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25 천계(天界) =========================================================================
나는 진소청과 함께 종남파에 도착했다. 종남파에서도 내가 도착한 장소는 호수로서, 종남파 장문인 연정홍이 애용하는 은거지였다. 또한 이 호수 근처에서 나는 이광과 비무를 벌여서 살벌한 접전을 치른 적이 있었다.
파앗!
그리고 나와 진소청이 호수 근처를 조금 걷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번갯불과 함께 이청운이 뇌신지혼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역시 아예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그는 내게 말했다.
"잘 왔네, 백웅!"
"이청운 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왜 백련교를 막으신 건지..."
내가 이청운에게 항의하자 그가 훗하고 웃었다.
"짐작했겠지만 이렇게 다시 보기 위해서지. 지금 낙양의 전조가 심상치 않으며 천계에서 하늘사다리를 내리려 한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일세."
"......"
그것까지 알고 있나?
나는 그를 경계하며 질문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내신 겁니까?"
"걸선(乞仙)을 통해서 기본적인 강호의 정보력을 장악했고, 추가적인 천계의 정보는 내 개인적인 비법으로 알아냈지. 난데없이 천계라는 게 끼어들어서 백련교도 참 곤란하겠어."
나는 놀랐다.
"걸선? 전대 개방 방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그는 내 친구지."
"......!!"
걸선(乞仙)!
그는 정파의 삼대기인(三大奇人) 중 한 사람이었으며, 현 개방방주인 천룡개 구익환의 스승이었다. 태산노옹이나 신승과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과거 무림에서 걸선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고 한다. 호협하기를 좋아하는 뜨거운 협객의 기질이 있으며 무공 또한 극히 고강하다는 게 걸선의 소문이었다.
하지만 삼대기인 걸선이 설마 뇌신류 호법사자 이청운의 친구였다니? 연배로 볼 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나 전혀 뜻밖의 친분관계였기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청운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가 내게 하러 온 말이 뭔지 알고 싶군."
나는 심정을 가다듬고는 이청운에게 말했다.
"천제가 내려오면 백련교 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재액이 닥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한은 앞으로 사십여 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청운 님과 뇌신류 고수들이 도와 주셨으면 합니다."
"역시나군."
예상했다는 듯 중얼거린 이청운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교주는 예전부터 그랬지. 마음속에는 천 가지 꿍꿍이를 감추고서, 적아를 구분치 않고 현실적인 선택만 했었지. 그리고 이제는 뇌신류에 부탁을 하게 된 건가..."
"......"
"백웅. 한 가지 말해두자면, 내가 일부러 구파일방에서 백련교를 막아서면서 자네를 부른 것도 같은 용건일세."
"네?"
"나 또한 백련교에 연수를 제안하고자 했네."
충격적인 말!
' 뭐... 뭐라고?'
나는 이청운이 괜히 말을 지어내는 게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래서 선뜻 믿지 못하고 그저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왜냐하면 백련교는 뇌신류를 몰락시키고 내쫓은 원수지간인데, 뇌신류에서 먼저 손을 뻗으려 했다니?
이청운이 씁쓸하게 웃었다.
"난 바보가 아닐세. 아무리 뇌신류의 원한이 중하다 한들, 세상이 멸망하고 나면 그게 무의미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또 한 가지로, 그 원한조차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탓이 크지만..."
"......?"
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백웅. 부탁 하나 해도 되겠나?"
"말씀하십시오."
"내가 교주를 만나게 해 주게."
갑자기 이야기가 너무 급속도로 진행되는 느낌이다. 나는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잘 파악이 되지 않아서 머리가 황망해졌다. 이청운의 몇 마디 말에 논리가 진탕되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잠시 후 진정하며 말했다.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요."
이청운이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교주가 그 동안 칠대절학을 얼마나 깨달았는지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네."
"확인해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자격을 알아본다는 말일세. 교주가 수준미달이라면 우리 쪽에서 동맹 거절이야."
"......"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쩍 벌렸다.
세상에 천하의 백련교주에게 자격과 수준을 운운하다니!
도대체 이 광오한 자신감은 어디서 비롯된다는 말인가? 이청운은 단연컨대 내가 여태껏 보아왔던 모든 무림인들 중에서 가장 광오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이청운의 역량이 호법사자를 훨씬 초월하며, 수십 년 전에 백련교주와 접전을 치를 정도의 절대지경의 초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대라신선조차 때려잡는 백련교주의 신위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던 나로서는 이청운의 자신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 이... 이게 바로... 뇌신류이며 그 종사인가.'
나는 별 수 없이 이청운의 말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아, 알았습니다."
"따라가는 건 진소청 하나로 족하겠군."
파앗
나는 이윽고 진소청과 이청운을 태운 채 교주가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허공에 떠서 명상을 하고 있던 교주는 난데없는 방문에 감각을 이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교주의 찌를듯한 시선이 느껴짐과 동시에 이청운이 사불상에서 내리며 말했다.
"간만이군, 교주."
[ ......]
교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꽤 당황한 듯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 ... 그랬군... 뇌신류의 부활에 대해 억측은 해 보았지만, 너무 황당해서 믿을 수가 없었거늘... 그래도 이게 진실인가...]
"후후후."
[ 오랜만이오, 이청운.]
교주의 신형이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 그 때 천령단이 와해되고 단전이 깨진 채 전신의 혈맥이 회복불가능이었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회복한 거지?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살아있었던 건가?]
그러자 이청운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텐데? 사라졌던 연결고리가 다시 이어졌으니."
[ ......]
"정말이지 의뭉스럽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른게 없군."
교주는 침묵했지만, 나는 그 침묵이 왠지 당황한 기색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방금 전 이청운의 말은 별것 아닌 것 같았지만 교주의 핵심을 찔러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이청운의 말뜻을 알아내려고 머리를 굴렸지만 그 때는 이미 대화가 재개되고 있었다.
[ 그래서 나를 치러 여기까지 온 건가?]
"아니. 교주 당신과 정면대결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야. 그렇게 할 리가 없잖아."
그렇게 대꾸한 이청운이 검지손가락으로 교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잘 배웠는지 확인하러 왔다. 아주 쉽고 간단하게 배우고 있으니 스승으로서 확인을 해 봐야하지 않겠나?"
잘 배웠다니?
스승?
이청운의 말은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나열되고 있었다. 나는 이청운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궁금했으나 지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교주는 머리를 굴리다가 이청운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말했다.
[ 내 깨달음을 보고 동맹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건가?]
"눈치는 예나 지금이나 빠르군."
교주는 약간 화가 난 듯 으르렁거렸다.
[ 건방지군... 오십 년 전, 이청운 그대는 내게 패배했다. 그때부터 쭉 죽어있었으면서, 그때보다 한 단계 발전한 내게 망발을 하는가.]
"푸하하하!!"
이청운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봐, 교주. 내가 현세에 되살아난 후 매일같이 생각했던 게 뭔줄 아나? 바로 그 날, 내가 왜 패배했는지를 계속 생각했어. 그리고 나는 이유를 알아냈지."
[ 뭐라고?]
이어진 이청운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뇌신류에 배신자 따위는 없었고, 당신은 내 제자였다. 그러니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거지. 당신은 시시때때로 나를 관찰하며 뼈를 깎는 수련으로 약점을 찾았는데, 나는 당신을 전혀 모르고 있었거든. 그 날도 모든 준비를 철저히 마치고 나를 부른 게 아니었던가?"
[ ......]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이었을 뿐. 나는 이제 당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게 되었으며, 원영신이 뭔지도 알았으니 두려워할 게 없다."
스윽
이청운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좌중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굳으면서 팽팽한 긴장감이 차 올랐다. 이청운과 백련교주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는 게 대자연의 변화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고, 그 증거로 천공의 운해(雲海)가 산산히 흩어지며 살기로 공간이 일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쿠구구구...
나는 그들의 대치를 지켜보면서도 도저히 방금 전의 대화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이청운이 스승? 교주가 제자? 교주가 뇌신류였나?'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스승과 제자라는 건 애시당초 원수관계인 두 사람에게 있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이청운이 뭔가 숨겨진 비밀을 은유했고, 교주는 그 비밀이 정답이었기 때문에 이청운의 말에 꿀먹은 벙어리가 된 게 분명했다.
제갈사가 내면에서 킬킬댔다.
[ 푸흐흐... 나는 알겠다. 원영신... 참 골때리는 능력이야.]
[ 뭔데?]
[ 몸을 준다고 약속하면 가르쳐 주지.]
[ 젠장. 꺼져.]
[ 크크크.]
제갈사가 허언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간다, 교주."
[ 으음.]
잠시 후 이청운이 서서히 창(槍)을 뽑아들었다. 내 기억으로 그가 창을 사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스으으으
이청운의 창은 조용했다.
단순히 움직이지 않는 정(靜)이라 한다면 특이할 일도 아닐 것이다. 무예의 기본은 부동심이며 자세유지이기 때문이다. 허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정중동(靜中動)이며 동시에 동중정(動中靜)이었다.
사위가 가라앉았다.
한참동안 나뭇잎이 떨어지며 무한과도 같은 정적을 유영했다. 그 시간은 눈을 두 번 깜박일 시간에 불과했으나,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는 흡사 하루와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정적을 깬 것은 교주의 새하얀 장인(掌印)이었다.
그 손은 찰나의 순간을 빙글 돌면서 내게 수천 개의 잔영을 보여 주었다. 속도가 극에 달하면 도리어 잔상이 보이는 것을 뛰어넘어, 의념으로 자신의 의지를 상대에게 새겨주는 심공(心功)으로 보였다.
이미 교주의 심천무량(心天無量)이 발동한 것이다. 검선 여동빈과 겨룰 때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리라.
수천 개의 손은 부드럽게 감싸듯이 내려앉았다. 그 움직임은 한없이 부드럽고 느렸으나, 손바닥 하나가 피부에 닿이는 순간 강철을 밀어낼 정도의 압력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은근한 끈기가 숨막히게끔 했다.
이것이 인간의 생각만으로 이루어진 현상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천수(千手)는 압도적인 현실감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덧 눈 앞의 현실은 공간째로 손바닥자국이 가득 패일 정도로 우그러지게 되었다.
그 순간 이청운이 번개로 변하면서 한 줄기의 기세를 쏘아보냈다.
뇌신지혼(雷神之魂)
운요섬(雲曜殲)
그 형체는 아무것도 벨 수도 자를 수도 없을 정도로 투박하게 보였으나, 완벽하게 천수의 압력을 걷어내며 중인들을 심공의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
저것은 무상(無常)이 무위(無爲)의 형태를 얻은 것.
모순되지만 그렇게밖에 형용할 수가 없다.
찌르릉!
팔랑거리면서 흩어진 천수가 천지와 함께 뇌령(雷靈)으로 흩어졌다. 뇌신(雷神)의 창(槍)이 스쳐지나간 상흔이 시공간을 갈랐다.
백련교주는 한 손을 가슴 앞에 세우며 배불(拜佛)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청운의 창은 일섬의 자세로 교주의 손에서 한 치 거리에서 멈춰 있었다. 세계가 그들과 함께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내 수준으로는 방금 전에 어떤 교환이 있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교주는 이번 초수에서 많은 걸 느꼈는지 중얼거렸다.
[ ... 무념(武念)이란 가히 처절한 것. 도달할 때까지는 멈출 수가 없다. 그것이 바로 무신(武神)이 내게 남긴 저주...]
"......"
[ 허나... 이청운 그대는 무념의 광기 없이도 도달할 수 있는가... 이것이 재능의 격차인가.]
교주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는 통한의 감정이 느껴졌다. 방금 전의 초수교환은 분명히 대등한 것처럼 보였지만, 교주에게는 약간의 열패감을 안겨준 모양이었다. 이청운은 자신의 창을 거두었는데, 그 순간 창극(槍戟)이 먼지처럼 변해서 사라져 버렸다.
파스스...
"어차피 진심으로 싸우면 이기는 주제에 말은 잘 하는군."
그렇게 대꾸한 이청운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동맹 성립이다. 천계든 뭐든 일단 쓰러뜨리고 나서 결판을 내자고."
[ 좋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이 자리에서 백련교와 뇌신류의 동맹이 우선 이뤄진 것이다.
' 대단해.'
나는 이번 생이 이전에 없을 정도의 진척도를 보인다는 걸 깨닫고 전율했다.
절대지경 고수들의 격전을 몇 번이나 보고 느끼는 것인지!
이 감흥과 영감을 살려서 계속해서 연마한다면 나도 언젠가 저들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거라는 기대감이 차 올랐다.
그 때 이청운이 말했다.
"거기 숨어있으신 분도 한 말씀 하시지?"
스으윽
이청운의 말이 끝나자, 그들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낮도깨비처럼 미야모토 무사시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저 자는 공간을 베어서 완전히 자신을 숨긴 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 교주는 눈치 못 챘던 건가?'
하지만 교주가 아무런 반응도 없는걸로 봐서는 그건 아니다. 아마 무사시가 온 걸 눈치챘지만 명상하는 척 대기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두 절대고수가 눈치보며 대화를 꺼낼 시기를 살피고 있을 때 내가 이청운을 데리고 도착한 것이리라.
미야모토 무사시가 말했다.
"백련교주. 율주는 동맹을 거부했다."
교주는 실망스러운 듯 말했다.
[ 그런가...]
"대신 내가 임시로 파견되었다."
무사시의 말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교주가 질문했다.
[ 우리와 함께 천계에 대항해 싸워주는 건가?]
무사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선을 베어보고 싶군."
[ 좋다. 환영한다.]
십이율의 답변도 이 순간 결정된 것이다. 십이율 자체가 백련교와 동맹하는 건 아니지만, 십이율 특위인 미야모토 무사시가 아군으로 참전하게 된 셈이었다.
' 굉장하다.'
나는 아군의 진용을 생각하며 전율했다.
절대지경의 고수가 셋!
단언컨대 역대 무림사상 최강의 세력이 결성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