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9 암천향(暗天鄕) =========================================================================
흑요석을 캐낸 나는 그걸 우선 목갑에 집어넣었다. 광산의 일꾼들은 난데없이 허공에서 거대흑요석이 떨어진데다 안에서 나와 천우진이 걸어나오자 기겁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들이 놀라든말든 다시 비등을 써서 화요의 결계 앞으로 갔다.
"호오..."
천우진이 놀라는 기색으로 화요의 결계를 훑어보았다.
"이게 바로 화요의 결계요. 여긴 중원에서 수천 리 떨어진 남쪽의 대륙이고."
일부러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는, 어차피 태산일대를 미후왕이 쓰러뜨릴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다가 천우진에게 봉선의식을 해야하는 이유를 납득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화요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면 천우진이 좀 더 성실하게 일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우진은 결계를 살피다가 말했다.
"이 결계는 굉장하군. 칠요를 수호하는 결계라는게 사실인가..."
"천우진. 궁금한게 있소만."
천우진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에게 질문했다.
"당신은 이미 천계에 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술수를 익혔다고 들었소. 그럼 당신은 등선(登仙)할 필요가 없을터인데 앞으로 삶의 목표가 무엇이오?"
그러자 천우진은 인상을 찡그렸다.
"뭐? 그런 걸 왜 물어보시오?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였소?"
나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이번에 치르는 봉선의식은 내 일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식이오. 그 의식을 주관해주는 당신에 대해서 알아보고싶은게 인지상정 아니겠소? 내가 여태 당신에게 의뢰하는 대가로 준 물건이 꽤 되는데 이 정도 질문도 할 수 없는지 궁금하군."
나는 천우진에 대해서 아직까지 신뢰할 수 없기에 그와 흑요석을 공유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를 동료로 할 여지를 만들려면 우선 그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
"그렇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인가."
내가 압박하자 천우진은 여태 받아먹은 걸 떠올렸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 정도의 염치는 있었는지 그는 이내 퉁명스럽게 말했다.
"... 말해줄 순 있는데 그 전에 당신의 목표부터 말해보시오. 당신같은 기인(奇人)이 뭔 생각을 하는지부터 알고싶군."
"내 목표는 칠요를 모으는 것이오."
"칠요를 모으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오?"
"칠요가 있으면 신의 힘을 얻을 수 있소. 그 힘으로 [옛 지배자]와 맞서싸울 생각이오.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인간세상에서 몰아내고 싶소."
"......"
내 대답을 들은 천우진은 아연실색했다. 잠시 입을 뻐끔거리던 그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미... 미쳤군. 진심이오?"
"그렇소만."
"하하... 무슨... 차라리 황제가 되겠다느니 천하를 지배하겠다느니 하는게 현실적이지..."
천우진은 헛웃음을 짓다가 말했다.
"당신은 미친 것 같지만 일단 약속대로 내 목표를 말해 주지. 내 삶의 목표는 스승님같은 경지에 이르는 것이오."
"스승님이라면 망량선사 말이오?"
"그렇소."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반문했다.
"그는 신(神)이잖소. 그 말은 당신도 신이 되겠다는 말이오?"
"흐음... 신이 되려는 건 맞소. 하지만 조금 생략된 거 같아서 보충하겠소."
천우진이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에 앞서서 나는 스승님의 정체를 알아내고싶소. 신이 되는 건 그걸 위한 수단에 불과하오."
"정체...?"
"스승님께서는 한때 나와 사형께 말씀하신 적이 있소. 자신은 기억상실에 걸려 있다고."
"......!!"
기억상실?!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예상치도 못한 말에 눈을 부릅떴다. 그냥 천우진의 생각과 포부 정도만 알아보려고 했는데 뜻밖의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내가 천우진을 응시하자 그는 눈 앞에 펼쳐진 화요의 결계에 손을 뻗어서 살피며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자신의 기원(起源)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셨소. 그 분이 갖고계신 최초의 기억은 옥황상제와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었다 하오. 그러나 옥황상제조차도 스승님의 정체는 커녕 어디에서 왔는가, 어떤 존재인가 알지 못했소. 대신 옥황상제는 스승님을 설득해서 도교의 수호자 직위를 주었고 그 이후로 쭉 지상에서 지내고 계신 것이오."
"......"
"삼청(三淸) 모두가 스승님을 불가해(不可解)의 존재로 단정지었소. 상고시대때부터 이어져왔던 모든 천계의 지식이나 상식이 통하지 않았기에 정의할 수 없었던 것이오. 모든 대라신선이 그분의 이름을 알아내는데 실패했소. 아마 천계의 그 누구도 스승님이 어떤 존재인지 모를거라 생각하오."
"으음..."
"내가 충분한 자격이 있는데도 등선하지 않는 까닭은 거기에 있소. 가봤자 못알아낼게 뻔한 데다가 해야할 일만 늘어나고 자유가 사라지니까."
엄청난 일이다.
옥황상제나 삼청조차도 그 존재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망량선사라니?
나는 엄청난 사실에 놀라서 몸을 부르르 떨다가 번뜩 떠오른게 있어서 말했다.
"하지만 망량선사는 지금 망량선사로 불리고 있소. 그럼 이름이 존재하는 게 아니오?"
천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이름 망량(??)은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임시로 붙인 것이었소. 경계의 제망량이라는 명호가 붙은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으나, 천계 최고의 권능을 보유한 옥황상제가 그분에게서 직감한 것일지도 모르오. 그렇기에 그런건 별명일 뿐 이름이라 할 수 없는 거요."
"으음..."
나는 곰곰히 생각했다.
' 망량은 왜 내게 이런 얘기를 안 해줬을까?'
나는 생각하던 중에 문득 알아챌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정의할 수 없는 망량선사의 신비한 실체 -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는 칠요를 모두 모으는 모험보다 더한 위험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만일에 망량선사가 [옛 지배자]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존재라면 당연한 일이다!
나는 여태껏 충동적이고 돌발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너무 많았기에, 망량으로서는 공연히 망량선사에게 호기심을 가지게 해서 안그래도 힘들기 짝이 없는 칠요수집행에 부담을 가중시키고싶지 않았던 것이리라.
나는 또 한가지를 질문하기로 마음먹었다.
"망량선사가 내리는 파천(破天)의 가호란, 삶과 죽음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측으로 인한 변화를 만드는 것이며, 이중성이 존재하는 개별적인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거라고 했소. 나는 머리가 나빠서인지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당신은 알고 있소?"
그러자 천우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일전에 백우선의 미래시에 대해서 설명해줬잖소! 그 원리를 이해하고 있다면 얼추 알 수 있을텐데."
"......?"
천우진이 양손을 들어서 각각 검지손가락을 곧추세웠다.
"요는 이 세상의 미래가 관측에 의해서 변동한다는 거요. 하지만 그건, '관측을 하는 세계'와 '관측자가 없는 세계'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지. 파천의 가호란 그 중에 어느 쪽이든 고를 수 있는 가능성을 주는 것이오. 신조차도 다룰 수 없는 양가성이 필멸자의 소유가 되는 것이며, 모든 실재성(實在性)을 부정할 수 있게 되오. 이런 생각은 해보지 못했소?"
무슨 말이지?
관측하는 세계와 관측자가 없는 세계?
양가성과 실재성?
내가 멍하니 천우진을 쳐다보자 그가 신경질을 냈다.
"아 됐소. 지금의 당신에게는 설명해봤자 못알아듣겠군. 나중에 사형한테 술법을 배우면서 지식 좀 키우시오."
"... 알았소."
"그리고 파천의 가호는 스승님한테 아무리 공양물을 바쳐도 안 주실 거요. 그 가호는 대라신선의 축복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니까."
결과적으로 호된 핀잔만 들었지만 꽤 성과를 얻은 느낌이었다. 나는 지금 들은 설명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머릿속에 암기하려고 노력했다. 일단 기억하고만 있으면 나중에 망량이나 다른 술법사들이 이걸 해석해줄 수 있을 것이다.
"잠깐. 그렇지만 천우진 당신이 천계에 등선하지 않고 신의 경지에 이른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소? 등선을 해야 정신체의 지고한 영력을 얻을테고 강대한 권능을 사역할 수 있을 텐데."
내가 당연한 질문을 하자 천우진이 피식 웃었다.
"도사의 등선이란 건 인간세상으로 치면 과거에 나가서 관직에 합격하는 것이오. 당연히 관리가 된 존재는 보통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을 것이며 더 많은 명성과 부를 얻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리가 아닌 인간이 그를 뛰어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잖소?"
"흠, 그 말은..."
"등선의 끝은 실질적으로 대라신선이오. 그러나 대라신선은 본질적인 의미로서 신(神)과 대등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 나는 천계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거요."
"......"
"그래야 스승님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테니까."
과연 천재만이 할 법한 광오한 발상이며 패기였다.
이 중화대륙에 존재하는 수만 명의 도사며 도인들이 평생동안 고된 수행을 하면서 지선(地仙)이라도 되기를 꿈꾸고 있다. 그런 지선들이 몰려들어서 천계로 가는 등용문을 뚫으려고 아둥바둥거렸다. 그 무시무시한 경쟁을 뚫고 천계로 올라간 지선들이 수백수천년의 수행 끝에 대라신선으로 승급하는 것이다. 그런 대라신선을 무시하고 그보다 강력한 신급 존재가 되겠다는 천우진의 발상은 보통 인간도사가 할만한 게 절대 아니었다.
' 하지만 내가 봤던 미래시에서는 천우진 너도 천계로 갔다고.'
나는 고소를 머금었다.
뭐, 아마도 그 미래시의 환신 천우진이 천계로 올라간 이유는 뒤늦게 자신의 실패를 깨달아서는 아닐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강력해진 나인교의 세력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천계로 도망친 것이리라. 나는 오만한 천우진의 콧대가 눌리는 미래를 보았기에 약간은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동시에, 천우진조차도 지상세계에서 도주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강력해진 나인교의 세력을 생각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래도 나인교는 앞으로 내 전생행로에서 큰 장애물이자 적수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았다.
천우진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근데 아까 그 흑요석은 왜 캔 거요?"
"그 흑요석을 써서 해보고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오. 더 이상은 말할 수 없소."
"그렇다 치지. 그래서 여기서 언제까지 있을 셈이오? 설마 나한테 결계구경이나 시켜주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겠지!"
"흠..."
나는 곤란함을 느꼈다. 원래라면 천우진과 거대흑요석을 빼내는 작업이 오래 걸릴것 같아서 넉넉잡고 온 건데, 천우진이 순식간에 빼버리는 바람에 시간이 남아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이나 때울 겸 천우진에게 결계를 보여주고 그의 이야기를 들은 건데, 그래도 아직까지 미후왕이 출동한 때부터 시간이 그리 많이 흐르지 않았다.
이 시간에 뭘 하는게 효율적일까?
나는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천우진에게 말했다.
"천우진. 혹시 봉황에 대해 알고 있소?"
"엥? 뭔 개소리요?"
"전설의 신수(神獸) 봉황이 얼마 전 고려의 서경(西京)에서 출현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 술수가 뛰어난 당신이라면 그 봉황이 나타난 흔적에서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소만..."
지금 생각난 것은 바로 이맘때 고려 서경에서 봉황이 출현했었다는 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십이율주가 해신세력이 지상으로 쳐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서 봉황을 소환했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이지만, 나는 그것도 뭔가 마음에 걸렸다. 지금까지 나를 속이거나 기만하기 일쑤였던 십이율주가 과연 그 이야기를 사실대로 말한 것일까?
그리고 십이율주가 봉황을 소환했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게다가 하는김에 서경에 있는 악령(惡靈)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싶었다.
' 에이 젠장... 이 자식은 또 대가를 내놓으라고 하겠지.'
내가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 뜻밖에도 천우진은 호기심이 동하는지 말했다.
"봉황이 고려에서... 사실이오?"
"사실이오."
"흐음. 뭐, 재밌겠군. 봉황이라... 심심풀이라면 한 번 가 봅시다."
대가 얘기를 하지 않는다! 나는 땡잡았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실실 웃었다.
' 호기심이 물욕을 이겼군!'
고려까지 가는 게 귀찮은김에 내 비등능력을 빌려서 고려를 한 번 구경해보려는 천우진의 속셈이 느껴졌다. 물론 나로서는 따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니 이득이었다.
파앗
나는 천우진과 함께 비등을 써서 고려 서경으로 왔다.
서경.
원나라에게 빼앗겼을 때 동녕부가 설치된 곳이며 공민왕 때 평양부(平壤府)라고 개칭된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원명교체기에 고려가 수성(守城) 및 개혁에 성공하고, 이어서 우왕과 창왕이 집권해서 국운(國運)을 되살리자 이곳은 서경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며 눈 앞에 있는 옛 동녕부의 폐건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여기 지금 미호는 없어.'
지금은 전생한지 얼마 안되는 시점이라서 미호가 고려로 건너오지 않은 상태이다. 지금의 미호는 천황을 홀린 상태로 막부에서 정치질을 하고 있으리라. 나는 옆에 있는 천우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뭔가 느껴지오?"
"봉황은 모르겠고 저 안에 웬 대악령이 있군."
"음... 그건 아마 묘청(妙淸)이라는 악령일 거요."
예전에 동녕부 폐건물에 터를 잡고 산해경의 요물들을 소환해대던 미호가 말하길, 묘청을 잡아먹어 흡수하기 위해 고려에 찾아왔다고 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전에 나와 이야기해서 칠요 해인을 찾기로 협상이 되었기에 미호가 묘청을 잡아먹는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 저 동녕부 폐건물에는 묘청이 잠들어 있는 게 확실하리라.
천우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몰랐으면 몰라도 알게 된 이상 지나칠 순 없겠군. 저 놈을 퇴치합시다."
"알았소."
나는 그 말에서 천우진의 성향을 알 수 있었다.
극도로 자신과 상관없는 일을 귀찮아하고 천재 특유의 오만함이 가득하지만, 이 놈도 협의지심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놈은 망량의 사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