와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화요에 전국옥새에 대라멸진을 쓰면 동귀어진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저 자들과 동귀어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풍백은 무사시를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
"다시 한 번 용건을 말해 주지. 특위가 말한대로 그대들이 우리 십이율에 따라와 줬으면 한다."
"거절한다면?"
"뭐 어쩔 수 없지. 이 자리는 그냥 물러나줄 수 있어."
뜻밖의 대답이었다.
풍백이 어깨를 으쓱했다.
"말했듯이 우리 대단군(大檀君)께서는 그대들과 좋은 관계를 맺길 원한다. 섣불리 싸우는 건 원치 않아."
제갈사가 비아냥거렸다.
"그럼 안 가면 되겠군? 친절하셔라. 얼른 꺼져!"
"후하하하..."
맑게 웃음을 터뜨린 풍백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다음에는 우리 삼사와 십이율문주를 모두 거느리고 그대들을 직접 찾아오실 거다. 그 때도 지금처럼 좋게 얘기해줄 거라고는 장담 못 해."
"......"
대놓고 협박 아니냐!
제갈사가 슬며시 내게 전음을 보냈다.
[ 백웅. 지금 상황은 네게 판단을 맡기마.]
제갈사나 망량도 지금 어떻게 하는 게 옳은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물론 평상시라면 그냥 내쫓아버리는 게 상책이겠지만, 십이율에서 본격적으로 적대로 돌아선다면 득보다 실이 훨씬 많았다. 게다가 적에 미야모토 무사시와 삼사가 있는이상 십이율은 그 어디까지라도 쫓아올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했다.
"나 혼자서 십이율주를 만나고 싶소."
풍백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대가 말로만 듣던 용의 화신인가?"
"그렇소."
"좋다. 그대만 따라온다면 나머지는 여기 있어도 상관없다."
나는 힐끔 망량에게 눈짓을 했다. 망량도 내 눈짓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순어구!'
순어구는 아무리 멀리에 있어도 양방향 통신이 가능한 보패였다. 망량과 내가 한 쪽씩 평상시에 순어구를 갖고다니고 있었기에, 십이율에 간다고 해도 멀리에서 내 상황을 전달할 수 있으리라.
사실 안전함을 추구한다면 나 대신 망량이나 제갈사가 십이율에 찾아가는 게 맞겠지만, 놈들의 목적은 십중팔구 나였다. 놈들은 낙양을 뒤집어엎은 용의 화신과 이야기하고자 이 자리에 찾아온 게 분명했다. 어설프게 빙빙 돌리느니 내가 따라간다고 하는게 옳았다.
"그런데 이동은 어떻게 하려고 하오? 여기서 동방 십이율까지는 수천리 길인데."
"그래서 내가 무사시를 따라온 것이다."
풍백이 손을 휘둘렀다.
쿠오오오 -
다음 순간,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주황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바람의 통로가 생겨났다. 풍백은 그 통로 앞에 서서 말했다.
"이 통로를 타고 가면 한 번에 천 리를 이동할 수 있다. 두세 번만 사용하면 신시에 도착한다."
"알았소."
나는 성큼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망량과 제갈사의 걱정어린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각오를 한층 곧추세웠다.
' 그래, 어차피 십이율과도 한 번은 결판을 냈어야 해.'
그 시기가 좀 일찍 찾아온 것 뿐이다. 어쩌면 십이율주의 손에 죽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왠지 지금 그를 찾아가는 게 죽을 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직감이 이 선택은 사로(死路)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파앗
나는 잠시 후 미야모토 무사시와 풍백을 따라서 바람의 길을 통과했다. 그리고 풍백이 다시금 통로를 만들어내서 이동하자, 그의 말대로 두세 번 만에 익숙한 신시의 풍경이 내 눈에 보였다.
신시에 진입하자 신시 너머로 하늘을 꿰뚫을 듯한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내가 그 나무를 물끄러미 구경하고 있자 풍백이 설명해 주었다.
"그건 신단수라고 하는 것이다."
알고 있다. 예전에 십이율주가 말해준 바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신단수를 보자 또다른 의심이 싹트는 걸 느꼈다.
' 혹시...?'
저 신단수 자체가 칠요 중 하나인 목요(木曜)가 아닌가?
목요의 힘이 저토록 거대한 나무를 생장시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겨났다. 만일 내 생각이 사실이라면 신단수가 십이율주의 힘의 근원일 가능성도 높은 것이다. 나는 신단수를 뒤로 하며 일단은 십이율주에게로 향했다.
십이율주는 예전에 왔었던 자신의 처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에 봤던 것처럼 밖보다 안이 넓은 구조였으며, 십이율주는 나머지 삼사인 운사(雲師), 우사(雨師)와 함께 앉아서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십이율주는 역시나 전신 강아지탈을 쓰고 있는 상태로 내게 손을 흔들었다.
"여어 반가워! 용의 화신 백웅."
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포권했다.
"반갑습니다, 십이율주."
"하하하. 역시 듣던대로 소년의 모습이군. 흥미로워."
"......"
"백웅. 멀리서 오느라 배고플텐데 식사나 좀 들지."
십이율주가 손가락을 튕기자 저만치에 호화스러운 만찬상이 나타났다. 십이율주는 자연스럽게 상의 끝으로 가서 앉았고 삼사는 그의 뒤쪽에 시립했다. 그리고 나는 그와 마주하는 대극에 앉아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밖으로 휙 나가버린 미야모토 무사시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무사시는 왜 저럽니까?"
"저 녀석은 날 죽이고 싶어하거든."
엥?!
내가 놀라서 십이율주를 쳐다보자 십이율주는 잘 튀겨진 고기덩어리를 젓가락으로 집으며 말을 이었다.
"놈은 예전에 반도에 찾아와서 동방십이율의 지존인 내게 도전해서 패배했어. 그리고 나는 승자의 권한으로 그를 십이율 특위로 고용했지. 언제 어디서든 내게 도전해도 좋다는 조건이었어."
십이율주가 고기를 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래서 무사시는 내게 삼사가 호위로 붙어있을 때는 빈틈을 노릴 수 없으니 함께 있기를 싫어한다."
"허..."
나는 황당해서 말했다.
"율주. 당신은 무사시가 두렵지도 않습니까? 저 자는 절대지경의 고수란 말입니다."
"후후! 나도 마찬가지야."
십이율주가 웃으며 대꾸했다.
"너희 중원인들은 내게 감사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저 무사시는 원래 반도를 통해 중원으로 진출해서 최강의 고수를 찾아다니려 했으니, 내가 도중에 무사시를 고용하지 않았다면 너희 무림세계에는 혈풍(血風)이 불었을 거야."
"......"
이제야 이해가 된다. 무사시는 원래 코지로를 강제성형시키고 자신의 절기를 전달해서 가짜 무사시를 동영에 세워놓은 채 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갑자기 행적이 묘연해서 그 동안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십이율주가 그를 패배시켜서 수하로 거둬버린 것이었다.
달그락
한동안 식사시간이 계속되었다. 만찬은 맛있었고 하나같이 최상의 실력으로 만들어진 요리였다. 맛있게 밥을 먹는 나를 보던 십이율주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잘 먹는군."
"맛있으니까요."
"독이 있을까봐 의심되지는 않나?"
"십이율의 지존씩이나 되는 분이 그렇게 치졸한 짓을 하실 리가 없지요."
나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실은 이미 만독불침지체를 이루었기에 딱히 걱정하지 않는 것 뿐이었지만, 십이율주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껄껄 웃었다.
"하하하! 재밌는 친구야."
"이제 슬슬 말해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건지."
"아아, 그래."
십이율주가 히죽 웃는 듯 보였다. 그리고는 말했다.
"딱 까놓고 얘기할까? 네가 화요(火曜)의 주인이란 건 알고 있으니, 날 도와서 해신(海神)을 함께 토벌해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