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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459화 (459/1,615)

00459  암천향(暗天鄕)  =========================================================================

나는 다음 날 험한 산지를 골라서 이동하던 중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그것은 스산한 악령이 떼거리로 모여있는 기괴한 산맥의 음지(陰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높고 인적없는 산 중턱에 웬 인간의 영이 있는지 궁금해서 그 음지로 향했다.

쿠우우...

' 아주 떼거지군...'

나는 동굴처럼 되어있는 그 내밀한 산등성이의 굴곡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천신경의 술법을 발동시키자 악령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는데, 하나같이 시뻘겋게 물들어서 원한과 공포, 절망에 물들어 있었다. 아마 이 근처를 지나는 생자(生者)는 저 악령들의 기운에 이끌려서 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으리라.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곳은 인적도 없는 높은 산지대였다. 보통 인간이라면 웬만한 장비를 갖추지 않고서는 올라올 수 없을 정도였고, 나조차도 까닥 잘못하면 만장단애 밑으로 떨어질 정도다. 이런 장소에 왜 악령이 몰려있는 걸까?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시꺼먼 동굴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러자 악령들이 내게 반응했는데, 놀랍게도 생자를 발견해서 흉폭해지는 게 아니라 마치 겁을 먹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 옆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

내 강력한 내공을 돋우면 물론 악령들을 견제하고 떨칠 수 있다. 또한 천신경의 술수를 부려도 저정도 악령들은 다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안 한 상태로 악령들 한가운데로 한걸음 내딛었을 뿐인데 모조리 도망치고 만 것이다. 마치 내 존재 그 자체에 두려움을 느끼는 듯한 모습이었다.

동굴의 더욱 안쪽으로 진입했을 때였다. 나는 퀘퀘하게 썩은 냄새와 함께 진흙탕같은 통로가 이어지고, 여기저기에 시체가 널부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무덤도 없는지 그들은 팔이나 다리, 머리통이 튀어나와서 대충 파묻혀 있었고 조용히 썩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으로 죽은 모습은 아니었기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시험삼아서 천신경의 술법으로 악령 중 하나를 불러 보았다.

"이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

악령은 뭔가 말하고싶은 듯 허우적거렸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이국의 언어라는 이유만으로 들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런 거였다면 내가 수백년 전의 영혼과 문제없이 소통할 수 있었을 리 없다. 다만 지금 이 영혼은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리에 오지 못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나는 답답함을 느끼고는 결국 제갈사를 불러서 이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제갈사가 유심히 악령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이놈들은 먹이야."

"뭐?"

"누군가에게 이미 제물로 바쳐졌어. 그래서 영혼이 그 자의 소유이기에 천신경의 술법에 대답할 수 없는 거다."

제갈사는 귀찮다는 듯 시선을 떼며 말했다.

"이런데는 뭐하러 오냐? 여긴 쓰레기통이야. 시간낭비 하지 말고 팽조나 찾으러 가라."

"쓰레기통이라니... 제대로 설명 좀 해줘! 여기에 죽어있는 인간이 최소 수백 단위인데 이유는 알아야 할 거 아냐."

눈에 시체가 질릴 정도로 들어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여긴 원래 꽤 넓은 공동이었겠지만 하도 인간을 많이 묻어서 동굴이 좁아진 것이다.

"좀 더 쉽게 알려줘야 이해하겠냐? 정확히 말하자면 여긴 음식물 쓰레기통이라고."

콰직

갑자기 제갈사가 손을 뻗어서 눈 앞에 있던 악령을 잡아챘다. 원래 영혼이란 인간이 잡을 수가 없는 것인데 이혼대법의 고수인 제갈사라서 가능한 묘기인 듯 했다. 제갈사가 그 악령을 탈탈 흔들다가 말했다.

"뜯겨나갔어. 혼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뭔가가 사라졌다고. 누가 먹다 남긴 쓰레기야."

"......"

나는 그제서야 제갈사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표정이 굳어졌다.

"[옛 지배자]한테 공양된 건가."

"그럴수도 있고..."

"그럴수도 있다니?"

"지배자 밑에 있는 사도나 고위이족도 공물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지. 어느 쪽이든간에 여기는 그런 놈이 먹다 남은 영혼을 버리는 쓰레기통이란 말이다. 오래 있어봐야 좋을 게 없으니 어서 나가."

내 표정을 힐끗 본 제갈사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쓰레기통의 주인을 쓰러뜨리느니 마느니 하는 생각은 하지도 마. 그럴 여유 없어."

"하지만. 이 시체를 봐! 이건 최근에 죽은 시체야.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그래서? 사도인지 [옛 지배자]인지도 모를 놈과 한번 싸워보겠다고?"

제갈사가 광기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 전국옥새의 힘과 전욱의 사도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면 고위이족 정도는 어떻게든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그건 삼황오제 쪽에서 [옛 지배자]에게 선제공격을 했다는 뜻이 되는 거다."

"......!!"

"삼황오제와 [옛 지배자]는 평화를 위해서 칠요로 휴전협정까지 맺은 사이야. 전욱이 너를 위해서 서방을 지배하는 신격과 싸워줄까?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사도자격을 박탈하고 버리는 게 뻔히 보이는데."

"젠장..."

"이런 일에 일일이 신경쓰지 마. 끝도 없으니까."

나는 결국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 여기에서도 태경촌같은 참극이 벌어진 거야...'

그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마을 하나가 몰살당하고, 그 육체가 잡아먹히고, 영혼은 심심풀이 장난감이 되어서 죽어서도 구원받지 못한다. 내가 동방에서 한번 막아냈던 참극이 서방에서 고스란히 되풀이된 걸 보고도 돌아서야 한다는 게 답답했다.

그리고 제갈사의 말은 예언이 되었다.

나는 그로부터 약 오백 리를 경공으로 주파하는 동안, 비슷한 낌새를 보이는 장소를 무려 서른 아홉 군데나 느낄 수가 있었다. 여기저기에 이름없이 죽어서 원혼이 되어 떠도는 인간의 숫자는 최소한 삼만 단위가 넘을 게 분명했다. 비록 인적없는 산지에 묻혔다고 하지만 때로는 폐허나 황무지가 되어버린 곳에서도 느껴졌다.

폐허가 된 마을의 경우는 흔적을 따로 숨길 이유도 없는지 처참하게 죽어있는 시체와 인골이 여기저기에 눈에 띄였다. 질척한 이족의 노폐물이나 껍데기도 여기저기에 보였다.

타닷...

나는 황망한 기분이 들어서 달리다 말고 멈춰섰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여긴 지옥인가?"

중원에서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무차별적으로 인간이 이족에게 잡아먹히거나 인신공양 당하는 정황이 너무나 명백하게 보이고 있었다. 간간히 멀쩡해 보이는 마을도 있었지만 그런 곳도 습격당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다. 이렇게 인간이 마구잡이로 죽어나가고 갈려나간다면 나라가 발전할 수가 없다. 게다가 여태껏 멀쩡한 마을에서는 이족의 흔적같은게 거의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이족이 인간을 습격하고 있는 걸까?

나는 한참 후 거대한 성(城)에 도착했다. 아라사에서도 보지 못한 웅장한 서양식 성이었고, 그 크기는 낙양만큼은 아니었지만 거대한 성이었다. 지금까지대로라면 사람들이 안보는 틈을 타서 재빨리 경공술로 성을 넘어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나는 성 앞에 몰려있는 꾀죄죄한 인간부락을 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뭐지?'

중원의 경우에도 성 밖에 살고 있는 거지들이나 난민들은 제법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웬지 그런 중원의 난민들과 달리 저 부락은 마을 하나가 통째로 옮겨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통솔이 되고 있는지 더러 서역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도 보였다. 성 밖에 또 하나의 마을군락이 오밀조밀하게 생겨있었다.

' 정보를 얻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나는 서역어를 모른다. 게다가 제갈사의 말로는 이 서역대륙은 중원과 달리 통일된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춘추전국시대처럼 분열된 상태라서 각 나라의 말이 달랐다. 이 상황에서 내가 저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딱히 없었기에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만리타향이라는 게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별 수 없이 으슥한 곳에서 제갈사를 불러서 물어보자, 제갈사는 마뜩찮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또 상관도 없는 일에 끼어들려 하는구만."

"수상쩍은 걸 그냥 보고 지나치는게 더 손해 아냐?"

"... 방법은 있다."

"어떤 방법?"

"천신경의 술법을 써라. 이 근처에 있는 강한 영을 찾아서 빙의시키면 일시적으로 이 지역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거다. 영혼이 뜯겨나간 악령 말고 제대로 된 영으로 말이다."

"알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신경의 술법을 발동시켰다. 이역만리의 땅인데도 십지의 기운이 명동하며 영의 기운이 느껴졌고, 이내 제갈사가 말했던 '강력한 영'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영을 불러와서 물었다.

[ 묻노니 그대는 누구인가?]

갈색 머리칼과 수염을 지닌 그 서역인은 독특한 복장과 함께 장검을 자신의 허리춤에 빗겨차고 있는 모습이었다. 기사같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형형한 눈빛에서 뿜어져나오는 힘은 그가 생전에 상당한 무예의 달인임을 알게 했다.

[ 동방에서 온 무사인가?]

"그렇다."

[ 나의 이름은 요하네스 리히테나워! 나에게 부탁할 일이 있는가?]

"음..."

대충은 알아듣겠다. 전혀 새로운 서역의 말이긴 하지만 의미가 고스란히 영적인 흐름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리히테나...워. 이름이 어렵군."

[ 아무렇게나 불러라.]

"리히테. 정보를 얻어야 하니 저 난민들에게서 현재 상황을 알아내 다오."

[ 쉬운 일이군!]

우우웅

약칭 리히테는 내 몸에 빙의했다. 그리고 신기한 눈빛으로 내 몸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대는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카프트(Kraft)의 소유자군. 믿겨지지 않을 정도!"

나는 정신 한켠에서 궁금해서 물었다.

[ 그게 뭐냐?]

"음... 내면을 감싸고 있는 힘. 근육이 아닌 내면을 충만하게 하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아, 기(氣)를 말하는 거군.

역시 서방의 무인들도 명칭은 다르지만 기를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리히테는 내 몸을 휘도는 천년설삼과 각종 영약의 기운을 단숨에 느낀 듯 했다. 나는 궁금해져서 리히테에게 질문했다.

[ 당신도 생전에 무예의 고수였나? 서방에도 무림이 있는건가?]

"후후. 무림이란 게 뭔지 모르겠군. 다만 나는 내 독자적인 유파를 이끌고 검술을 연구하는 수련자였다."

저벅저벅

그는 이윽고 난민촌으로 가서 그들 중 촌장으로 보이는 자에게 말을 걸었다.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다 괄시하지 마시오. 나는 리히테나워 학파에 수학하러 온 동방의 유학생이오."

두툼한 옷을 입은 큰 덩치의 촌장은 그 말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대화가 익숙하게 잘 통하는 모양이었다.

"알게 뭔가?! 귀찮게 하지 말고 썩 꺼져."

촌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리히테가 물었다.

"왜 성벽 안으로 들어가지 않소? 성 안에서 사는게 편할텐데."

"빌어먹을... 우리가 귀족이나 부르주아인 줄 아나? 성에 들어가 살 수가 없어."

"이 곳 출신은 아닌 듯 한데 그럼 왜 성벽 밖에서 노숙한단 말이오?"

"......"

촌장은 약간 화난 눈으로 말했다.

"이거 정신 못차리는 뜨내기군. 혼 좀 나봐야겠어!"

우드득

그러자 난민촌 여기저기에서 주먹깨나 쓸법한 장정들이 걸어나왔다. 그들은 맨손도 아니었고 단검이나 철퇴같은걸 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자리에서 죽이거나 병신으로 만들 속셈이 뻔해 보였기에 싸움은 피할 수 없어보였다.

쐐액

그 순간 리히테가 빠르게 내 장검을 발검(拔劍)해서 크게 횡참을 세 번 그었다. 번개같은 베기가 지나가자, 주변에 있던 장정들의 옷 앞섶이 피부와 한끝차이로 잘려 나갔다. 중원의 절정고수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정밀한 솜씨였으므로 나는 내심 감탄했다.

' 빨라! 극쾌(極快)의 경지에 도달했군.'

게다가 기의 운용도 굉장히 섬세했다. 서방의 무예도 그리 우습게 볼 게 아닐지도 모른다.

"헉."

촌장이 얼어있자 리히테가 그의 목에 칼을 겨누며 말했다.

"리히테나워 학파라 말했잖소?"

"윽... 미, 미안하네. 제대로 대답해 주지."

이윽고 촌장은 설명을 해 주었다.

"얼마 전부터 마을들이 괴멸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고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숲과 평야를 돌아다닌다는 이야기가 들렸네. 그래서 영주의 보호를 받기 위해 여기에 5개 마을의 사람들이 몰려와있지. 만에 하나라도 괴물이 습격해 와도 자기 성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영주가 좌시하지는 않을 테니까."

"영주에게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하면 되잖소?"

"하룻밤 사이에 마을이 초토화되는데 뒤늦게 그런 요청을 한들 무슨 소용이겠나? 더욱이 생존자들의 말로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괴물들이 원흉이라 하니 우리는 감당할 수 없었네."

리히테는 그 후로도 촌장에게 현재의 상황설명을 이것저것 다 들었다. 모든 정보를 수렴한 리히테가 물러나와서 말했다.

"내 할 일은 다 했지만 하나 부탁해도 되겠나?"

[ 어떤 부탁 말이오?]

"내가 죽은지 이십여 년이 지났으나 이 근처는 내 고향일세. 영주에게 한 마디 하고싶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천신경의 술법이란 대라신선이 강한 영을 불러내서 일을 하나 시키는 대신에 그에게 풍부한 선업(善業)을 줌으로써 거래를 하는 개념이었다. 선업을 받은 영은 자기자신을 강화시키던가 아니면 승천해서 사후세계에 가기 쉬워진다. 당연히 영 입장에서는 자신이 부여받은 일 이상은 안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리히테나워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 알았소.]

파밧

이윽고 리히테는 경공을 써서 성벽 위로 날아오르며 성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기를 발 끝에서 튕기면서 연신 감탄했다.

"대단한 힘이야!"

그런데 외성에서 내성으로 들어가는 동안에 분위기가 점차 이상해졌다. 외성쪽은 평범하게 약간 발전한 서역의 도시같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농밀한 마력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사실을 리히테도 깨달았는지 내성의 성곽 위에 올라서서 중얼거렸다.

"으으... 더 이상은 못 가겠군... 그럼 이만."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내 몸에서 떠나갔다. 억지로 더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더 이상은 술자인 내게 위험이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판단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눈 앞의 마기는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시꺼먼 구름처럼 퍼져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지직

심지어 내성의 첨탐 위에는 흑운이 몰려다니면서 번개가 치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자 인상을 찌푸렸다.

' 마(魔)!'

오십 년 후의 진소청이 보았던 낙양의 광경이 떠오른 것은 착각일까?

나는 여기가 경계라는 걸 알아챘다. 아마 내성에는 강력한 마(魔)의 일족이 거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고, 여기서 더 안으로 들어가면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성곽의 문이 열리며 경비병 한 명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경비병이 입을 쩍 벌리더니 꾸불텅거리는 촉수가 입 안에서 낼름거리며 기어나왔다. 촉수를 휘적거리던 그 존재는 내게 염파로 말했다.

[ 그대... 삼황오제의 사도... 인가?]

이족의 마법으로 인간 하나를 통째로 촉수의 숙주로 삼은 모양이다. 나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나를 알고 있는가?"

[ ... 칠요로... 서로의 구역을 정했을 텐데... 내 영지에 침입한 까닭은...?]

나는 그 순간 알아챌 수 있었다.

' 이 지역의 영주는... 고위 이족이다!!'

황당한 일이었다. 바깥의 부락 난민들은 이족의 습격을 두려워해서 영주에게 의존해 왔는데 정작 그 영주가 강대한 마(魔) 그 자체라니! 풍겨오는 느낌으로 봐서 [옛 지배자]나 사도급은 아니었으나 확실히 강대한 이족임은 틀림없어보였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그에게 대꾸했다.

"지나가던 길이다. 싸움을 걸거나 너희에게 해를 입히려 온 것은 아니다."

[ 무엇때문에... 지나가고 있었지...? 왜 서역에 온 건가...?]

"너에게 말해줄 이유는 없지."

나는 문득 스쳐지나간 생각이 있어서 냉담하게 말을 이었다.

"말해두지만 나는 삼황오제의 명령을 수행중이다. 네가 나를 가로막거나 위협한다면 나도 무력행사를 하겠다."

움찔!

그러자 촉수가 부들거렸다. 명백히 동요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인과율이 작용하게 되면 내가 놈을 치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아하니 영주놈도 삼황오제의 사도와 싸우는 걸 크게 망설여하는 듯 했다.

잠시 후 촉수가 말했다.

[ 좋다... 서로 간섭하지 않도록 하지... 조용히 이 땅에서 떠나가라...]

"이봐. 성 밖의 난민들을 어떻게 할 생각이지? 부하들을 시켜서 잡아먹을 건가?"

[ 그런걸 왜 묻지...? 내가 그런 벌레들을 일일이 신경쓸 거라 생각하나...?]

나는 그에게 으르렁거렸다.

"그 자들을 내버려 둬. 그들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을테다."

[ 크흐흐... 무섭군... 좋다... 어차피 내 자식들의 먹이는 충분히 마련했으니...]

"......"

근방에서 학살된 수만 명의 인간들은 고위이족인 영주가 낳은 흉칙한 이계의 생물에게 먹이가 된 모양이다. 나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으나 지금 현재로서는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가지만 더 물어보고 싶은게 있다. 이건 질문값이다."

휘익

나는 제갈사가 쟁여둔 달의 짐승의 가죽 중 몇 개를 꺼내서 던졌다. 이건 이족에게도 충분히 통용되는 가치있는 물건이었다. 가죽을 받아든 촉수가 침묵하자 나는 더 질문했다.

"나는 창힐과 팽조를 찾고 있다. 그들의 행적을 알고 있나?"

[ 그런건 모른다만...]

영주가 망설이다가 대꾸했다.

[ 경고하겠다... 이 대륙에 나와 같은 영주는 한둘이 아니다... 네가 일일이 우리 일에 간섭한다면... 우리 나름대로 너에게 제재를 가할 것이다...]

파앗!

쏴아아아 -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촉수를 토해내며 쓰러져 죽은 경비병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괴물이 지배하는 땅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서방은 이족의 소유가 되었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골치 아프군.'

대영제국은 기술과 공학이 크게 발전한 나라.

그 말은 마도(魔道)에도 그만큼 크게 잠식당했다는 소리다. 아마 대영제국에 들어가게 되면 심심찮게 고위 이족이나 괴물들이 횡행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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