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0 암천향(暗天鄕) =========================================================================
나는 검마에게서 비등을 넘겨받으며 질문했다.
"비등을 쓸 때 정신력이 고갈되거나 유혹에 빠지지 않으셨습니까?"
이게 검마에게 비등을 줄때 제일 걱정됐던 일이었으며, 연락이 끊긴지 이틀만에 내가 부랴부랴 낙양을 향해 움직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어찌된 일인지 비등을 아무리 써도 유혹에 전혀 안 걸리고 정신력소모도 없었지만 제갈사의 말에 따르면 보통 인간은 그렇지 않았다.
검마도 내 기억을 보았기에 비등이 무엇인지 얼마나 위험한지는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으나 일말의 위험성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 해도 화신류 본거지에서 포위당해 살해감금당하는 위험부담보다는 비등을 한두번 쓰는 게 나았기에 검마에게 비등을 준 것이다.
검마는 한숨을 쉬었다.
"왜 아니겠나? 자네의 기억에서 봤던 것처럼 가공할 어둠의 도시와 환영을 볼 수 있었네. 자네는 비등에 익숙해져서 금세 그 환영을 떨쳐버린 듯 했으나 직접 써보니 덮쳐오는 감각의 수위가 대단하더군."
"괜찮으십니까?"
"그래도 한두 번 정도는 여유로 쓸 수 있었네. 문제는 비등이 아니었네만..."
말끝을 흐린 검마가 말했다.
"어서 제갈사에게 가지. 지금 가장 좋은 계책을 내줄 자는 그일세."
"네."
검마도 계책이나 계략에 일가견이 있는 무림고수였으나 제갈사의 그것과는 성격이 달랐다. 마도의 지식에 해박하고 기책에 능한 제갈사라면 지금 꼬여있는 상황을 풀어줄 수 있으리라. 나는 곧장 비등을 써서 장령곡으로 향했다.
파앗
그리고 장령곡의 곡주가 머무는 방에 갔을 때였다.
쿠구구구...
나는 심상치 않은 어둠의 힘이 눈 앞에서 또아리를 트는 느낌에 멈칫했다. 검마 또한 이 기세를 느낀 듯 굳은 얼굴로 전방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문 안에 제갈사가 있을테지만 섣불리 문을 열어서는 안된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짚이는 게 있었기에 검마에게 말했다.
"제갈사가 마도서 무명제사서를 연구할 때는 자신에게 섣불리 접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흐음. 그렇다면 문을 열지 않는 게 좋겠군.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 아마도 마도서를 연구하는 게 심화된 모양입니다."
나는 제갈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읊었다.
"마도사가 마도서를 '읽는' 것은 보통의 독서와 다르다 했습니다. 심화되면 마도서의 정신에 접촉해서 제의(祭儀)를 치르게 된다고 했는데..."
방 안에서는 마법진과 각종 사악한 의식의 제물이 널려있을 것이고 제갈사는 어둠의 기운을 조종해서 마도서와 접촉하고 있으리라. 문을 열었다가는 제갈사가 주화입마같은 상태에 빠질 확률이 컸다.
"그렇군. 마도서는 보통의 책과 다른, 마도사의 보패같은 거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
상황을 이해한 검마는 힐끔 어둠의 기운이 흘러나오는 문짝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자네가 제갈사를 떠난지 수 개월의 시간이 흘렀으니 충분히 그럴수 있어. 지금 제갈사의 의견을 구하는 건 불가할테니 우선 장령곡에서 나가도록 하세."
"네."
"아, 잠시 그 전에..."
나는 검마가 말하는 장소에 가기로 했다. 그리고 장령곡의 시비와 함께 제갈부가 감금되어 있는 장령곡의 밀실에 도착했다. 나는 제갈부의 피골이 상접해 있는 걸 보자 장령곡의 시비에게 물었다.
"음식을 주지 않은 건가?"
시비는 송구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곡주께서 삼순구식(三旬九食)을 주라 하셔서 그 말대로 먹이를 주고 있습니다."
"......"
삼순구식이라 함은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먹게 한다는 뜻이었다. 죄수에게도 삼순구식을 하지 않을 정도로 혹독한 방식이었는데 제갈사는 제갈부를 정말로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먹이'라고 표현하는 걸 보면 눈 앞의 시비도 제갈사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을 쓰레기처럼 보는 시선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검마가 헛기침을 했다.
"흐흠. 우선 그를 깨워보세."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제갈부의 손목을 잡고 기경팔맥으로 막대한 기를 흘려보냈다. 기를 넣는다고 해서 본질적인 영양실조가 치유되지는 않으나 일시적으로 배고픔과 이성저하가 사라지고 활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배고픔으로 기절해있던 제갈부가 정신을 차리며 얼굴에 홍조가 되돌아왔다.
제갈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내게 말했다.
"백웅! 제발 나를 살려주시오. 이대로라면 난 굶어죽을 거요!!"
제갈부의 외침에는 절절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중원지보로 불리던 일세의 천재가 이런 외딴곳에 갇혀서 굶어죽을 위기를 느낀다는게 어불성설이었다. 삼순구식이 반 년을 넘으면 웬만큼 정기가 강한 인물도 쇠약사하기 십상이었는데 내공도 봉인된 현재의 제갈부로서는 아사할 위험을 배제할 수 없었다. 제갈부의 뺨은 완전히 홀쭉해져 있어서 마치 해골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냉정한 눈으로 제갈부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당신이 우리 말에 솔직히 답한다면 시비에게 당신의 끼니를 성실히 챙기라고 명령할 거요. 그러니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하시오."
"물론!! 물론이오. 제발..."
"당신은 혹여 등곽이라는 인물을 알고 있소? 다른 자가 아니라 청류계의 수장 등곽을 말하는 거요."
제갈부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물론이오. 그 자는 요주의 인물으로서 황제를 비롯한 대소신이 모두 신경쓰고 있는 거물이라 모를 수가 없소."
"그에 대해서 아는대로 다 이야기하시오. 누구나 다 아는 표면적인 이야기부터, 당신이 알고 있는 그의 비밀까지."
"으... 그 전에 먹을 것을 좀... 배가 고파서 생각이 나지 않소."
제갈부는 은근슬쩍 핑계를 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먹을 것부터 갖다줬다가는 배가 불러서 정보를 말하지 않으려 할게 분명했기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이야기를 하시오. 듣고 결정하겠소."
"알았소."
제갈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말했다.
"등곽은 청류계의 수장이자 도어사이며 막강한 감찰원의 권력을 통제하고 있는 고관대작이오. 또한 그의 뒷배에는 유림(儒林)이라는 세력이 있어서 황제께서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시며, 대학자로도 유명하오. 무엇보다도 선제(先帝)가 그를 크게 중용하고 신뢰했기에 우리는 등곽을 제거하는 일에 매우 신중할 수밖에 없었소."
"무슨 말이지? 아무리 그가 권신이라고 하더라도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그를 역적으로 모는 건 일도 아닐텐데..."
이게 제일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감찰원이라 함은 대명제국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보유한 부서였으며 그런 감찰원의 고위직인 도어사 또한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황제의 황권에 비할 바는 아니었기에 황궁세력이 힘을 쓰면 등곽이라 해도 역적이 되어 참수되었으리라. 그런데도 제갈부는 황궁세력이 등곽을 건드리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갈부가 말을 이었다.
"그는 일개 권신이 아니오. 태생부터가 전대황조부터 명문가인 등씨 가문의 가주이며, 그가 속한 유림이라는 집단은 유학자(儒學者)와 제자백가의 후예인데 유가인 그들에게 은밀히 전승되는 술수와 무공이 따로 존재하오. 또한 등곽 본인도 힘을 숨기고 있으나 세상에서 손꼽히는 초절정고수이며, 그를 제거할 경우 유림이 어떻게 폭주할지 모르기에 우리로서도 등곽을 어쩔수없이 놔둔 것이오. 무엇보다도 그는 선제가 제거되었는데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우리에게 칼을 들이밀지 않았다는 점이 크지만."
"......"
유림!
나로서는 처음 듣는 단체였다. 하지만 들어보니 유림은 유가(儒家)의 세력이 주축이 된 유학자와 선비들의 집합체이며 상당한 무력을 보유한 곳인 듯 하다. 아마 명 조정의 청류계라고 하는 신진유학자나 진보세력에는 유림출신이 많이 포진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듣고 있던 검마가 말했다.
"도가나 불가의 무림문파는 많으나 유가의 문파에 대해서는 나도 처음 들어보는군. 그들은 공맹을 말하며 학문을 수양하는 무리들인데 비전무공이 따로 존재한단 말인가?"
"그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우리도 잘 모르오.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으며 강력한 세력을 지닌 비밀결사란 사실 외에는..."
"제갈유룡도 모른단 말인가?"
"그렇소. 등곽은 내황각을 싫어하는 자였으니 아버님과는 친분관계가 없었소."
그렇다면 등곽과 유림은 이번 전생에 완전히 새롭게 등장한 세력이다. 황궁세력조차도 꺼릴 정도의 힘을 지닌 비밀결사가 이번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검마가 훗하고 웃었다.
"자네가 움직인 건 삽질이 아니었군. 자네가 움직여서 상관혁에게 도움을 청한 덕에 결과적으로 등곽이 움직인게야. 이건 이득일세."
"그렇군요. 하지만 그와 손을 잡아야 할지는..."
나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복잡한 국면이 만들어질지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검마를 통해서 화신류 쌍검술을 배우는 간단한 일이 이 정도로 진행되다니! 당연히 제갈사의 조언을 얻어야 했으나 제갈사는 마도서를 연구중이라 어쩔수가 없었다. 그러자 검마가 말했다.
"그러면 망량을 찾아가는 수밖에."
"그래야겠군요."
제갈부가 필사적으로 말했다.
"자... 잠깐... 나를 풀어주시오. 그러면 결코 배신하지 않겠소."
"미안하지만 당신은 끼니나 잘 챙겨먹고 있으시오. 얘기해둘 테니."
내가 싸늘하게 대꾸하자 제갈부가 자신의 팔다리를 옥죄고 있는 쇠사슬을 철컹거리며 급히 외쳤다.
"날 풀어준다면 도움이 될 거요! 제발! 부탁하오!"
"......"
너무 간절한 목소리라서 원래의 나였다면 혹했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불쌍해서 도와주고 싶다. 하지만 나는 과거 전생을 하면서 제갈부가 자기자신의 보신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할 수 있는 부류의 인간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 때의 경험으로 볼 때 제갈부는 결코 신용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닌 것이다. 나는 망설임없이 고개를 돌리며 제갈부가 감금된 석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비등을 써서 망량이 수련하는 장소로 향했다.
"백웅. 무슨 일이오?"
망량은 여전히 그 장소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전에 봤을 때보다 영기가 더욱 크고 강대해져 있어서 그의 힘이 크게 늘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는구나.'
나는 망량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과 사정을 이야기했고, 흑요석을 줌으로써 더욱 상세한 기억을 보여주었다. 망량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백웅. 나도 유림에 대해서는 소문만 들었을 뿐 실제로 그런 단체가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소."
"음... 역시 그랬구려."
"하지만 있을법하긴 하오. 유불도(儒佛道)가 중원에서 발전한지 수천년이며, 춘추전국시대부터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헛된 인신공양과 인명경시를 반대했소. 그런 성향에 비추어보면 어쩌면 그들은 처음부터 이 세상의 [어둠]이나 [옛 지배자]의 존재를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
"제갈사가 지금 바쁘다면 나라도 수련을 잠시 멈추고 당신 일을 도와주겠소. 내 술법이라면 꽤 도움이 될 거요."
"그래준다면 고맙소!"
나는 망량이 합류하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들었다. 더욱이 전생한 이후 강력한 기연을 얻어서 지속적으로 수준을 향상시켜온 망량이 아닌가? 아직 그의 수준이 어느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도움이 될 게 틀림없었다.
"우선 등곽의 연수제안은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요. 받아들여야 당신이 등곽과 유림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며 앞으로의 전생에서 유리하게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오."
"알았소."
"그리고 당신은 지금 사도로써 강력한 칠요와 보패를 지녀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데, 황궁을 격파하는 싸움에서 그 힘을 최대한 숨기는 게 좋겠소."
뜻밖의 조언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왜 그렇소?"
"어차피 당신은 황궁에서 얻을 수 있는 기연과 보물을 거의 다 빼먹은 상태고, 지금의 연수도 황궁세력을 빈집털이하려는 것에 가깝소. 소소한 전투라고 할 수 있지. 이런 싸움에서 등곽이나 한백령같은 거물들에게 당신의 힘을 각인시켜 버린다면 앞으로의 전개는 둘 중 하나요."
망량이 두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들을 복종시키던가, 아니면 그들을 파멸시키던가."
"......"
그것까지는 생각지 않았기에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망량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검마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 말이 맞네. 나도 백웅의 힘을 감추는 게 좋을거라 생각되는군."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수는 없는 일. 화신류와 유림 두 세력을 모두 접수할 생각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힘을 내보여서는 안 되는 일이오. 그리고 지금 두 거대세력을 잡아먹기에는 기반이 좀 부족하지."
"알았소."
나는 두 사람의 충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망량은 내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짚어주고 있었다. 망량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대로 내일의 회담이 진행된다면 그저 화신류의 부하세력으로서 제대로 된 발언권도 얻지 못할 것이오. 뿐만 아니라 등곽이나 한백령에게도 무시당해서 앞으로 큰 계획을 세우기가 어려워지겠지. 너무 무시당하는 것도 곤란하니, 무영련이 최소한의 발언권을 얻어서 그들의 동맹세력을 우리 뜻대로 주도할 기회를 잡아야 하오."
"어떻게 해야하겠소?"
"후후. 한 사람을 데려가기만 하면 되니 걱정 마시오."
이윽고 망량이 계책을 풀어내었다. 이번 계책은 검마도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는지 그가 찬탄성을 내었다.
"기막히군!"
"검마 어르신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또한 그 분을 잘 설득해야 합니다."
"그건 맡겨 주게."
우리는 계획대로 열심히 움직였고, 다음 날 회담장으로 향했다. 회담장은 낙양에서 가장 넓고 큰 고급주루로서 휘천루(輝天樓)라는 곳이었다. 고관대작이나 대상인 등등 권력과 금력을 보유한 자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초고급 주루로서 보통 평민은 평생 가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휘천루에 들어오자 1층에서부터 정중한 차림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 우리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우리는 그녀를 따라서 휘천루를 올라갔다. 그리고 최정상인 9층에 도달해서 커다란 탁자에 앉았다. 탁자에는 잠시 후 등곽과 한백령이 와서 앉았다. 9층에는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으나 휘천루 근처에는 등곽과 한백령이 데리고 온 호위무사들이 줄줄이 포진해 있는 게 느껴졌다. 등곽은 우리 일행을 보더니 눈매를 좁혔다.
"무영련주. 거기 삿갓을 쓴 자는 누구인가?"
검마는 자기 옆에 앉아있는 삿갓의 인물을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곧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상한 분이 아닙니다."
"흐음."
한백령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등곽. 말을 해 봐라. 황궁을 치겠다는 게 무슨 의도냐?"
"말 그대로다."
등곽은 비분강개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의 황제는 미쳤다. 그는 금의위와 동창에게 사악한 마(魔)의 힘을 내리고 있으며 인간을 인신공양해서 불로불사를 얻으려는 생각에 빠져 있지. 그리고 그 일을 내황각의 술법사들이 돕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조만간 큰 일이 생길 것이다."
"......"
"우리 유림은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그들을 쳐서 종묘사직을 보전하고 정의를 실천하려는 것이다."
한백령이 픽하고 웃었다.
"후후. 정의 따위는 관심없다. 나는 네 일을 도우면 우리 화신류에 어떤 득이 생기는지를 묻고 있는거다, 등곽."
"황제를 돕고 있는 사악한 세력이 몰락하면 너희 백련교 세력을 국교(國敎)로 인정하도록 새로운 황제께 강력히 건의하겠다. 그리고 한씨세가의 확장을 억제하고 있던 법제를 모두 풀어주도록 하지."
흠칫!
등곽이 한번에 크게 찔러와서인지 한백령의 표정이 굳었다. 역시 등곽은 한백령의 한씨세가가 사실 백련교 소속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한백령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 전에 한가지 묻고싶군."
"뭐냐?"
"네 녀석은 역성혁명이 아니라 했다. 그렇다면 새로이 황제위에 추대할 후보가 있다는 말인데 그게 누구냐?"
등곽은 표정변화 없이 대꾸했다.
"네가 확답을 주지 않는 한 이야기할 수 없다. 극비기 때문이다."
"네놈이 본녀를 농락하는 게 아니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지?"
"... 틀림없이 그 후보는 존재한다."
등곽이 단호하게 말하자 한백령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듣고 있던 나는 그게 누군지 알고 있었다.
' 주재후.'
과거 망량이 추천해줬던 뇌신류의 신입기재이자, 사실은 황위계승서열의 최상위에 존재하는 황족! 주재후는 내 전생 중에 한차례 황제로 추대된 적이 있었다. 아마 등곽이 말하는 건 주재후가 틀림없을 것이다. 주재후 외의 황족들은 모조리 그릇이 작고 무능해서 황제가 될만한 자가 아니었다.
한백령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승산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지. 네 녀석은 제사장이 실종되어서 황궁세력이 약화되었다 하지만, 본녀가 파악하기로 아직도 황궁세력은 강력하다. 알고 있느냐?"
"알고 있다."
"수십 수백개체의 강력한 마물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며 금의위나 동창도 건재함은 물론 어떤 사악한 술수를 감춰두었을지 모른다. 본가의 정보력으로도 그들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 이런 상황에서 너희 유림만 믿고 우리 화신류가 정면으로 뚫다가는 큰 피해가 날 것인데 어찌 협력할 수 있겠느냐?"
그러자 등곽이 차갑게 웃었다.
"후후! 그런 자들이야 호법사자의 힘으로 다 쓸어버릴 수 있을텐데 간을 보는 것이냐?"
"단순한 무력적인 측면을 말하는 게 아니다. 황궁이 연관되면 무림세력의 다툼처럼 단순하게 끝나지는 않는다. 사후처리라던가 그들의 하부세력을 충분히 상대할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 유림이 그정도 준비가 안되었을 것 같으냐?"
"흥! 아까부터 대책없이 너희를 믿으라고만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런 식이라면 슬슬 회담을 깰 수밖에 없겠군."
나는 지금 그들의 알력이 능구렁이끼리 서로 숨기기만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등곽이든 한백령이든 서로 연수할 필요성은 느끼지만 각자의 세력을 노출시키기를 극단적으로 꺼려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한백령이 연수제안을 거절하고 나갈 가능성도 농후했다.
' 지금이군.'
나는 검마에게 넌지시 눈치를 주었고, 검마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영련주가 한 말씀 올립니다."
등곽과 한백령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검마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 특별한 분을 모셨는데 두 분 께서는 잠시 이 분의 말씀을 들어보고 결정하심이 어떻겠습니까?"
"그 삿갓을 쓴 자 말인가?"
"그렇습니다."
등곽은 흥미로운 듯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 무공이 대단한 자는 아닌 듯 한데 누구인가? 나이도 들어보이는데."
한백령은 말없이 이쪽을 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삿갓의 괴인에게서 뭔가를 느낀 듯 신중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삿갓의 괴인이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껄껄 웃었다.
"허허허! 무공은 대단치 않아도 아직 등곽 자네에게 한 소리할 기력은 남아 있다네."
"......?"
등곽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현 조정에서 가장 강력한 권신 중 하나인 자신에게 서슴없이 말을 놓는 존재가 잘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리라. 등곽이 머리를 굴리는 표정을 짓자 삿갓의 괴인이 천천히 자신의 삿갓을 벗으며 말했다.
"수십년 전 처음 장군 생활을 시작할 때가 생각나는군. 자네는 그 때 젊고 유능한 관리로 주목받고 있었지."
"헉!"
삿갓의 괴인의 얼굴을 확인한 등곽이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황급히 예의를 차리며 크게 고개를 숙였다.
"소인 등곽이 황연대장군을 뵈오."
"간만일세, 등곽."
그랬다.
삿갓의 괴인은 황연대장군!
지금까지 목갑에 있던 그를 꺼내어서 검마와 내가 몇 시진동안 상황설명을 하며 설득했고, 마침내 그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 회담자리에 데리고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