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439화 (439/1,615)

00439  암천향(暗天鄕)  =========================================================================

나는 수기공양의식에 들어가기 전에 망량과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확실히 망량 말대로 내가 화요를 얻으려고 강박적으로 일을 진행하다보니 허술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불상을 사용하는 계책이 봉인되었다는 점이 컸다.

망량이 탁자에 앉아서 말했다.

"백웅.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제 예측이 되지 않소."

"무슨 뜻이오?"

"음... 내가 당신의 기억을 읽어볼 때, 대략 15번째 전생까지 전세(前世)의 나, 망량은 어느정도 큰 계획을 잡고 진행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소. 계획이 체계적이었으며 복선도 마련해 두었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내 계책은 헛돌기 시작했고 임기응변에 크게 의존하는 면이 강해졌소."

"......"

그는 한숨을 쉬었다.

"16번째 전생에서 아예 천계의 하수인인 지선 망량이 되고, 17번째에서 주작에게 뒤통수를 맞고... 이후로는 통제가 안되는 상태로 상황에 끌려다녔소. 당신은 내 계책에 크게 의존했으나 실제로는 내가 당신을 돌봐줄 깜냥이 아니었던 탓이오."

"아니오, 그건..."

"내가 가진 책사로서의 재능과는 별개로 내가 실패해온 건 사실이오. 위로하지 않아도 되오."

망량이 자기자신의 전생을 분석하는 건 처음이 아니지만 지금은 약간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이전까지는 그저 한탄이라던가 되짚기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아주 냉철한 분석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물을 들이킨 망량이 말했다.

"제갈사가 당신에게 '책사에게 의존하지 마라'고 한 것은 무능력한 책사인 나를 향한 일침이기도 했던 거요."

"으음."

"백웅.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당신이 전생하자마자 늘 나를 찾아오는 것은 전생을 분석정리하고 새로운 효율적인 길을 찾아줄 사람이 필요해서요. 맞소?"

"... 틀리진 않소."

"이 시점의 나, 망량은 무공은 할 줄도 모르고 술법은 영 꽝에 가진거라고는 머리밖에 없소. 그러나 당신이 다루는 전생의 외연은 이미 삼황오제나 [옛 지배자]의 비밀을 알아내고 그들과 맞서는 경지에 올라섰소. 또한 당신이 보유한 고대신화의 비밀은 인간이 지닐만한 수준이 아니게 되었소."

그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즉... 이대로 당신을 따라서 전생행로에 참여하기에는 내가 영 쓸모없어졌단 소리요. 당신의 20여번에 이르는 장대한 모험의 기록에 비하면 많이 부족해졌지. 19번째 생에서는 배교의 교주이자 마도사이며 이족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진 이혼대법의 달인인 제갈사였기에 그런 당신을 보좌할 수 있었던 거요."

나는 놀라서 그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소! 당신은 내게 필..."

"그건 당신이 인간대 인간으로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호감일 뿐이오. 나는 지금 당신의 동료가 되기에는 많이 자격이 부족하오."

"......"

나는 뭐라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망량이 이렇게까지 자기비하를 하는 건 처음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비하라기에는 말투 한켠에 깃들어 있는 줏대가 똑바로 서 있어서, 나는 망량에게 다른 생각이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를 차분하게 쳐다보자, 망량은 훗하고 웃었다.

"좋은 눈빛이군. 제갈사는 확실히 훌륭한 책사였던 것 같소."

"당신은 제갈사를 싫어하지 않았소?"

"싫어할 수밖에.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고 배교의 사술과 마도를 익힌 마도사가 되었고, 심지어 인신공양도 벌이고 황궁에서 몇몇을 주살(呪殺)하기도 했고 이족과도 심심찮게 어울렸소. 내 아버지인 제갈유룡이 그를 쫓아내지 않을 수 없었소. 적어도 지금의 나는 제갈사를 좋아할 수가 없었소."

그렇게 말한 망량은 턱을 괴며 고민되는 표정을 지었다.

"... 하지만 당신의 기억을 보니 내 평가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겠군. 그는 대단한 인물이오. 그가 바라고 있는 이상을 인정해야할지도."

잘은 모르겠다.

그렇지만 망량이 제갈사를 인정하는 걸 보자 왠지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망량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뭐,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가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건 아니오. 도리어 반드시 당신의 동료가 되고 싶소. 그러나 지금 나는 많이 부족한 상태라는 말이오."

나는 망량의 말 뜻을 눈치챘다.

"부족함을 채울만한 시간이 필요하단 뜻이오?"

망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무공이든 법술이든간에 나는 당신에게 거치적거리지 않을 정도의 역량을 손에 넣어야만 하오. 이제는 머리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시기가 지났기 때문이지."

"음... 어떻게 할 생각이오?"

"천계 곤륜산에 갈 생각이오. 그리고 등용문을 뚫어 다시 한 번 구천현녀의 제자가 되겠소."

천계!

나는 그 말을 듣자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 시점까지 와서도 의도가 명확하지 않고 구린 부분이 있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옛 지배자]와 싸울만한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타도해야만 하는 자들이기도 했다. 진공가향을 외치며 천계와 맞서던 교주조차 천계의 가공할 힘에 지배자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세력이었다.

"설마 망량... 당신은 지선(地仙)이 될 생각인가."

"그렇소. 삼황오제의 비밀을 밝히고 칠요를 찾는 모험에 동참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겠지."

망량의 설명이 이어졌다.

망량의 말에 따르면 인도(人道), 도사들이 수명의 한계를 맞이하기 전에 화천(化天)하여 영육을 벗어던지며 강한 힘을 얻는 단계가 존재한다고 했다. 이 단계가 산신령이라고 불리는 하급신선이며, 이들을 가리켜 지선이라 했다. 이들은 천계에 못 올라가는 상태였기에 땅의 신선, 지선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지선에서 좀 더 등급이 올라간다면 상위신선인 천선(天仙)이 되며, 천선이란 대라신선(大羅神仙)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었다. 대라신선 중에서도 힘과 위계에 따라 서열이 나뉘는 편이었지만 그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 의미는 없었다.

나는 듣던 중 이상함을 느껴서 질문했다.

"잠깐. 하지만 예전 지선이었던 당신 망량은 천계 곤륜산에서 수련을 하고 온 거였소. 인간도사로서 천계에서 수련을 하고 땅으로 내려온다는 건, 도사의 정상적인 승격순서와 반대 아니오?"

"맞는 말이오. 원래는 오랫동안 지상에서 수련을 쌓은 도사들이 산신령이 되고, 그들 중에서 경쟁을 통해서 선발되어 천계의 등용문을 올라 천계의 직위를 얻는 식이지. 하지만 과거의 나는 먼저 등용문부터 올라서 구천현녀의 제자가 되는 편법을 썼던 게 아닌가 싶소."

"음... 이상하군. 지선의 영력이 없는데 어떻게 등용문부터 오른단 말이오? 중원 전역에서 모여든 쟁쟁한 지선출신들을 뚫고..."

망량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잘 모르겠소. 지금 내 지식으로는 그럴만한 방도가 없는데, 어떻게든 뚫고 간 모양이군. 그리고 지선 망량의 경우는 아마도 당신이 수요를 북극에서 억지로 해방시키는 바람에 천계가 다급해진 덕을 얻었던 모양이고, 19번째 생에서는 당신 덕에 삼황내문과 수요의 축복을 얻었으니 강한 영력 덕분에 가능했을 거요."

"흠..."

나는 납득했다. 확실히 망량이 지선이 되어서 강력한 술법사로서 내게 가세해 준다면, 종래에는 억지로 천우진을 움직이지 않아도 술법계의 일에 아쉬울 일이 없다. 천우진은 실력은 좋았지만 워낙 까칠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을 되짚어보자면, 당신은 어떻게든 화요를 뚫고 가 볼 생각인 것 같군."

"그렇소."

"화요의 개기일식 중 가장 빠른게 언제요?"

나는 이족의 지식을 뒤지다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 인간의 시간으로는 지금부터 대략 94년 후요. 그 다음이 그때부터 367년 후."

"오래 걸리는군... 367년 주기인가! 그래서 대운의 축복으로 뚫으려 했던 거구려."

"그렇소."

안타깝게도 화요의 개기일식이 열리는 시간은 내가 살아가는 시간대와 꽤 동떨어져 있었다. 94년 후라면 아주 머나먼 미래는 아니지만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보통 사람이 늙어죽고도 남는 시간인 것이다.

90여년이나 기다린 다음에야 화요를 획득할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손해인게 틀림없었다. 그 이후 367년 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때면 500년에 근접하니 거진 말법(末法)의 시대가 찾아올 것이다. 망량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는 그 일에 계책을 주지 않겠소."

"음?!"

"말했듯이 나는 그저 임기응변만 동원해줄 수 있는 상태요. 하지만 그 임기응변이 당신의 행로를 꼬이게 하는 것도 사실이지. 그래서 나는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길 때까지, 세계를 보는 눈이 넓어질 때까지 칠요를 모으는 일을 당신의 직감에 맡기겠소. 왜냐하면 당신은 전생자이기 때문이오."

하마터면 우는 소리가 나올 뻔 했다. 하지만 나는 망량의 말을 듣는 순간, 그게 망량이 나를 싫어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내 능력을 믿고 있기 때문에 하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내가 진정으로 전생자로서 주도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느껴졌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내게 맡기시오."

나는 이윽고 망량과 함께 수기공양의 의식을 시작했다. 그리고 의식이 시작되자 처음으로 태허천존이 드러났고, 태허천존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에게 외쳤다.

[ 나는 태....]

"태허천존이여! 여쭐 게 있습니다만."

[ ...허천존인데 음... 뭐가 궁금하냐?]

"이 공양의식을 통해서 수요의 수기를 공양하는 셈인데, 다른 칠요에 잠들어 있는 자연지기를 공양해도 되는지요?"

이건 망량이 방금 전 내게 조언해줬던 내용이었다. 태허천존은 의외의 질문인지 눈을 껌벅거리다가 대꾸했다.

[ 어떤 칠요의 자연지기를 말하는 거냐?]

"화요에 잠든 화기도 가능한지요?"

[ 받아는 주겠지만 그리 내키지 않을 듯 하구나...]

"왜입니까?"

태허천존이 약간 언짢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수요의 수기에 후한 값을 매겨 좋은 축복을 내려주고자 함은, 그 수기가 천계에 크게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수기의 생명력으로 천계의 화원이 살아나기에 그 공훈을 높이 사는 것. 허나 화기란 현재의 천계에서 그리 필요치 않은 힘이므로 받고싶지 않다.]

"......."

왠지 지금 말하는 투로 보면, 화요의 화기를 공양한다 해도 의식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공짜라고 해도 자신에게 필요치 않은 쓰레기를 받고싶은 자는 없을테니 지당한 일이었다. 화요를 얻은 후 화기로 일석이조를 노리는 계책은 물건너간 셈이다.

나는 궁금했던 점이 해결되자 말했다.

"음... 그럼 다음 분."

[ 응?! 내 축복은...]

"다음 분."

[ ......]

태허천존 다음으로 서왕모가 나타나자, 나는 서왕모를 수상쩍은 눈으로 잠시 쳐다보았다.

' 너무 수상해.'

서왕모는 신화시대에 인간형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그 모습이 변하였으며, 그 본체가 천계 어디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지상에 미호를 통해 강림해서 월요의 수호자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구천현녀가 서왕모나 천계의 고위존재를 조사하려고 하자 그 지선들이 다수 소멸되었을 정도니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꿍꿍이냐고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나는 별 수 없이 서왕모에게 말했다.

"서왕모시여. 혹여 화요의 화기에 저항할 수 있는 가호를 내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 흐음... 내가 내려줄 수 있는 건 장수의 가호다만...]

"서왕모님 같은 전능하신 신께서는 뭐든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나는 일부러 아부를 해 보았지만 서왕모는 어림도 없다는 듯 단칼에 말했다.

[ 그런 건 없다. 어차피 네게는 내 기운이 스며있어 축복이 무의미하겠구나. 그럼 다음 차례로 넘기겠다.]

파앗

나는 공양의식을 치르며 계속 고민을 했다. 과연 이 상황에서 뭘 해야 화요에 접근할 수가 있을까? 어쩐지 해법이 있을 것 같았는데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망량에게 의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 답답했다.

다음.

다음.

[ 나는 태공망이다.]

나는 계속 차례를 넘기다보니 어느덧 태공망의 차례까지 온 걸 알게 되었다. 나는 태공망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 그냥 사불상 받아버려?'

하지만 사불상으로 화요를 뚫는 계책이 막혔으니 사불상을 받아봤자 비등과 성능이 겹친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재선택을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 재선택... 대라신선의 가호를 재선택... 화요에 도움...'

그렇게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

"오호라!"

[ 정했는가?]

"사불상이 아니라 재선택권을 주십시오."

[ 알았다. 그럼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태공망에서 다시 처음의 태허천존으로 되돌아간 나는 차례를 쭈욱 돌리다가 예에게서 멈췄다.

' 맘에 안 드는 놈이지만 한 번 해보자!'

마음을 정한 나는 천신 예에게 외쳤다.

"예 님의 가호를 원합니다!"

[ 나는 예이다. 네게 필중의 능력을 주겠다.]

예상했었다! 나는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눈을 빛냈다.

"아뇨. 그 정도론 안되겠습니다."

[ 뭐라고?]

"필중의 능력이 제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확신이 없습니다. 필중능력의 위력을 강화시켜 주시거나 다른 분을 소개시켜 주십시오."

[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들어보십쇼. 백련교주가 얼마나 쎄냐면..."

나는 백련교주의 힘, 천령단과 원영신의 힘, 그리고 십이율주의 힘, 무사시의 힘 등등 내가 만났던 인계최강자들의 힘을 구구절절 설명했다. 예가 황당한 듯 이야기를 다 듣자, 나는 강변했다.

"... 그러니까 살기 위해선 필중만으론 안 됩니다."

[ 음 그런가...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네게 나의 화살을 주겠다.]

그 때였다.

천둥이 울리는 듯 하더니, 갑자기 예의 몸 주변에 팔괘(八卦)가 떠올랐다. 선연하게 떠오른 팔괘는 예의 몸을 속박하듯이 감싸고 있었다. 예는 팔괘를 확인하자 하늘을 향해 외쳤다.

[ 제준(帝俊)이여! 이건 무슨 뜻이오?]

나는 이게 무슨 현상인지 알고 있었다. 이내 사람의 얼굴에 개의 귀, 그리고 알 수 없는 짐승의 몸을 한 존재가 하늘에서 강림했다. 외양은 두말할 것 없이 괴물이었으나 그 존재에게서는 사악함 대신에 신령스러움이 흐르고 있어서 신적인 존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존재는 바로 사비시신으로서 삼황오제 제준의 사도격인 존재였다.

[ 제준의 뜻 다음과 같다. 적궁(赤弓)도 백시(白矢)도 천제(天帝)의 소유. 필멸자(必滅者)에게 내리기에는 과한 축복일지니.]

[ 그리 말할 것이라면 이 활으로 정령(精靈) 삼족오(三足烏)와 대풍(大風), 알유(??), 착치(鑿齒), 구영(九?), 파사(巴蛇), 봉희(封?) 등을 멸한 공업(功業)은 어찌 하오리까? 그 업(業)은 황제(黃帝)께서도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했소!]

[ ......]

[ 부디 옳은 판단을 내려 주소서.]

이윽고 말싸움이 끝나고 오색조가 홰를 치며 날아갔다. 제준의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 네게 나의 적궁백시가 내려졌다.]

"감사합니다!"

파앗

이윽고 강신이 풀리자, 나는 수기공양의식을 끝냈다. 그리고는 망량에게 내 무공의 기억을 담은 흑요석과 내공강화용 흑백련, 성련, 삼황내문을 건넸다.

"이 정도면 강해지는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을 거요."

그러자 망량이 히죽 웃었다.

"하나 빠뜨렸구려."

"음?"

"다음 전생부터는 내게 보물을 줄 때 이걸 빠뜨리지 마시오."

그리고 망량이 내가 늘어놓았던 보물들 중 하나를 냉큼 집자, 나는 탄식했다.

"아하!"

그 방법이 있었구나! 그럼 일석이조가 된다. 과연 망량은 머리가 좋았다.

준비물을 다 챙긴 망량이 말했다.

"백웅. 나는 이제 곤륜산에 가서 지선이 될 때까지 못 나올 거요. 그러니 그 동안에 만일 지략이 필요하다면 앞으로는 제갈사를 찾아가도록 하시오."

"윽... 그 녀석을..."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당신은 제갈사와 뛰어난 호흡을 맞췄소. 그에게 사정을 설명해 보시오."

대화가 끝나자 망량은 떠났다.

파앗

나는 일련의 과정이 끝나자마자 비등을 써서 화요의 유적이 있는 결계 바로 앞으로 갔다. 그리고 희뿌연 안개가 가득한 결계가 보였다. 나는 결계를 노려보다가 외쳤다.

"예이시여! 적궁백시로 결계를 파괴해 주십시오!!"

[ 알았다.]

쿠구구구

다음 순간, 내 몸에 천신이자 투신 예가 강림했다. 예는 강림하자마자 허공에 거대한 불꽃의 활을 소환하더니, 새하얀 영기의 번개를 활시위에 장전했다. 그는 이내 무시무시한 힘을 끌어모았고, 그 힘 때문에 주변의 공기가 타들어가며 굉음이 울렸다.

[ 일발!]

꽈앙!!

[ 이발!!]

두 번째 화살이 결계에 부딪혔지만 아직까지 화요의 결계는 파괴될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예는 약간 놀랐는지 당혹해했다.

[ 음 인간이여... 이 결계는 무엇이냐? 이렇게 단단한 결계는 거의 본 적이 없거늘.]

여기가 화요의 봉인지라는 걸 잘 모르나 보군.

나는 예가 깊은 생각을 하기 전에 재빨리 그를 도발했다.

"못 부숩니까? 예님은 강한 투신이라 들었는데..."

그러자 예가 발끈했는지 말했다.

[ 누가 못 부순다 했느냐! 이 정도는 간단하다. 아직 두 발밖에 안 쐈으니.]

쾅!

콰쾅!

콰콰쾅!!

예의 화살, 백시가 발사되어서 화요의 결계를 연속으로 때렸다. 순식간에 여섯 발까지 쏘아낸 예였고, 천지가 부숴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누가 투신 아니랄까봐 이제 화살의 위력은 천재지변을 일으키기에 모자람이 없어보였다. 인력과는 감히 비교하기 힘들었고, 절대지경에 이른 자들의 힘의 최대치를 서서히 넘고 있는 듯 했다.

' 아직 6발째... 그럼 나머지 3발은 무시무시하겠구나.'

적궁백시가 엄청난 힘이긴 했다. 화살을 쏠 때마다 위력이 가산되는 것이다. 거의 배로 강해지는 듯 했다. 예전에 나를 죽였던 힘이기에 그리 곱게 볼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예는 투신이라 칭할만 했다. 나 자신에게 쏠 때는 물리공격력이 아니라 영체타격으로 전환했기에 잘 몰랐지만, 단순파괴력으로 쏘면 이 정도의 위력을 보이는 것이다.

쩌저적

아니나 다를까 꿈쩍도 안하고 있던 결계가 서서히 조각나며 갈라지는게 육안으로 보였다. 예는 기분이 좋은 듯 외치며 발사했다.

[ 칠발!!]

꾸콰쾅

뚫었다!! 예의 적궁백시는 일곱 발째에 결계 한켠에 딱 일 장 크기의 구멍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비록 결계가 자기수복능력이 있는지 조금씩 회복되는게 육안으로 보였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예의 적궁백시 8발째는 지금보다 몇 배는 강력한 위력일테니 결계가 반파될 게 분명하다!

' 해냈다.'

예의 적궁백시의 힘을 빌려서 화요결계를 뚫는 작전 성공이다!

결계만 뚫는다면 공공과 굳이 싸울 필요도 없다. 그냥 비등으로 비밀방에 들어가서 화요만 갖고 나오면 된다!

이번에는 멍청하게 화요를 직접 손으로 집지 않고 어기지력으로 목갑에 넣어볼 생각이었다.

[ 후후후, 팔바...]

그 때였다.

위잉

타앙!

갑작스럽게 뭔가가 눈 앞에 소환되더니 거대한 기둥같은 걸 휘둘러서 맹렬하게 날아가던 여덟발 째의 백시를 쳐 내고 말았다. 천신 예는 난데없이 끼어들어서 자신의 공격을 방해한 방해꾼을 확인하자 눈살을 찌푸렸다.

[ 뭐냐? 네가 갑자기 왜 내 앞을 가로막지?]

거대한 기둥이 다시 작아지며 회수되었다. 자유자재로 커지고 작아지는 능력이 있는 듯 했다.

[ 예 아저씨. 거 몰라서 묻나? 인과율과 천계의 명령 때문인데요.]

건방진 말투로 건들거리며 대답하는 존재가 있었다. 기둥을 휘두른 건 바로 그 존재로 보였다. 그 존재는 전신에 털이 나 있었고 사람처럼 생겼으나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그 존재가 원숭이와 인간을 절반씩 섞은 것처럼 생겼으며 눈이 새빨갛고 눈동자가 금빛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투전승불(?戰勝佛) 미후왕(美?王) 비켜! 나는 가호의 맹약을 따르는 거다.]

투전승불?

저 놈은 뭐지?

예가 윽박질렀지만 그 원숭이처럼 생긴 투선(鬪仙)은 건들거리며 구름 위에 올라탄 상태로 말했다.

[ 거 뭐냐... 다 좋은데 여기가 칠요 중 화요의 봉인지라는 건 알고 있수? 인간이 정당한 절차를 밟아서 오는거라면 몰라도 우리 천계의 투선이 직접 결계를 부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아저씨.]

[ 헉!! 진짜냐?]

[ 내가 맘대로 천계에서 내려올 수 있긴 한가? 당연히 내가 여기 있는게 가장 큰 증거 아니요, 아저씨. 이래봬도 공무집행 중이오.]

[ 윽... 이건 내가 원해서 한 게 아니다.]

[ 그러시겠죠~]

투전승불이라 불린 그 원숭이 투선은 구름 위에서 뒹굴며 말을 이었다.

[ 선택하십쇼. 나랑 한판 붙을건지 아니면 물러날건지.]

예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 흥. 너와 싸워서 지진 않는다.]

[ 누가 뭐랬어요?]

[ ......]

예는 잠시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 인간 백웅! 그대는 천계를 기만하고 농락하여 투선으로 하여금 계약을 부수게끔 유도했다. 그 죄가 극악하니 즉결처형하겠다!]

아니 잠깐!

저 원숭이는 또 뭐야? 잠시만요!

쿠콰쾅

내가 뭐라 항변하려 했으나, 다음 순간 8번째와 9번째 백시가 영체로 변환되며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백시가 영혼을 갈기갈기 헤집는 느낌에 발버둥쳤지만, 예가 마음먹고 쏜 백시에 내가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의식이 사라져 간다.

그것이 나의 21번째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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