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56 암천향(暗天鄕) =========================================================================
전국옥새를 가져온 나는 제갈사와 화요와 용화수를 동시에 얻을 작전을 의논했다. 제갈사가 손가락 두 개를 치켜세우며 내게 말했다.
"현 시점에서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 첫 번째는, 화요 근처의 도원으로 이동한 후 빠르게 화룡신검으로 화요의 화기를 흡수한 후 용화수의 위치를 전시안으로 알아내 채취하고 본진으로 귀환하는 것..."
중지를 천천히 접은 제갈사가 끌끌 혀를 찼다.
"이 방법은 약간 문제가 있어. 만일 도원 내에 즉시 공공이 소환된다면 네 녀석이 화룡신검에 화기를 불어넣을 여유나 있을까? 이 방법을 시행하려면 네 녀석을 지켜주고 공공을 상대로 버텨줄 수 있는 호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럴만한 실력자는 중원무림이 아무리 넓다지만 한정되어 있지."
"으음..."
"또 하나의 방법은 이거다..."
나는 제갈사에게 두 번째 방법을 들었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후자가 좀 더 도박이군."
"그래. 그래서 어느쪽이든 간에 전제조건은 화요의 수호자 공공을 상대로 버텨낼 수 있는 무력의 소유자가 아군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망할 확률을 최대로 줄일 수가 있지."
제갈사의 말을 듣자마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백련교 호법사자!"
무한의 내공을 지니고 있는 호법사자라면 공공을 상대로 무난하게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싸우기에 따라서는 이길 수도 있으리라.
"그게 제일 좋겠지. 용비천이 월요의 수호자를 맞상대하던 걸 실제로 봤으니."
"하지만 호법사자와 연관되는건..."
"교주와 연관되는 것과 다름이 없지. 호법사자가 교주를 상대로 그렇게 중대한 일을 숨기며 움직일 리가 없으니."
나는 영 내키지 않아서 인상을 찌푸렸다. 화요씩이나 되는 기보에 용화수까지 있다면 교주가 잠자코 보물의 소유권을 내어주려 할 리가 없다. 설득을 하면 어떻게든 호법사자를 움직여서 같이 데려갈 수는 있겠지만 호법사자가 칠요를 뺏아가려 할 것이다. 또한 백련교와 원한을 사게 되는 건 불보듯 뻔했다.
"아니면 뭐, 이도저도 아니라면 네가 힘으로 밀어붙여서 공공을 쳐죽이면 되겠지. 전국옥새의 힘을 끌어올려서 대라멸진에 뇌명을 쓰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빌어먹을. 그걸 몰라서 안하는게 아니잖아. 대라멸진을 하고나면 죽는다고."
싸워서 이긴다 한들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나는 신경질을 낼 수밖에 없었다. 제갈사가 그걸 원하면서 내 속을 긁은 것이기 때문이다.
"큭큭큭. 내 우둔한 주군께서는 언제쯤 강해지실까."
조롱하듯 낄낄대던 제갈사가 말했다.
"객관적으로 이쪽 전력을 지금 살펴보자고. 네가 절대지경에 오른다면 지금 이렇게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공공을 베어버리면 되지만, 절대지경이란게 지금 네 재능으로 얻으려면 최소한 수백 년은 걸리겠지. 그렇다고 술법에 있어서도 천우진급은 고사하고 중급술사에 겨우 올라있는게 네 현재상황이야. 나도 그다지 싸움을 잘하지는 못해. 안 그래?"
"... 그거야 그렇지."
"그럼 그냥 이번 생은 용화수를 포기하는거지."
"... 뭐?"
나는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반문했다. 그러자 제갈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신화급 존재를 상대할 아군을 언제 만들어서 갈래? 그럴 시간과 노력을 들일 필요는 없어. 용화수까지 얻고 싶어서 무리를 하고 있지만 사실 그건 덤에 가깝지. 전국옥새를 이용해서 한번 시도만 해 보고, 무리다 싶으면 화요만 갖고 나오자고."
"윽... 하지만 흑요석을 이용하면."
"그 계획은 지금 써먹으려고 할만한 게 아냐. 네 녀석은 아직 선택할 준비도 되어있지 않잖냐."
제갈사가 한층 싸늘하게 말했다.
"화요를 한시라도 빨리 얻는게 중요해. 일단 용화수를 얻을 준비는 최대한 해뒀으니 나머지는 운에 맡기자고."
"그래야겠군."
확실히 그랬다. 흑요석을 이용하더라도 최소한 1년에서 3년은 걸릴 것이다. 그 시간에 화요를 먼저 얻어서 나머지 작업을 다 해놓는게 백 배 나았다. 나는 용화수를 기필코 얻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
나는 추가로 제갈사에게 물었다.
"제갈사. 공공에게 이 방법을 쓰는 건 어떨까?"
내가 공공을 상대할 전략을 말하자, 제갈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꾸했다.
"효과는 있겠지만 불가(不可)!"
"아니 왜?"
"그건 일회용인데 공공 따위를 상대하는데 쓰긴 아깝지. 어차피 화요를 얻을 확률이 높은데 뭐하러 그런 낭비를 해?"
"쩝."
제갈사가 기가 막히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네 녀석 머리 돌아가는게 예전보다는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 서투르고 대충 막 던지는 경향이 있군. 공부를 더 해야겠어."
"크윽... 웬만한 유생(儒生)만큼 공부를 많이 했다고 자부하는데 얼마나 더 해야한다는 거야?"
내 불평은 사실이었다. 초기에 망량과 더불어 삼 년을 지내면서 이미 온갖 도가서책과 기본경전을 꽤 읽었고, 이후의 전생에서도 무예를 수련하면서 틈틈히 공부를 하고 서책을 접했다. 나는 중원 전체로 봐도 먹물 깨나 먹은 유생과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글쎄다. 적어도 현 시점의 망량보다 책을 많이 읽어야 쓸만해지겠지."
제갈사의 대꾸에 나는 그가 내 말을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약간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정도면 어렵지 않..."
내 말을 끊으며 제갈사가 나를 조롱하듯 하나하나 뭔가를 읊기 시작했다.
"독파하기를 최소 이만 권. 모두 이해하고 주석을 달 수 있을 정도. 학파의 주장을 깨달아 역사의 흐름을 전개할 정도. 열왕의 기록과 고문의 해석에 박학다식. 황실의 예절을 두루 익혔으며 유학은 물론이고 사략과 정서, 병서, 산술, 약학, 기문둔갑에 두루 능통. 시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음. 참고로 여자도 잘 꼬시지."
"......"
"그게 바로 현 시점의 망량인데 말이다."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제갈사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역시 망량은 뛰어난 책사였다. 방금 제갈사가 읊은 내용 중 하나라도 이룬 서생이 그리 많지는 않을진대, 저 젊은 나이로 모든 지식과 지혜를 쌓다니! 술법재능이 없을 뿐 전 중원에서 손꼽히는 천재가 망량이라는 건 틀림없는 것이다.
"현이는 천재야. 제갈무후의 후예로서 부족함이 없지."
제갈사가 내게 충고했다.
"물론 임기응변이나 직감에 있어서는 네가 망량보다 나은 점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건 커다란 대국(大局)을 보는 능력과 비례한다고는 말할 수가 없어. 대국을 보기 위해서는 좁은 시야를 버려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는 게 많아야만 하지. 그래서 지혜있는 이들이 공부(工夫)를 해서 지식을 쌓는 거다."
"어..."
제갈사답지 않게 기묘한 현기가 감도는 말이었다. 내가 그 현기에 놀라서 제갈사를 쳐다보자 그가 킬킬 웃었다.
"왜? 말해두는데 나도 현이만큼은 공부를 했다. 그러니까 이런 평가를 할 수 있는 거지."
"아 그러시군요..."
"네녀석은 전생을 하면서 안그래도 머리터지게 배워야 할 게 많으니까 나나 현이의 공부수준을 따라오라는 소리는 하지 않아. 다만 너 스스로 지식과 지혜를 늘리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책사를 둬도 효율적으로 써먹지 못할 거다."
유념해둘 만한 이야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가 볼까."
제갈사는 잠시 후 안에 들어갔는데, 그 안에서는 뜻밖에도 제갈사가 아니라 초상기인이 걸어나왔다. 그 초상기인은 초기형이라서인지 흑발의 소녀 형태였는데, 제갈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육체를 움직이며 말했다.
"출발."
목소리도 제갈사의 광기가 스며들어있는 옥구슬 구르는 듯한 소녀의 목소리였다. 나는 황당해서 딴지를 걸었다.
"야 잠깐... 그건 뭐야?"
"뭐냐니. 이혼대법으로 조종하고 있잖냐. 이 초상기인 소체가 제일 완성도가 높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건 여자몸..."
내 말을 들은 제갈사는 눈을 꿈벅거리다가 미친듯이 웃었다.
"크하하하하!! 초상기인은 인간의 형태를 한 인형일 뿐이야. 인형을 조종하는 것 뿐인데 성별이 뭐가 중요하지?"
제갈사가 소녀의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이런 초상기인은 나처럼 이혼대법을 시전하는 자에게는 아주 대단한 보물이지. 인간소체와 달리 튼튼하고 강력해서 쉽게 부숴지지도 않고 이혼술로 무공과 술법을 강화시켜서 사용할 수도 있어."
"진심으로 그 초상기인의 육체로 따라올 생각이냐?"
"멍청아. 이 육체는 목숨을 잃을 염려가 없이 위험한 장소를 탐색하는데도 제격이다. 내가 뭐하러 죽을 위험이 있는데 그렇게 위험한 곳에 본체로 가냐고. "
"......"
제갈사가 내 이마를 검지손가락을 튕겨 때렸다.
"이혼대법을 빨리 대성해라. 그래야 돌연사할 확률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왠지 올바른 충고에 멋진 말이었는데도 귀여운 소녀의 몸으로 하고있으니 신뢰가 가지 않는다. 나는 문득 생각난게 있어서 제갈사에게 말을 걸었다.
"제갈사. 내가 가져온 초상기인의 소체 중에서 백발소년은 없었어. 안 그래?"
"그랬지."
"후기형인 것 같은데... 왜 백우선으로 봤던 미래에서는 하필 그 놈이 흉신의 대주교로 각성한 걸까? 초상기인은 나중에 꽤 많이 제작되니까 굳이 그 놈이 대주교일 이유가 없잖아."
"흐흐.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가설 정도는 세울 수 있겠지."
제갈사는 빙글 돌며 소녀의 머리통에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세워서 갖다댔다. 그리고는 갑자기 기(氣)를 불어넣어서 날카롭게 만들었고, 관자놀이에서 피가 주륵하고 흘러내렸다. 조금만 더 파고들면 손가락이 피부와 뼈를 뚫고 뇌수를 관통할 정도였다.
그 상태에서 제갈사는 광기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봤냐? 아무리 이혼대법으로 통제된다지만 이 소체에는 생존본능이나 이성이 아예 없어. 인간에게 이혼대법을 걸면 따르기는 해도 생존본능 때문에 사소한 불량이나 멈칫거림이 생기는것과는 다르지. 즉 이 초상기인에게는 백(魄)은 있어도 혼(魂)이 없는 거다. 처음부터 인형으로 만들어진 존재야."
"그건 알고 있어."
"하지만 네 기억을 보면 그 백발소년에게는 초상기인인데도 불구하고 자기자신의 의지가 있었다. 그건 백발소년 그 놈은 독특하게도 혼(魂)을 지니고 있는 초상기인이었다는 말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아주 큰 의미가 있다."
제갈사가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관자놀이에서 치우며 눈을 빛냈다.
"혼이 있는 초상기인. 그건 더 이상 인형이 아니야. 인간을 초월한 초인(超人), 아니 진화한 신인류(新人類)라고 봐도 된다고."
"......!!"
"그건 모든 인형술사와 사법사들의 최종목표이기도 하다."
그렇게 중얼거린 제갈사는 천천히 말했다.
"이혼대법을 공부하고 있어서 알겠지만, 백은 분리되거나 상처입어도 쉽게 재생성된다. 그러나 혼은 그렇지 않아. 아주 섬세하고 여린 성질을 갖고 있는데다가 쉽사리 복제할 수 없는 고유성을 갖고 있지. 그래서 내가 알기로 유사이래 그 어떤 인간술법사나 마도사도 인간의 혼을 창조하지는 못했다는 거다."
"혼을 창조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냐?"
"그래. 육체같은 건 팔괘의 비술과 연금술로 비교적 쉽게 만들어낼 수 있지. 백 또한 인공백을 생성하는게 충분히 가능해. 그러나 혼은 다르다. 혼은 절대 창조할 수 없어. 그건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 안돼."
나는 제갈사의 말을 얼추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백발소년 그 놈은 주작 제갈유룡의 최고 걸작이란 소리겠군."
"......"
"제갈사?"
"믿을 수 없어."
제갈사는 왠지 질투하듯 손가락을 세게 깨물었다.
"확신할 수 없어. 제갈유룡은 분명히 중원최고의 술법사 중 하나지만, 유사이래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혼의 창조를 해냈단 말인가? 했다면 대체 무엇때문에? 너무 미심쩍은 점이 많다."
혼잣말을 하던 제갈사가 내게 말했다.
"뭔가 엄청난 비밀이 있어. 다음에 제갈유룡을 만나면 바로 죽이지 말고 붙잡아서 고문하자."
"... 알았어."
아무리 그래도 친형 아닌가? 친형을 고문하자고 태연하게 말을 꺼내는 제갈사의 신경줄은 미쳤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나는 뭐라고 한 마디 하고싶었지만, 제갈사의 행동은 이성적으로 보면 하나하나 일리가 있었으므로 관뒀다.
"가자!"
파앗!
마침내 나는 화요의 도원에 도착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전국옥새의 전시안을 발동시켜서 도원 내에 있을 용화수의 씨앗을 찾으려 했다.
' 저긴가?'
역시 토둔으로 땅을 헤집는 걸로는 찾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놀랍게도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복숭아나무 중 하나의 줄기 한가운데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재빨리 다가가서 나무등걸을 잘라서 용화수의 씨앗을 목갑에 집어넣었다.
' 시간이 없어!'
그리고는 목갑에서 화룡신검을 꺼내며 즉시 여동빈을 불렀다.
여동빈은 내 몸에 오자마자 말했다.
[ 으음... 연자가 오제의 사도가 되었다는 소식은 전해들었다.]
[ 그런건 지금 신경쓰지 말고 이 화룡신검으로 화요의 화기를 흡수해 주십시오! 그래야 화룡진인이...]
잠깐 들고 있을 뿐인데 손이 화끈거린다! 혈맥이 통째로 불타버릴 것만 같았지만 전국옥새의 영력을 끌어올려서 간신히 손의 화상만으로 참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여동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습니다.]
우웅
여동빈이 완전히 내 몸을 장악하자 화룡신검의 거부반응이 크게 사라졌다. 잠시 안쓰러운 눈으로 화룡신검을 쳐다보던 여동빈이 이내 크게 일 참(一斬)을 휘둘러 화요 간장의 검신(劍身)을 때렸다!
까강
[ 으아아악. 지금 뭐 하는...]
나는 당황했다. 설마 여동빈은 화룡신검으로 칠요를 때려부술 생각이란 말인가? 그러나 여동빈은 가타부타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재차 일 참을 내려쳤다.
까앙
순간 간장에서 주욱하고 주황빛 기운이 화룡신검에 이끌려오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이글거리는 홍염(紅炎)이 내 몸을 가득 휩싸는 것 같았다. 그런데 화염에 휩싸였는데도 내 몸은 하나도 불타지 않았으며 되려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기운이 가라앉자, 여동빈은 말했다.
[ 화룡진인의 기운이 되살아났으니 곧 스승이 힘을 되찾으실 겁니다.]
나는 난데없는 여동빈의 존대에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 여동빈. 내가 사도라서 존대하는 겁니까?]
[ 그렇습니다.]
[ 그러지 마십시오. 어색하니까.]
[ ......]
여동빈은 대답하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나는 지금까지 친했던 상대와 웬지 소원해진 기분이 들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화요를 얻었다."
나는 화요 간장을 손에 들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얼마나 고생을 해서 이 칠요를 얻게 된 것인지 감격의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그 때 옆에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제갈사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뭔가 좀 이상한데?"
"뭐가? 칠요의 주인이 됐잖아."
"공공이 아예 안 나타나는게 이상하다고. 칠요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나타나야 정상인데."
"그러게."
"백웅. 한 번 도원을 나가 보자."
나는 제갈사의 말대로 함께 도원을 걸어나갔다. 그러자 저만치의 제단에서 희끄무레한 환영같은게 나타나더니, 이내 공공의 모습으로 현신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긴장하며 비등을 쓸 틈을 찾았다.
' 도망칠 수 있어!'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공공은 예전과 달리 자신의 대검을 꺼내들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저 물끄러미 멍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화요의 수호자 공공의 이상한 점을 깨닫고는 말을 걸었다.
"화요의 수호자 공공이여! 나 백웅은 화요 간장을 가져가겠소!"
[ ... 그러시든가.]
"엥?!"
이건 또 무슨 대답이란 말인가?
내가 당황하자 공공은 제단 위에 커다란 몸을 뉘이며 대꾸했다.
[ 백웅이여. 삼황오제 전욱의 사도로서 모든 허락을 얻어놓고 왜 나같은 문지기에게 일일이 묻는 것이오?]
"아니 그게..."
공공이 졌다는 듯 자신의 두 팔을 번쩍 들었다.
[ 알았소. 화요 가져가시오. 난 아까부터 당신이 언제 나가나 기다리고 있었소.]
"......"
[ 얼른. 간만에 쉬고싶소...]
나는 황당해서 제갈사를 쳐다보았다. 제갈사는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말했다.
"나 먼저 간다. 이거 초상기인 갖고 와라."
다음 순간 이혼대법이 풀렸고 초상기인 소녀는 힘없이 추욱 늘어졌다. 나는 초상기인을 수습해서 목갑에 넣을 생각도 못한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렇다.
이렇게 개고생하며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봉선의식때 전욱의 사도가 되면서 화요는 이미 내 것이 되어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