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29 천계(天界) =========================================================================
나는 이청운에게서 뇌신류의 연구결과를 대략 6일 동안 들은 후 움직일 수 있었다. 이청운의 당초 예상으로는 이틀이었으나 내 재능이 둔한데다가, 막상 이야기를 풀기 시작하자 이청운이 설명할 게 훨씬 많아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 기간동안 종남파에서 숙식하며 뇌신류 고수들과 함께 수학했다. 형(形)을 수련하고 이론을 배웠으며 이청운이 직접 펼쳐내는 오의를 계속해서 관찰했다. 당장 내가 익힐 수는 없어도 아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었다.
마지막 날, 이청운이 말했다.
"이로써 백웅 자네에게 우리가 연구해낸 칠대절학의 가능성 8가지를 모두 가르쳐 주었네."
"감사합니다."
이청운은 훗하고 웃었다.
"뭐, 자네가 이 모든 걸 단시일에 터득하는 건 무리겠지. 하지만 전생을 하며 갈고닦는다면 지금의 지식과 경험이 큰 도움을 줄 것일세."
"그렇겠지요."
"칠대절학의 파생오의 8개를 모두 연마해서 실전에 쓸만한 수준이 된다면 무쌍패도 눈에 보이게 될 게 분명하네."
이 오두막에는 나와 이청운밖에 없었다. 이청운이 은근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 그러니 뇌신류를 너무 미워하지 말게. 뇌신류는 백웅 자네를 미워하지 않아."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려고 노력중입니다."
"자네와 이광은 좋지 않은 인연으로 엮여 있지. 그 악연은 오로지 당사자끼리만 해결할 수 있는 것... 그래서 나는 유치하게 자네 둘을 화해시키려 하지 않았네. 하지만 차후의 전생에서 어떻게 해결이 나든, 인간이란 게 살면서 어떻게든 바뀔 수 있는 생물이라는 걸 감안해줬으면 하는군."
"......"
"내가 급사한 바람에 광아의 인성이 급격히 편협해진 건 사실이야. 그의 인생에 찾아온 뜻밖의 불행이 대협의 기질을 꺾어버린 셈이었지. 복수라는 명분에 휘둘리다가 현실과 종종 타협하는 일이 반복되었으니 어찌 너그러울 수 있었겠나... 이해해줘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네."
나는 그의 말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겁니다. 그가 진정한 대협이었다면 그 모진 고난에도 꺾이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밀고 나갔겠죠. 그런 이유로 그를 봐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역시 그런가."
"네. 이번 생의 이광은 어떤지 몰라도, 저는 기필코 그 빚을 제대로 정산하고 말 겁니다."
단지 산적해있는 굵직한 일이 너무 많기에 우선순위를 뒤로 해두고 있을 뿐이다. 내가 물러서지 않자 이청운은 한숨을 쉬었다.
"알았네. 그럼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지요. 공양물을 충분히 모아서 바로 태허천존의 대운에 도전할 생각입니다."
"문제는 천우진이군. 그는 회복되었을까?"
나는 흠칫했다. 사실 그것때문에 마음이 급한데도 최대한 효율적으로 기다릴 작정으로 이청운의 무예 가르침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망량과 함께 가보는 수밖에 없을 듯 합니다."
"혹시 모르니 나도 같이 가겠네. 뜻밖의 강적이 있을 경우 내가 상대해 주지."
"감사합니다."
파앗!
나는 이청운, 망량과 함께 사불상을 타고 태산의 천제단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놀랐다.
우우우우 -
마도(魔道)의 소굴같았던 음산한 파괴의 현상이 완벽하게 정돈되어서 신전같은 영성을 뿜어내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널려있던 시체들은 모두 공동묘에 안장되어서 사령(死靈)들이 생전의 고통을 정화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한 마디로 여기는 서 있기만 해도 편안해지는 영지(靈地)로 변모한 셈이다.
망량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중얼거렸다.
"완벽하구려. 역시 내 사제요."
"천우진은 어디 있지?"
천우진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먼 발치에서 들려왔다.
"여깄소."
"천우진!"
근처의 동굴에서 터벅터벅 걸어나오는 건 환신 천우진이었다. 그는 짜증섞인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다가 망량을 쳐다보자 확 얼굴이 밝아졌다.
"어, 사형! 왔구려."
망량이 빙긋 웃었다.
"오랜만일세 사제."
"그간 어디 가 있었소?"
"천계의 등용문을 뚫고 곤륜산에서 수학하던 중일세."
"지선(地仙)까지 따고 내려왔으면 좋았을텐데."
"그러고 싶었지만 지상의 상황이 급변해서 말이지..."
회포를 풀던 망량이 힐끔 천제단을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빠른 시간 내에 태산의 천제단을 복구시켰군. 이건 역사에 남을 위업이야. 사제는 진정 인세 최강의 술법사라 할 수 있네."
그러자 천우진은 왠지 기분좋은 걸 감추듯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 이 정도야..."
그 때 상황을 지켜보던 이청운이 앞으로 나서며 포권했다.
"반갑네, 천우진. 나는 뇌신류의 종사인 이청운이라 하네."
"이야기는 들었소. 반갑소."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백웅 대신 내가 설명해도 되겠나?"
천우진이 의외라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상관없지만 왜 그러시오?"
"자네가 백웅과 이야기할 때는 쓸데없이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아서 말일세."
"흥..."
잠시 후 이청운이 천우진과 헤어진 후 삼황오제에게 봉선의식을 치뤄서 어떤 결과를 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뇌신류와 어떤 수련을 했는지를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천우진은 골치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선지자, 그 놈이 무식야매하게 인과율을 꼬아버렸겠군. 술법 대신 마법을 사역하는 존재니까 더 심하게 꼬였을거야. 그럼 그놈 말대로 봉선의식을 또 실행하는 건 극히 위험한 짓이 되어버렸소."
"어떻게 안 되겠소?"
"글쎄... 그건 나도 장담을 못하겠소. 어떻게 보면 의미가 없다 할 수도 있으니."
"의미가 없다고?"
"삼황오제가 워낙 제멋대로인 존재들이라 그 제약이 있든 없든 성공율이란 걸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오. 자기들 내키는대로 사는게 분명한지라."
"......"
저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알 수가 없었다. 곰곰히 생각하던 천우진이 말했다.
"태허천존의 대운을 이용한다고 했지. 그럼 공양물은 뭘로 할 생각이오?"
"수천 년치의 수기에 맞먹는 보물이 필요하겠지. 그래서 전국옥새와 순어구를 바칠 생각이오."
"화룡신검은?"
"그것도 바칠 생각이오."
천우진은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말했다.
"혹시 그걸로도 모자랄지도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하시오. 그리고 더 필요할 거 같소."
"뭣..."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전국옥새는 소호금천이 직접 만들어낸 최고위 보패 아니오? 거기에다 순어구에 화룡신검까지 바치는데도 모자랄 가능성이 있다는 거요?"
"간을 봐야한다는 소리요. 의식을 한번만 치르는 게 아니라 두 번 치르는 거잖소."
"으음."
"태허천존에게 바칠 제물, 그리고 삼황오제에게 바칠 제물. 따로따로 마련해야 하오. 그리고 삼황오제에게는 이번에야말로 전국옥새를 바쳐야겠지. 그러면 태허천존에게 바칠 것은 따로 마련해야 하는 셈이오."
천우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망량이 말했다.
"그럴줄 알고 우리가 돌아다니면서 기진이보를 모아왔네."
"어떤 걸 모아왔소?"
스윽
망량은 품속에서 동상을 꺼냈다. 그것은 삼황오제 전욱의 동상이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태경촌에 있던 화씨일족의 봉황조각도 같이 꺼냈고, 뿐만 아니라 오화칠금선에 처음 보는 비파도 있었다. 망량의 말이 이어졌다.
"여기에 백웅이 백우선도 갖고 있고 교주가 비등과 목갑도 내 주었지. 이걸 싸그리 다 바치면 충분하겠지."
"확신할 수는 없소, 사형. 태허천존은 워낙 예측불가한 존재라..."
말끝을 흐린 천우진이 말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천제단을 모두 복구시킨 덕에 지상의 영성은 크게 높아져 있소. 선지자가 뒤틀어놓은 균형도 천제단의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인과율이 불안정한 건 사실이므로 기회는 딱 한 번 뿐일 거요."
"......"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하겠소."
우리는 천우진의 인도에 따라 공양물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모은 보물들을 한번에 모아서 정렬하자 생각보다 그 양이 많았다. 제단에 배열된 공양물을 보던 천우진이 질린 듯 말했다.
"보통 인간은 이 중 하나를 얻으려고 평생동안 모험해도 부족할진대... 어떻게 다 모았단 말인가."
이윽고 천우진은 하나하나 공양물을 세심하게 살피다가 말했다.
"사형. 태허천존의 공양의식은 사형이 진행해 주시오."
"알겠네."
망량은 선뜻 앞으로 걸어나오며 대답했지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질문했다.
"망량이 해야하는 이유가 있소?"
천우진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삼황오제의 봉선의식 쪽이 훨씬 규모가 크고 어려운 의식이오. 내가 태허천존의 공양의식을 진행해도 되지만 술력이 모자라면 봉선의식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지오. 그래서 사형이 먼저 진행해줬으면 하는거요."
"아."
"시작하는군."
천제단에 빛이 흘러나왔다. 망량은 확실하게 대의식을 주관할 정도의 술법력을 쌓은 것이다.
망량은 먼저 주문을 외쳤다.
"오시오, 태공망!"
쿠르릉
제단 위에 태공망의 환영이 떠올랐다. 그는 소환되자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이었다.
[ 날 왜 부른거지?]
"풍화비파(風火琵琶)를 바칠터이니 백웅에게 존재하는 태허천존의 기운을 제거하여 재선택권을 주십시오."
[ 음... 그런 거군. 알았다.]
파앗
태공망은 머리가 좋아서 금새 알아들은 듯 풍화비파를 냉큼 집어들고는 사라져 버렸다. 풍화비파는 망량이 구천현녀에게 성적이 우수한 댓가로 받은 보패로서, 오화칠금선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었는데도 바쳐버린 것이다.
"영보천존의 화신이여... 나 망량이 부르나니... 강림하소서!"
그리고 망량은 재선택권이 부여되자마자 연속으로 주문을 외워서, 이번에는 태허천존을 부르기 시작했다.
"사형도 그 동안에 엄청난 수련을 쌓은 것 같군. 삼청의 공양의식이라 하면 일개 술법사가 엄두를 낼 수 없는 대의식이거늘..."
쿠오오오
천우진이 감탄하는 동안에 망량의 주문이 흘러나오며 어슴프레한 오색환영이 쏟아져나왔다. 태공망에 이어 태허천존의 소환도 성공시킨 것이다.
나는 빛으로 화하는 제단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이상함을 느꼈다.
' 뭐지?'
친숙한 혼돈(混沌).
그 기분은 아주 잠깐 흘러나왔다가 사라졌다. 나는 이게 무슨 기운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런 기분도 아주 잠시였고 이윽고 천제단 위에서 빛의 기둥이 뻗어오르며 허공에서 태허천존의 모습이 나타났다.
태허천존은 나타나자마자 우리에게 말했다.
[ 너희는 무슨 일로 나 태허천존을 불렀느냐...?]
망량은 태허천존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희는 태허천존의 권능이신 대운(大運)의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 천제단에 상응하는 제물을 바치나니 백웅에게 대운의 가호를 부여해 주소서, 태허천존이시여."
[ 흐음...]
태허천존이 허공에 뜬 채로 새하얗고 빛나는 손을 뻗어서 천제단에 있는 제물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 요순의 보패... 봉황조각... 그리고 제갈량의 보패... 오화칠금선... 보패를 3개나 바친다라... 아주 훌륭하구나.]
"감사합니다... 그럼 가호를..."
[ 하지만 이걸로는 모자라다.]
흠칫!
장내에 있던 우리 모두가 놀랐다. 자기 입으로 보패를 3개나 바치는지라 훌륭하다고 하면서 모자라다니 저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가 당혹감을 숨기고 태허천존을 쳐다보자 태허천존이 말했다.
[ 삼청(三淸)의 화신인 나를 직접 불러내서 공양하는 일 자체가 은주시대 이래로 없었던 일... 나는 좀 더 큰 댓가를 받을 필요성을 느낀다...]
"태허천존이시여! 이건 굉장히 큰 제물이 아닙니까?!"
[ 글쎄...? 너희는 좀 더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은데 나한테 좀 더 줘도 되지 않겠느냐?]
"......"
[ 어디보자, 저기 있는 전국옥새라던가... 월요라던가...]
은근슬쩍 의뭉스럽게 말하는 태허천존의 모습은 얄밉기 짝이 없었다.
' 다 알고 있잖아!'
그래도 천계의 최상위 존재라는 걸까? 태허천존은 강림한 순간부터 우리가 보패와 기물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제물을 아끼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전부 다 내놓으라고 반협박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전국옥새와 월요를 바쳐버리면 큰일난다. 왜냐하면 삼황오제에게 바칠 게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태허천존에게 말했다.
"태허천존. 작작 좀 하쇼! 대운의 가호를 바치는데 적당한 제물을 준비했는데 왜 이리 욕심을 부리시는 겁니까?"
"배, 백웅!"
망량과 천우진이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것이 대라신선 중에서도 영보천존의 화신이라 불리는 대존재에게 정면으로 따지고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괘씸죄를 사서 소멸되어도 할 말이 없는 행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태허천존을 직접 대하자 그리 무서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렇기는 커녕 이 놈을 윽박지르고 싶다는 감정이 치솟아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태허천존은 약간 찔끔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 어... 그 뭐냐... 너희가 삼황오제만 신경쓰니까 심술이 나서 그렇지...]
나는 짜증이 나서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중에 천존한테도 큰 공물을 드릴테니까 걱정 마십시오."
[ 진짜냐?]
"네, 진짜."
태허천존은 흐뭇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 좋아 봐 줬다. 요순의 보패와 오화칠금선만 가져가 주마.]
"그럼..."
[ 백웅에게 대운의 가호를 내리겠다.]
그 때였다. 망량이 급히 끼어들며 말했다.
"혹여 삼황오제께서 대운의 가호를 불편해하시지 않겠습니까?"
[ 나는 모르겠군... 불편해할 거 같진 않다.]
귀찮은 듯 대충 대답한 태허천존이 순어구와 오화칠금선을 자기 소매에 털어놓고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 또 불러라!]
"......"
태허천존이 사라져 버리자 우리는 뭔가 벙찐 기분이 들었다. 설마설마 했지만 내가 윽박지르는 방법이 통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특히 천우진은 마치 해괴한 괴물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배... 백웅. 당신 뭐하는 사람이오? 삼청을 협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