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17 천계(天界) =========================================================================
대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 백련교주를 쳐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 왜인가?]
여동빈의 반문에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 검선께서 망설이고 있으니까요.]
[ ......]
[ 검선은 인간을 수호하는 자입니다. 망설인 순간 이미 명분이 사라진 게 아니겠습니까?]
더 그럴듯하게 말하고 싶지만 말주변이 그닥 없어서 이정도밖에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여동빈은 내 말을 알아들은 듯 잠시동안 화룡신검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다. 그러던 여동빈이 말했다.
[ 내가 망설임을 놓으면 쳐도 된다는 것인가?]
[ 어... 그건...]
뭐라 해야할지 몰라서 망설이자 검선은 차분하게 말했다.
[ 연자여. 화룡신검을 찾아준 일에 크게 감사하네. 허나 신검이 내 손에 들어왔다 해도, 정의를 찾을 수 없으니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음...]
[ 그대는 천 년 만에 나와 최대의 인연을 쌓은 존재. 그대의 생각을 더 듣고 싶다.]
여동빈은 왠지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 수 없어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이런 여동빈의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왠지 인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대라신선들이 인간의 뭇 감정을 초월한다는 세속의 이론이 틀린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 제가 백련교주를 설득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 무엇을 설득한다는 말인가?]
[ 천계가 천제를 내리는 명분은, 백련교가 낙양을 점거한 상황이 위험하다는 겁니다. 저는 백련교의 부교주 직에 있으니 교주를 설득해서 물러나게끔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무력을 쓰지 않고도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될거라 생각합니다.]
이건 제갈사와 미리 이야기했던 사항이었다. 사실 여동빈이 소환되면 처음부터 하려고 준비해뒀던 말이기도 했지만, 여동빈이 너무 빠르게 장내의 분위기를 장악하는 바람에 간신히 말을 꺼낸 것이다.
[ 그대의 언변만으로 족한 일이 아닌가?]
[ 교주는 힘을 숭앙합니다. 검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 그런가.]
쉬리링
[ 사불상이여.]
여동빈은 화룡신검을 검집으로 거두더니 갑자기 사불상을 불렀다. 소환된 사불상이 여동빈을 묵묵히 쳐다보자, 그는 사불상의 목 부분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 천 년 전 이래로 새삼 신세를 지게 되었소.]
그러자 놀랍게도 여태껏 자기 임무를 수행할 뿐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던 사불상이 툭하고 대답했다.
[ 잘도 말하는군, 여동빈. 생전에는 죽어라 부려먹었으면서.]
사불상의 기린같은 눈동자가 번득이며 안광이 흐르는게 느껴졌다.
[ 그렇소?]
[ 할 일이 있으면 빠르게 움직여라. 나도 내 할 일을 할 뿐이다.]
파앗!
사불상을 탄 여동빈은 이윽고 교주가 폐관수련하는 장소로 찾아갔다. 난데없이 여동빈이 장내에 나타나자 그 기세를 감지한 원로원의 고수들이 떼로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일로가 나를 보며 말했다.
"부교주! 교주께선 폐관수련중이라 말했을텐데? 감히 함부로 침입하다니!"
원로원 고수들은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하고 살기가 넘치는 기색이었다. 왜냐하면 교주의 이번 폐관수련은 매우 중요하기에 그들이 목숨을 걸고 침입자를 막아야만 했다. 평상시에 교주와 일대일 대면이 잦은 부교주인 나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백웅 부교주! 침입한 이유를 말하고 꺼지시오! 그렇지 않으면..."
일로를 비롯한 원로원 초절정고수들은 당장이라도 나를 공격할 듯한 기색이었다. 그들은 대개 교주에 대한 진심어린 충성심을 지니고 있었다.
[ 여동빈! 몸을 주십시오. 내가 저들에게 설명을...]
[ 필요없다.]
단칼에 거절한 여동빈은 자신의 화룡신검을 들며 그들에게 외쳤다.
[ 교주에게 할 말이 있다. 내가 너희의 합공을 삼 초 내에 격파하면 길을 열어라!!]
쿠르르릉
여동빈이 내 잠력을 상당히 끌어썼는지 순식간에 거대한 기력의 폭풍이 몰아쳤다. 하지만 원로원 고수들도 내공으로 치면 어디 가서 뒤떨어지는 자들이 아니었기에, 잠시 비틀거리다가 코웃음치는 기색이었다.
"미친 놈!"
"천령단도 없으면서 죽고싶어서 환장했구나!!"
[ 받아들이겠나?]
그러자 우두머리격인 일로가 앞으로 나와서 살기 그득한 말투로 대꾸했다.
"물론! 부교주 네놈 목이 먼저 떨어지겠지만!"
나는 그들의 반응을 보자 새삼 씁쓸해졌다. 그동안 호법사자를 거쳐서 부교주까지 오르면서 백련교에서 크게 출세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원로원은 천령단 없는 나를 거의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교내세력도 천령단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새삼 저들의 반응을 보니 짜증이 났다.
쿠구구구
전방에 있던 원로원 고수 여덟 명이 일거에 기운을 증폭시키며 자신들의 진신절학을 끌어올렸다. 저들은 본래 사대무류 출신자도 있었으나, 반수 이상은 중원에서 이름을 드날리던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백련교의 명성에 혹해서 투신했다가 교주가 직접 선발해서 원로원에 집어넣고 무공을 향상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원로원 대다수는 교주의 제자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 젠장!'
나는 그 광경을 보자 미칠 것만 같았다. 눈 앞의 여덟 명의 실력은 당장 구파일방 장문인과 싸워도 승산이 높은, 명실상부한 초절정고수들이었다. 아무리 내 내공이 높다고 하더라도 월요의 월영을 소환하지 않는다면 이길 가망성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급히 여동빈에게 외쳤다.
[ 여동빈! 월요를 쓰십시오. 월요를 쓰면 쉽게...]
[ 닭 잡는데 소잡는 칼은 쓰지 않는다.]
간단명료하게 대답한 여동빈은 화룡신검을 치켜들고 전방으로 돌진했다.
쿠콰콰콰쾅!!
잠시 후 초절정고수 8인의 진신절학이 무수한 강기를 뿜어내며 현란한 빛의 폭포를 만들어냈다. 이 정도 공격이라면 호법사자라고 해도 방어해야만 할 정도였다. 원로원의 강함과 명성은 결코 허명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 시간이 멈추는 듯한 느낌과 함께 여동빈의 선검이 유영했다.
천둔검법(天遁劍法).
육의성천도(六意聖天圖)
해결(海決)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는 듯, 공간이 검영(劍影)에 휩싸였다. 일개 검영으로는 검강의 폭포를 감당할 수 없으나, 어찌된 일인지 육의성천도 해결이 뻗어나가는 진로에 있던 모든 무공이 지워지는 듯 했다. 감당할 수 없는 대자연의 힘 그 자체가 선검술의 저변(低邊)에서 꿈틀거리며 치솟아오르는 것이다.
꾸웅!
푸른 쪽빛이 해풍(海風)처럼 호신강기를 가르고 지나갔다.
"크아아악!"
"으아악!"
삽시간에 여덟 명의 초절정고수들이 피떡이 된 채 뒤로 날려갔다. 심지어 여동빈이 약간 봐줬는지 중상을 입었어도 죽은 자는 없었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일 초만에 벌어진 일이었으므로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 이... 이렇게 강했나?'
여동빈이 원래부터 극강의 투선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며 그 무위도 여러 번 구경한 적이 있었다. 마신을 쓰러뜨리는 절세적인 신위도 보았으며 무영검제조차 쉽사리 쓰러뜨리는 모습도 보았다. 그러나 지금 느껴지는 여동빈의 강함은 그때 느꼈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너무나 강력하고 강력해서 도저히 항거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일로가 내가 달려들며 부르짖듯이 외쳤다.
"다 덤벼!!"
파아앗
그 외침이 끝나는 순간 무려 서른 명에 이르는 원로원 고수들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이들이 아마 원로원의 최대전력일 테고, 백련교 역사상 원로원이 누군가를 합공한 적은 아예 없었으리라. 그러나 일로의 명령에 망설임없이 뛰어들 정도로 저 자들이 여동빈을 거대한 위협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천둔검법(天遁劍法).
육의성천도(六意聖天圖)
여동빈은 가벼운 진각을 내딛으며 자신의 검결을 융화시켰다.
지우결(地雨決)
합일(合一)
소나기가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역천(逆天)한다. 그렇게 생각될 정도의 검광(劍光)이 수만 갈래를 뻗어내며 땅에서 천공으로 치솟았다. 삽시간에 전방에 있던 원로원 고수들 중 십여 명은 검결에 격중당해서 의식을 잃었고, 나머지도 휘어지듯 날아오는 검광세례에 저항하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두둥
"허윽..."
"크학..."
단 2초만에 모든 결판이 나고, 원로원 고수들이 전멸하며 일로까지 기절하고 말았다. 심지어 그 와중에 죽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여동빈은 무표정하게 그 광경을 쳐다보더니 말없이 안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이런 일은 자랑할 일도 아니라는 태도였다. 그러나 나는 여동빈의 무학에 깃들어있는 어마어마한 경지를 느끼자 전율때문에 입을 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천둔검법 육의성천도!
초식이 없는 신선의 검법은 인간의 무공과 차원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육의성천도가 올연히 절대지경의 무공임과 동시에, 수백 년동안 투선이 연마해온 것이었기에 지상의 조악한 무공으로는 대항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새삼 이렇게 엄청난 전율을 느끼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내 수준이 오른 거야.'
엉뚱한 결론같아 보였지만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때는 그저 검광과 강기가 뿅뿅거리며 날라다니는게 신기할 뿐이었으나, 이번 생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절대지경의 무공을 자주 접하고 그 이론과 경험을 가르침받았다. 특히 삼보절기를 수련받으며 교주의 심득을 가르침받았기에 어렴풋이 그 경지를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투선 여동빈의 강함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게 느껴진다.
저벅
여동빈이 교주의 폐관동에 걸음을 내딛었을 때였다. 폐관동의 어둠속에서 촛불이 하나둘씩 밝혀지더니 이윽고 수백 개로 늘어났다. 원래부터 세워져 있던 촛불에 마치 요술처럼 불이 붙은 것이다.
그리고 폐관동의 정중앙에는 백련교주가 이미 서서 여동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련교주는 여동빈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포권했다.
[ 낯선 자여, 잘 찾아오셨소.]
[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 외양은 부교주지만, 그대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힘은 절대고수. 그리고 원로원을 일거에 제압할 때의 그 절예는 가히 천상의 기예나 다름없었소. 나는 평생에 그대같은 자를 거의 보지 못했소.]
교주는 역시 폐관수련을 하다가 바깥의 전투기척을 알아채고 대비한 모양이었다.
[ ......]
[ 그대는 혹여 천계의 투선이 아니오?]
교주의 솔직한 말에 여동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 그렇다. 나는 검선 여동빈이다.]
흠칫!
교주는 꽤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민간에서 추앙받는 전설적인 도교팔선 중 하나가 눈 앞에 있다고 하면 누가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교주는 현재 천계와 직접 적대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손쉽게 납득한 듯 했다.
교주가 약간 침울한 기색으로 말했다.
[ 아쉽군. 좀 더 수련하고 싶었는데...]
[ 나는 그대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하러 왔다.]
교주가 여동빈의 말에 이채를 띄며 말했다.
[ 무슨 말이오? 천계의 역적인 나를 토벌하러 온 게 아닌가?]
[ 원래라면 그랬겠지.]
여동빈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 나의 연자가 그대를 설득하기로 했으니, 나는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스으으...
이윽고 여동빈이 강신을 풀고 내게 몸을 돌려주는 게 느껴졌다. 온전히 사지백해의 감각이 되돌아오자, 교주는 대번에 그 기색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교주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자 나는 한숨을 쉬며 교주에게 말했다.
"교주. 낙양을 포기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교주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들은 교주는 곰곰히 생각하는 듯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 이해가 안 가는군.]
"네?"
[ 백웅. 그동안 나를 은연중에 제거하고싶어 했다는 건 다 알고 있다. 허나 반반이라서 아슬아슬하다 생각했지. 투선 여동빈의 힘을 빌린다면 나를 손쉽게 제거하고 보물을 되찾을 수 있었을텐데 어찌 투선을 설득하려는 모험을 한 거지?]
"......"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동맹관계니까요."
[ 진심인가?]
"네. 그리고 전에 말씀하셨듯이... 저는 교주가 보게 될 미래가 궁금합니다."
그렇게 대꾸한 나는 말을 이었다.
"교주. 이 정도면 되었지 않습니까? 천계가 뭘 두려워하는지는 몰라도 지금으로서 천계를 자극해서 정면충돌하는 건 시기상조입니다. 낙양 정도는 손을 떼버리고 물러나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어떻게든 천계를 설득해서 천제의 설치를 막아보겠습니다."
[ ......]
"교주."
교주의 심정이 크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교주를 설득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교주가 말했다.
[ 천계가 나를 그토록 경계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군. 다시 여동빈과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요구에 따라 여동빈을 강신시켰다. 여동빈과 눈을 마주친 교주는 잠시 그 깊이에 침음성을 흘리다가 말했다.
[ 여동빈. 한 가지만 알려주시오. 낙양만 아니면 되는 것이오?]
[ 그럴 것이다.]
[ 그 이유는?]
[ 천기라서 누설할 수 없다. 하물며 그대에게는.]
[ 역시 그렇군...]
씁쓸하게 중얼거리던 교주가 말을 이었다.
[ 알겠소. 지금 즉시 모든 백련교의 세력을 낙양에서 철수시키고 두 번 다시 오지 않겠소. 이 정도면 천계를 설득할 수 있겠지?]
[ 확언할 수 없다. 가능성이 적다고 봐도 좋으리라.]
[ 흐흐...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셈인가.]
그러자 여동빈이 단호하게 말했다.
[ 천제가 설치되면 무고한 자들이 살상됨은 물론, 그 이상의 거대한 재액이 닥쳐올 것! 나는 최선을 다해 그 일을 막으리라.]
[ 고맙소.]
오오오
그 때였다. 교주의 몸 주변에서 심천무량의 만다라가 슬며시 떠올랐다. 여동빈이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자 교주가 한쪽 손을 앞으로 뻗으며 말했다.
[ 가기 전에 후배에게 가르침을 부탁드리오.]
[ 그럴 처지가 아님을 모르고 있는가?]
[ 그러기에는 무신(武神)에게 경도된 향무심이 너무 커서 말이오. 이대로 물러나긴 아쉬우니 한 수 배울 기회를 주시오.]
백련교주의 비무신청!
하지만 여동빈은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대꾸했다.
[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그대와 내가 겨루는동안 소모되는 기력은 모두 연자의 것. 연자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선택은 할 수 없다.]
[ 철저히 무의 깨달음만 겨룰 것을 약속하오. 원영신의 공능은 쓰지 않겠소.]
[ ... 그렇다 해도.]
여동빈은 한동안 고민하다가 화룡신검을 겨누며 말했다.
[ 좋다.]
[ 고맙소.]
두 절대고수가 준비자세를 잡자, 여동빈이 중얼거렸다.
[ 백련교 사대무류와 싸우는 건 천 년 만인가...]
그리고 마치 일천 초처럼 느껴졌지만, 정확히 삼 초의 교환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