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12 천계(天界) =========================================================================
교주는 그 후 칠대절학 연구회에도 나오지 않고 혼자서 참오하는 시간에 들어갔다. 폐관수련이었으며, 그 동안에 호법사자들은 낙양 치안의 안정을 도우고 백련교의 영향력을 넓히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나는 교주가 폐관하기 전, 그에게서 별개의 명령을 받았다.
[ 백웅. 나는 깨달음을 갈무리해야 한다. 내가 폐관을 깨기 전에 다시 한 번 중요한 일을 해 줘야겠다.]
나를 따로 부른 교주가 진중하게 말을 꺼냈다.
"또 무슨 일을..."
[ 넌 예전에 주작이란 자가 천제단을 통해 천계의 기밀을 훔쳐들었다고 말한 적 있었지.]
그건 주작을 없애게 된 경위를 설명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교주에게 설명해줬던 일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요."
[ 우리도 주작처럼 놈들의 계획을 훔쳐들을 수 있을 것이다.]
"주작이 이미 엿듣다가 걸린 상태라서 천계에서 십중팔구는 막아두었을 것 같습니다만."
교주는 고개를 저었다.
[ 애초에 네가 일러바치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놈들 아닌가? 나는 천계가 또다시 빈틈을 노출할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황당해서 반문했다.
"말도 안 됩니다. 그런 건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째서..."
[ 천계는 오만하다.]
단호하게 말한 교주가 마치 끓어오르는 듯한 감정을 실으며 말을 이었다.
[ 그들 스스로가 인류의 관리자라는 지위에 취해서 수많은 헛점을 지상에 놔두고 있었지. 남화노선과 싸우면서 그 사실을 더욱 강하게 깨달았다. 내 느낌은 결코 허투루 지나가지 않는다. 천계는 같은 약점을 두 번 당할거라고 생각지 않고 있으리라.]
"......"
정말 그럴까?
[ 백웅. 빠른 시일 내에 오악의 천제단을 제압하고, 그곳을 통해 천계의 비밀을 알아내라.]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난색을 표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어서 천계가 나를 극악한 죄인으로 판정하고 죽을때까지 쫓아다니면 어떻게 되는가? 아직은 아슬아슬한 상황인데 내가 그 정도의 모험을 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교주가 훗하고 웃었다.
[ 이미 엎질러진 물이란 걸 모르는가? 천계는 남화노선보다 더 강력한 수를 두며 우리 백련교를 공격해 올 것이다. 최선을 다해 발버둥치지 않으면 너도 살아남을 수 없음을 깨달아라.]
"음..."
[ 네게 수신류의 모든 전력을 사용할 권한을 주겠다. 기대하마.]
나는 교주가 폐관에 들어간 후 제갈사와 의논하기 시작했다. 이런 작전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제갈사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어떻게 하지?"
제갈사는 대뜸 말했다.
[ 하면 되지. 이게 고민할만한 일이냐?]
나는 턱을 괴면서 중얼거렸다.
"오악을 제압한다는 건 구파일방(九派一邦)과 정면으로 대결한다는 뜻이야. 이게 쉽게 결정할 일이냐고."
그렇다. 천계의 후환은 둘째치고 오악은 태산, 화산, 형산, 항산, 숭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개 중 태산과 항산을 제외한 나머지 삼악(三岳)은 모조리 구파일방의 근거지로서, 특히 화산파는 구파일방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대파였다. 또한 형산파는 쾌검으로 유명한 검문이었으며 숭산은 신승이 버티고 있는 소림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자 제갈사가 킬킬 웃었다.
[ 개뿔...]
"뭐?"
[ 교주는 수신류 전력을 움직일 권한을 줬다. 그러면 네 녀석은 직접 안 움직이고 수신류 장로 세 명을 시켜서 각각 구파일방 하나씩 뭉개라고 시키면 그만이야. 이게 뭐가 어려운 일이냐?]
나는 태연하기 그지없는 제갈사에게 대꾸했다.
"그 자들이 구파일방의 사정을 봐줄 리가 없잖아! 피가 냇물을 이룰텐데 그럴 순 없어."
수신류 장로들은 하나같이 비인간적인 면모가 있었다. 천령단을 받아들인 부작용 때문인지, 이따금씩 인간에 대해 무지막지할 정도로 비정했다. 만일 그게 교의 명령이라면 갓난아이까지도 눈 깜짝하지 않고 살해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명문대파의 대쪽같은 자존심을 고려할 때, 구파일방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을 것이다.
태연하게 혈겁(血劫)을 지시하는 건 강호인의 양심으로서 안될 일이었다. 그러자 제갈사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 구파일방 꼰대들이 좀 뒈지면 어때서 그래? 그 놈들이 살아있으면 뭐 세상에 도움이 되나?]
"뭐라고?"
[ 제발 정의로운 척 좀 그만둬라. 지금 천계와 백련교가 건곤일척의 승부를 앞두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거냐? 지금 네 앞가림도 못하는 처지에 남 사정 봐주게 생겼냐? 천계의 정보를 알아내는 건 성공하든 실패하든 무조건 도전해봐야 하는 일이야.]
"하지만 그들은 죄가 없어."
제갈사는 냉소했다.
[ 구파일방의 죄? 그놈들의 죄라면 2가지 있지! 힘이 없는 죄. 그리고 힘이 없는 주제에 대가리를 뻣뻣하게 쳐들고 있었던 죄!]
"이 자식..."
이어진 제갈사의 말에 나는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 이광이라면 망설임없이 쓸어버렸을 거다. 네가 이렇게 고민하는 시간에 싹 다 쓸어버리고 정천맹주를 무릎꿇린 채 백련교에 영원히 복속한다는 각서를 받아냈겠지.]
"......"
[ 네 녀석은 이상한데서 물러. 정말로 신을 꺾고싶은 생각이 있긴 있는거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냐! 이건 분명히 다른 문제야!"
[ 뭐가 달라?]
나는 그동안 심중에 품고 있던 진짜 마음을 토해냈다. 그것은 제갈사가 단번에 핵심을 찌르며 나를 도발했기 때문에 진심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이건 타인이 아니라 나를 위한 선택이야. 그러니까 쉽게 선택할 수 없어!"
[ ... 뭔 소리냐?]
제갈사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전생을 하면서 인간 목숨같은 게 그렇게 소중하지 않다는 건 옛날옛적에 깨달았어! 망량이 나를 억제하긴 했지만 나는 그가 나를 유도해주는 걸 은연중에 선택한 거다. 왜냐하면 그게 필요하니까."
[ ......]
"네 말대로 인간은 쓰레기일지도 몰라. 나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번 쓰레기나 장난감처럼 막 죽이고 내팽개치면 나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 세상에서 뭘 지켜야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지?"
[ 음...]
"그럴거라면 나는 더 이상 전생할 필요가 없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니까, 네가 뭐라고 하건간에 나는 최대한 인간성을 지켜야 해! 왜냐하면 나는 계속 버텨야 하니까!"
방해되는 건 대충 막 죽이고 전혀 사정봐주지 않으며 진행한다면, 훨씬 더 쉬웠을 것이다. 그것은 망량과 함께 했던 전생보다 제갈사와 함께 하는 이번 전생에 큰 성과를 얻은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해서 망량의 능력이 제갈사만도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도(正道)를 걷는 일에도 그 나름의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 ......]
제갈사는 한참을 침묵했다. 제갈사의 침묵은 상당히 길어서, 여태껏 놈과 함께 했던 시간 중에서 가장 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침묵이 이어지던 중 제갈사가 문득 말했다.
[ 왜 버티냐? 그 길고 긴 고통과 인내를.]
"니 입으로 말했잖아. 신을 이겨야 하니까."
[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거냐? 전생을 하다보면 악신(惡神)을 멸하고 세상에 질서를 되찾아줄 수 있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제갈사는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 어떻게 그렇게까지 신념을 유지하는 거냐? 네 녀석은 애초에 아무것도 안 갖고 있던 무지렁이였잖나. 지금도 신과 싸워야 할 명확한 이유는 없을텐데, 뭘 믿고 흔들림없이 나갈 수 있는 거냐고?]
"너, 내 기억을 다 본 거 아니었냐."
[ 질문에 대답해라.]
이 놈 왜 이래?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대답했다.
"나는 내 인생에 감사하고 있으니까."
[ ... 뭐?]
나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후회만 가득한 생이었는데 한번 더 살아가는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야. 거기에 천암비서만 있으면 계속 전생할 수 있으니까 최고지. 난 아직까지 내가 꺾여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겠어."
[ ......]
제갈사는 머뭇거렸다. 그것은 너무 황당해서 말을 더듬는 것으로 보였다.
[ 그렇게 쓰레기처럼 바닥에서 기어올라오는데도 불행하지 않다고? 너 벌써 18번이나 죽었어. 네가 겪은 고통은 이미 보통사람이 평생 겪는 걸 수십 배나 뛰어넘었다고. 보통사람은 너만큼 절망하지 않는다 절대로.]
나는 의아해서 반문했다.
"내가 불행하다니 무슨 소리야? 나는 안 끝나. 끝나지 않으니까 불행하지 않다고."
[ 어...]
"내가 끝장나기 전에 신들이 먼저 끝장날 거다."
내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제갈사가 당황했다.
[ 진짜,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오늘따라 왜 이래? 그렇다니까."
갑자기 제갈사가 화를 버럭냈다.
[ 병신새끼! 네 녀석은 [옛 지배자]가 뭔지 알기나 하는거냐? 지금까지 네가 보아왔던 지배자의 힘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온 세상을 장난감처럼 여기는 그 자들을 상대로 진심으로 싸워서 이기겠다고?]
"뭔 소리냐. 너도 지금까지 그걸 위해 날 돕는 거 아니었..."
[ 크크... 크크크...]
어이없어하던 제갈사는 광소를 터뜨렸다.
[ 크하하하하하하하하......!!!]
그 광소는 진정한 광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미친 척 포장하는 게 아니라 그가 품고 있던 음울한 사념과 악랄한 잔인함이 범벅이 되어서 꿈틀거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제갈사의 영혼이 품고 있던 광기가 얼마나 혼탁한지 느끼고는 흠칫 떨었다. 세상에서 내로라하는 악인조차도 제갈사의 광기를 일할도 감당치 못하리라.
[ 이렇게 순수한 등신새끼는 정말 처음이다. 정말로...]
그렇게 중얼거린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 알았다. 그렇게 하자.]
"이해해준 거냐?"
제갈사는 전에 없이 음울한 목소리로 맞받았다.
[ 닥쳐. 니놈 원하는대로 책략을 짜 줄테니까 그렇게 해 보자고.]
"... 아, 알았다."
이 놈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는데?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갑자기 제갈사가 왜 심경변화가 생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 앞서 말했듯이 구파일방을 무력으로 쓸어버리는 건 문제없지. 네놈이 구파일방을 봐주던가 말던가 알아서 해라. 중요한 건 천제단에서 천계의 비밀을 엿듣는 방법을 알아내는 거다.]
"그게 문제군..."
[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총 2명이 있지. 제갈유룡과 제갈부. 하지만 제갈유룡의 혼은 천계에 봉인되었고 제갈부의 영혼은 네놈이 한번 써먹은 바람에 바로 천신경의 술법을 사용할 수 없다.]
"흠."
천신경의 술법에 존재하는 약점은 바로 이거였다. 어떤 강력한 영이라 해도 강령시키거나 정보를 들을 수 있으나, 한번 의뢰를 한 다음에는 적어도 1년의 시간이 지나야 같은 령을 다시 써먹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앞으로 1년 동안은 제갈부의 영혼에게 명령을 할 수 없는 것이다.
[ 하지만 알만한 자가 또 하나 있긴 하지.]
나는 귀가 솔깃했다.
"그게 누군데?"
[ 천제단에 대해서 그나마 잘 알고 있는 놈이 인간 중에 딱 하나 있다. 누구겠냐?]
나는 곰곰히 생각했지만 잘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제갈사가 말했다.
[ 다른 4악의 천제단은 모두 의미를 상실했거나 관리불능이 되거나 사이비 도사나 주술사들의 거처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오직 하나의 천제단만큼은 그동안 온전하게 보전되어 오면서 확실하게 지켜졌지.]
나는 번뜩 깨달았다.
"숭산! 신승 명호대사!"
[ 이제 알았냐?]
그렇다.
신승 명호대사!
현 소림사의 최강고수이며 호법사자를 제외한 무림고수 중 최고의 내공을 지닌 존재! 그는 예전에 천제단을 찾아다닐 때 내게 천제단을 안내해주고 설명해준 일이 있었다. 또한 이광이나 진소청과도 상당히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다. 확실히 그라면 천제단을 사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을 확률이 컸다.
"그런데 그가 알고 있는 건 천제단에 공양을 올리는 방법이잖아? 주작은 천제단을 통해 훔쳐들었으니까 신승이 그 방법을 알고 있다고는..."
[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신승 명호대사는 순수하게 천계의 뜻에 따르는 놈이 아니라 망량선사를 추종하는 인물이다. 거드름피우는 천계보다 직접 인간을 수호해 주는 망량선사를 존경하며, 그가 주는 파천의 가호를 이용해서 성장한 놈이지. 그런 놈이 곧이곧대로 천제단을 지키고만 있었을까?]
"......!!"
[ 소림사가 네놈 전생동안 무수한 환란이 일어났는데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게 우연이라 생각하나? 십중팔구는 신승이 모종의 수단을 써서 미리 정보를 전해듣고 우환을 피했던 거다.]
그런 건가?!
내가 놀라고 있을 때 제갈사가 말했다.
[ 빨리 움직여. 미야모토 무사시가 십이율주의 답변을 가지고 찾아오기 전에 이 일을 끝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