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1 천계(天界) =========================================================================
나는 일행을 데리고 사불상을 타서 낙양에 도착했다. 그리고 낙양의 상공에 떠 있는 상태로 낙양을 내려다보자 황망한 기분에 휩싸였다.
"......!!"
검푸른 안개가 사위를 둘러싸고 있다. 이 안개는 너무나 짙어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안개 곳곳에서 피안개가 일어나면서 곳곳에서 인간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정체모를 괴물들이 쉿쉿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것도 보였다.
핏빛을 띈 구슬같은 게 여기저기에서 출몰하더니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는 광경도 보였다. 물론 저것도 이 세상의 존재는 아닐 것이리라. 동시에 쉴새없이 농밀한 마력(魔力)이 도시 전체의 공기를 삼키며 뿜어져 올라오고 있었다.
어둠에 삼켜진 마경(魔境)!
화마가 일어나는 게 보통 도시파괴의 상징이지만 이건 그 이상의 처참한 파멸을 암시하고 있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이 도시에서 숨쉬는 것만으로도 한 식경만에 정신에 이상이 올 게 분명했다.
내가 침을 꿀꺽 삼킨 채 내려다보자, 내 뒤에 앉아있던 망량이 말했다.
"백웅. 잠시 물러납시다."
"물러나자고?"
망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가 [옛 지배자]와 정식계약을 맺었다는 건 기정사실이 되었소. 그리고 내가 교주라면 아마 황궁에 본거지를 잡은 채 그곳에서 본격적인 의식을 치르고 있을 거요. 또한 황궁의 방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엄중할 게 분명하지. 하지만 정작 그 지상최강의 요새를 쳐야하는 우리들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소."
나는 망량의 말 뜻을 깨달았다.
"작전을 짜고 오자는 말이오?"
"바로 그렇소."
망량이 한층 힘주어서 말했다.
"상대는 다름아닌 그 백련교주요. 우리가 가진 최대의 힘을 동원해도 부족할지 모르오. 뇌신류 고수들을 비롯해서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을 모두 끌어냅시다."
"흐음!"
"일단 물러서서 냉철하게 작전을..."
망량의 말은 지극히 일리있고 당연한 것이었다. 원래도 백련교주는 대라신선 3명을 소멸시킬 정도로 막강했는데, [옛 지배자]의 마력을 정식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얼마나 강해지는 걸까?
그 때였다. 제갈사가 내 내면에서 말했다.
[ 흥... 현이는 마도(魔道)를 접한 경험이 별로 없어서 미숙하군. 저 판단은 틀렸다.]
[ 제갈사!]
지금까지 잠잠하다 했더니 불쑥 얘기를 꺼내는 제갈사였다. 제갈사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 교주에게 있어서 최악의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봉선의식에 딱 맞춰서 교주가 낙양의 마도의식을 발동시킨 게 우연이라 생각하나? 너희가 제대로 체계를 정비해서 오면 크게 불리하기 때문에, 놈은 지금 이판사판으로 건곤일척의 승부에 매달린 거고, 지금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하게 빌고 있겠지!]
[ ......]
[ 마도사가 제일 약할 때는 공양의식을 치르고 있을 때다. 교주를 친다면 지금이다. 위험해도 바로 지금 승부를 보는 수밖에 없어.]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반문했다.
[ 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지금 아무런 작전이 없어. 지금은 그냥 정찰을 하러 온 거란 말야. 준비없이 갔다가 교주에게 깨지면 어떻게 하잔 말이냐?]
제갈사가 코웃음을 쳤다.
[ 작전은 무슨... 지금의 교주가 정상적으로 싸울 수 있을리가 없는데 무슨 작전을 짜냐!]
[ 어?!]
[ 마도사가 제일 약한 시점이라고 했지! 천하무적의 교주라고 해도 은카이의 수면자에게 대공양의식을 치르려 한다면 본인이 직접 전신전령을 다해서 주관할 수밖에 없다. 백련교에 그 일을 대신 맡길만한 주술사는 존재하지 않아. 그렇기에 현재의 교주는 여태껏 네놈이 봐왔던 중에 최고로 약한 상태일 게 분명하다.]
[ ......!!]
이 말이 사실인가?!
"망..."
내가 입을 열어서 망량에게 의견을 구하려 하자 제갈사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 작작 좀 물어봐! 천재인 망량이라 한들 이렇게 변칙적인 상황에서 아무 경험없이 올바른 답을 줄 수 있을거라 생각하나? 그건 책사를 믿는 게 아니라 책사에게 모든 짐을 떠맡기는 병신같은 짓이다!]
[ 윽.]
[ 망량이 너보다 똑똑하지만 그건 통상적인 경우고. 지금 이 상황에선 전생자인 네놈이 망량보다 더 경험이 많기에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 하지만...]
제갈사는 한층 강하게 으르렁거렸다.
[ 내가 전에 네놈 대가리로 생각하라고 말했지!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오로지 네 머리와 네 판단으로 의견을 수용해라. 아니면 물리치고.]
[ ......]
나는 제갈사의 말이 옳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이런 결정의 순간에 망량에게 의견을 구하는 게 맞겠지만, 반면에 언제까지고 망량의 지혜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중대한 판단은 결국 나 자신의 의지로 결정해야만 하고, 이 선택의 순간을 겪는 것 자체가 성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생각하자.'
나는 곰곰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망량의 의견과 제갈사의 의견을 하나하나 살피고 따지면서 뭐가 나을지를 객관적으로 생각해 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모두들."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빠르게 뇌신류 최정예만 데리고 와서 최단시간 내에 황궁을 칩시다!"
"음!"
"정면으로 교주를 치되 주저해선 안 되오."
다들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책사인 망량의 의견과 정반대되는 의견을 내었기 때문이다. 망량은 뜻밖에 그리 놀라지 않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백웅. 그건 제갈사의 의견이오?"
"그렇소."
나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그게 맞다고 생각하오! 제갈사에게 휘둘리지 않았으니 걱정 마시오."
망량은 잠시 침음성을 흘리다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소. 그대의 말에 따르겠소."
"고맙소."
나는 방금 전 생각을 거듭하면서, 제갈사의 말과 함께 내가 교주와 지내왔던 경험을 생각했다. 그리고 잘은 모르겠지만 교주의 행동양식으로 볼 때 지금 치는 게 치명적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원래라면 망량의 의견에 저절로 손이 가겠지만 이번 전생만큼은 제갈사의 의견 쪽이 더 맞을거라고 생각했다.
파앗
나는 잠시 후 종남파로 갔다. 그리고 종남파에서 수련중이던 뇌신류의 무인 - 진소청, 이광, 극호를 만나서 대충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들은 잘은 상황을 이해 못한 것 같았지만, 이광이 큭하고 웃으며 대꾸했다.
"어쨌든 교주를 죽일 수 있단 말이군. 그럼 협력하겠소."
"그거면 된 거요."
그들이 동의한 듯 하자 나는 그들을 목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청운에게 물었다.
"만일 합공을 한다면 손이 꼬이지 않겠습니까?"
이청운은 대번에 내가 말하는 뜻을 눈치챘는지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검선 여동빈의 수준이 나보다 훨씬 높으니, 내가 그에게 맞춰야겠지. 적어도 짐은 되지 않을 자신이 있네."
"다행이군요."
"다만 장담은 할 수 없어. 교주의 최대전력은 측정불가일세."
"알고 있습니다."
그 때 옆에 있던 망량이 말했다.
"백웅. 그럼 나를 빠르게 황연 대장군에게 데려다 주시오."
"황연 대장군에게?"
"어찌되었든 간에 결판은 빠르게 나게 될 테니 내가 황연의 책사로 가 있겠소. 혼란스러운 전국을 수습하려면 황연의 군세를 수도 쪽으로 불러들여야 하오. 그래야 낙양파괴 후 천하가 안정될 터이니."
"좋소."
나는 망량의 말대로 그를 황연에게 데려다주고, 황연에게 사정을 말해주었다. 황연은 심각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더니 말했다.
"백웅. 천시(天時)와 지리(地利), 그리고 인화(人和)를 기본으로 삼음이 바로 사마법(司馬法)이라는 걸 기억하고 있는가?"
나는 생뚱맞은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 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마법은 다 읽었습니다."
예전에 황연 대장군이 내게 병서 사마법을 건네준 적이 있었다. 그때 받은 사마법 책을 시간날때마다 읽어서 지금은 거의 외울 정도로 알고 있는 상태였다. 손자병법을 읽었던 기초가 있어서 좀 이해하기 쉬웠던 덕도 있었다.
"사마법에서 논하는 인화란 곧 인(仁)을 말하는 게지. 사마법을 지은 전국시대의 천재전략가인 사마양저(司馬穰?)는 자신의 능력으로 제나라를 지켰으며, 전쟁의 본질이 살육이란 걸 알면서도 인자함으로 전쟁을 다스리길 원했네. 그 이유가 뭔지 아는가?"
"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황연은 진중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건 말일세, 인간이란 결국 인자함으로 다스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네. 비록 인간의 마음에 정의가 없을지언정 인간의 마음은 따스함에 이끌리는 것일세. 아무리 인간이 잔혹해지더라도 근본적인 연민이 남을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마양저가 알고 있었던 것이야... 그 연민을 거스르고 혹독하게 굴수록 큰 반발이 돌아오기에 그는 전국시대에 인(仁)을 주창했던 것일세."
"......?"
"나는 교주라는 자를 잘 모르겠으나, 교주의 마음속에도 인(仁)이 남아있을거라 생각하네. 백웅 자네가 교주를 괴물로 대하면 대할수록 그는 그런 면모만을 보여주겠지만, 자네의 그릇으로 그를 포용할 수 있다면, 자네는 교주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네."
"으음..."
나는 황연의 말을 듣다가 한숨을 쉬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황연의 말은 대명제국의 천하대장군인 그의 가치관과 인품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또한 그가 과거 내게 어떤 심정으로 사마법을 줬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큰 인물이 될 수 있다 생각했으므로 인품을 수양하는 수단으로 사마법을 줬던 것이다. 그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좋아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하지만 낙양에 사는 수백만 명의 인간을 망설임없이 제물로 바친 지금의 교주에게 인간성이 남아있을 것인가? 나는 마도의 공양의식을 여러번 접했으므로 그 질문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해도 지금의 황연의 말은 들어둘 가치가 있었으므로 일단 기억해 두기로 했다.
"내가 황연의 책사가 되어서 군을 움직이며 낙양의 상황을 살피겠소. 만일 낙양의 상황을 정리한다면 내게 알려주시오."
"알았소."
나는 망량을 요동성에 놔둔 채 뇌신류 무인들과 천우진을 데리고 다시 낙양성 앞으로 갔다. 천우진은 팔짱을 낀 채 나에게 말했다.
"백웅. 당신은 황궁의 좌표가 있으니 즉시 사불상을 데리고 황궁의 옥좌까지 갈 수 있겠지만, 그건 현명하지 못하지. 사형에게 이미 들었지 않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망량은 두 갈래로 나누어서 교주를 공략하라 했소."
"그렇소. 어차피 교주를 상대하는 일에 숫자가 많아봤자 무의미하오. 나머지는 허망하게 죽을 가능성이 높소. 그러니 당신과 이청운 님만 교주를 상대하러 가고 나머지가 낙양에서 시선을 끌며 소동을 일으키는 게 나을 거요."
진소청이 아쉬운 듯 말했다.
"아쉽구려. 일 년만 더 수련했다면 같이 갈 수 있었을텐데..."
"......"
나는 지금도 충분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소청의 경지가 아예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 또한 절대지경임이 틀림없을진대, 그저 겸손하게 있을 뿐이었다. 이청운 또한 내게 미리 진소청이 셋 중에 가장 강하다고 말해둔 바가 있었다. 나는 이청운의 말을 생각해 냈다.
[ 백웅. 미안하지만 진소청은 교주공략에서 빼 주게.]
[ 왜입니까?]
[ 진소청이라면 나, 여동빈과 더불어 교주에게 일격을 가하기에 부족함이 없네. 그러나 현재의 진소청은 뇌신류의 미래 그 자체일세. 진소청이 죽으면 뇌신류는 끝장이야. 내 개인적인 욕심을 제발 이해해 주게.]
[ 하지만 교주에게 지면 미래가 없습니다.]
[ 그 몫을 내가 마저 담당하지. 내 모든 것을 걸고 교주를 막겠네.]
이청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현재의 진소청은 뇌신류 역대 최고의 종사인 이청운이, 내 흑요석을 통해 칠대절학의 무예경험을 이어받아서 최고의 역량으로 다듬어낸 완성된 극고의 천재! 나 또한 무인이었기에 그런 이청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5년 후의 진소청이라면 분명히 천하무림의 지존이 되고도 남았다. 십이율주와 대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소청이 창을 휘두르며 외쳤다.
"그럼 가겠습니다."
선발대로 뇌신류의 3대고수가 앞장서서 낙양으로 돌진했다. 그들 앞에는 교주가 만들어낸 듯한 농밀한 마력의 결계가 쳐져 있었지만, 천우진이 손을 흔들자 바로 입구가 생겨나 버렸다. 이윽고 그들은 강기를 쏟아내며 요란하게 낙양 성내에서 싸우기 시작했다.
쿠과과광
끼에에엑!
끄에엑!!
마물들이 찢기고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들 셋은 이미 수백 단위의 마물들을 척살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싸움이 격화되고 있으니, 낙양 내에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마물들이 드글거리는 게 틀림없었다.
한동안 그 기색을 지켜보고 있던 천우진이 눈을 빛냈다.
"결계의 중심이 이동했군. 바로 지금이오!"
"좋아!"
파앗
나는 즉시 천우진, 이청운과 함께 황궁 심처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우오오오 -
수백 - 아니 분명히 수천, 수만에 이르는 영(靈)이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그 영들은 결코 자연적으로 죽은 게 아니었기에 사기(邪氣)와 혈기(血氣)를 머금고 있었다. 거대한 분노와 원한이 공간 전체에 휘돌면서 암울한 음천(陰天)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 와중에 황궁 심처는 내가 알던 풍경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본디 명목뿐이긴 했지만 분명히 황궁의 건축양식이었건만, 이 실내는 완전히 이족 특유의 꼬불꼬불하고 기괴한 마력이 느껴지는 이계의 분위기였다. 그리고 높이가 칠 장에 이르는 거대한 제단(祭檀)이 궁궐 대신에 커다랗게 세워져 있었다.
제단의 최정상에는 한 인영이 서 있었는데, 그건 분명히 교주였다. 무면탈을 쓴 교주는 이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고, 그 밑의 제단에서 슬며시 다섯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호법사자!"
수신류 호법사자 독고준, 화신류 호법사자 한백령, 그 외의 수신류 장로 셋!
저들 다섯 명 모두가 천령단을 보유한 절세고수라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적수가 단번에 우리 앞을 가로막은 셈이었다. 만일에 교주가 우리 예상과 달리 건재한 상태라면 이 장소가 무덤이 될지도 몰랐다.
교주는 육합전성을 써서 내게 말했다.
[ 백웅 부교주. 이리 오라. 그대는 우리 편이지 않은가?]
나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낙양의 인간들이 수십만 명도 넘게 학살당했을 겁니다, 교주. 그들은 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입니까?"
[ 그런 사소한 얘기를 할 줄이야...]
교주가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 이 자리에는 그런 생면부지의 인간들보다 더욱 밀접한 자들이 희생하고 있지. 너는 그걸 모르고 있는가?]
"무슨..."
[ 백웅. 너는 영력을 지니고 있으니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교주의 수상쩍은 말에 전시안을 동원해서 근처를 떠도는 수천 수만의 영혼을 잘 살펴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몸을 부르르 떨었다.
"......!!"
이, 이럴 수가!
나는 대경해서 외쳤다.
"교주! 설마! 그럴 수가!!"
이윽고 교주가 광기를 함묵한 채 혈광(血光)을 눈에서 내뿜으며 대꾸했다.
[ 이 제단은 [옛 지배자]에게 직접 제물을 바치는 곳이지. 노예시장에서 거둔 모든 노예들... 그리고 풍신류의 모든 노예들을 바쳤다. 또한 모든 황족(皇族)과 백련교도들을 한꺼번에 바쳤지... 그 수는 삼만(三萬)이니, 은카이의 수면자가 사도를 부르는데 부족함이 없으리라.]
"으아아아아!!"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단순히 교주가 말한 제물들의 상징성 때문이 아니었다. 전시안과 백우선을 지니고 있는 내 뇌리에 이 장소의 기억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 모든 인간들이 이 제단에 꿇어앉혀져서 하나하나 칼로 심장을 도려지거나 내장을 뜯겨서 살해당했고, 심지어 그 중에는 갓난아이나 힘없는 노약자도 즐비했던 것이다! 반항하는 자는 장력에 맞아서 뇌수를 흘리며 머리가 터져죽기도 했다. 그 숫자가 무려 삼만 명이라니!
이건, 이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야!!
나는 분노해서 교주에게 외쳤다.
"교주,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서 법문을 모아야 합니까?! 인류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게 용서될거라고 생각합니까!!"
[ 삼만으로 백억을 구할 수 있다면... 정말로 값진 희생이 아닌가?]
되려 교주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 이제 은카이의 수면자가 삼황오제와 전면전을 벌이고 대전쟁의 서막이 오르면, 인과율은 완전히 엉망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가 되면 세상에 숨겨져 있던 법문의 행방도 단번에 드러나겠지. 진공가향은 코앞이다, 백웅 부교주.]
나는 더 말해봤자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입술을 꽉 깨물며 월요를 소환해서 힘을 끌어올렸다.
"날 도와주십시오, 여동빈!"
고오오오
내게 투선이 강림한다.
월요가 내 근처를 떠도는 와중에 화룡신검이 창노한 불꽃을 토해내며 울었다. 분노와 함께 소환된 대라신선이자 투선, 여동빈은 곧장 내 몸에 내려앉았다. 여동빈은 잠시 눈을 반개하고 있다가 교주에게 화룡신검을 겨누었다.
[ 교주여. 마도(魔道)로 인간을 구할 수는 없다.]
교주가 여동빈의 말에 비웃음을 지었다.
[ 그래서? 너희 천계는 인간을 구해줄 수 있는가?]
[ ......]
[ 오라, 검선이여. 그리고 뇌신류의 종사여.]
교주의 무면탈에서 기이한 혼돈이 일렁였다.
[ 오로지 승자만이 이 자리에서 정의를 논할 수 있으리라!]
절대지경의 고수들은 의념을 겨누어 교주를 향했다.
동시에 천령단의 소유자들이 무한의 내공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교주 토벌전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