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9 암천향(暗天鄕) =========================================================================
등곽은 이후 유림과 화신류가 어떻게 황궁을 나눠가질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등곽이 이미 자신과 반대파에 있던 황제파의 관료들을 보이지 않게 숙청하거나 포섭하는 중이었으며, 화신류는 낙양의 무림을 평정하고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기로 했다. 그리고 열흘 이내로 새로운 황제인 주재후가 추대될 것이라 말했다.
망량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말했다.
"공자께서 괴력난신을 논하지 말라 한 건 아까 말했던 유림의 이념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 공자께서 괴력난신을 논하지 말라 하신건 실제로 그런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어."
"무슨 뜻입니까?"
등곽이 신중하게 설명했다.
"자네들은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둠]에 속하는 존재들은 자신을 생각하며 모호한 망상에 잠기는 존재에게 쉽게 접근한다네. 괴력난신을 쉽게 논하게 되면 현실의 껍질이 쉽게 깨어져서 [어둠]이 인간을 부른다네. [옛 지배자]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재앙을 부르기도 하지."
"그렇군요."
"그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니 금한 것일세. 괴력난신이 없어서 금한 게 아니야. 실제로 있으며 위험한 존재니까 섣불리 빌미를 주지 말라는 뜻이었지. 빌미를 괜히 주지 않으면 의외로 이족들은 얌전하니 말일세."
망량이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내 경험을 통해서 충분히 등곽의 말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과거, 내가 황궁을 제압하며 제갈부와 전투를 치렀던 그 전생에서 나는 성좌에서 흉신(凶神)이 나를 무한한 어둠속으로 초대하는 걸 느꼈다. 나는 그 부름을 거부하기 위해서 자해하여 자살하는 걸 택했을 정도로 무서운 [부름]이었다. 아마 공자가 괴력난신을 금한 것은 그런 [부름]을 막기 위해서였으리라.
"황궁의 모처에는 연금술사가 남겨놓은 연구결과나 유산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일반인이 접할 경우 큰 재앙이 닥쳐올 수도 있으니 반드시 회수해야 합니다."
"그렇겠군. 꼭 밑에 말해 두겠네."
"황궁의 건물이 다 녹았다지만 반지하에 뭔가를 숨겨뒀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중얼거린 망량이 등곽에게 질문했다.
"만일에, 제사장이 실종되지 않고 황궁의 어둠이 계속해서 성세를 발휘했다면 어쩌실 생각이셨습니까?"
"...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건가?"
"유림(儒林)은 계속해서 그들의 만행에 침묵하고 있었을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망량의 질문에 등곽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아마 그랬을 걸세."
"왜입니까?"
"아는 걸 질문하다니 악취미군. 백련교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사악한 족속을 쫓아낼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유림의 힘이 약하기 때문일세. 우리가 정명의 힘을 다루어 이족에 최소한의 대항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호신용에 지나지 않네. 정명은 이족의 이름을 제압해서 쫓아낼 수는 있으나 강력한 이족이나 이족과 결탁한 인간에게는 별로 효과가 없어."
"흐음..."
"우리는 본질적으로 속세의 유학자들일세. 끝까지 눈치를 보다가 정 안되면 수도 낙양에서 탈출해서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만족했나?"
"경솔한 질문, 사과드립니다."
"아닐세. 충분히 할 만한 질문이지."
나는 망량이 왜 방금 전의 질문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지금껏 내가 전생을 하며 몇 번이나 황궁세력을 들어엎었는데 유림이 부각된 것은 스무번을 훨씬 넘은 전생에서였다. 어째서 유림이 이렇게 늦게 부각되었는지를 알기 위해 질문한 것이다.
' 아마... 유림의 등곽이나 주요인사들은 큰 환란이 닥쳤을 경우 그 전에 직감하고 대피했겠군.'
유림은 마에 대항하는 퇴마사도 승려도 신선도 아니었기에 한계가 있었다. 등곽이 이끄는 유림은 세속에서는 강대하지만 이면의 세계에서는 약소세력인 것이다. 그들은 우리처럼 직접 술법과 무공을 써서 대항하는 방법을 시도하지 못하고 인간의 세력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니 용중일과는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망량의 질문에 등곽이 대답했다.
"황산파 장문은 예전에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네. 그 때 안면을 터서 여태껏 알고 지내고 있지."
"무슨 일이었습니까?"
"너무 캐묻는군."
등곽이 인상을 찌푸리자 옆에 시립해 있던 용중일이 천천히 말했다.
"과거 내가 황산파를 창립하고 운영할 자금이 부족해서 어르신께 금전을 융통해 달라고 찾아왔었소."
"어허 이 사람이! 왜 그걸 말하나?"
"어르신. 이들에게 쓸데없는 의심을 사고싶진 않습니다."
등곽이 약간 당황해했지만 용중일은 가볍게 대꾸하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금전은 얼마 전에 다 갚았으니 채무관계는 청산이 되었소. 허나 마음의 빚은 청산되지 않았으니 오늘은 어르신을 호의로 뵙는 것이외다."
"그렇군요."
마치 준비라도 한 듯한 청산유수같은 대답이었다. 역시 용중일은 두뇌도 뛰어난 인물로 보였다.
등곽이 약간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흠! 더 하고싶은 말이 있는가?"
망량이 말했다.
"새로운 황제가 되실 분을 만나보고 싶군요. 소개장을 써 주시겠습니까?"
"물론 그리 해야지. 안 그래도 그 제안을 하고 싶었다네."
"그리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좀..."
"후후."
등곽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황제에게 홀대받았던 뛰어난 관리와 무관들을 재등용시킬 것일세."
이윽고 우리는 등곽과 논의를 마친 후, 주재후를 만나는 소개장을 들고 마차로 향했다. 마차로 가기 전 나는 용중일을 힐끔 뒤돌아보았다. 그는 우리를 송별하듯 저택 앞에 나와있었는데, 나는 그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계속 따라올 작정이오?"
"내가 어딜 가든간에 그건 내 마음이니."
"우리를 따라오지 마시오."
용중일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출발해서 관도를 달리기 시작하자, 망량은 내게 전음으로 말했다.
[ 저 자는 따라올 거요.]
[ 그렇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용중일은 아버지가 내게 당했다는 이유 말고도 내게 큰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이대로 낙양의 움직임이 그에게 간파당하면 뒷맛이 찝찝했으므로, 망량이 내게 제안을 했다.
[ 주재후를 만나는 건 등곽의 집에서 간파되었으므로 일단은 그대로 갑시다. 그리고 주재후를 면담하는 게 끝나면 곧장 낙양에서 빠집시다.]
[ 그래야겠군.]
[ 용중일에 대해서는 이후 얘기합시다.]
이윽고 마차가 관도를 달리는 걸 보던 망량이 문득 내게 말했다.
"백웅. 밖을 보시오. 아주 넓지 않소?"
"그렇군."
다그닥 다그닥
"이렇게 화려한 마차를 타고 관도대로를 달리며 낙양의 풍광을 구경하는 건 보통 사람이 좀처럼 해볼 수 없는 경험이라오. 또한 마차 밖의 시선이 명예욕을 채워주기도 하지."
나는 바깥의 풍경을 보았다. 확실히 큼직한 건물들이 여기저기에 세워져 있었고 인파도 많았으며, 평민이나 서민들이 이 마차를 보면서 신기해하며 경외하는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등곽이 내어준 이 마차는 최상위 관작만이 이용할 수 있는 거대고급마차였기 때문이다. 한두 필이 이끄는 게 아니라 앞뒤로 호위하는 마차가 더 있었다.
"......"
하지만 그리 끌리지는 않는다. 분명 불특정 다수가 나를 부러운 눈으로 보는 게 상당한 쾌감을 주는 건 사실이다. 망량도 그 쾌감에 대해서 내게 얘기한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어찌된 일인지 이런 삶이 그렇게 끌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만인에게 우러름받으며 명예와 부귀를 누리는 삶이 별로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 왜지?'
내가 최근에 고민했던 명예욕이나 우대받고싶은 심리와 정면으로 연관되어있음에도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기에 나는 곤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고민하며 생각하자 망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군. 알았다 싶으면 또 다른 면모라니..."
"내가 이상한 사람이오?"
"그야 평범한 사람은 아니지. 당신은 원래부터 집착이 꽤 강한 사람이었소. 스스로도 그리 생각지 않소?"
망량은 턱을 괴고 바깥풍경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걸로 정상과 이상을 판단할 수는 없소. 당신의 인격과 욕망을 판단하는 하나의 잣대일 뿐. 당신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파악하는 건 오로지 그 자신의 몫이오. 가장 중요한 건 백웅 당신이 지금 자기의 모습에 만족하고 있느냐는 거겠지."
"그렇군..."
나는 망량의 말에 깨달은 기분이 들었다. 망량의 말대로 나는 자기현시욕이 강한 내 모습을 부정하고 있었고 지금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 모습 또한 나 자신이므로 섣불리 판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탄 마차는 곧 주재후의 저택에 도착했다. 주재후는 우리가 도착했다고 하자 정원 앞까지 나와서 맞이했는데, 그 또한 황족이라서 거처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제갈현! 오랫만이오!"
주재후는 망량을 보자마자 반겼다. 망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전하. 지금은 망량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쪽은..."
"등곽에게 들었소. 용의 화신이라고 하더군."
"맞습니다."
주재후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다가, 망량에게 고개를 돌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당신이 뭐든간에 내게는 소중한 친구요. 그리고 그대의 친구도 내 친구요."
주재후가 싱글싱글 웃었다.
"궁 내에서 내가 힘들 때 당신이 종종 지혜를 빌려주고 조언해 줬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오. 내게는 생명의 은인과도 같으니, 나는 늘 망량 당신을 황궁으로 불러들이고 싶었소."
"과찬이십니다."
"허나 그대는 모든 관직을 거부하고 진랑곡에만 있으니 근래 섭섭했소. 심지어 내 추천으로 정 4품의 직위까지 마련했었는데..."
주재후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망량은 그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는데, 나는 그의 속내를 알 것 같았다.
' 황족의 추천으로 황궁에서 벼슬을 하면 필연적으로 천문관과 황궁세력의 눈에 띄일텐데 가시밭길에서 억지로 살아가고싶진 않았겠지...'
망량의 입장에서는 마음 편하게 진랑곡에서 유유자적하는 게 좋았으리라.
"아무튼 이리 오시오. 그간 못했던 이야기를 합시다."
"네."
우리는 주재후를 따라서 안쪽의 응접실으로 향했다. 과연 황족의 집 답게 등곽의 처소 못지 않은 융숭한 내부가 펼쳐져 있었다. 주재후는 망량과 그동안의 일에 대해서 잡담을 나누다가 대략 한 식경째가 지나자 본론을 꺼냈다.
"이미 등곽에게 들었겠지만 나는 곧 대명의 황제로 즉위할 것이오."
"감축드립니다."
"허나 이대로는 또다시 등곽에게 휘둘리는 허수아비가 되고 말겠지. 그의 일파가 전 황제를 물리치는데 주된 역할을 했고, 동창과 금의위도 전멸했소. 내게는 아무런 세력도 없소."
주재후가 갑자기 망량의 손을 꼭 붙잡았다.
"망량! 제발 부탁이오. 나를 도와주시오. 그대가 있어야 내가 제대로 된 황제가 될 수 있소."
"......"
주재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등곽은 유림의 수장이며 유학자였으나 자신의 욕망에 상당히 솔직한 인물이었다. 그가 정의를 추구하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일파가 정국을 주도하게 만들고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 확률은 충분히 높았다.
망량이 난처해하며 말했다.
"그리 말씀하셔도 곤란합니다. 저는 일개 백면서생일 뿐일진대 어찌 등곽같은 고관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원한다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위를 주겠소."
"네?"
"망량 그대에게 상국(相國)의 자리를 주겠단 말이오. 이름뿐인 자리가 아니라 진정한 실권을 전권 위임하겠소."
망량은 물론이고 내 얼굴도 굳어졌다.
상국.
그것은 재상을 뜻하는 것으로, 현 정치체계에서는 황제가 친정을 하며 동창과 금의위같은 친위세력을 부렸기에 거의 유명무실한 직책이었다. 그러나 주재후가 망량에게 상국의 자리를 주겠다고 한 것은, 단번에 망량에게 모든 고관대작을 압도하는 중화정치의 책임자 자리를 준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그 말대로라면 망량은 고작해야 이삼십대의 나이에 정치 최고권력에 오른다는 뜻이다.
"전하. 그건..."
"허황된 소리가 아니오. 등곽은 이미 나를 황제로 올리기 위해서 교섭하러 왔었고, 다음 교섭때 내 부탁을 뭐든 들어주기로 했소. 그는 내 말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오. 이제 와서 나를 포기하고 다른 황족을 제위에 올리면 각지에서 반역이 일어날 게 분명하니까."
"으음."
"각지의 황족이 이용해먹기도 힘들 정도로 멍청하다는 건 웬만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일이지. 그들 중 하나라도 황도에 들이면 간신이 득세하고 피로 피를 씻는 난세(亂世)가 일어날것이오."
주재후는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듯 했다.
' 감이 좋군.'
나는 내심 그가 상당히 영민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보통이라면 황제가 된다고 하면 기분좋아서 넋놓고 있을텐데, 현재 자신의 위치와 생존전략을 확실히 잡아놓고 진행하는 인물이었다. 황제의 그릇인 건 틀림없었다.
망량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전하. 죄송하지만 저는 더 큰 일이 있어서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저와 비견되는 역량을 지닌 인재를 한 명 추천해 드릴까 합니다. 앞으로는 그 자와 논의해서 대소사를 결정해 주십시오."
"무... 무슨 말이오? 더 큰 일이라니?"
주재후가 놀라워했다.
"필히 차기황제가 될 내가, 그대에게 대명제국의 재상 자리를 주겠다 한 것이오! 이보다 더 큰 일이 있단 말이오?"
언뜻 오만해보이는 말이었으나 놀랄만한 일이긴 했다. 보통 사람은 황궁에서 말단 관리를 하기도 힘든데 차기황제가 보장하는 재상자리는 굉장한 권능인 것이다. 관직에 뜻을 둔 청운의 인물들이라면 결코 거부할 수 없다! 그런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버렸으니 망량을 이상하게 볼만 했다.
"세상을 구하는 일입니다."
"세상?"
"전하께선 황궁에서 암약하는 괴이한 존재들이 있다는 걸 알고 계셨겠지요. 저는 한때 그 존재들이 두려워 힘을 키우고자 진랑곡에 은거했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번에 용의 힘을 얻어 악한 존재들을 일소한 것입니다."
"......"
"하지만 그 존재들을 완전히 멸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언제고 다시 돌아올 것이고, 그 때는 더욱 강대한 마(魔)로 사람들을 타락시킬 것입니다. 저와 용의 화신께서는 그 자들과 싸워야 합니다."
주재후는 한참이나 생각하더니 말했다.
"... 그렇구려. 내 생각이 짧았소."
"이해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그럼 그 인재가 누구요?"
"사마경(司馬敬)입니다."
"사마경?"
망량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사마 가문의 영재(英材)였으나 전대황제의 숙청 때 직위를 잃고 관중의 한직으로 밀려난 사람입니다. 그의 정치행정능력은 저와 비슷하거나 더 뛰어나니 반드시 그를 중용해 주십시오."
주재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망량 그대가 추천했으니 확실하겠지. 그를 등용하겠소."
"감사합니다."
나는 곧 망량과 함께 주재후의 집에서 물러나왔다. 그리고 용중일이 쫓아오는 기색이 있는지를 살피다가, 으슥한 곳으로 들어가서 비등을 써서 장령곡으로 복귀했다.
파앗!
나는 망량에게 질문했다.
"사마경이 누구요? 나는 처음 들어보는데."
"그는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오는 사마 종가의 직계종손이오. 굉장히 뛰어난 지능을 지니고 있고, 내가 수학하던 시절에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소. 출중한 인물이니 새 황제를 잘 도와줄 것이오. 지력만으로는 제갈부에도 뒤지지 않을 거요."
"망량 당신은 뛰어난 인물을 많이 알고 있군."
"수도 낙양은 천 년의 고도(古都)로서 뛰어난 인재들이 몰려드는 곳이니 당연한 거요. 사마경은 기문둔갑에도 능한 인물이며 나와 친분이 있으니 앞으로 좋은 인연이 될 거라 생각하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한 망량이 갑자기 멈춰서서 내게 물었다.
"백웅. 아까 용중일과의 일전 말이오, 어땠소?"
나는 망량이 왜 질문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겁게 대답했다.
"용중일은 초절정의 경지를 한꺼풀 벗어나 있는 듯 했소."
"그렇군..."
내 감상은 그랬다. 현재 내 실력은 초절정고수들 중에서도 웬만한 실력자를 아래로 볼 정도로 상승해 있었지만, 의념절기를 원활히 운용하지 못해서 초식에 약점이 있었다. 용중일이나 무영검제와의 대결에서 그 헛점을 간파당해서 일격을 맞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에 가까웠다. 삼보절기가 원숙해지기 전까지는 종종 이런 일이 생길 터였다.
그리고 내 실력의 부족과 별개로 용중일의 실력은 굉장히 높았다. 만일 칠요나 전국옥새가 없었다면 그를 밀어붙이기는 커녕 용중일에게 난도질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건 초절정의 경지에서 논할 수 있는 검학이 아니었다.
"용중일이 절대지경의 초입이라고 보시오?"
"......"
나는 망량의 질문에 크게 고민했다. 그리고 말했다.
"난 아직 그걸 판단할 수준이 되지 않소."
겁쟁이같은 대답이긴 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절대지경에 오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그 초입을 함부로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쯤 나보다 강해져 있을지도 모르는 검마라면 그 수준을 판단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칠대절학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용중일의 수준을 추측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이건 섣불리 허세나 자존심을 부릴 일이 아니다. 무인에게 있어서 상대방의 실력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일은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수치를 무릅쓰고 망량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해야만 했다.
"확실한 건 용중일의 실력은 구파일방 장문인 중 최강이라 볼 수 있겠군."
망량의 말에 나는 부연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풍신류의 제일고수일지도 모르오."
"그 정도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용비천이 천령단이 없다면 용중일의 백초지적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오."
나는 용비천과 여러 번 격돌해봤기에 그의 무학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다. 용비천 또한 초절정 고수 중에서도 알아줄 정도의 상위권인 건 확실했지만, 내가 방금 겪은 용중일의 검학은 그와 차원이 달랐다. 굴공천축검으로 우세를 점했다기 보다는 대등하게 싸웠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망량은 팔짱을 꼈다.
"이상한 일이군. 용중일의 무예스승은 아버지인 용비천이 아니겠소? 그런데 용중일의 전공은 용비천처럼 장공이 아니라 검공이오. 아무리 천재라 해도 일맥의 무예를 등지고 새로운 검술의 경지를 개척해서 절대지경을 앞둔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이오?"
"그건... 나도 모르겠소. 하지만 그 자의 검은 굉장히 자유롭고 강했소. 공손검법이나 굴공천축검과 같은 반열에 둘 수 있을 것 같소."
"혹시 황산파의 검예(劍藝)일 거라 생각하오?"
"......"
나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아니오. 나는 황산파 장로들과 부딪힌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검법과 전혀 달랐소. 풍신류의 검법 같지도 않소."
내가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나는 황산파와 풍신류의 검법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겪은 용중일의 검법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백웅. 우리는 굉장히 귀한 정보를 얻은 거요. 지금껏 당신의 전생에서 용중일은 하도 신중하게 굴어서 그의 무공경지를 추측만 할 뿐 제대로 알 길이 없었지. 심지어 풍신류 실전부대인 풍신대가 쓸려나가도 방관했던 인물과 직접 검을 맞댔으니."
약간 흥분하던 망량이 말했다.
"방금 전에 나눴던 검합을 잘 기억해서 검마와 논의해 보시오. 그 자의 검술연원을 밝혀내면 뜻밖에 좋은 성과가 나올지도 모르오."
"알겠소."
나는 머릿속에 하나의 단어를 떠올렸다.
' 검형(劍形).'
용중일은 심적권청의 순간에 그 단어를 말했다. 일반적으로 검술종가에서 종종 쓰곤 하는 말이었으나 왠지 그 말에는 용중일의 고명한 검술의 원천이 깃들어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제갈사에게로 갔다. 장령곡의 시비가 정성들여서 그를 간호하고 있었고, 제갈사의 얼굴 혈색도 많이 나아져 있었다. 나는 제갈사를 진맥해 봤는데 확실히 이제는 회복기에 접어들어서 며칠 후에는 의식이 생길 듯 했다.
망량이 말했다.
"당분간은 제갈사가 깨어날 때까지 장령곡에 머뭅시다."
"그럽시다."
나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망량에게 술법지도를 받기로 했다. 망량은 내가 수련하는 태평요술을 보더니 몇 가지 잘못된 걸 지적해 주었고, 나는 밤낮없이 이혼대법과 태평요술을 수련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약 사흘이 지났을까? 제갈사가 마침내 눈을 떴다.
"내가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나?"
"그리 오래진 않소, 숙부."
우리는 제갈사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제갈사가 농담하듯 말했다.
"요란하게 오대의원을 부를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죽으면 이혼대법으로 초상기인에 내 영혼을 옮겨주지 그랬냐?"
"그건 내가 반대했소."
망량이 무겁게 말했다.
"숙부의 본체가 죽는 건 큰일이오. 초상기인이 인간과 닮았다 해도 인공생명체에 불과하므로 영적인 공격에 약해질 게 분명하오. 뿐만 아니라 초상기인에 옮기는 순간 숙부가 얻은 마도서의 마력이 사라질지도 모르잖소."
"그래, 그 말이 맞다."
제갈사가 고개를 돌리며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실수다."
왜 사과를 저렇게 작은 소리로 한단 말인가?
내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제갈사는 안색을 회복하고는 말했다.
"그래서 백웅 너는 용중일한테 처발렸단 소리지?"
"윽."
나는 느닷없이 아픈곳을 찔리자 말문이 닫혔다. 제갈사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아직 갈길이 멀군~"
"그 놈이 그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고."
"그래. 얼마나 다행이냐? 네 녀석이 전생과정 중에 황산파 용중일 타도를 목표로 했으면 얼마나 힘들었을지."
"......"
"뭐든 대충대충 하는것도 좋은점이 있군."
그러고보니 예전에 황산파의 만행에 분노해서 용중일을 엿먹이려고 행동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용중일을 쓰러뜨리려 목표를 잡았다면 굉장히 힘들지 않았을까? 내가 전생을 스무 번을 넘겼는데도 아직까지 나와 맞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무력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무튼 지금은 용중일이 중요한게 아니야. 낙양에는 슬슬 관심을 끊고 암천향에 갈 준비를 하자."
"어떻게?"
"한 5년쯤 잡아놓고 우리 모두가 수련해서 능력을 상승시켜야 겠지. 그리고 네 녀석은 쌍검술을 연마하면서 화요의 힘으로 화룡신검을 완전히 회복시키면 된다. 그 정도 전력이 갖춰지고 나면 꿈의 계단을 이용해서 암천향에 진입해 보자."
"왜 5년이야? 좀 더 수련해도..."
"야. 우리가 암천향에서 달을 찾아 몇 년을 헤맬지 어떻게 알지? 5년도 최대한으로 잡은 것 뿐이고 화룡신검이 완전부활하면 그 순간 도전해도 상관없어. 전욱이 이야기한 10년은 네 생각보다 훨씬 짧다는 것만 알아 둬."
퉁명스럽게 대꾸한 제갈사가 망량에게 말했다.
"현아. 5년이면 충분하겠냐?"
망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정도면 충분할 듯 합니다."
"좋아. 그럼 수련하자."
나는 제갈사에게 물었다.
"제갈사. 이제 괜찮은 거냐? 마도서의 부작용 같은건..."
"걱정 마라. 내가 더 깊이 파고들려 하지 않는다면 더 심해지진 않을 테니까."
제갈사는 자신의 상태를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듯 했다.
나는 그렇게 망량, 제갈사와 함께 장령곡에서 머물며 수련하던 중 때가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 오늘이 약속부터 보름째.'
나는 며칠 전부터 산중에서 수련하겠다는 핑계로 밖에 나와있었다. 나는 적당히 시간이 늦어지자 인적없는 곳에서 비등을 사용해서 낙양으로 향했다.
파앗
나는 한씨세가의 응접실에 도착해 있었다. 야밤이라서 빛이 하나도 없었고 사위가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수의 감각으로 주변 물체가 어디에 있는지를 다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륵
갑자기 양옆에서 촛불이 켜지더니 응접실이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그리고 어느 새 응접실의 맞은편에는 한백령이 담뱃대를 늘어뜨린 채 몸을 뉘이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셨군요, 용의 화신이여."
그렇다. 화신류 호법사자 한백령과 보름째에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망량이나 제갈사에게 논의하는 게 옳았을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한백령이 '신뢰'를 언급하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나중에 사과하고 홀로 찾아오기로 한 것이다. 이 생각에는 설령 한백령이 함정을 파뒀어도 내 힘으로 헤치고 나올 자신감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백령은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제가 용의 화신을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짐작하십니까?"
"나는 잘 모르겠소."
"......"
그녀는 담뱃대를 손에서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말했다.
"용의 화신이여."
이어진 말에 나는 놀라서 눈을 홉떴다.
"백련교주를 쓰러뜨려 주십시오. 그 대가로 화신류의 모든 것을 바치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