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434화 (434/1,615)

00434  천계(天界)  =========================================================================

십이율주가 여기에 왜 있는가.

그것도 소교주의 머리를 가지고.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심대한 의문이 부풀어 올랐지만, 나는 이윽고 인과관계를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었다. 원래라면 잘 연상하지 못할 관계였지만 교주와 맞대면하며 이번 일에 가장 깊숙히 끼어든 지금이라면 알 수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십이율주를 노려보았다.

"소교주가... 교주의 약점이었던 겁니까?"

"호오. 눈치가 빠른걸."

"그렇다면 무사시는..."

내가 미야모토 무사시를 쳐다보자, 십이율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보면 모르나? 나는 처음부터 동맹을 한다고 한 적 없어. 당연히 교주의 조문을 찌르기 위한 자객으로 보냈지."

"......!!"

나는 일이 어찌된 건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백련교주가 십이율을 멸망시키려는 흉심(凶心)을 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십이율주 또한 백련교를 없앨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십이율주의 말에서 납득되지 않는 점이 있어서 말했다.

"교주는 의심이 많습니다. 당연히 무사시를 의심했을텐데..."

"후후... 그러나 한번에 자신의 약점을 노릴줄은 몰랐겠지. 거기에 너희가 교주와 맞붙어서 여유를 없애고 시선을 끌어준 덕이 컸어."

"......"

"정말 고맙네 백웅. 자네는 영웅이 확실해. 아무리 나라고 해도 경계하는 백련교주를 상대로는 틈을 낼 수 없었으니."

여유롭게 대꾸하던 십이율주가 소교주의 목을 가슴께로 들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글쎄, 뭐,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싶진 않았어. 단지 너무 큰 일이 되어버려서 누군가는 수습을 해야했지. 그건 너희도 동의할 거야."

"지금 그런게 중요한 게 아니오, 십이율주."

이청운이 한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는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백련교는 붕괴했소. 하지만 곧 낙양에 [옛 지배자]와 삼황오제의 격전이 일어나겠지. 당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텐데 앞으로 어떻게 하려는 생각이오?"

"응... 그래. 당신이 뇌신류의 종사 이청운인가."

십이율주가 이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걸 왜 걱정하지?"

"......?!"

"보아하니 우리 십이율이 소교주의 수급을 취했다는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더 이야기할 이유가 없겠지."

나는 뭔가 일이 꼬이는 걸 느꼈다.

' 천우진이 살아있었다면...'

천우진이나 망량 등 술법사가 이 자리에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십이율주의 말 뜻을 술법지식으로 파악해서 말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와 이청운밖에 없었기에 그쪽 방면으로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이를 악물자 내면에 있던 제갈사가 말했다.

[ 백웅. 잠시 기다려라.]

제갈사의 목소리는 이전과 달리 광기에 휩싸이지 않았으며 지극히 침착냉정했다. 나는 이런 제갈사의 말투를 들어본 적이 얼마 없었기에 흠칫했다. 그리고 제갈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 지금은 정말 중요한 전환점이다. 그러니 신중하게 내 말을 들어라.]

[ 제갈사. 지금 무슨 상황인지 파악한 거냐?]

[ 그래. 하지만 네가 살아나기 어려운 상황인 것도 사실이지. 마치 내가 너 때문에 백련교주 앞에 노출됐을 때와 같다.]

[ ......]

나는 제갈사의 비유를 듣자 한번에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살의(殺意)!

직접적으로 포착되지는 않았지만, 제갈사는 인과관계와 이해관계를 유추해서 십이율주가 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금 십이율주가 나를 죽이려는 마음을 품은 거라면 살아나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제갈사가 말했다.

[ 백웅. 지금 네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한 가지는 이 자리에서 어떻게든 삶을 유지하지만, 눈 앞의 십이율주에게 노예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십이율주는 정사(正邪)가 따로 없는 괴인이니 너는 죽을 때까지 농락당하겠지만 그 와중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역전할 수도 있다.]

[ ......]

[ 십이율주는 백련교주와는 달라. 너와는 공감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어. 그는 현재 네게 있어서 천하에서 가장 위험한 흉인(凶人)이다.]

[ 또 한 가지는?]

[ 이번 생을 포기하고 그냥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거지. 눈 앞의 십이율주에게도 크게 한 방 먹여줄 수 있다. 하지만 네가 죽는 건 결코 피할 수가 없어.]

그렇게 말한 제갈사가 음울하게 말을 이었다.

[ 개인적으로는 전자든 후자든 무슨 차이인가 싶군. 어쨌든간에 너는 빨리 선택해야 한다.]

내가 제갈사의 말을 들으며 고민하는 동안에 이청운이 십이율주를 견제하며 앞으로 한발짝 나서고 있었다. 그는 교주와의 격전 때문에 크게 지쳐 있었지만 지친 티를 내지 않고 십이율주에게 말했다.

"십이율주.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소. 하지만 우리는 교주를 쓰러뜨리는 목표를 다했으니 이제 물러가고자 하오. 그러니 우리를 방해하지 마시오."

그러자 십이율주가 히쭉 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누구 맘대로 가겠다는 거지?"

일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 자리에 있는 고수들 모두가 결전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방금 전 십이율주의 말은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청운은 매서운 눈으로 십이율주를 노려보며 말했다.

"역시 토사구팽하려는 속셈이었나."

"후후. 그런 표현은 별로 맞지 않는데... 삭초제근(削草除根), 발본색원(拔本塞源)같은 게 좀 더 맞지 않겠어?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볼 때 이 사단을 낸 건 거기 있는 백웅이니까."

"억지 부리지 마시오. 교주가 일을 벌였을 뿐."

"정말 그런가?"

십이율주가 강아지탈의 팔을 들어서 나를 가리켰다.

"백웅. 너는 여와의 명을 받고 교주를 견제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지. 하지만 네가 한 건 교주의 심복이 되어서 허우적대며 봉선의식을 하러다닌 것 밖에 없어. 정말로 교주를 막을 생각이었다면 그 때부터 그와 필적하는 세력인 우리 십이율과 상의해서 그를 암살할 계획을 짰어야 하는게 아닌가?"

"당신이 그 사실을 어떻게..."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내가 여와에게서 지령을 받았다는 사실은 천계의 신선들이나 삼황오제, 혹은 천우진 정도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태산의 봉선의식에서 일어난 일을 인간이 알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십이율주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네 속셈이 보여. 교주에게 업혀가면서 이 세상이 혼란에 휩싸이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겠지. 그 때 나타나는 고대의 신비와 비밀을 알아내려는 속셈 아니었나? 네 녀석은 만악의 근원이며, 교주보다 몇 배는 더 음흉한 놈이야."

"......"

"이미 낙양의 혼란은 종막에 접어들었다."

위이잉

십이율주 하은천이 자신의 허리춤에서 신령스러운 청광(靑光)과 함께 신기 은하구절편을 꺼냈다. 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화룡신검을 곧추세웠으나 이미 반토막난 화룡신검의 힘으로는 은하구절편의 신기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십이율주가 킬킬 웃는 듯 했다.

"후후... 화룡신검은 정상적이라면 은하구절편에 맞먹는 절세보패지만, 아까 싸울 때 다 봤다. 그 보패는 이미 쇠해서 부숴지기 직전이더군. 그걸 갖고 교주같은 괴물과 싸운 검선 여동빈은 정말 대단한 자야."

"뭐, 뭐라고."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여동빈의 전투과정이 스쳐지나갔다.

여동빈은 전용보패인 화룡신검의 출력을 올리며 싸웠으면 훨씬 강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부러 익숙지도 않은 전국옥새나 월요의 힘부터 먼저 퍼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화룡신검이 부러지자 한탄하던 모습은 이미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기색이었다.

' 설마 화룡신검은... 수백 년 동안 암천향의 통로를 봉인하는데 모든 영력을 소진해서 파괴되기 직전이었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동빈은 화룡신검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화룡신검이 있어야 최대전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이청운이 내게 육합전성을 보냈다.

[ 백웅. 내가 어떻게든 저들을 막으며 시간을 벌겠네. 자네는 사불상이나 비등을 사용해서 틈을 봐서 도주하게.]

[ 가능하겠습니까?]

[ ... 모르겠네. 하지만 해 봐야지.]

이청운이 이렇게 자신없는 소리를 하는 건 처음봤다.

하지만 그럴만도 했다. 절대지경의 고수 두 명이 눈 앞에 서 있는데다, 그 중 하나는 칠요를 두 개나 보유한 현 인간계의 절대자였다. 저 둘은 각각 고려와 동영의 무림최강자였다. 뇌신지혼을 시전하는 이청운이라 해도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인 것이다.

나는 결국 마음의 결정을 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제갈사에게 말했다.

[ 나는 후자를 고르겠어, 제갈사!]

[ 진심이냐?]

[ 이대로 저 개자식의 발을 핥으면서 살아남을 순 없어.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방 먹이고 말겠다!]

잠시 침묵하던 제갈사가 말했다.

[ 그럼 해 볼까. 내 말에 따라라.]

이윽고 제갈사의 입에서 나온 계책에 나는 흠칫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나는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그 말에 동의했다.

[ 알았어.]

나는 마음을 정하자마자 십이율주에게 외쳤다.

"십이율주! 그만 두십시오. 지금이라도 순순히 우리를 보내준다면 피를 보지 않을 겁니다."

십이율주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피만 봐서 되겠어? 네놈 시체를 봐야 끝나겠지."

"......"

"아! 뒷일은 걱정 마. 너는 영웅으로 죽을 거고 만세에 길이남을테니까."

투웅

말이 끝나는 순간 전투가 시작되었다. 십이율주가 선공한 것이다!

그리고 빛살이 스쳐지나감과 동시에, 이청운이 미야모토 무사시와 십이율주의 합공을 허공에서 막는 듯한 잔영(殘影)이 눈에 박혔다.

퍼버벙

[ 컥... 어서...!!]

이청운은 겨우 일 초수의 교환이었을 뿐인데도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뇌신지혼으로도 두 절대고수의 합공을 막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인 듯 했다. 이청운 혼자였다면 저 정도 부상은 당하지 않았겠지만 나를 지키려고 싸우려다 보니 부상을 입은 것이다.

' 큭.'

나는 즉시 비등을 발동시키려 했지만 발동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아마 십이율주가 뭔가 손을 썼으리라. 하지만 제갈사가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으므로 즉시 사불상을 불렀다. 사불상이 소환되자 나는 지체없이 이동하려 했다.

꾸콰쾅

바로 그 때 거대한 은하구절편이 날아들더니 내 허리를 강하게 때렸다. 엄청난 속도라서 나는 알고도 피할 수가 없었다.

"......!!"

월요에서 뽑아낸 영력으로 내공을 회복한 상태였던지라, 모든 호신강기를 찰나에 집중해서 막아낸 덕에 즉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마치 교주의 심천무량의 일격을 얻어맞은 것 같은 무시무시한 격통이 찾아왔다. 뼈가 몇 개는 부러진 듯 했고 장기도 터진 느낌이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이 일격에 전투불능이 되어서 땅에 널부러졌으리라.

이 한 방으로 나는 하은천이 교주와 동급 이상의 절대자라는 걸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예전에 나와 신시에서 싸웠을 때는 말 그대로 놀아줬던 것이다.

아직, 아직인가?

나는 그 찰나에 초조해하며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등과 사불상을 시도해서 이 자리에서 도주하는 것까지는 전자든 후자든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에 따라서 내 선택이 완전한 결정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 때였다.

[ 백웅!!]

허공에서 외마디 외침이 들려오더니 거대한 은염(銀炎)이 이쪽으로 폭사되어 왔다. 연속초수로 내 목숨을 끝장내려던 십이율주는 흠칫하며 그 은염을 피하는 기색이었다. 은염의 범위가 굉장히 넓었기에 그로서도 피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엄청난 영력을 머금은 환염을 발사한 존재는 찬연한 은빛을 내며 허공에서 날아와서 내 옆에 섰다. 나는 가물가물해지는 눈을 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 미호."

[ 도망쳐! 백웅!]

화르륵!

미호의 모습은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평범한 구미호일 때와는 달리 그녀의 꼬리는 세 개로 변해 있었고, 그 꼬리 하나하나는 살아있는 듯 강력한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또한 머리카락도 흑발에서 완전한 은빛으로 넘실대고 있어서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얻게 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이게 바로 대운(大運)인가?

미호가 천계에 가서 힘을 얻고 각성한 후, 내 위기에 딱 맞춰서 이 자리에 도착해서 내게 시간을 벌어준 일, 이 자체가 대운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미호에게 어찌된지 묻고싶었지만 여유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미호의 몸뚱이에 미야모토 무사시의 절대적인 검기가 날아들고 있었다. 미호는 꼬리의 영력을 모두 동원해서 방패를 만들었지만 이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 아악.]

무사시의 원월천살법이 너무나 강력해서 미호의 힘으로도 얼마 못버틸 게 분명했다.

또 다시 선택이 갈린다. 제갈사는 빠르게 외쳤다.

[ 지금이야! 어서 가!]

갈 수밖에 없다!

"차원을 돌파해!"

[ 알았다.]

파앗

나는 우선 사불상을 써서 이 근처를 벗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비등을 못 쓰던 이유는 십이율주가 비등의 도약을 막는 차원결계를 미리 설치했기 때문으로 보였다. 철두철미하게 나를 잡으려고 함정을 파놨던 것이다.

하지만 하루에 한 번 차원조차 돌파할 수 있는 사불상의 능력 덕에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사불상에서 내리자마자 여유도 없이 바로 사불상을 송환시킨 후 비등을 꺼내들었다.

파앗!

내가 도착한 곳은 암천향의 이계였다. 나는 대번에 밀림에 존재하는 [옛 지배자]와 대면한 상태가 되었다. [옛 지배자]는 나를 주시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나는 급히 말을 꺼냈다.

"옛 지배자여!! 부탁이 있습니다!!"

[ 무엇인가...?]

나는 도박의 양면성이 몸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걸 느끼며 외쳤다.

"십이율주와 미야모토 무사시를, 죽여 주십시오!!"

지금으로서는 이 계책밖에 없다.

여태껏 내가 밀림의 [옛 지배자]에게 한 번 이상 부탁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칠살마을의 흑패는 딱 한번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등으로 밀림에 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는데도 오지 않은 이유는 바로 흑패 때문이었다. 출입권이나 부탁할 권리도 없는데 멋대로 찾아올 경우 [옛 지배자]가 어떻게 분노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 전생을 걸고 지금 도박을 건 셈이었다. [옛 지배자]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앞으로도 몇 번씩이나 반전의 권능으로 적을 죽이거나 아군을 살릴 수 있다. 다만 이게 아닐 경우, 나는 천암비서의 전생이 끝나고 [옛 지배자]의 노예가 되어서 영겁토록 고통받을지도 모른다.

밀림의 [옛 지배자]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말했다.

[ 너는 아주 지상을 재밌게 만들어 줬더군...]

저 존재는 암천향이라는 머나먼 이계에 있으면서도 지상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심지어 지금의 말은 그 사건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지배자가 흥미로운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 원래라면... 흑패도 없이 이 자리에 찾아온 것부터가 중죄... 암천향을 지키는 거미의 신에게 갈기갈기 찢겨죽거나... 내 권능으로 시간의 나락에 떨어져야 정상이겠지...]

나는 [옛 지배자]의 말을 듣자 소름이 돋았다.

' 역시 두 번은 안 되는 거였어.'

이걸로 편리한 전생수단은 봉쇄되었다. 내가 각오한 채 지배자를 쳐다보자 그의 말이 이어졌다.

[ 하지만... 뭐 어떤가... 너는 역사상 가장 내 마음에 드는 인간이다... 혼돈을 주재하고... 필멸자의 아비규환을 이끌어내는... 후후...]

잠시 웃던 지배자가 말했다.

[ 네 부탁은 들어주겠다... 하지만 댓가는 받아야겠지...]

지금 이런 대화를 하는 순간에도 이청운과 미호는 시시각각 죽음의 길로 다가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외쳤다.

"어떤 댓가입니까?"

[ 영혼...]

"......"

[ 흑패를 갖고 있다면 무상으로 소원을 들어줬을테지만... 너는 등가교환으로 봐 주겠다...]

즉 십이율주와 무사시를 죽이고 싶다면 내 목숨을 바치라는 소리였다.

이런 걸 갖고 봐 준다고 표현하다니 정말 어이없는 소리였지만, 그게 [옛 지배자]라고 불리는 사신들의 사고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또한 제갈사에게서 들은 계책이었기에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그 때였다.

지배자가 자신의 몸에 새겨져 있는 수백 개의 눈에 이채를 띄며 말했다.

[ 호오... 재밌군... 그 자를 배신해도 좋은가...]

이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지배자가 이내 광소를 터뜨렸다.

[ 흐하하하... 좋다... 그 거래를 받아들여 주마...]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지이잉

허공이 일그러지며 차원문이 열렸고, 거기에는 당혹스러운 듯한 표정의 벽지상이 서 있었다. 배교의 초대교주이자 신과 거래해서 마왕(魔王)이 된 존재는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기색이었다.

벽지상이 갑자기 거대한 안개로 형상을 변화시키더니 분노한 이족의 언어를 토해냈다.

[ 크아아아아!! 제갈사아아아아!! 감히, 감히 나를 배신...]

밀림의 지배자가 웃는 듯 했다.

[ 네놈은 산양을 믿고 너무 까불었다... 이렇게 빨리 기회가 왔구나...]

[ 그럴 순 없...]

[ 그럼 잘 먹겠다...]

휘리릭

벽지상이 갑작스럽게 자신의 어둠의 권능을 발휘해서 밀림의 지배자를 공격했으나, 난데없이 허공에 나타난 시공간의 구멍에 마치 물줄기처럼 쑥 빨려들어갔다. 순식간에 벽지상이 소멸되어버렸지만 나는 그게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 잘 먹었다...]

밀림의 [옛 지배자]가 마왕 벽지상을 먹어치운 것이다!

' 뭐... 뭐야? 무슨 일이...'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자 밀림의 지배자가 이윽고 허공에서 혼 두 개를 소환했다. 그리고 예전과 같이 먹어치웠다.

[ 백웅... 네 소원을 들어줬다.]

"......"

아마 방금 잡아먹힌 것은 십이율주와 무사시의 혼일 것이다.

[ 마지막 인사를 나눌 시간을 주마...]

우웅

내 몸에서 새하얀 혼백이 분리되었다. 그리고는 새하얀 영체의 모습으로 제갈사가 천천히 허공에 떠올랐다. 제갈사는 내 앞에 서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 이걸로 마지막이군.]

"제갈사! 어떻게 된 거냐."

[ 보면 모르나? 내가 몸을 숨긴 벽지상의 위치를 신께 말씀드렸고, 신이 이 곳으로 벽지상을 소환해서 처리한 것이다.]

"......!!"

나는 그 순간 과거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벽지상이 자신의 힘을 과시한답시고 외신의 힘을 빌린 주문을 변황 일대에 시전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옛 지배자]들은 자신의 영역이 침범당한 셈이었으므로 크게 불쾌했을테지만, 벽지상이 외신을 모시는 사제였기에 이만 갈고 있었으리라. 그러던 중에 제갈사가 벽지상이 숨은 위치를 밀림의 지배자에게 일러바쳐버렸기에 벽지상은 소멸된 것이다.

제갈사가 말했다.

[ 기분은 그저 그렇군. 이제 곧 신의 뱃속에 들어갈 텐데도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냐.]

"뭐....?"

[ 네놈의 영혼을 바친다는 조건을, 내가 벽지상에게 바친 정보로 대신했다. 그리고 뭐, 대가가 조금 부족하다길래 내 영혼도 바쳤다. 앞으로는 밀림의 지배자께 내 영혼이 귀속되겠지. 말이 귀속이지만 먹이가 될 뿐이지만.]

"......!!"

나는 경악했다. 제갈사가 설마 이런 선택을 할 줄이야?!

"왜, 왜 그런거냐? 대체 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제갈사가 전생자인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희생해 줄 이유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난데없이 벽지상을 배신한 건 그렇다치고 [옛 지배자]에게 흡수되는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고 있는 제갈사가 이런 선택을 하다니?

제갈사는 차갑게 웃었다.

[ 난 저승이나 구원에 미련없어.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죽은 후에 뭐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지. 하지만 나는 알만큼 다 알고 있고, 천계에서 마련해준다는 인위적인 구원을 혐오한다. 결국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

"무슨 소리야..."

[ 나도 형님도 형수도... 제갈세가 전체가... 얼마나 천계의 위선에 농락당했는지.]

씹어뱉듯 말한 제갈사가 씩 웃었다.

[ 그러니까 이대로 마(魔)에 종속되어서 인성을 잃은 채 무한히 절망할 거다. 그런 것도 나한테 어울리겠지.]

"... 넌 미쳤어. 하지만..."

[ 이제 알았냐?]

나는 제갈사의 감정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제갈사는 사실 미친 게 아니다.

단지 이 세상에서 미친 채 행동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기에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이미 사신(邪神)에게 장악당해 모든 업(業)이 악의 천칭에 기울어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행동 - 그것이 바로 광기였을 뿐이다.

미친 세상에서 함께 미쳐버리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오랫동안 제갈사와 영혼을 공유하고 이혼대법을 수련해서인지 그 감정을 알아챌 수가 있었다.

[ 이번에 널 위해 행동한 이유... 그건 네가 가능성이 있는 놈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뭐?"

[ 나같은 천재도 이따금씩 바보같은 행동을 하고싶은 법이지.]

"뭐..."

갑자기 웬 자화자찬? 내가 황당해하자 제갈사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너같은 둔재가, 기어오르고 발버둥치며, 설령 천 년을 노력해도 그 결과가 허섭스레기같다는 건 알고 있다. 지금도 나는 네 노력이 무의미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한다. 칠요를 모아봤자 결국 망할테지.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제갈사는 처음으로 서글픈 미소를 띄었다.

[ 그런 네 녀석을 주군으로 선택한 게... 나의 운명에 대한 최초의 반역이다.]

파앗

제갈사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는 사라졌다.

정확히는 밀림의 지배자에게 흡수된 것이다.

"......"

앞으로 그는 영겁토록 [옛 지배자]의 장난감이 되어서 고통받으며 지낼 것이다. 그건 세상에서 [지옥]이라고 부르는 세계와 다르지 않으리라. 하지만 제갈사는 인위적인 구원을 거부했고 자신의 의지로 지옥행을 선택한 셈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이건 아냐.

이건 아니라고!

제갈사가 아무리 개자식이라도, 이런 결말은 원하지 않아!

그리고 울부짖었다.

"신이여! 그 자의 영혼을 돌려 주십시오!!"

밀림의 지배자는 냉엄하게 말했다.

[ 정당한 거래가 이뤄졌는데 왜 떼를 쓰는 거지...?]

"빌어먹을! 이게 정당한 거래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알고 있다.

이 자리에서 살아나가서, 앞으로도 미래를 향해 걸어나가는 게 옳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제 십이율주, 백련교주, 주작이 모두 제거되었으니 내가 칠요를 찾고 힘을 키우는데는 더할나위없이 좋은 환경이 될 게 분명하다. 제갈사는 그걸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그 업을 짊어지고 대신 죽어준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런 절망적인 현실에 타협해서 눈돌리며 내 힘을 키운다고 해도 그게 옳은 일인가? 단지 신의 힘에 의존해서 동료의 희생에 거짓눈물을 흘리며 걸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닌가? 그리고 제갈사가 영겁토록 지옥에서 고통받는 걸 도대체 무슨 염치로 견뎌내라는 말인가?

그래서야 내가 신의 힘에 굴복했던 절대자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건 무한히 농락당할 뿐인 게 아닌가!

나는 이마에 핏발이 선 채 노갈했다.

"신이여!! 인간이 그리도 갖고놀기 좋은 장난감이란 말인가!!"

내가 고함을 치는데도 밀림의 지배자는 되려 재밌다는 듯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 인간 뿐만이 아니지. 신 앞에서 모든 필멸자는 평등하다.]

"흐... 흐흐..."

[ 인간 백웅이여. 신이라 하는 존재들은, 우리 [옛 지배자]는 이 세상 그 자체이다. 너희가 아무리 발악하고 의지를 다한다 해도, 우리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하지. 너희는 우리에게 유희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뿐이다.]

"이 세상이라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내 전생에서 특정한 하나의 적수를 쓰러뜨리면 끝나는 게 아니다.

끝나는 것처럼 보여도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패배의 고리가 계속되었던 이유 - 그것은 내 적이 신(神)이며, 그 자들은 자신을 세상 그 자체라도 자부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밀림의 지배자는 내 적을 제거해주고 정의를 실천한 양 굴고 있으나 실제로는 어릿광대를 갖고 노는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절망적인 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나만의 답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제갈사의 죽음에서 그 답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 면 겠다."

[ 호오... 뭐라고?]

내 머릿속에서 백련교주와 제갈사의 죽음이 떠나가질 않는다.

나는 광기에 함몰된 채 이성을 뒤흔들었다.

혼돈 속에서 외친다.

"그럼 나는 죽겠다.... 죽고 나서 또 다시 도전해 주겠다."

나는 모든 힘을 끌어낸 채 옛 지배자에게 돌격했다.

"세상을 죽여버릴 때까지!"

그리고 내 의식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혼돈 속에서 나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울부짖었다.

반드시 이루고 말 것이다.

이 세상이라고 칭하고 있는 신의 종말을 내 눈으로 보고 말 것이다!

내 19번째 죽음이 유년기의 끝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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