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0 암천향(暗天鄕) =========================================================================
내가 국가의 경계를 넘어 대영제국에서 얼마 멀지 않은 내륙에 도착했을 때, 나는 웬 이상한 가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의 행렬을 발견했다. 가면이라기 보다는 마치 쐐액거리며 숨을 쉬기 위한 통기구를 부착시킨 듯한 조악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또한 마치 찌를듯한 길쭉한 코가 가면에 부리처럼 붙어있어서 까마귀처럼 보이는 가면이었다.
검은 옷.
나는 그 자들에게 심상치 않은 호기심이 느껴져서 한번 천신경의 술법으로 근방에서 뛰어난 영을 소환해서 그 정체를 물어 보았다.
[ 저 자들은 흑사병을 치유하는 의사일세.]
자기자신을 테르시오의 창안자라고 자신만만하게 밝힌 그 영은 곤살로 데 코르도바라는 기괴한 이국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서방의 유명한 장군인 것이다. 그는 이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戰死)한 영이라서 그런지 죽은지 얼마 안된 듯 했다.
"흑사병?"
[ 아주 무서운 병이 이 대륙에 창궐했었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저 병이 돌고 있었어.]
"지금도 흑사병이 이 대륙에 돌고 있소?"
[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구제된 걸로 알고 있네. 그 이유는 눈앞에 보고 있는 저 의사들 덕분일세.]
"저 자들이 흑사병을 치료했단 말이오?"
[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지. 다만 저들은 신비스러운 자들이라 어떤 식으로 환자를 치유하는지는 잘 모르네. 그리고 저들은 백여 년이 다되어 가는 지금도 흑사병의 잔재를 찾아서 대륙 곳곳을 순례하고 있다네.]
"흐음..."
나는 곤살로의 말에 흥미가 돌았다. 그리고 그가 죽은지 얼마 안되었다는 점에 착안해서 질문했다.
"곤살로. 현재 이 대륙의 정세는 어떻소? 그리고 대영제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좀 가르쳐 주시오."
[ 음... 내가 아는 것과는 좀 달라져 있을테지만 괜찮을지 모르겠군.]
그는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 현 시점에서 대륙은 2강 구도로 이루어져 있네. 대영제국과 신성로마 제국이 패권을 다투고 있으며 나머지 열국은 두 국가의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지. 대영제국은 땅이 작지만 뛰어난 기술력이 있고 신성로마제국은 카를 5세의 통치 아래 광대한 영토를 지니고 있네.]
"카를 5세?"
[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일세.]
"서방 최고의 권력자란 말이군."
즉 두 개의 제국이 서방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셈이다. 나는 세계지도를 흘끔 보다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곤살로에게 질문했다.
"대영제국이라 해도 이 나라는 조그마한 섬나라에 지나지 않잖소? 중원의 일개 주 크기가 될까말까한 나라인데 어찌 왕국을 넘어선 제국이라 자칭하는거지?"
[ 자네가 살던 동방에는 대영제국이 찾아가지 않았나 보군.]
곤살로가 대꾸했다.
[ 대영제국 자체의 땅덩어리는 작지만 저 나라는 엄청난 해군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는 중일세. 해외에 존재하는 각종 소국이나 이민족들에게서 막대한 부와 자원을 얻어내고 있기에 전 대륙의 경제와 정치를 좌지우지할 수 있지. 뿐만 아니라 군사력도 막강하기에 제국이라 부르고 있네.]
"식민지..."
나는 그 말에서 남쪽 대륙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남쪽 대륙에서 원주민을 학살하던 놈들도 대영제국의 군대이며 수병이었다. 그런 놈들의 선단이 수십 개씩 퍼져나가서 확장전쟁을 펼치고 있다면 확실히 영토가 매우 넓어질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추가로 곤살로에게 질문했다.
"곤살로. 현재 이 대륙의 총기기술은 얼마나 발달해 있소?"
[ 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나는 곤살로의 반문에 아는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곤살로가 피식 웃었다.
[ 부싯돌과 화약접시는 한물 갔지. 조총이라는 그 얄팍한 총기와 달리 여기에서는 뇌홍이 약실의 장약을 발화시켜서 발사시키네. 발사의 시간차도 매우 적고 장전시간도 아마 절반 이하겠지.]
"......"
나는 기술력 차이를 얼추 이해한 기분이 들었다.
' 대영제국이 세계 최고의 총기기술을 갖고 있군! 그 다음이 서양 열강이야.'
굳이 비교를 하자면 대영제국이 대략 수십년치의 기술을 앞서나가 있고, 바로 옆에 붙어있는 대륙의 열강들이 그 뒤를 추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최신식 기술이 남만 아유타야에 수입되는 중이며, 중원 명제국은 총기에 대해 기본지식은 있으되 제대로 된 총병을 양성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대영제국이 최고인 이유는 망량이 설명했듯이 후장식 총기에 탄피까지 개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망량의 말에 따르면 탄피가 있는 총기와 없는 총기는 천지차이라고 했기에 대영제국은 현 시점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나는 곤살로에게서 대충의 지식을 들은 후 그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흑사병 의사에 대해서 궁금한 건 많지만 병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쏴아아아 -
그렇게 대략 이틀 정도를 미친듯이 달렸을까? 나는 해변에 도착해 있었다. 항구 쪽은 사람이 많아서 눈에 띌것 같았기에 인적없는 해안을 찾아서 이동한 결과였다. 나는 수평선 너머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젠장... 망설여지는군."
내 내공이 많기에 수상비로 바다를 건너는데는 큰 문제가 없다. 이 곳이 지형상으로는 르아브르라는 곳으로 그렇게 멀지도 않았다. 다만 문제는 마(魔)의 소굴이 되어있는 곳이 바로 대영제국인데다가 해군력도 막강하다 들었기에 섣불리 들어가려다 큰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정면으로 입항하는 것도 꽤 곤란했다. 왜냐하면 흑발흑안의 동양인은 이 대륙에서 엄청나게 눈에 띄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영제국은 대륙과 매우 한정적으로 교류하고 있어서 그 틈새를 뚫기는 바늘구멍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정면돌파를 강행하기로 했다. 환영술이나 은둔술을 써서 뒷길로 갈 수도 있겠지만 너무 번거로웠다. 설마 배가 아니라 맨몸으로 수상비를 써서 오는 인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할테니 되려 잘먹힐 것이다.
타다다닷
나는 수상비로 수평선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고급경공술인 수상비는 일반 경공보다 훨씬 내공이 많이 들었고, 나는 대략 오십 리를 달리자 조금 다리에 쥐가 나는 걸 느꼈다. 육체의 한계가 빨리 찾아왔고 내력소모가 급격했기 때문이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다시 내공을 급격히 끌어올리며 잠력을 폭발시켰고, 이내 내공이 회복되며 계속해서 달릴 수가 있었다.
파앗
발 밑에서 푸른 바닷물결이 스치고 지나가는 게 익숙해진다.
사백 리쯤 달렸을까? 나는 호흡이 가빠지고 이마에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을 느꼈다.
' 역시... 그냥 평지를 달리는 것보다 훨씬 힘들구나.'
아직 육지는 보이지 않지만 이대로라면 바다에 자빠져서 기절할 것 같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쉴만한 장소를 찾았다. 하지만 망망대해라서인지 암초같은것도 보이지 않았고 나는 되려 각오를 다져야만 했다.
"으아아아앗!!"
나는 비명소리를 지르며 의지력을 다해서 내공을 최대한 체력으로 전환했다. 그러면서 힘이 다 떨어지기 전에 이 바다를 일주한다는 생각으로 달렸다. 수상비가 거칠어지자 발목까지 풍덩하고 바다에 빠지기도 했다.
오백 리...
육백 리!!
"육지다!!"
나는 시꺼먼 땅이 보이자 반가워서 소리를 질렀다. 비록 근처에 배가 보이고 사람이 사는 흔적이 역력했지만 어쨌든간에 쉴 수 있는 장소가 눈에 보였다. 나는 마지막 힘을 다 해서 육지까지 달려가서 땅 위로 올라가서 엎어졌다.
철푸덕
"허억... 허억..."
철컥
헐떡거리며 땅에 누워있자 갑자기 칼날이 몸 근처에 느껴졌다. 슬며시 주변을 둘러보자 색목인 병사들이 내게 총칼을 들이대며 십여 명 정도가 몰려 있었다. 그들 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뭐라고 소리지르는 게 들렸다.
"@^&@!!!"
어떻게 내가 오는 걸 알아챈 거지?
나는 궁금해하다가 내가 막판에 수상비가 너무 거칠어져서 푸른 물보라를 만들어내며 해안으로 다가오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래서는 병사들이 알아챌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쓰잘데기없는 실수에 허탈함을 느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뭐 어때. 도착은 했다고. 그럼 내가 이긴 거야."
투둥
나는 말이 끝나자마자 멸혼보를 발휘해서 빠르게 도망쳤다. 기력이 다해서 엎어져 있었다지만 워낙 체력적인 극한상황을 자주 맞이했기에 최소한의 잠력은 남겨두고 있었다. 내가 멸혼보를 쓰자 병사들은 당황하며 여기저기에 총을 쐈지만 맞을 리가 없었다.
나는 병사들의 포위를 손쉽게 뚫어서 인적없는 곳으로 계속해서 도망쳤다. 병사들을 따돌리는 것만이라면 진작에 해냈지만 이 곳은 마도의 본산지였다. 이상한 놈한테 걸려서 비명횡사할 가능성도 적다고 할 수 없었다.
' 저기서 잠깐 쉴까.'
내가 쉴 곳으로 선택한 곳은 십자로 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건물이었다. 인적도 없고 조용해보이는 곳이라 슬며시 멸혼보로 들어가서 건물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적당히 비어있는 방을 하나 골라서 땀을 식히며 쉬었다.
"후우... 후우..."
나는 앉아서 체력을 회복하며 생각했다.
' 이것 참. 혹시나 했는데 대양일주같은건 안되겠군...'
이 정도 거리에서 수상비를 쓰는 것만으로 지쳐버렸다면 배 없이는 대양 너머로 갈 수가 없다. 지금의 내 여행경로도 초인적인 일정이긴 했지만 역시 인간의 육체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앉아서 대략 한 식경동안 여유롭게 쉬다가 천신경의 술법을 시전해서 근처의 영을 불러오려 했다.
"......?"
안 된다.
주변에 강력한 영이 없단 말인가? 내가 다소 당황해서 앉아있자, 문 바깥에서 염파가 들려왔다.
[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이리로 오십시오.]
나는 의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장소로 향했다. 염파의 근원은 커다란 강당이었는데, 그 곳에는 십자 장식 아래에서 한 장년인이 꿇어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장년인은 눈 앞에 둥그런 유리알 같은걸 끼고 있었는데 유리알을 만지작거리며 내게 염파를 보냈다.
[ 먼 곳에서 오셔서 우리 말이 안 통하겠지요.]
이 자는 상당한 능력을 지닌 술사였다. 염파 자체가 고등술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혹시나 해서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 당신은 누구지?]
[ 저는 이 교회의 주인입니다. 망량선사께 미리 연락을 받았습니다.]
[ 뭐?!]
[ 당신이 사상최악의 땅에 찾아오시는걸 걱정하셨나 봅니다. 그래서 약한 가호를 내리셔서 당신의 여행길을 수호하셨고 여기에 인도하셨습니다.]
이게 난데없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여기서 망량선사가 왜 나온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놈이 내 여행길을 조정했다고?
내가 당혹해서 그를 쳐다보자, 그가 탁자에 앉아서 내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 그 분의 가호는 동방에만 미치는 게 아닙니다. 그 분은 우주적 존재이시지요.]
[ ......]
[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오신건지는 모르겠지만 용건을 마치고 빨리 떠나 주십시오. 이 곳은 현재 마경(魔境)이 되어 있습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곤 대답했다.
[ 마경이라는 건 알고 왔소. 나는 총독관저의 지하로 가야 하오.]
그러자 그가 깜짝 놀랐다.
[ 세상에...!! 그 곳은 절대 안 됩니다. 포기하십시오.]
[ 나도 내 한몸 건사할 능력은 있소.]
[ 거기는 검은 형제단의 총본산입니다. 가면 죽을 겁니다.]
[ 검은 형제단?]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 외신(外神)을 숭배하는 대마도사들과 타락한 존재들이 모여서 결성된 사신의 교단입니다. 그 곳은 이미 인간세상의 경계가 모호해져 있습니다.]
[ ......]
즉, 총독관저는 사신교단의 총본산이란 뜻이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질문했다.
[ 서방에도 망량선사처럼 인간을 수호하는 수호자가 있다 들었소. 그 자는 어디에 갔소?]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 그 분은... 최후의 보루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성지(聖地)에 봉인하셨습니다.]
[ 성지라면 팔리아스를 말하는 거요?]
[ 알고 계시는군요. 거기까지 빼앗기면 인간은 완전히 가축화되기에 모든 걸 희생하셨습니다.]
[ 으음...]
생각보다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 동방과 달리 이 서방대륙은 언제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기술적인 발전은 엄청나지만 그와 반비례해서 인간의 권리와 존엄이 밑바닥까지 떨어져 있는 것이다.
' 이 상황에서 억지로 총독관저까지 가는건 안되겠어...'
억지로 런던까지 갈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곳에 함정이 펼쳐져 있거나 비등으로도 달아날 수 없는 특수한 결계가 쳐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래서는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팽조에게 들킨 시점에서 대영제국 잠입은 극상의 난이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참 생각한 후 물었다.
[ 당신의 이름은?]
[ 토마스 모어라고 합니다.]
[ 나는 다시 오겠소. 그 때까지 몸 조심하시오.]
파앗
나는 비등을 써서 장령곡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제갈사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제갈사는 한참을 듣고 있더니 말했다.
"잘 했다. 물러날 때를 잘 판단하는군."
"제갈사. 역시 팔리아스와 금요는 거기에 있는 걸까?"
"십중팔구는."
제갈사가 킬킬 웃었다.
"검은 형제단의 총본산인 대영제국 총독관저... 그 곳에 거하는 대마도사와 고위이족들을 뚫을 수 있어야 금요를 얻을 수 있다는 게 되겠지. 농밀한 마력의 수준을 생각하면 인간 대마도사들도 장난 아니게 강할걸~"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긴? 지금 그 곳을 공격할 능력도 명분도 없잖아."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일단 서방탐색은 중단하고 천계 공양의식을 한번 더 치르자."
"아하."
나는 제갈사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대라신선을 소환하는 의식으로 팽조를 불러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