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50 암천향(暗天鄕) =========================================================================
동녕부 안으로 걸어들어가자 갑자기 폐건물의 여기저기에서 유령들이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예전에 미호가 동녕부 건물을 지배하고 있을 때는 못 보던 현상이라 힐끔 그들을 살피자, 천우진이 말했다.
"악령이 우리에게 반응해서 깨어나기 시작했소. 그래서 약한 부유령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구려."
"묘청이 어디쯤 있겠소?"
"잘 모르겠군. 자신의 기운을 철저히 은닉하고 있어서 조요경같은게 없으면 쉽게 위치를 알 수 없소."
"조요경?"
"요마의 본질을 비춰 약화시킬 수 있고 어디에 있든 알아낼 수 있는 보패요."
꽤 유용할 것 같은 보패다. 나는 조요경에 호기심이 생겨서 물었다.
"조요경은 어디서 얻을 수 있소?"
"글쎄? 이야기로만 전해올 뿐 그게 어딨는지는 잘 모르오."
"흐음..."
"당신은 어찌된 일인지 전설의 보물과 보패를 잔뜩 들고 있지만, 원래 보패라는 건 보통 인간이 죽을 때까지 모험하며 찾아내려 해도 한 개 찾아낼까말까한 전설의 기물이오."
나는 천우진의 말에 그의 허리춤에 걸려있는 산하사직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는 당신도 보패를 갖고있잖소."
천우진은 내가 바로 산하사직도를 알아본 사실에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스승님께 받은 거요."
"망량선사가 줬다고?"
"내가 한 사람 몫을 하게 된 기념으로 주신 거요. 더 묻지 마시오."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하고는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러더니 1층의 입구에 멈춰서서는 양손을 뻗으며 크게 외쳤다.
"급급여율령!"
콰르릉
다음 순간 거대한 뇌전과 화염이 천공에서 떨어지더니 지상에 불기둥을 만들어 내었다. 동녕부의 폐건물을 삽시간에 전소시킬 정도로 강대한 술법인지라 나도 모르게 뒤로 약간 물러설 정도였다.
' 오행술(五行術)?'
역시나 인계 최강의 술사답게 오행술의 위력이 장난아니었다. 단숨에 세 쪽 나서 폭삭 주저앉는 동녕부 건물에서 자욱한 연기가 흘러나왔고, 나는 그 모습에서 천우진이 직접 진입하기보다는 요마의 둥지부터 박살내는 방법을 선택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쿠구구구...
자욱한 연기 속을 쳐다보던 천우진이 말했다.
"지하에 있군."
"입구가 따로 있단 말이오?"
"잘 모르겠소. 묘한 위화감이 느껴지는데."
천우진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내게 말했다.
"백웅. 당신 무공실력이 어느정도 되오?"
"갑자기 그건 왜 묻소?"
"이제부터 내가 묘청이라는 악령의 본거지를 찾아서 들어갈건데 굉장히 흉험한 장소일거같아서 당신의 실력이 받쳐줘야하오."
"방금 했던 것처럼 오행술로 부수면 되잖소."
내가 대꾸하자 천우진이 역정을 냈다.
"그게 안될것 같으니까 이러지! 묘청이라는 놈이 아무래도 고유한 이계(異界)를 만들어서 몸을 숨긴 것 같으니 직접 문을 찾아서 본인을 해치우는 수밖에 없소."
"악령이 그런 것도 할 수 있소?"
"빌어먹을. 내가 먼저 질문했으니 대답부터 하시오."
천우진이 나를 노려보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글쎄... 백련교나 십이율을 제외하면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어갈 거요."
"무림인들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무공 깨나 한다는 소리겠지."
"뭐 그렇겠지."
크르르르
크르르
"그럼 저 놈들 좀 상대하면서 전진하시오. 나는 술력을 아껴야 해서."
천우진이 바라보는 폐허의 너머에는 흉측한 형상의 요괴들이 소환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이족이라고 하기엔 덜 흉측했으나 아무리 봐도 인간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악령 묘청이 깨어나면서 위협을 느끼고 요괴들을 소환한 걸로 보였다.
부웅
전면에 있던 거대한 소머리 요괴가 내게 대부(大斧)를 휘둘러 왔다. 일격에 땅이 패이고 토사가 일어날 정도로 강력한 베기였으나, 나는 이미 소머리 요괴의 옆으로 돌아가서 놈의 허리에 양 손의 장심을 대고 있었다.
뇌신권(雷神拳)
번확쌍장(飜擴雙掌)
꽈광!
[ 크오오오 ]
소머리 요괴는 전신이 터져나가며 처참하게 쓰러졌다. 그냥 뇌령인으로 때려도 죽었겠지만 뇌신권의 파생절초를 써보고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장을 요동치게 만들어서 즉사시키는 내가중수법 오의 중 하나였다. 나는 소머리 요괴를 쓰러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 스무 마리 정도인가?'
하나하나가 덩치크고 강력한 요괴들이었다. 보통의 퇴마사라면 이 정도 규모의 요괴들이 소환된다면 악전고투할게 분명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이 놈들을 상대하는데 전혀 부담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왜냐하면 아오키가하라 수해에서 이보다 더한 마물들과 생사를 건 싸움을 거듭한 적이 있었고, 절세고수들의 절초에 비교하면 하찮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쿠꽈광
나는 연신 멸혼보와 분영을 섞어쓰며 뇌령인과 검강으로 천우진 근처에 다가오는 놈들을 물리쳤다. 열 마리 정도를 처치하자 요괴들이 잠시 주춤거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천우진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반로환동의 고수라는 건 꽤 강하군."
"아직 멀었소?"
"저 놈들을 일단 마무리해 보시오. 집중이 안 되니까."
나는 천우진의 주문대로 모든 무공을 동원해서 나머지 요괴들을 처치했다. 시간은 딱 반 식경 정도가 걸렸고, 장내는 요괴들의 피륙이 처참하게 흩어져서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천우진은 주문을 웅얼웅얼 외우더니 앞으로 손을 내뻗었다.
"급급여율령!"
쿠오오
그러자 갑자기 폐허 속 어딘가에서 어두운 영기가 뿜어져 나왔다. 천우진은 그 영기 앞으로 다가가더니 사각형 모양의 입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잠시 후 천우진의 술법에 반응했는지 입구가 쑥하고 열리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약간 놀라서 말했다.
"지하입구?"
"그런 것 같군. 긴가민가했는데 아주 고도의 술법으로 숨겨져 있었소. 평상시에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들어갈 수 없게 감춰져 있었겠군."
"흠..."
나는 천우진의 말을 들으면서 과거 미호가 묘청을 흡수하러 왔는데도 곧장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이유를 유추할 수 있었다. 우선 강한 충격이 쏟아지면 묘청이 깨어나면서 요괴떼거리가 소환되는데다가, 입구도 술수로 감춰져 있었다. 미호는 섣불리 이렇게 강력한 주술방어를 뚫으려 하다가는 자신의 힘이 쇠할 것을 염려해서 우선 동녕부를 점거한 후 진지부터 구축했던 것이리라.
저벅...
지하입구로 들어가서 어두운 층계참을 내려가자 나는 서서히 빙빙 꼬이는 행로가 이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이 층계참의 형태도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선..."
이 곳도 이족의 유적이란 말인가? 천우진이 내 중얼거림에 힐끔 내 쪽을 보았지만 별일 아니라 생각한 듯 다시 앞으로 향하는데 집중했다.
한참이나 층계참을 내려가다 보니 시꺼먼 덩어리 같은게 전방에 보였다. 천우진이 그걸 보자마자 내게 경고했다.
"저 놈이 우리에게 환혹을 거는군! 정신을 집중하시오."
환혹?
나는 그 말에 정신을 바짝 차렸지만 뜻밖에도 정신공격 같은건 느껴지지 않았다.
' 뭐야?'
옆을 쳐다보니 천우진은 정신을 집중해서 환술에 저항하는 게 눈에 보였다. 눈 앞의 마물이 내게 정신공격을 하는 걸 깜박했나 싶어서 나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보았지만 역시 환술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물의 일 장 앞에까지 다가오자, 나는 그 시꺼먼 덩어리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가 있었다.
시꺼먼 덩어리라고 생각한 것은 고농도로 압축되어 있는 마력이 시각적으로 흑암에 물들어 있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농도의 마력 내부에는 승려의 옷을 걸치고 있는 해골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해골과 눈이 마주쳤다는 걸 알아챘다. 해골은 따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게 말했다.
[ 넌... 왜 환술이... 안 통하지...]
"......"
[ 나가라... 이곳은... 내가 거하는 곳...]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승려해골에게 질문했다.
"네가 묘청이냐?"
[ 나가라... 어서 나가라...]
아마 십중팔구는 묘청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승려해골은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듯 나가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눈 앞의 적을 쓰러뜨리기로 마음먹고는 검강을 끌어내어서 의념을 실은 참격을 승려해골에게 날렸다.
스칵!
[ 크아아악...]
승려해골은 정확하게 사선으로 반토막나서 와르르 무너졌다. 그와 동시에 해골을 뒤덮고 있던 농후한 마력도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듯 했다. 뒤늦게 뒤에서 걸어오던 천우진이 황당한 듯 말했다.
"당신 대체 뭐요? 아무런 영향을 안받았소?"
"잘 모르겠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소."
"......."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던 천우진이 승려해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잘 했소. 일격에 없애버리면 되겠군."
천우진이 수인을 맺은 채 승려해골을 향해 손을 뻗자, 바닥에 쓰러져서 해골을 딱딱거리고 있던 승려해골이 다급하게 외쳤다.
[ 크아아아... 그만둬라... 날 죽이고도 모자라... 내가 있을 곳을 뺏으려 하느냐...]
"너같은 악령이 터를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고한 백성들이 음기(陰氣)에 피해를 본다. 부디 성불해라."
[ 크흐흐... 그런게 어딨나...]
승려해골이 뼈를 달각거리며 격렬하게 말했다.
[ 나 묘청... 탄압받던 서경을 위하여... 모든 심모를 다했으나... 결국 어리석은 자들이 겁을 먹어... 거사를 실패했다... 그러나 그들 누구도 모를 것이리라... 바로 이 곳에 신(神)께서 거하고 계시니... 모두가 후회하게 될 것이다!]
"유언은 끝났냐? 급급..."
"천우진. 잠시 기다려 보시오."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당장 급급여율령을 외치려는 천우진을 제지시킨 후 묘청이라고 자처한 악령에게 질문했다.
"신이라고? 어떤 신을 말하는 거지?"
묘청은 내가 겁먹었다 생각했는지 음충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 위대하신 존재... 상고시대 이후 봉인되었으나 누구도 그 흔적을 찾지 못했던 존재... 달의 지배자이시자... 위대한 일족을 이끌고 동영의 창세신으로 군림했던 분께서 이 도시에 거하신다... 그 분은 언제고 부활하신다...]
"......!!"
[ 흐흐흐... 나를 죽여봤자 너희는 이진아시(伊珍阿?)님의 부활을 막을 수 없다!]
콰르르릉
다음 순간, 천장이 무너지고 전후좌우에서 기괴한 마물의 촉수같은게 흘러나왔다. 천지사방에 촉수로 들어차는 듯 했다. 천우진은 끔찍한 광경에 소름이 돋는 표정을 짓다가 크게 노갈했다.
"급급여율령!"
천우진의 술법이 터져나오면서 사방천지에 주언의 영력이 날아갔다. 당장이라도 우리를 집어삼킬 것처럼 뻗어나오던 수십 장 크기의 촉수들이 터져나가며 괴이한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울렸다. 천우진이 다급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재빨리 반응해서 전방에 있던 묘청을 향해 의념절기를 시전했다.
콰과광
[ 크아아악...]
묘청은 이번에야말로 소멸한 듯 처참한 비명소리와 함께 소환되어 있던 촉수들에게 먹혀서 사라졌다. 술법으로 결계를 펼치고 있던 천우진이 외쳤다.
"빨리 나갑시다!"
나는 재빨리 천우진의 옷자락을 잡고 비등을 쓰려 했으나 비등이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들어온 곳으로 나가면 되나?"
"그럽시다."
파밧
나는 멸혼보를 시전하며 천우진의 몸을 옆구리에 끼고 입구로 날아갔다. 그리고 서서히 닫히려 하는 입구를 빠르게 통과해서 겨우 바깥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천우진은 지상으로 나오자 한숨을 쉬었다.
"제기랄... 그냥 없애자니까 왜 말을 안 듣소? 놈이 마지막 힘을 다해서 마력을 끌어모아 촉수를 불러내려는 중이었잖소."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음 미안하오. 놈이 중요한 정보를 말할 것 같았소."
"저 곳은 원래부터 [옛 지배자]의 영역에 속한 이계였던 모양이오. 묘청인지 뭔지가 마지막 발악으로 저곳에 자신의 은거지를 만들고 수백 년간 잠들어 있었나 보군."
"... 무엇 때문에?"
"내가 아오? 하여간 쓸데없이 동쪽나라까지 와서 대악령을 퇴치하다니 제기랄!"
천우진이 역정을 냈지만 나는 그의 신경질에 일일이 반응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 이진아시.'
묘청이 언급한 '서경에 잠든 신'!
나는 과거에 그 이진아시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 그곳에 간다면 자네가 찾는다는 칠요의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 그곳은 타카마가하라(高天原)라고 불리며 자네들이 생각하는 신계(神界)같은 곳일세. 그러나 내가 생각해보니, 바로 그곳이야말로 이족의 근거지일 듯하더군.]
[ 천황에게만 비전(秘傳)되기를, 타카마가하라는 신(神)이 찾아온 대지가 아니라 불길한 존재가 봉인되어 있는 장소이며 통로일세. 그곳에서 도래한 자들이 강력한 힘을 지니고 이 동영땅에서 신으로 군림한 곳이지. 나는 바로 그곳이 이족이라는 존재들이 거처하는 장소일 거라 생각하네.]
[ 고려(高麗)의 거창(居昌)이라는 지역에 타카마가하라의 통로가 있다고 알고 있네. 거기에 가면 뭔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일세.]
이건 미호에게 홀린 척 하며 살아가고 있는 동영국의 천황이라는 자가 내게 알려준 정보였다. 나는 그 때 진소청과 함께 거창으로 가서 타카마가하라라는 곳이 있는지를 탐색했고, 찾아보던 중에 거창 고원에 있던 이공간을 뚫고 내부의 이계로 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계가 사실은 암천향과 연결된 통로라는 걸 알아챘었고, 그와 동시에 내부에서 하나의 비석을 발견한 일이 있었다.
[제왕이진아시지령(帝王伊珍阿?之領)]
그 때의 추측으로는 이진아시(伊珍阿?)라는 자가 바로 최초의 군주이자 동영의 신이 된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번에 뜻밖에도 다시금 묘청의 입에서 이신아시라는 이름이 언급된 것이다.
' 그렇다면...'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생각해내자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나는 급히 천우진에게 물었다.
"천우진. 방금 그 놈이 이 곳에 신이 잠들어있다고 했잖소. 이 서경이란 도시에 그런 강력한 존재가 느껴지오?"
천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최소 마왕급 아니겠소? 그렇게 강력한 존재가 있었다면 내가 진작에 알았을 거요. 그런 건 없소."
"하지만 그 이계의 내부였다면..."
"... 있을 수도 있겠지."
천우진은 내가 말하려는 바를 알아챘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이 서경이라는 땅에 바로 동영의 창세신이자 마왕으로 군림했던 존재가 잠들어 있고, 그 입구는 묘청이 숨어있는 이계에 존재하는 것이다! 묘청은 이진아시의 힘을 빌리기 위해 서경으로 천도했으리라.
뜻밖에 강력한 마신(魔神)인 이진아시의 소재를 알게 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