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3 암천향(暗天鄕) =========================================================================
내 의식이 마치 관찰자처럼 내 몸뚱이를 지켜보는 상태가 되자 나는 화룡진인이 완전히 내 몸에 빙의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 느낌은 여동빈이 빙의할 때도 많이 느꼈던 것이므로 익숙했다. 단지 나는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화룡진인의 영혼의 격에 더 큰 압박을 받았다. 인간출신 투선보다는 상고시대 응룡의 화신의 영혼이 더 강해서이리라.
화룡진인은 화룡신검을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 이 검이 정의를 실천하리라!]
그와 동시에 갑자기 내 몸이 두둥실 뜨더니 천공으로 크게 솟구쳤다. 자세히 보니 나는 화룡(火龍)의 등에 앉아있었고, 화룡진인은 화룡의 머리 위에 오연히 서 있었다. 갑작스럽게 엄청난 영기를 내뿜으며 화룡진인이 출현하자 허공에 떠 있던 호법사자들이 깜짝 놀라서 화룡진인을 쳐다봤는데, 화룡진인은 용비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백령을 쳐다보았다.
[ 화염의 힘을 최대한 끌어올려라!]
"넌..."
[ 너의 내면에 깃든 거대한 힘이 도와줘야 저 마(魔)를 토벌할 수 있다.]
한백령은 눈알이 없어지고 새하얀 안광을 뿜어내는 '나' 백웅이 다른 존재로 변한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작스럽게 천령단의 힘을 한곳에 집중시켰다. 한백령의 심장 부근이 두근거리며 진홍빛을 내뿜으며 물들기 시작했고, 그 진홍의 광채는 이윽고 그녀의 세맥까지 흩어지며 온 몸이 불타는 듯 했다.
오오오오
천령단의 거대한 힘이 한 순간 멎었다고 느낄 정도의 압축률!
한백령의 몸에 퍼져나간 진홍의 힘이 수습되어 다시금 새하얀 피부를 되찾았을 때, 한백령의 두 눈동자는 새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최종오의 화신지혼(火神之魂). 이 비장의 수까지 동원하고 진다면 인생 최대의 수치다!"
[ 걱정 말라, 인간이여! 반드시 저 자를 토벌하겠다.]
꽈앙
한백령과 화룡진인의 두 손이 마주치자 폭발음과 진동이 울리는 듯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백령이 화신지혼에 응축된 거대한 힘을 화룡진인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은은한 공명과 함께 무형의 원이 낙양 상공에 퍼져나갔다. 한동안 진홍빛 기류 속에서 용형(龍形)으로 기세를 벼려내던 화룡진인이 눈을 떴다.
[ 화룡소환!]
시간이 찢겨나간다.
어둠이 불타오른다.
지금까지 광선을 내뿜던 천령단의 파괴공격과도 차원이 다른 일격(一擊)이 촉수나무의 뿌리까지 산산히 부숴버렸다. 휘몰아치는 백광 사이로 점점이 부숴지는 물질 덩어리가 날아다녔고, 그것들은 이내 극한의 백염(白炎)에 또다시 삼켜졌다.
진정한 화룡이 현세(現世)했다.
무시무시한 힘을 머금은 백염의 폭풍은 땅의 근간까지 없애버리겠다는 듯 소용돌이처럼 휘돌기 시작했다. 너무나 광폭한 화룡의 힘이 갈 곳을 잃고 포효했고, 그 기세가 촉수의 재생력을 모조리 무시하고 소멸에 소멸을 거듭했다.
쿠오오오
지금까지는 호법사자의 거센 공격을 맞고도 끈질기게 꾸물거리며 되살아났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거대한 불꽃에 양초가 쪼그라들듯이 급격하게 몸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화룡이 나무를 먹어치우는 듯한 광경이었다. 이미 황궁의 건물은 형태가 남아있지 않았고 모조리 녹아서 사라지고 말았다.
수백여 장에 이르던 촉수괴물의 몸뚱이가 일 장 이하로 줄어들자 화룡진인은 화룡과 함께 돌진했다.
[ 하앗!]
콰직
그 때였다. 나는 갑작스럽게 주위 풍경이 바뀌면서 '다른 공간'에 와 있다는 걸 알아챘다. 어둠과 함께 점점이 별처럼 수놓인 광구(光球)가 현란하게 떠도는 장소였다. 그러나 이 몽환적인 풍경의 군데군데에 촉수와 함께 어둠의 생물들이 꿈틀거리고 있어서 요사스러운 분위기도 풍겼다.
' 화룡진인. 여기는...'
[ 놈이 본체와 핵을 감춘 영계(靈界)다. 그녀의 힘을 빌려 차원을 뚫었느니라!]
간단하게 대꾸한 화룡진인은 눈 앞에 있는 '적'을 발견하고는 분노한 듯 화룡신검과 화요 간장을 교차했다.
[ 영계를 침식하여 타락시켰군.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나는 영계의 중앙에 서 있는 듯한 산과 같은 존재를 보자 할 말을 잃었다. 크기는 태산이나 황산보다 훨씬 더 컸으며, 그 높이가 하늘을 뚫을 듯하여 측량조차 되지 않는 거대한 기둥이 있었다. 나는 저게 영락없이 영계의 거산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촉수나무가 거대화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거대해도 너무 거대하다. 그러나 화룡진인은 조금도 겁먹지 않은 듯, 화룡의 머리 위에 서서 호령했다.
[ 신의 뜻으로 악을 멸하나니!]
다시금 화룡이 적에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극한의 신염(神炎)이 촉수를 불태우며 나무의 정중앙을 뻥 뚫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쉽게 당하지 않겠다는 듯, 촉수는 빠르게 자신의 몸을 재생시키면서 갑작스럽게 나무 위로 거대한 인면(人面)을 돋아나게 만들었다.
우드득
그 인면은 연금술사의 얼굴이었다. 인면이 흉측하게 웃으며 말했다.
[ 하하하! 이 곳의 영기를 내가 모두 차지했기에 물질계보다 힘과 재생력이 10배는 강하다. 네가 아무리 태고의 용왕(龍王)이라 한들 영계에서 내게 이길 수 있을까?]
[ ......]
[ 무명제사서의 최고위 금술(禁術)에 겁먹은 것인...]
[ 송사리 같은놈!]
화룡진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연금술사를 매도하자 그의 인면이 일그러졌다.
[ 뭐... 뭐라고?]
화룡진인은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고 대꾸했다.
[ 내 제자 여동빈이 여기 있었다면 네놈을 비웃었을 것이다. 세상을 멸망시킬 최후의 거룡(巨龍)에 비하면 네놈은 잔챙이에 불과해.]
[ 크아아악!!]
연금술사는 발악하듯 자신의 부상을 회복시키며 크기가 수백 장에 이르는 촉수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엄청난 물리력을 가진 공격이었지만 화룡진인은 다음 순간 화룡의 입을 벌려서 숨결을 토해냈다.
꽈과과광
지평선까지 길게 이어지는 화염광선이 영계를 반쪽내는 듯 했다. 숨결 하나만으로도 천령단의 순간파괴력을 훨씬 상회하는 느낌이었다. 당연히 그 무식한 파괴광선에 맞은 연금술사의 몸체는 6할 이상이 파괴되어 버렸고, 화룡진인은 좌수(左手)에 화요 간장을 잡으며 말했다.
[ 화요여. 나 응룡의 화신이 명하나니 진실된 힘을 해방하라!]
파칭
내 착각이었을까? 화요 간장은 지금껏 내가 쓸 때와는 달리 검날에서 크게 눈을 뜨는 듯 했다. 지금까지보다 더 강렬한 신염(神炎)이 구슬처럼 변해서 화룡진인의 몸 근처를 맴돌았다. 그리고 화룡진인은 화룡을 전방으로 돌격시키며 크게 횡으로 화요를 휘두르며 외쳤다.
[ 천염(天炎)! ]
그게 끝이었다. 천염이 발사되자 화룡이 조그마한 불꽃을 머금은 듯 일순간 멈칫거렸다.
그리고 화룡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으며 종래에는 시야를 모두 먹어치울 정도로 거대해졌다. 천지를 가득 메운 신의 불꽃이 수백 리의 대지를 모조리 불태우며 연소시켰고 물질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았다. 존재의 근간마저 뒤흔들어버리는 절대적인 극한의 불꽃이 세계에 소용돌이치며 천재지변을 일으켰다.
[ 영계여, 불타거라! ]
화룡진인은 끝장을 보려는 듯 두 신기의 힘을 더욱 강렬하게 공명시켰다.
우우우우 -
영계 바깥까지 내 시야가 넓혀지면서, 별의 영토가 화염의 용에 감싸이는 게 보인다. 세계를 장구하게 뒤흔드는 불꽃은 구름을 사르고 어둠을 멸했다. 바다는 말라버리고 촉수는 불탔다. '연금술사'였던 초거대 촉수괴물은 이미 재생력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로 타들어가서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 이것이... 수요천빙의 대극... 화요천염!'
만마(萬魔)를 징벌하는 궁극의 불꽃!
나는 화요를 해방하자 알게 되었던 화요천염의 진짜 위력을 실감하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대로 된 소유주가 사용할 경우 이 세상 전체에 재앙을 토해낼 수 있는 신급 화염의 위력을 눈 앞에서 똑똑히 본 것이다. 지금은 영계이기에 맛만 본 정도였으나 화요천염의 전력이 인간계에서 발휘될 경우 열국이 일순간에 불탈 수도 있으리라. 사도 달기의 포효를 훨씬 상회하는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후두두둑...
화요천염의 시전이 끝나자 화룡진인은 어둠의 근간이었던 장소로 향했다. 그 곳에는 한때 '연금술사'였던 생 제르맹이 인간의 형태가 된 채 꿇어앉아 있었다. 그의 전신은 화염에 불타서 전신화상을 입었고 피부가 녹아내리고 있는 중이었고,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끔찍하고 비참한 모습이었으나 생 제르맹은 큭큭 웃으며 말했다.
"흐흐... 용왕이 칠요의 소유자가 될 줄은... 정말... 생각도 하지 못했다... 쿨룩!"
[ 악인이여. 그대의 악업은 천계에서 영겁토록 심판받으리라.]
"악(惡)이라... 후후... 이미 이 세상에 악이 흘러넘치는데 나같은 소악(小惡)이 하나 늘어난다 해서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어."
생 제르맹은 허탈하게 웃다가 말했다.
"[그 수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근원이다. 그 수가 있으면 우리는 인류의 마음을, 영혼을 열 수 있다.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 하늘에서 이루어지듯, 지상에서도 이루어지리라...] 이것이 우리의 맹세..."
[ ......]
"나는 실패했으나... 검은 형제단이 복수해줄..."
풀썩
그가 쓰러져서 절명하자 화룡진인은 그의 시체를 응시했다. 그러자 눈 깜짝할 사이에 시체는 뼈도 남지 않고 잿더미가 되어버렸으며, 그 시체에서 시꺼먼 영혼덩어리가 흘러나왔다. 화룡진인은 그 영혼을 움켜잡아서 하늘로 던져버렸는데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아무래도 연금술사의 영혼을 천계로 보내버린 듯 했다.
[ 추악한 놈!]
퇴마를 끝낸 화룡진인은 다시 화룡을 타고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화룡진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 곳에는 호법사자 두 명이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경계심 가득한 기색으로 화룡진인을 보며 말했다.
"당신은 누구지? 천외천(天外天)의 고수라면 별호성명을 밝혀라."
화룡진인이 방금 보여준 신위는 호법사자라 해도 압도될 정도였던 모양이었다. 하긴 원래부터 대라신선중에서도 특출난 존재였던 화룡진인이 힘을 되찾은데다 칠요까지 지니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자 화룡진인은 훗하고 웃더니 말했다.
[ 그대들은 인간이니 내가 싸워야할 존재가 아니다. 길을 비켜라.]
"감히 나를 무시하는 거냐?!"
용비천이 화가 났는지 거대한 풍탄을 소환해서 화룡진인에게 날렸다. 하나하나가 지형을 바꿀만한 위력이었으나 화룡진인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콰과과광!
"끄아아악."
휘파람이 이내 거대한 화염폭풍이 되어서 용비천의 풍탄을 모두 삼켜버리고 용비천을 날려버렸고 그의 비참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단 한 방으로 용비천의 호신강기를 깨 버린 것이다. 저만치 날아가서 기절해버린 용비천의 행색은 천하무적의 호법사자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한백령이 말도 안 되는 화룡진인의 강함에 멍청히 있다가 말했다.
"당신은... 백웅이 아니군. 도대체 누구죠?"
[ 나의 이름은 화룡진인! 백웅은 내게 몸을 빌려주었으니 그를 섣불리 대하지 말라.]
"......!!"
[ 그대들은 혼돈의 힘을 빌리고 있으나 어쨌든 인간의 인과율에 속한 존재. 부디 내게 힘을 쓰게 하지 말거라.]
파앗
나는 갑자기 빙의가 풀리고 내 몸의 통제권이 돌아온 것을 알아차렸다. 화룡진인에게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봤지만, 화룡진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한백령에게 말했다.
"어... 일단 다 끝난 것 같은데 슬슬 정리해야하지 않겠습니까..."
"......"
"한백령... 님?"
갑자기 한백령은 내게 포권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용의 화신이셨군요. 방금 용비천이 한 무례한 행위를 용서해 주시길..."
"물론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이제 정리를 하려 하는데 도와주시길."
"네."
나는 서로 존댓말을 쓰는 상황이 되자 어색했지만 반면에 내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 나... 설마 존대받고 싶은 건가?'
아까 화룡진인한테도 그랬고 한백령한테도 그랬다. 나는 어느 새 누군가에게 공대(恭對)를 받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고 공경받는 일에 쾌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한백령이 나를 용의 화신이라 생각해서 정중히 대하는 걸 어색해하면서도 내심 기분 좋아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섬김받을 거라면 이렇게 구차한 삶을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 그냥 전생하자마자 내가 가진 온갖 지식과 보물을 이용해서 무림에서 떵떵거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내게는 큰 목표가 있기에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야 했고, 명예욕은 앞으로 내 행동에 크게 발목을 잡을 게 분명했다.
나는 이런 생각을 이윽고 만난 망량과 검마에게 말했다. 망량은 흑요석을 통해 자초지종을 보더니 말했다.
"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소.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공경받은 적보다 무시당하며 살아온 적이 많았잖소? 누구한테 대우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오."
"음 그렇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니 스스로 경계하여 조심하기만 하면 되오."
옆에 있던 검마가 껄껄 웃었다.
"으하하! 난 되려 좀 겸손하다 보네만... 지금 자네의 무공과 실력이면 천하무림을 자신의 축으로 재편해도 이상할 게 없어. 자네의 적수가 신급이라서 스스로 초라해하고 있을 뿐이지."
"......"
"자, 그럼 다같이 가 보세."
검마가 히죽 웃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무림을 장악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