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54 암천향(暗天鄕) =========================================================================
나는 제갈사와 함께 축융족을 찾아서 나서기 전, 일단 내가 갖고있는 걸 점검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화요의 결계가 해제된 이상 당장이라도 화요를 갖고나올 수 있는데다 외딴 남쪽대륙까지 가서 먼저 화요를 갖고나올만한 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물들을 하나하나 뒤적거리며 꺼내자 제갈사는 유심히 살펴보다가 말했다.
"백웅. 네 녀석이라면 몰라도 내가 쓸만한 게 없군."
나는 황당해서 대꾸했다.
"뭐? 이게 네 보물이냐? 갑자기 무슨 말이야."
제갈사가 혀를 끌끌 찼다.
"축융족의 능력을 잊었나? 그들은 [위대한 종족]이라서 그 어떤 지성체보다 강력한 정신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심지어 전음까지 읽을 수 있는 족속이지."
"아."
"네 녀석은 왜인지 모르지만 정신방어력이 높아서 잘 안읽히는것 같지만 나같은 인간마도사는 다르다. 그들 앞에 서 있으면 모든 생각이 읽힐 것이고 그들이 원하면 정신제압을 당하고 말 거다."
제갈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실제로 내가 축융족에게 동방무결을 포함한 세 명의 초절정고수를 제압해달라고 의뢰했을 때, 축융족들은 아주 간단하게 그들을 혼절시켜버렸다. 초절정고수가 지니고 있는 정신력만으로는 그들의 지배력을 버티지 못한다는 증거였다. 또한 제갈사가 뛰어난 마도사인데도 그들의 정신공격에 저항하는 걸 자신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제갈사가 내 보물을 하나하나 만져보다가 말했다.
"이 보물들은 다 뛰어나지만 정신방어력을 올려주는 게 없어. 그럼 내가 따라가도 짐이 될 가능성이 높겠군. 교섭하기도 전에 의도를 다 읽힐 테니."
나는 제갈사의 말에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제갈사. 너는 축융족의 왕인 선지자 앞에 갔을때도 별다른 반응없지 않았나?"
"그 존재는 [옛 지배자]와도 직접 거래를 틀 정도로 고등한 존재인 이스의 마도왕(魔道王)이다. 저항하든 안하든 마찬가지라면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 뿐이지."
"......"
새삼 선지자가 얼마나 신화적 존재인지를 깨달은 듯 하다. 제갈사는 준엄하게 내게 충고했다.
"백웅. 앞으로 전생하면서 정신방어력을 올려주는 마도구나 보패를 꼭 찾아봐라. 안 그러면 네 동료가 고위급 이족 앞에 섰을 때는 없느니만 못하게 될 거다. 왜냐하면 정신제압능력을 가진 건 [위대한 종족] 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으음..."
"생각해봐라. 네 무림인 동료가 정신제압 당해서 너를 배신하는 경우를."
제갈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진소청이나 검마, 무영검제 등에게 기연을 줘서 기껏 강화시켰는데 정신제압능력때문에 적이 되어서 내게 칼을 휘두르는 상황! 이족의 정신제압력은 무림인의 정신력과는 별개로 작용하는 것 같았기에 아주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내가 심각한 표정이 되자 제갈사가 킬킬 웃었다.
"뭐... [위대한 종족]이 특별히 정신능력이 강력한 종족이긴 하지. 그정도 능력을 가진 종족은 극히 드무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라."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기억이 다 읽힐 수도 있으니 따라가지 않겠다는 거냐?"
"설마. 네 녀석이 또 호갱처럼 당하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그 놈들이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모르는거냐?"
"......"
"방법이 있으니까 기왕 이렇게 된거 잠깐 현이를 찾아가자. 그 동안의 얘기도 해 줄겸."
나는 이윽고 제갈사와 함께 진랑곡으로 향했다. 망량이 삼황내문과 도력을 얻은 후 우선 진랑곡에서 자기자신을 연마하겠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등용문을 오르려고 떠난 게 아니라면 진랑곡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진랑곡에 있는 망량의 처소 앞에 도착하자, 나는 오두막집 너머의 대나무숲 근처에서 거대한 영기가 뻗어나오는 걸 발견했다.
구우우우...
"으음!"
나는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영기를 보자 침음성을 흘렸다. 영기란 건 무림인들이 수양하는 순수한 기력과는 좀 다른 것이었는데, 주술사가 지닌 술력이 정신력과 상승효과를 일으키며 뿜어져 나오는 현상이었다. 영기 또한 보통의 기와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을 강화하는데 쓰이곤 했다.
하지만 영기라는 건 선천적으로 재능이 있는 자나 술법을 공부한 자가 아니면 보기가 힘든 것이었다. 그런 영기가 육안으로 보일 정도라면 굉장히 강력한 영력을 의미했다. 나는 대나무숲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우우우우
그 곳에는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삼황내문을 허공에 띄운 채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고 있는 망량이 보였다. 놀랍게도 망량의 몸에서는 은빛과 황색의 불꽃이 넘실대며 나선형으로 교차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신에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주문을 외우던 망량은 이윽고 기세를 서서히 낮추었다.
그리고 망량은 반개한 눈을 떠서 우리 쪽을 바라보더니 반가워했다.
"왔구려!"
"수련하는 중이었는데 미안하오."
"아니오. 어차피 이건 기초단련이니까."
그 엄청난 영기를 내뿜은 게 고작해야 기초단련이라고?!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던 제갈사가 말했다.
"삼황내문의 힘을 꽤 흡수한 모양이군."
"아직 멀었죠."
"그건 그렇고 할 말이 있으니 잠시 따라와라."
망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들을 보자 왠지 모를 감흥에 휩싸였다. 제갈사에 관련된 일이면 노골적으로 불쾌해하고 혐오하던 망량이 그럭저럭 제갈사를 대우해 주는 건 예전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잠시 후 나는 흑요석 조각을 떼어서 거기에 지금까지의 기억을 불어넣어 망량에게 건네주었다. 망량은 흑요석의 기억을 받아들여 읽더니 말했다.
"왜 왔는지 알겠군. 이걸 가져가시오."
망량이 자신의 품 속에서 순어구를 꺼내서 내게 주었다.
"고맙소."
"고맙긴. 원래 당신 거잖소."
나는 순어구를 받아들어서 한 쪽을 제갈사에게 주었다. 이로써 준비가 갖춰진 것이다. 원래라면 망량에게 줘서 다른 계획을 실행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당장 축융족의 정보를 알아내는 일이 급하니 잠시 빌리는 것이었다.
나는 망량에게 호기심이 생겨서 물었다.
"망량. 수련은 좀 어떻소? 등용문이란 걸 뚫을 수 있겠소?"
"하핫. 우리가 헤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건방지게 등용문을 논할 수 있겠소. 평생을 수련한 도사나 도인들이 탈각해서 지선이 되고, 그 지선중에서도 뛰어난 자가 등용문을 통과하는 것이거늘."
탁자 옆에 서서 팔짱을 끼며 듣고 있던 제갈사가 킬킬 웃었다.
"흐흐. 현이 네가 정말 기만질의 대가로구나. 절세기연을 얻어서 자신감 넘치는게 눈에 보이는데."
그러자 망량은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 뭐 그렇다 해도 최소한 3년은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큭큭큭."
제갈사는 뭐가 즐거운지 계속 웃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백웅. 나중에 양자택일을 해야하겠군."
나는 제갈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하게 선택할거야. 아니면 또 하나 캐도 되고."
"또 하나 캘 거면 미리 작업을 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 그 여우를 꼬드겨 봐라."
"......"
앞에 앉아있던 망량은 마치 암호같은 이야기를 다 알아들은 표정이었다.
"음... 너무 고민하지 마시오. 어차피 화요를 얻고나서야 뭔가를 시작할 수 있지 않겠소? 다른 부차적인 일은 나중에 고민해도 되는거요, 백웅."
"망량, 고맙소."
"나는 계속 여기서 수련을 하고 있겠으니 나중에 순어구를 다시 주러 오시오."
나는 망량과 곧 헤어져서 제갈사를 장령곡에 데려다 주었다.
제갈사가 내게 이혼대법을 시전하며 말했다.
"쇠뿔도 단김에. 지금 바로 갔다와라."
나는 이혼대법에 걸려서 찝찝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제갈사가 배신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설령 이혼대법이 강하게 펼쳐져도 저항할 자신이 있었다.
"알았어."
파앗!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비등을 써서 무창의 탑으로 갔다. 원래 내가 축융족을 만났던 장소는 남쪽 아유타야 왕국이었으나, 지금 동방무결 일행이 도착했다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축융족이 거기에 와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륙간 전이를 가능하게 하는 무창의 탑에 가서 관리자 역할을 하고 있는 축융족과 대면하는 것이었다.
휘이이잉
무창의 탑 앞에 도착하자 황량한 바람이 불었다. 거인의 유적이 주변에 있었고 눈 앞에는 새까맣고 구멍 뚫린 돌로 이루어진 무창의 탑이 있었다. 내가 무창의 탑 앞에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자, 근처의 유적에서 한 명의 적의인(赤衣人)이 걸어나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
"인간이여. 그대는 마도구를 써서 여기에 왔군. 마도사인가?"
나는 그에게 포권을 하며 대꾸했다.
"축융족이여. 나는 백웅이라고 합니다. 다름아니라 당신들과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스슥
스스슥
그러자 거인의 유적 여기저기에서 적의인들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기색이 느껴졌다. 저들 모두가 축융족일 것이다. 나는 적지 않은 압박감을 느꼈지만 우선 눈 앞의 적의인의 반응부터 기다렸다. 적의인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상한 인간이군. 무슨 거래를 하러 왔지?"
됐다!
저 말은 간단해 보였지만 많은 뜻이 숨겨져 있었다. 인간의 정신따위는 손바닥 뒤집듯이 읽을 수 있는 축융족이라면 내게 거래내용을 물어볼 이유가 없었다. 단지 기만일 수도 있지만 나는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역시 축융족이라고 해도 내 정신을 읽거나 제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대답했다.
"나는 화요 근처에 숨겨져 있다는 용화수의 공능과 그 정확한 위치, 모양을 알고 싶습니다. 하는 김에 화요의 수호자 공공의 약점에 대해서도."
"그걸 우리가 왜 알려줘야 하지?"
"그건..."
말문이 조금 막힐 때였다. 품속에 넣어둔 순어구를 통해서 내 머리에 제갈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 올게 왔군. 내가 시키는대로 말해.]
[ 알았어.]
이게 바로 우리의 작전이었다.
이혼대법을 이용해서 시각과 청각을 공유하면서, 순어구로 먼 거리에서 의사를 교환하는 것! 이렇게 하면 제갈사가 직접 찾아와서 정신을 읽힐 염려가 없이 축융족과 교섭하는 게 가능했다. 나는 제갈사가 시키는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오제 전욱의 사도로서 화요의 소유와 해방을 허락받았기 때문입니다. 결계도 다 해제되었으니 화요는 지금 당장이라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웅성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축융족이 놀라는 기색이었다. 뜻밖의 일이었는지 내 앞에 서 있던 축융족도 다소 당황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정말인가...?"
"그대들의 왕을 통해 알아보면 될텐데요."
"......"
축융족은 나를 껄끄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뭔가 정신으로 교신을 하는 듯 했다. 잠시 후 축융족이 말했다.
"전욱의 사도 백웅이여. 상황은 알겠지만 그래서 우리에게 어쩌라는 것이오? 아무리 삼황오제의 사도라고 해도 우리가 공짜로 정보를 줄 이유는 없소."
말투가 명백히 바뀌었다. 삼황오제의 사도라는 신분은 콧대높은 위대한 종족이라고 해도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마주 말투를 바꾸었다.
"공짜로 받을 생각은 없소. 충분한 보상을 드리지. 지금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어떤 보상을 말하는 거요?"
나는 제갈사의 말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나를 도와서 정보를 준다면, 앞으로 삼황오제 전욱의 사도로서 최대한 축융족에 성의껏 도움을 드리겠소. 사도라는 위치가 어떤 것인지는 당신들이 더 잘 알텐데."
"......"
곳곳에 있던 축융족들이 동요하는 게 느껴졌다. 축융족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더니 이윽고 내 말에 대답했다.
"기다리시오. 이 일은 너무 큰 사안이라서 우리의 왕께 보고를 드려야겠소."
그래봤자 선지자 아니냐?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맘대로 하시오. 하지만 만일 좋지못한 대답이 나온다면 나로서도 포기하는 수밖에..."
위잉 -
잠시 후 눈 앞의 축융족의 머리 위에 웬 은테가 떠오르더니 눈알에서 은광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정신능력을 극대화시켜서 축융족의 왕, 선지자와 대화를 하는 듯 싶었다. 한참동안 '대화'를 하던 축융족이 말했다.
"좋소.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좋군."
"당신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겠소."
나는 씨익 웃었다.
' 보물을 아꼈군.'
계책이란 바로 사도의 이름을 팔아서 축융족과 교섭하는 것! 사도가 축융족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는 대신에 정보를 제공받겠다고 하면 직접 보물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일개 인간으로 오만한 축융족과 아귀다툼을 하면서 보물을 얼마나 뜯길지 고민하는 것보다는 이 쪽이 훨씬 나았다. 또한 창힐의 행적을 찾을 때 축융족과 쓸데없이 여러 번 교섭할 필요를 줄이게 된다. 물론 축융족이 실제로 내게 부탁을 하면 곤란해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대가를 내놓는 시점이 바뀌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보물들을 사도의 이름값으로 아낀 건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