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0 천계(天界) =========================================================================
"잘 해결됐잖소."
"그런 문제가 아니오! 삼청이란 존재는..."
천우진이 막 발작하려 할 때 망량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진정시켰다.
"사제. 백웅이 원래부터 독특한 자라는건 알고 있었잖은가? 지금은 쓸데없이 심력을 낭비할 때가 아니니 가장 중요한 의식에 집중해 주게."
"하지만..."
"사제도 알다시피 그가 정말로 수상한 거악이었다면 스승님께서 가만두지 않았을걸세. 그래서 나는 백웅을 믿어."
"... 알겠습니다."
망량은 털썩 주저앉아서 눈을 감았다.
"나는 술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으니 잠시 쉬겠네."
"하아."
천우진은 한숨을 쉬며 삼황오제의 봉선의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천우진이 준비가 끝나자 나를 부르며 말했다.
"백웅. 나는 이번 의식 동안에 아무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을거요."
"왜?"
"선지자가 억지로 봉선의식을 진행시킨 여파 때문에 인과율을 안 건드리려고 조정을 해야할 것이오. 분한 일이지만 내 능력으로는 인과율을 폭주시키지 않는것만으로도 힘에 벅차오. 그러니 삼황오제와의 협상은 전적으로 당신의 능력과 운에 달려 있소."
"음."
천우진이 미간을 모았다.
"말해두지만 이번 봉선의식이 끝이오. 실패하면 하늘사다리가 내려올 때까지 두 번 다시 할 수 없소. 그걸 잘 기억하시오..."
"망량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작하면 안되겠소?"
"너무 큰 의식인데다 인과율의 혼재 때문에 극도로 어려워져 버려서, 아직 지선도 되지 못한 사형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없소. 그러니 신경쓰지 말고 자기 일에나 집중하시오."
"알았소."
스아아앗!!
잠시 후 천우진의 전신에 신령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예전에 봉선의식을 진행할 때와는 달리 그는 모든 술력을 여기에 쏟아붓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청운이 단검을 손에 쥐고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갔다.
"인신공양같은 잡일은 내가 하지. 자네는 집중하게."
"네."
고오오오
잠시 후 삼황오제가 출현할 때 특유의 어둠이 천지에 깔렸다. 그리고 예전과 같이 고대 귀신들의 만신전이 허공에 나타나더니, 휘황찬란한 어전 한가운데에서 오제 전욱이 모습을 드러냈다.
' 일단 성공이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초 목표는 오제 전욱을 불러내는 것!
지난번에는 소호 금천을 불러냈다가 피를 보았지만 이번에는 전욱의 동상이 있으므로 노리고 소환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오제 전욱이라면 지난번에 내게 꽤 호의적이었으므로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
삼황오제 전욱은 나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 나는 황제의 후예인 오제(五帝) 전욱(?頊). 나를 부른 자 누구인가?]
"전욱이여! 저는 인간 백웅이라 합니다. 우선 오제를 뵙는 예로써 제물을 바치겠습니다."
[ 그리 하라.]
이청운이 바로 제갈유룡의 예비육체에서 심장을 뜯어내서 바쳐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동안 그 영력을 음미하는 듯 하던 전욱이 말했다.
[ 기본 예의는 되어 있군. 그래, 무슨 말을 하려고 나를 불렀는가?]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현재 천계에서는 백련교의 전횡을 참지 못하여, 삼황 여와께서 분노하셔서 하늘사다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는 인간세상에 큰 재앙이 다가오는 일이므로 부디 철회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 천제 계획을 거부하라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충분한 공물을 준비했으니 아무쪼록 통촉해 주시옵소서."
내가 무릎을 꿇고 간절히 빌자, 전욱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이윽고 하늘이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전욱의 감정변화를 의미하는 듯 했다. 그는 나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
[ 월요의 주인 백웅이여. 이 모든 건 그대의 탓이다.]
"네?!"
역시 전욱은 보자마자 내가 월요의 주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또한 출현할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건 그렇다치고 왜 내 탓이라는 말인가? 전욱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 여와께서는 그대에게 지상세력의 균형을 이루고 폭주를 막으라 명령하셨지. 그러나 그대는 전혀 부여된 임무를 실천하지 못했다. 결국 여와께서는 고대의 맹약을 수호하기 위해 행동에 나서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임무를 실천하지 못하다니요? 이미 백련교주가 낙양에서 물러나게끔 하겠다고 여동빈을 통해 천계에 상소를 올렸습니다만..."
[ 어리석은!]
전욱이 갑자기 호통을 쳤다.
[ 문제가 뭔지 전혀 모르는구나. 그 상소를 받은 시점에서 백련교주라는 자는 이미 마(魔)와 결탁하여 무시무시한 계약을 맺었다! 인간을 상대라면 그따위 기만이 통할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같잖은 짓거리에 불과할 뿐. 우리는 중원대륙에 [옛 지배자]의 영향력이 더 퍼지는 걸 막기 위해 특단의 대책을 내린 것이다.]
"......?!"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전욱은 다른 자들과 달리 극단적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고, 하늘사다리를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뭔가 확신이 있기에 저렇게까지 말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옆에서 비틀거리며 망량이 걸어오더니 전욱에게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오제 전욱이시여! 하찮은 인도(人道) 망량이 질문할 기회를 주실 수 있겠나이까?"
[ 허(許)한다.]
"그 말씀은... 설마 백련교주가 이미 복마전의 지배자와 정식계약을 체결하여 마신(魔神)의 힘을 정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 그렇다.]
오제 전욱은 약간 분노한 듯 얼굴의 어둠이 폭사하듯이 일그러졌다.
[ 그 자는 무생노모의 법문을 찾으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더구나. 어차피 인간의 힘으로, 아니 삼황오제의 힘으로도 완성하는게 불가능한 법문일진대! 그 건방진 인간에게 천계의 힘을 보여주리라.]
고오오오오!!
전욱의 분노가 몰아치자 지상에 거대한 진동이 울려퍼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한 순간, 상상도 하지 못할 범위로 진동이 퍼져나가며, 대지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보나마나 중원대륙 여기저기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고 있으리라.
나는 삼황오제의 힘에 소름이 돋았다. 단지 분노만으로도 대륙에 거대한 횡액을 일으킬 수 있다니?!
' 이게 신의 힘...!!'
전욱이 손을 휙하고 저었다. 그러자 반쯤 투명해져 있던 공양제물들이 다시 원래 색깔로 되돌아왔다.
[ 공양은 받지 않겠다. 본제(本帝)가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걸 갖고 일을 수습할 생각이나 하여라.]
"하면 어찌..."
[ 중원의 인과율이 더 무너지기 전에 그 자를...]
쿠구구구구궁!!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 끼에엑!!]
귀신 도올이 머리를 마구 휘저었다.
[ 히이이이이익!!]
[ 수면자가, 수면자가 힘을 발휘한다!!]
[ 큰일났어!!]
[ 옛 지배자와 전쟁한다!!]
오제 전욱이 보유한 만귀의 만신전이 날뛰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 존재들은 소신격인데도 멀리에서 몰아치는 강대한 마력의 파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 했다. 이 마력은 나조차도 농밀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사악하고, 무섭고, 엄청난 무언가였다.
오제 전욱은 분노하며 말했다.
[ 흐흐... 결국 그 빌어먹을 놈이 일을 저질렀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 더 이상 경고는 없다! 칠일칠재의 유예는 여기서 끝이다.]
"네?! 왜죠?!"
[ 개구리 놈이 선공(先攻)했기 때문이다...!!]
전욱의 어둠이 거대하게 치솟았다. 그는 마치 어둠으로 이루어진 거인처럼 변해버린 채 허공을 향해 울부짖었다.
[ 인과율이 천계의 강림을 허락했으니 이제부터 무력행사에 나설 것이다. 개구리 놈은 삼황오제의 힘을 얕본 걸 후회하리라!]
파앗
동시에 오제 전욱과 만귀전이 씻은듯이 사라져 버렸다. 하늘 또한 암운이 걷히고 원래대로의 하늘로 되돌아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봉선의식이 실패한 건 확실한데 오제 전욱이 무슨 행동을 한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할 수가 없어서 멍청히 서 있었고, 이청운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청운은 뭔가를 감잡은 건지 망량 쪽으로 와서 말했다.
"망량. 몸은 좀 괜찮나? 자네라면 무슨 일이 일어난지 알고 있겠지?"
"크윽... 이럴수가..."
망량은 몸이 안 좋아서 안색이 새파래진 상태로 휘청거렸다. 그는 잠시동안 이를 악물고 버티다가 몸에 힘이 없는지 풀썩 주저앉았다. 이청운이 그를 부축하자 망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진이가 기절했습니다. 이청운 님이 그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염려 말게."
"그가 깨어나면 이야기하지요."
이청운은 선 채 기절해있는 천우진에게 다가가서 거대한 기를 불어넣으며 운기요상을 시행해줬다. 무한한 천령단의 힘 덕분인지 이 세상 그 어떤 기공치료보다 효과적이었고, 이윽고 천우진은 각혈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커헉!"
"정신이 드오?"
"무슨 일이 있었소? 의식을 유지하려다가 기절해버려서..."
좌중의 시선이 망량에게로 쏠렸다. 이 중에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건 망량 뿐이었기 때문이다. 망량은 한참동안 정좌한 채 침묵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잘못 짚고 있었소. 천계를 막으려들기 전에 백련교부터 멈춰세워야 했소."
"망량. 무슨 말이오?"
망량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까 오제 전욱의 말 기억나오? 백련교주라는 자는 이미 마(魔)와 결탁하여 무시무시한 계약을 맺었다! 라고 했던 말을..."
"기억나오. 하지만 백련교주의 수신류는 원래부터 수신 크타아트를 연구하여 마와 연관되어있는 게 아니었소?"
"그게 아니오. 그들이 보유한 마의 힘은 순수한 근원의 혼돈에 가까운 것. 삼황오제가 염려할 정도로 세상의 균형을 뒤바꾸는 건 아니지. 오제 전욱이 말한 의미는 좀 더 단순한 것이오."
망량의 말이 이어졌다.
"백련교주는 낙양을 점거한 후 [옛 지배자]와 정식 계약을 맺은 거요."
"그건 알고 있는 사실이오. 그 존재를 달래면서 10년 내로 십이율과 고려를 제물로 바치겠다고..."
"그게 아닐 거요."
"뭐?"
"교주가 당신을 기만했다는 얘기요, 백웅."
망량은 씁쓸하게 말했다.
"교주에게 있어서 당신은 곁에 두고 있으면 복(福)을 불러들이는 더할나위없는 아군. 그렇기에 당신에게 많은 배려를 해 줬고 대우를 해 줬지만, 교주 또한 당신을 진정으로 믿지는 않았을 것이오. 당신이 거부하며 떠날만한 이야기를 해줬을 리가 없잖소. 특히 내 영향으로 인신공양과 [옛 지배자]를 싫어하는 당신에게..."
"......!!"
"전욱이 저렇게 말한 걸 보면 그정도 수준의 계약이 아니오. 교주는 어설프게 약속을 하지 않고, 확실하게 [옛 지배자]의 힘을 빌리면서 인신공양을 했을 게 분명하오. 그 위험도는 모르긴 해도 굉장히 높아져 있을 거요."
"아..."
있을 법한 일이다. 단지 내가 교주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걸 굳이 생각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천계는 그걸 감지했기 때문에 천제를 내려서 뒤늦게라도 은카이의 수면자가 영향력을 뻗치는 걸 막으려 한 것이며, 동시에 백련교주가 법문을 모으면서 낙양의 대결계를 부수는 위험성을 차단하려 한 게 분명하오."
"아니, 그건 무슨..."
나는 황당했다.
교주가 나를 속였다니?
물론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일이 너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천제단에 공양할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내가 멍하니 서 있자, 망량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확신할 수 있소. 교주도 지금 천계가 행동에 들어갔다는 걸 느꼈을 테니 낙양에 [옛 지배자]의 마력을 정식으로 불러들여서 인신공양을 시작했을 거요. 마병(魔兵)을 소환하고 사도를 불러들일 준비를 하고 있겠지."
듣고 있던 천우진이 대꾸했다.
"사형. 지금 낙양은 지옥이겠구려."
망량은 음울하게 말했다.
"그렇네. 앞으로 천계의 신선들과 [옛 지배자]의 사도가 부딪히며 더한 지옥이 되겠지. 어쨌든간에 낙양은 끝장이야."
"믿을 수 없소."
나는 황망한 눈빛으로 망량을 바라보며 말했다.
"교주가 어떻게..."
지금 망량의 말대로라면 보통 일이 아니다.
교주는 낙양 전체를 통째로, [옛 지배자]의 입에 던져주며 인신공양을 할 거라는 소리다! 거기에 사는 인간들의 육체와 영혼은 난도질당해서 먹잇감이 될 것이다.
나는 암만 그래도 교주가 그 정도로 극악무도한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내심 충격에 빠졌다. 망량은 나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백웅... 주작 제갈유룡과 교주는 똑같소."
"뭐가 똑같단 말이오?"
"그들 모두 인간을 구원하려 하지만, 그에 따르는 사소한 희생을 무시하는 자들이오. 교주는 처절한 인간의 운명을 구하고 싶어했지만, 백련교인이 아닌 다른 자들이 몇 명이 죽든간에, 그에게는 고려할만한 대상이 아니었던 거요... 주작과 다를 게 없소."
한탄하듯 말한 망량이 말했다.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구려... 교주를 없앱시다. 교주를 없애지 않는다면 천계와의 전쟁이 격화되어서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이 씨몰살당할 거요."
나는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천계가 이긴다고 해도 인간에게는 미래가 없잖소!"
"그렇다 해도 [옛 지배자]에게 잡아먹히는 것보다는 낫소. 천계의 자비에 걸어보는 수밖에 없소..."
"빌어먹을..."
나는 말하는 중에 너무 암울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백련교주를 없애야 하는데, 그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성공한다고 한들 대학살은 모면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 기가 막힌 일인 것이다.
' 어디서 꼬인 거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침묵하다가 말했다.
"일단 낙양으로 가 봅시다."
낙양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해야 행동을 정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