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9 암천향(暗天鄕) =========================================================================
잠시 내가 상관혁에게서 등곽의 신분에 대해서 설명을 들은 후, 등곽은 내 맞은 편에 앉았고 상관혁이 우리 둘을 중개하듯 삼면 중 하나를 차지했다. 나와 등곽, 어느 쪽이든 먼저 말을 꺼내기 곤란했으므로 상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등곽 어르신. 한씨세가에 무영련주가 현재 붙잡혀 있을 가능성이 높은지라 그를 구해낼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내가 그래야 할 이유는?"
"일전에 어르신 가문의 영재(英才)를 치료했을 때 어떤 청이든 하나는 들어준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그 청을 이번에 쓰려 합니다."
상관혁의 말에 등곽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말했다.
"너무 앞뒤가 없군. 무영련은 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으니 좀 더 구체적인 이유를 말해 보게."
"......"
구체적인 이유?
등곽은 무엇을 듣고싶은 것인가?
나는 등곽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이어진 상관혁의 말에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대인께서 원하시던대로 교주께 연수제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괜찮군."
등곽은 상관혁에게 은근히 추가적인 보수를 요구한 것이다! 단순명쾌한 흐름을 깨닫고나자 잠시 허탈해졌으나 이내 반발심이 들어서 등곽에게 말했다.
"등곽 어르신. 강호의 범부가 한가지 여쭙고자 합니다만."
"얼마든지 물어보게. 자네도 그만큼 대답해줄 수 있다면."
"... 이번 일을 어떻게 해결하시려는지요? 사병(私兵)을 이끌고 가서 한씨세가를 치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등곽의 생각이 알고 싶었다.
등곽의 내공이 천하일절이며 무공도 대단할 것으로 보이지만, 상대는 백련교의 호법사자와 화신류였다. 등곽의 무공이나 사병집단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무력으로 토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수만 대군이 포위해서 공격하면 이기겠지만 일개 세가를 치는데 그렇게 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그러자 등곽이 껄껄 웃었다.
"후하하하... 나는 엄숭(嚴嵩)같은 놈이 아닐세. 엄연히 황제께서 이 낙양을 통치하고 계시는데 일개 신하가 함부로 병사를 움직이는 건 반역죄로 치부될 수 있는 위험한 짓이지."
"무력을 쓰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애시당초 왜 무력을 써야 하지?"
등곽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는 상관혁을 통해서 나를 움직였지. 그리고 나는 한번 움직이면 맡은 일은 반드시 해내는 성격을 갖고 있네. 자네는 잠자코 나를 믿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네."
내가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그 순간 상관혁의 전음이 날아왔다.
[ 자제하게. 등곽 어르신은 도어사(都御司)로서 대명제국의 고관대작 중에서도 막강한 실권을 쥐고 계신 분. 저 분의 성질을 건드리면 설혹 엄숭이라 해도 목이 위태로울 것이니 일단 잠자코 있게!]
"......"
엄숭은 권신으로서 현 조정에서 상당한 권력을 보유한 자였다. 그렇기에 엄숭의 호위무사로 있던 이광의 동기, 정윤보도 오랫동안 호위무사 일만으로도 뇌신류를 후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엄숭조차도 등곽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눈 앞의 인물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물론 내가 볼때는 그런 인간세상의 권력이 그리 와닿지는 않았다. 천계의 신선이나 [옛 지배자]와 상대하는 내게 있어서는 의미없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모처럼 새로운 조력자가 생겼는데 공연히 자만해서 일을 그르치는 건 옳은 행동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 일에는 검마의 목숨이 걸려 있는 것이다.
나는 반발심과 의심, 격랑을 꾹 밀어넣고 등곽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을 잘 부탁드립니다."
"자, 그럼 움직여 보지. 말을 듣자하니 한시가 급한 사안이군."
"어디로 가실 겁니까?"
바로 일어선 등곽은 문으로 걸어나가며 대꾸했다.
"당연히 한씨세가일세."
화륵...
우리는 이윽고 하인과 식객들을 이끌고 야밤중에 낙양의 밤거리를 지나기 시작했다. 상관혁의 의가에서 한씨세가는 그렇게 먼 장소는 아니었기에 길어도 반 시진이면 도착할 듯 했다. 말 위에 타고 있던 등곽이 말했다.
"백웅. 충성심이 지극하군."
나는 뜬금없는 말에 그를 힐끔 돌아보곤 말했다.
"저는 그에게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은원을 잊지 않고 갚는 것은 훌륭한 사나이일세. 앞으로도 그 자세를 잊지 말게."
"유념하겠습니다."
등곽은 충성심이나 의리를 큰 가치로 여기는 인물 같았다. 나는 등곽에 대해서 궁금한 게 산더미같았기에 질문했다.
"등곽 어르신께서는 어찌하여 백련교주를 만나려 하시는 겁니까?"
"두 번째군."
"네?"
"내가 이번에 자네 질문에 대답하면 두 개의 질문에 답해주는 셈인데, 자네도 응당 내 질문에 답해야하지 않겠나?"
"......"
"물론 말해 줄 생각은 없네. 이제 겨우 일면식을 익힌 상대에게 해줄 정도로 얕은 이야기가 아니니, 자네는 앞으로 내 질문에 한 번만 대답하면 되는 걸세."
나는 기가 막혀서 등곽을 쳐다보았다. 내가 구렁이 담넘어가듯 정보를 캐려는 걸 완전히 봉쇄해 버리고 도리어 내가 대답을 해야하는 상황으로 만든 것이다. 언변이 능란한 인물이란 것도 알 수 있었다.
' 하긴 그러니까 구중궁궐에서 높은 벼슬을 할 수 있는 거겠지...'
푸르륵
그 때 말이 한씨세가의 대문 앞에서 멈춰섰다. 경비무사 대신에 웬일로 헌원사도가 서서 경비하고 있었고, 그들은 우리를 보자 말했다.
"멈추시오. 여기가 한씨세가란 걸 알고 오셨소? 신분을 밝히시오."
그 말에 등곽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 위에서 대답했다.
"나는 등곽이다. 한씨세가 가주를 만나러 왔다."
"......!!"
맨 앞에 서 있던 헌원사도의 첫째는 순식간에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러더니 아우들에게 눈치를 주며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몰라뵜습니다. 강호무부(江湖武夫)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무림인인 듯 한데 안에 소식을 전할 수 있겠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후 안쪽에서 한진성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걸어나왔다. 한진성은 표정관리의 달인이었는데도 동요를 감추지 못할 정도로 등곽의 방문이 의외의 일이라는 뜻이었다. 한진성이 예의있게 등곽에게 법도를 차린 인사를 하며 말했다.
"한씨세가 소가주 한진성이 등곽 어르신을 뵙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음. 오랜만이군."
한진성과 등곽은 면식이 있는 사이인 듯 했다. 등곽은 설렁설렁 인사를 받고는 말했다.
"가주를 만나고 싶으니 안내해라."
한진성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가주께선 침소에 드셔서 오늘 사람을 만나실 수 없습니다."
"이 내가 직접 찾아왔는데도 수면을 핑계로 만나지 못하겠다는 건가?"
"그건..."
등곽은 으름장을 놓듯 말했다.
"가주에게 전해라. 오늘 나와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백 년의 후회를 하게 될 것이라고."
한진성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더욱 숙이며 말했다.
"그럼 이야기를 올려 보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간 한진성은 일 각이 지난 후에 뛰어나왔다. 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안으로 드십시오."
등곽이 갑자기 상관혁을 제지하며 말했다.
"자네는 혹시 모르니 밖에서 기다리고 있게."
"그리 하지요."
나와 등곽은 한진성을 따라서 한씨세가의 안쪽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익숙한 한백령의 정원에 도착했는데, 한백령은 이전과 달리 여유있는 안색이 아니었다. 정원의 다리에서 내려와 정면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은 등곽을 향하고 있었다.
한백령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꿍꿍이지? 유림(儒林)의 노괴(老怪)가."
한백령의 말에 등곽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지인의 부탁을 받아서 무영련주를 데리러 왔다. 들리는 말로는 한씨세가에서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하더군."
"흥. 아무리 도어사에 청류계의 수장이라 해도 여기서 제멋대로 굴 수 있을 것 같으냐?"
한백령이 의념으로 살기를 흘려냈으나 등곽은 역시 초절정의 고수라서인지 그 기세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기고는 말했다.
"내 직위는 상관없지. 중요한 건 무영련주가 한씨세가에 초대받은 후 모살(謨殺)당했는지 의심스러운 거니까. 관아에서 조사해봄직한 일일 게야."
움찔
한백령은 등곽의 담담한 말에 도리어 위협을 느낀 듯 했다. 그녀는 경계를 감추지 않고 등곽을 노려보며 말했다.
"관(官)의 위력을 끌어들이려 한다면 이쪽도 생각이 있다."
"이런.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나? 어, 그러고보니 그런 방법도 있겠군."
"능구렁이같은 놈!"
등곽이 히죽 웃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기기 전에 무영련주 얼굴이나 좀 보여주는 게 어떻겠나? 너무 잘생겨서 혼자만 숨겨두고 몰래 보려는 건 아니겠지?"
"......"
한백령은 화를 눌러참는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그는 현재 폐관수련 중이다."
"폐관? 왜 이런 적지에서 폐관수련을 한다는 말이지?"
"그 자신이 청한 것이다. 지금 불러올테니 기다려라!"
후웅
한백령은 순식간에 극성에 달한 화영미리보를 써서 화염이 꺼지듯 사라졌다. 역시나 한백령의 무공은 같은 초절정끼리도 쉽사리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라서 감탄성만 나왔다. 한참 후 한백령은 하늘 저편에서 무공술을 써서 한 명의 인영과 함께 정원으로 도착했다.
타닷
그리고 놀랍게도 한백령의 옆에는 검마가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는데, 검마가 빠르게 상황파악을 한듯 나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흠, 미안하군 백웅. 내가 경솔했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나는 당혹스러웠으나 정작 등곽이나 한백령은 그리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뿐만아니라 등곽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까지 지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무영련주. 폐관수련에 바쁜데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군."
등곽이 비꼬자 검마는 깊이 포권하며 말했다.
"강호의 일에 공연히 마음쓰게 하여 죄송합니다, 어르신."
"흐음."
"잠시 백웅에게 이야기를 좀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검마는 내 쪽으로 오더니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회담은 모두 정상적으로 끝났네. 그리고 쌍검술의 전수를 이야기하던 중 한 가주께서는 제자교환의 형태를 원하셨고, 나는 그건 안된다고 말씀드렸지. 그러다가 내가 폐관수련으로 한 달 내에 필요한만큼 터득하고 가는 것으로 합의를 본 것일세."
그렇게 된 거였구나!
나는 공연히 마음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무영검제에게 신경질을 냈던 기억이 나자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검마에게 투정하듯 따질 수 있는 자리도 아닌지라,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전서구라도 보내주셨으면 좋았을것을..."
"한씨세가의 요지(要地)가 노출되니 그리할 수 없었네. 미안하네."
큰일이 벌어진 줄 알았는데 전혀 큰 일이 아니었다니, 내가 설레발을 친 느낌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기에 검마에게 말했다.
"그러시다면 한 달 후에 무영문으로 오시겠습니까?"
"그렇게 하겠..."
검마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등곽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멋대로 이야기를 끝내지 말게."
좌중의 시선이 등곽에게로 쏠렸다. 등곽은 중인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오연한 목소리로 자신이 하고싶은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자네들 세력과 유림(儒林)의 연수를 제시하고 싶으니."
엥?
정말 뜬금없는 소리였다. 그리고 등곽이 무슨 의도로 저런 이야기를 꺼냈는지도 아직 내 머리로는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나 검마와 한백령, 한진성은 머리가 똑똑한 자들 답게 등곽의 말과 이면배경까지 한번에 통찰한 모양인지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한백령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등곽. 이제야 움직일 셈이냐? 청류계, 유림이라 불리는 집단의 대표로서 하는 말이냐?"
"물론이다."
등곽은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이제야 기회가 찾아왔다. 지금껏 [어둠]에 속하는 세력이 너무 막강해서 생존만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얼마 전에 갑자기 그들의 제사장이 실종되고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지. 건곤일척의 기회가 생겼기에 연수를 제안하는 것이다."
한백령이 피식 웃었다.
"후후... 야망이 크군."
"대명제국을 위한 충심(忠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검마가 말했다.
"그 길이 대역죄와 관련있다면 이 서문 모는 빠지도록 하겠소."
"무영련주. 절대 그런 게 아닐세. 황제의 곁에 사특한 무리들이 뱀처럼 우글거리고 있으니 그들을 쳐내고 만세태평을 이룩하려는 것일 뿐, 결코 역성혁명이 아니네."
"......"
검마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된 이상 나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었다.
' 등곽은 황궁세력을 치려는 거야!'
그것도 자신이 보유한 유림세력만으로는 부족하기에 화신류와 무영련까지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검마가 대역죄를 운운한 이유는 그런 등곽의 의도를 한번에 간파했기에 수위를 가늠해보려고 던진 질문이었다.
등곽이 거만한듯 열정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대답해 주게!"
꿀꺽
나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분위기가 더 이상 손쓸도리 없이 흐르기 전에 재빨리 끼어들어서 외쳤다.
"잠시만!"
좌중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갑자기 너무 큰 선택을 해야하는 것 같습니다만, 장소를 정해서 내일 다시 이야기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지금 바로 결정을 내릴 문제가 아닙니다."
잠시 눈치를 살피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대세력들의 수장은 눈빛교환을 하더니 이윽고 내 의견에 동의하듯 말했다.
"좋아."
"좋네."
"그리 하지."
곧이어 만날 장소와 시간이 정해졌고, 나는 하루의 시간을 벌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백령에게 허락을 받아서 검마를 데리고 한씨세가에서 나오다가 상관혁의 전음을 들었다.
[ 백웅. 안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자네에게 은혜를 다 갚은 걸세.]
[ 알고 있소.]
[ 그러니 부탁이니 배교교주가 내게 건 이혼대법을 풀어주게.]
나는 상관혁이 내 일을 순순히 도왔던 이유를 알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제갈사를 데리고 와서 이혼대법으로 강제하면 마찬가지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가 마냥 순수한 마음으로 돕지 않았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 잠시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 그건 장담할 수 없소. 다만 제갈사가 당신에게 과한 손속을 쓰지 않도록 당부하겠소.]
[ ... 그것만이라도 고맙네.]
이혼대법에 걸린 상관혁은 불쌍하지만 바로 술수를 풀어줄 수 없는 상대다. 그는 낙양 전역을 감시하는 마도사인데다가 교주의 심복이며 아직까지 감춰둔 꿍꿍이가 많은 존재였다. 섣불리 상관혁의 금제를 풀면 나중에 중요한 국면에서 큰 피해를 입을수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