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23 천계(天界) =========================================================================
나는 일단 백련교에서 보관하고 있던 제갈유룡의 복제체를 목갑에 쓸어넣은 후, 교주와 함께 사불상을 타고 화산의 천제단으로 왔다. 천제단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지자가 교주를 쳐다보았고, 교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선지자가 말했다.
[ 이제 봉선의식을 시작하면 되나...]
교주는 선지자를 보자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 위대한 종족인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교주는 선지자의 인간형 변신을 보고도 단숨에 그가 이족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 교주여. 충분한 대가가 있어야 삼황오제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 그건 걱정 마라. 충분히 갖고 왔다.]
교주가 자신있게 말했다. 잠시 후 나는 교주와 함께 가지고 온 공양물을 선지자에게 보여주었다. 하나하나를 확인하던 선지자가 고민되는 듯 말했다.
[ ... 수신의 마도서라. 대단히 충만하군. 내가 보기엔 충분한데... 문제는 논리다. 왜 하늘사다리를 내리면 안되는지 충분히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말한 선지자가 힐끔 나를 보더니 말했다.
[ 두 명이 섣불리 자기 주장만 외쳐대면 일이 꼬이겠지... 한 사람만 말하던가 충분히 주장의 호흡을 맞추도록 해라.]
"알았어."
[ 마수팔찌는 내 소유지만 바쳐주는 걸로 해 두지.]
선지자의 말은 하나하나 일리있는 말이었다. 나는 교주에게 말했다.
"교주. 교주께서 완전히 낙양에서 물러나겠다고 약속을 하시는게 어떻겠습니까?"
[ ......]
"교주?"
[ 그렇게 하지. 그 전에 어떤 삼황오제가 불려나올지 알 수 있겠는가.]
"어... 그건..."
그건 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예전에 오제 전욱의 동상을 매개체로 했을때는 당연한 듯이 전욱이 소환되었다. 또한 월요를 매개체로 했을 때는 월요의 제작자인 여와가 강림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나타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내가 고민하자 선지자가 말했다.
[ 확실한 건 황제 공손헌원이 불려나올 일은 없다... 지금 가진 매개물로 봤을때는 말이지...]
[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 영겁의 세월동안 황제는 삼황오제 중 가장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냥 그것 뿐...]
말을 얼버무린 선지자는 손을 휘휘 저었다.
[ 지금의 상태로 볼 때는 여와나 소호 금천이 소환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본다...]
[ 왜?]
[ 설명하기 너무 귀찮고 힘들군... 그냥 그러려니 해라...]
[ 흐음...]
교주는 선지자의 말에 탐탁치 않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선지자가 이 순간 대충 사실을 숨겨주었다는 걸 눈치챘다.
' 내가 전국옥새를 갖고있기 때문이구나!'
전국옥새의 제작자는 삼황오제 소호 금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국옥새를 직접 공양물로 삼지는 않더라도, 전국옥새의 주인인 내가 봉선의식에 참여하기에 소호금천이 소환될 확률이 높은 것이다. 물론 내가 월요 또한 갖고있으니 여와가 소환될 가능성이 있으나, 여와는 현재 지상계를 좋지 않게 보고 있으니 소환에 응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지자가 그 사실을 말할 경우 교주는 내가 어째서 전국옥새를 갖고있는지 추궁할 것이다. 선지자는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대충 말하다말고 뭉개버린 것이리라. 나는 선지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느껴졌지만 이내 내면에서 제갈사가 이죽거렸다.
[ 방금 너를 감싸준 것도 네녀석이 좋아서 그런 건 아니지. 받은 성유물 값을 해주고 있을 뿐이다. 하나하나 다 계산되는 거라는걸 잊지 말라고.]
[ 젠장. 누가 몰라?]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교주가 생각하다가 말했다.
[ 여와라면 좋겠군. 만일 소호 금천이 소환된다면 그 자를 설득하는 것만으로도 삼황오제 전체가 동의할 가능성이 높은 건가?]
선지자가 대꾸했다.
[ 소호 금천이 삼황오제 중에 어느정도 직위인지를 묻는 것인가...]
[ 그렇다. 기껏 설득했는데 삼황오제 중 직위가 낮아서 무의미하다면 무슨 헛고생인가.]
[ 소호는 서방상제(西方上帝)였다... 또한 새들의 왕이니... 요순(堯舜)보다는 격이 높으나... 결코 삼황을 넘어서는 권위는 가질 수 없겠지...]
[ 골치아프군...]
교주가 고민하다가 말했다.
[ 그러면 삼황은 노리고 소환할 수 없는 건가? 여와낭랑, 태호복희, 염제신농 어느 쪽이든...]
그러자 선지자는 비웃듯 말했다.
[ 칠요가 있으면 확정해서 소환할 수 있겠지... 뭐 그게 의미가 있을까마는... 특히 현재의 복희는 인격체와 대화가 통할지도 의문이지... 또한 지금의 여와는 지상세계에 많이 화가 나있을테니 소환될 경우 우리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
[ ......?]
복희가 뭐 어쨌다는 말인가?
나와 교주가 어리둥절하는 동안에 선지자가 말을 이었다.
[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어차피 삼황오제는 웬만하면 서로의 뜻을 존중한다... 모두가 강력한 대신격이기 때문이지... 합리적인 이야기로 한 명이라도 설득할 수 있다면 성공했다고 봐도 좋을 거다...]
[ 알았다.]
교주는 선지자의 말에 납득한 듯 나를 돌아보았다.
[ 백웅 부교주. 시작하지. 그런데 부탁이 있는데...]
"네?"
[ 월요를 바쳐줄 수 있겠나?]
역시 그 질문이 나오는군.
교주 입장에서는 삼황을 소환해서 성공률을 올리고 싶을테니, 여와를 확정소환할 수 있는 월요를 바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으므로 나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선지자가 말했듯 여와가 소환되었다가 우리 모두를 공격해서 몰살시키려 하면 그건 최악의 경우입니다. 그리고 월요까지 공양했는데 허탕을 치게 되면 미래가 없으니 그럴수는 없습니다."
[ 공양이 아니라 매개체로만 쓰자는 말이다.]
나는 한층 강경하게 말했다.
"지금 인간세상을 없애려 드는 주체가 바로 여와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도박은 할 수 없습니다."
[ ... 알았다.]
교주는 한탄하듯 말을 이었다.
[ 그럼 나머지 변수에는 내가 원활하게 대처하겠다.]
이걸로 세 번째 봉선의식이며, 지상의 운명을 건 봉선의식이다!
내가 각오를 다진 채 천제단을 노려보았고 교주 또한 자신의 정신을 집중하는 기색이었다. 바야흐로 분위기가 심오해지기 시작할 때 선지자가 끼어들었다.
[ 하는 건 나인데 왜 너희가 비장해하는거냐...]
"......"
[ ......]
우우우웅
선지자가 제물을 제단에 바치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천제단에 푸른 영기가 흘러나오더니 서서히 어둠의 구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어둠의 구체는 잠시동안 허공에 팔괘(八卦)를 그리기 시작했다.
팔괘가 서서히 천제단에 내려앉으며 하늘의 먹구름이 한층 강해졌다. 마치 천지를 뒤덮는 듯 자욱하게 맺힌 먹구름은 태양의 빛을 한줌도 남김없이 삼켜 버렸다. 완전히 시꺼멓게 천지가 뒤덮였을 때였다.
사아아아
갑자기 하늘이 오색찬란한 빛에 휩싸였다. 칠채(七彩)라고 하는 묘사가 이토록 어울릴 수 없을 정도로, 선연하면서 맑은 빛이 구름을 뚫고 땅을 비쳤다. 태양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았으며 무지개빛이 황홀경 속에서 부유하는 듯 천지사해가 넘실댔다.
그 화려한 정경 속에서 일순간 폭발하듯이 무언가가 하늘 곳곳에서 날아왔다. 잘 보니 그것은 하나하나가 날개를 지닌 새였다. 다만 지상의 새가 아니라, 무언가 지상의 생태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괴이한 무언가였다. 새라고 표현하는 것은 단지 '그것'들이 날개를 갖고있기 때문이었으며, 가까이서 보면 다를 것 같았다.
삐이이 -
새의 숫자가 늘어나서 대략 일백 마리를 넘어섰을 때였다. 새들은 허공에 점점이 무리지어 도형을 만드는 듯 했고, 그 도열된 형상 속의 구름에서 서서히 무지개가 내려왔다.
나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신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저 성스러운 광경! 그러나 칠채의 광란 속에서 나는 성스럽거나 훌륭하다는 느낌보다 괴이(怪異)를 느꼈다. 마치 애초부터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던 모순이 꿈틀거리며 기어나온 것 같은 위화감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인가?
잠시 후 무지개 너머에서 새하얀 것이 뭉글거리며 인간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전욱 때와 마찬가지로 고대제왕의 의복과 제관을 하고 있으나, 그 존재 근처에는 오로지 새 밖에 없었다. 또한 인간의 피륙을 지니지 않고 마치 구름이 옷을 입은 듯한 비인간적인 외견이 시선을 강탈했다.
또한 그 존재의 의복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영의 깃털을 나풀거리며 펄럭거렸다. 이윽고 그 존재의 주변에는 백여 마리의 새가 다시 오색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분열했고, 분열된 섬광 속에서 더 많은 새들이 폭발하듯이 태어났다.
새들의 천국처럼 허공에 오색칠채로 물들고 나서야 그 제왕은 자신의 의지를 지상으로 쏘아보냈다.
[ 나는 소호(少昊).]
삼황오제, 소호금천(少昊金天)은 매우 권태로운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너희는 무슨 일로 나를 이리도 멀리까지 불렀느냐?]
멀리라고?
뭔가 표현이 이상했다. 물론 천계가 인간계에 비하면 차원적으로 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유에 불과했다. 삼황오제 정도의 신이라면 그정도는 숨쉬듯이 왕복할 수도 있으리라. 왜냐하면 일개 술법사나 마도사들도 약간의 차원지식만 있으면 차원을 돌아다닐 수 있다고 제갈사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 소호금천은 먼 세계에서 왔다는 말인가?'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을 때 선지자가 앞으로 나서서 소호금천의 말에 화답했다.
[ 간만이군요... 황아(皇娥)께선 강녕하신지...]
그러자 구름덩어리로 보이던 소호금천의 피부가 움찔거리더니, 이내 그의 몸뚱이 전체가 몇 배나 커졌다.
휘리릭
그리고 소호금천은 마치 이쪽을 훑어보는 듯한 거대한 시선을 내비쳤고, 나는 이내 몸 전체가 구석구석 긁히는 흉측한 감각을 느꼈다. 소호금천은 신적인 권능으로 우리 전부를 투시하더니 알겠다는 듯 대꾸했다.
[ 축융의 왕인가... 치우(蚩尤)의 봉인을 지키는 일은 잘 하고 있겠지?]
' 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정말로 삼황오제 소호금천이 선지자를 아는척 하는 것이다! 삼황오제같은 신적인 존재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말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게다가 치우의 봉인이라는 소리를 하자 무슨 소린지 신경이 잔뜩 쓰였다.
선지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 그 일은 저희 종족의 일이니 신경쓰지 마십시오... 잘 하고 있습니다...]
삼황오제에게 하기에는 매우 무례한 말투!
[ 그리하라.]
하지만 소호금천은 그러려니 하고 넘겨버리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 삼황오제가 선지자를 왕의 일원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나름대로 인정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선지자는 상상했던 것 이상의 거물이었던 것이다.
선지자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 오늘 봉선의식으로 부르게 된 것은 천제(天梯)를 내리는 계획을 중단해주십사 하여, 월요의 주인되는 인간의 의뢰를 받아 제가 공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훌륭한 판단을 부탁드립니다...]
[ 천제라고...]
선지자의 말을 들은 소호금천의 몸뚱이가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허공에 어느 새 옥좌같은 형태의 구름을 만들어 낸 소호금천은 옥좌에 앉은 후 옆에 있던 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오연한 기세로 지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 그런건 전욱한테나 말해라... 내가 끊은 사다리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대놓고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 모습에서 예전에 소환되었던 삼황오제 전욱을 떠올렸다.
' 닮았어.'
너무나 인간세상의 일에 무심하다!
심지어 천제, 하늘사다리의 일은 인간문명의 흥망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일인데도 무관심하다 못해 게을러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정말로 삼황오제가 인간이 망하든말든 자신들과 무관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저런 태도라면 이쪽에서 아무리 설득하든 의미가 없지 않은가?
내가 불안해하는 동안에 교주가 성큼 앞으로 나서서 외쳤다.
[ 오제 소호여! 나는 백련교의 교주 독고운천이오.]
그러자 소호가 물끄러미 교주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교주가 연속해서 말했다.
[ 천계는 내가 낙양에 거하는 것만으로 대결계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다 여겨서 천제를 내린다 하오. 그러니 나는 모든 백련교의 세력을 낙양에서 물려서 두 번 다시 접근하지 않음을 맹세하오. 또한 여기 우리의 공양물과 성의를 바치나니 부디 고려해주십시오.]
소호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심지어 움직임도 없었다.
그것은 뭔가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침묵이 아니었다. 그렇다기 보다는 황당해하는 침묵에 가까워보였다.
' 에라이. 작업이나...'
푸콱
"공양물을 올립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자 나는 재빨리 초상기인의 심장을 꺼내서 바쳤고, 나머지 보물들도 하나하나 선지자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선지자는 그 보물들을 자신의 마법을 써서 소호에게 바쳤다.
우우우우 -
아까운 보물들이 모두 사라지자, 소호금천의 몸에서 한순간 빛이 흘러나왔다. 그가 공양물을 맛있게 먹었다는 뜻인 듯 했다. 소호금천은 옥좌에 앉은 채 왠지 건들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주길래 받긴 했으나, 만사가 귀찮구나...]
"......"
[ 힘내거라 필멸자들이여!]
번쩍!
갑자기 하늘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또 흘러나왔다. 그 빛은 유난히 화려하게 번쩍번쩍 거리며 수백 개의 섬광을 터뜨렸다.
치리링 -
[ 힘내라!]
하늘에서 어둠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반짝이기에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 화려한 빛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우리는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지상에서 멍하니 빛의 폭주를 쳐다보았다.
설마 이거 삼황오제식 응원인가?
마음의 선물?
이윽고 선지자가 섬광이 잦아들 때쯤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 도와주지 않으시렵니까...]
소호 금천은 구름으로 되어있는 자신의 손을 지상으로 향하며 대꾸했다.
[ 여와께서 인간에 환멸하셨다. 내가 인간 따위를 위해서 그분의 기휘를 범할 필요가 있는가? 허나 받은 공물이 있으니 최대한 인간의 처우를 고려해 보겠노라.]
즉 효과가 없는 건 아니지만, 소호 입장에서는 인간을 위해서 노력해줄 이유가 없다는 말이었다. 말로는 노력한다고 하지만 저 귀찮아하는 행태를 보면 아무것도 안해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 뭐...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나는 경악했다.
설마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고 저딴 태도라니! 아무것도 안 받았으면 모르되, 아니 줄 때까지 아무 말도 안 하다가 다 먹고 나서 모르쇠라니?! 나는 억울하고 황당해서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전설의 신격인 삼황오제가 저런 쓰레기였을 줄이야!
' 저딴 태도라면 더 바쳐봤자 의미가 없어...!!'
여기서 월요나 전국옥새를 더 바쳐서 소호금천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필멸자를 저렇게까지 깔보고 만사 귀찮아하는 태도라면, 아무리 성의를 보인다 하더라도 무시할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설득할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순간 나는 머리의 꼭지가 확 돌아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버럭 소리를 쳤다.
"소호!!"
일순간 내게로 좌중의 시선이 몰렸다. 나는 그 시선의 압력에 쪼그라드는 것 같았지만 분노의 감정이 더 컸기에 마저 소리를 질렀다.
"... 님!! 제발 좀 도와주시지요!! 이러다가 인간이 멸망합니다!"
스으...
소호 금천의 신안(神眼)이 내게 머무는 것 같았다. 소호 금천은 마치 구름을 비롯한 자연이 그대로 신체(神體)를 이루는 듯한 기묘한 신이었다. 알 수 없는 혼돈과 어둠이 내 몸뚱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은 아마 소호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소호가 입을 열었다.
[ 멸망하면 또 만들어주마.]
"... 네?"
[ 그리 큰 일도 아니니 호들갑떨지 말거라...]
되려 소호는 한심하다는 듯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소호의 관점이 너무 비인간적이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 미친 놈!'
멸망하고 나면 또 만들어준다니 저건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인간을 찰흙인형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듯한 말이라서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때 교주가 끼어들었다.
[ 공물을 받으셨으니 소소한 부탁을 조금 더 들어주셔도 되지 않으시오?]
[ 부탁?]
[ 태산의 천제단이 더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오.]
[ 알았다.]
후우웅...
그것이 끝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소호는 물론이고 하늘을 가득 장식하던 휘황찬란한 빛이 씻은 듯 사라지고 말았다. 교주는 씁쓸한 듯 말했다.
[ 더는 무리인가...]
선지자가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부탁받은 일은 다 했군... 성유물의 댓가도 거의 다 소진되었으니 나는 가 본다.]
"잠깐!"
[ 왜 부르는가...]
"천우진이 태산 천제단을 더 빨리 회복시키게 되면, 남은 시간동안에 봉선의식을 한 번 더 할 수 있겠지?"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후의 희망이었다. 교주도 소호금천이 개새끼라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에 최대한 이득을 보면서 희망을 남기려고 마지막에 그런 주문을 한 것이다. 천우진이 빨리 회복하면 봉선의식을 한 번 더 실행해서 다시 한 번 삼황오제에게 부탁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선지자는 고개를 저었다.
[ 안 될 거다...]
"왜?!"
[ 삼황오제를 부름으로서 천지천상의 균형이 크게 깨졌다는 걸 느끼지 못하는가? 봉선의식은 사실 의식의 힘으로 삼황오제의 거대한 존재감으로 현실이 부숴지는 걸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내가 의식을 주관하긴 했으나 서툴었기에 겨우 성립만 시켰을 뿐 이미 세계의 균형이 조금 무너졌다. 지상에 곧 천재지변과 재앙이 닥칠 것이다.]
"......!!"
[ 비유하자면 누란지세(累卵之勢). 천우진의 역량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으나... 의식을 하다가 사고가 발생해도 책임은 못 진다...]
나는 그 순간 선지자에게 의뢰해 봉선의식을 진행할 경우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지를 알 수 있었다. 선지자는 일단 봉선의식을 성립시킬 수는 있지만, 천우진만큼 술법의 흐름에 정통하지 못해서, 봉선의식 자체만으로 세상의 법칙을 혼란시켜버리는 것이다. 이족이 억지로 봉선의식을 대행해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잠깐 그렇다면...'
나는 선지자를 노려보며 소리를 빽 질렀다.
"이 개새끼! 그런 건 미리 말했어야지!! 너 때문에 봉선의식을 여러 번 할 수 있는 기회를 다 날려버렸잖아!!"
그렇다. 차라리 이번에 봉선의식을 안 했으면!
천우진이 한 달의 시간을 허비하고 풀려난 이후부터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봉선의식을 해서 삼황오제를 설득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지자가 억지로 봉선의식을 해서 균형을 망가뜨린 바람에 그 기회가 다 날아가 버렸다!
[ 호갱...]
"뭔 소리야!"
선지자는 왠지 히쭉 웃는 기색으로 말했다.
[ 안 물어봤잖나... 난 시킨 일은 다 했으니 여기서 끝이다...]
파앗!
선지자는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제갈사가 내면에서 이죽댔다.
[ 꼴을 보니 대사원에서도 종적을 감출 게 뻔하군... 아주 된통 처맞았다 그치?]
"......"
뜻밖에 선지자에게 뒷통수를 맞은 셈이 되어서 내가 멍하니 있자 교주가 씁쓸하게 말했다.
[ 됐다, 백웅.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
교주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 이제는 전면전을 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