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02 천계(天界) =========================================================================
나는 중원으로 귀환해서 상관혁을 찾아갔다. 교주를 찾아가기에 앞서서 상관혁의 일을 먼저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교주와 담판을 짓는 일이 내 목숨을 거는 위험한 행위라는 점도 이 선택에 한몫 했다.
"백웅. 당신에게서 엄청난 영력이 느껴지는군."
의성 상관혁은 상관가의 전각 3층에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탄성을 내질렀고, 나는 그를 무덤덤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품 속에서 십계비의 조각을 꺼내서 상관혁에게 보여주었다.
"이거면 충분하겠소?"
"오오...!!"
상관혁이 손을 뻗었으나 나는 곧장 그에게 주지 않고는 손을 뒤로 뺐다. 그리고는 차갑게 말했다.
"교환내용은 확실히 합시다."
"그래야겠지. 내게 그걸 넘겨준다면 당신에게 칠요의 해방에 대해서 확실히 알려주겠소."
"그것 뿐만이 아니지."
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이 조각을 얻기 위해서 엄청난 수고와 노력을 했소. 그러니 당신에게 보패급 유물을 넘겨줄 경우, 당신이 이걸로 뭘 하려는지 정도는 알 자격이 있소."
그러자 상관혁이 얼굴에 난색을 표했다.
"그걸 꼭 알아야겠소?"
"아, 몰라도 되오. 다만 이번 거래는 없던걸로 하지."
나는 일부러 강하게 나갔다. 사실 칠요해방에 대해서 원래 알고 있어서 별로 상관혁과 거래할 필요성이 없다는 게 뒷심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내 표정에 한치의 흔들림도 없자 상관혁은 침음성을 흘렸다.
"잠깐만 생각하게 해 주시오."
"그러지."
상관혁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마음을 결정한 듯 말했다.
"좋소. 말해주지. 내가 보패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봉인(封印)을 강화하기 위해서요."
"봉인?"
"그렇소. 내 가문이 아주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는 업(業)이지..."
그는 짧게 한숨을 쉬며 등을 돌렸다.
"나를 따라오시오, 뇌신류 호법사자 백웅."
나는 그를 따라서 상관가의 전각 아래쪽으로 향했다. 1층에서 은밀한 방으로 들어간 상관혁은 웬 기관장치의 단추를 눌렀고, 이윽고 기계음과 함께 방 전체가 쿠궁거리며 움직였다. 그리고는 방 하나가 통째로 땅 아래로 내려가는 기동음이 들렸다.
잠시 후 지하에 도착하자 기관장치의 문이 열렸다. 아무래도 지하로 이동하는 독특한 방식의 장치인 모양이었다. 지하는 밝은 공동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굉장히 넓었다.
' 인기척은 없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습한 주술적인 문양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마력(魔力)이 뿜어져나오는 걸로 봐서는 이 곳이 마도사의 근거지인 게 확실해 보였다. 잠시 후 나는 상관혁을 따라서 웬 거대한 나선이 휘도는 기계장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치키킹
치킹
기이한 소리를 울리면서 약 삼 장 크기의 어둠이 심장처럼 맥동하면서 허공에 떠 있었다. 그 어둠은 은은한 빛을 흘리고 있었으며, 그 주변에는 수십 수백개의 기계장치가 나선을 그리면서 연신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무한히 움직이는 동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기계가 어둠을 감싸며 춤을 추는 듯 했다.
빛이 원반처럼 허공에 막을 생성하기도 했고 무지개빛 섬광이 이따금씩 회전하는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었다.
나는 기계장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이건 뭐요? 인간의 기술로 이런 걸 만들 수 있소?"
그러자 상관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천 년 전, 만당 시절에 제작된 것이오. 물론 당신 짐작대로 인간의 기술은 아니지만..."
"영문을 모르겠군. 이게 봉인이라니... 뭘 봉인했다는 소리요?"
"......"
그는 약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 안에 봉인된 것은 과거의 상흔이오. 나는 상관가의 가주로서 이 찢어진 상처를 봉인하며 유지해야할 의무를 지니고 있지. 하지만 이 봉인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추가적인 봉인을 필요로 하는 것이오."
상관혁은 말을 에둘러서 직접 설명하는 걸 피하려는 듯 했다. 바로 직접 캐물어도 말해줄 것 같지 않았기에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내가 보패를 주지 않으면 이 봉인이 조만간 풀리는 건가?"
내가 떠보는 질문을 하자 상관혁이 대꾸했다.
"그런 건 아니오. 하지만 보패가 있으면 앞으로 적어도 이백 년은 안정적으로 봉인을 유지할 수가 있겠지."
"흐음. 이게 뭘 봉인하고 있는지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보패를 주지 않겠소."
"크윽... 그걸 꼭 알아야 하오?"
"당연하지. 보패만 있으면 내 술력이 크게 증강하는데 이 귀한 보물을 수상쩍은 봉인에 갖다주는 셈이잖소. 적어도 어디에 쓰이는지 알지 못하면 내놓을 수가 없소."
그러자 상관혁이 이를 악물더니 말했다.
"... 여기서 알게된 걸 결코 외부에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야겠소."
"물론이오."
"이 봉인은 천 년 전의 봉선의식때 일어난 여파로 생겨난 시공간의 균열(龜裂)이오. 거대한 신격이 새로이 생성되면서 차원이 찢어져 버렸고, 그 때 세상에 마력이 퍼져버리는 바람에 강력한 요괴들이 새로이 태어났을 정도지."
그는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 봉인이 풀리면 큰일이 일어나오. 균열이 벌어지는 건 그 누구도 바라는 일이 아니오. 나는 봉인을 강화하기 위해서 보패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 것이오."
"으음."
균열이라고?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갈사가 내면에서 말했다.
[ 딴은 맞는 소리군. 그냥 조각을 줘 버려라.]
[ 제갈사. 뭔가 알고 있냐?]
[ 짐작가는 게 있긴 하지만 지금 신경쓰기에는 구차한 일이다. 빨리 넘겨버려.]
[ 알았어.]
나는 십계비의 조각을 상관혁에게 건네주었다. 상관혁은 조각을 받더니 만면에 미소를 띄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고맙소. 이건 강력한 힘을 지닌 보패가 틀림없군."
"고마울 거 없소. 거래잖소? 당신도 이제 내게 칠요해방에 대해서 알려줘야지."
"알았소. 그 전에 먼저..."
상관혁은 말이 끝나자마자 십계비의 조각을 들고 주문(呪文)을 외웠다. 주문을 모두 영창한 상관혁은 십계비의 조각을 곧장 봉인 안쪽으로 던져넣었다.
쿠구구구!!
그러자 나선 기계장치 안에서 꿈틀거리던 어둠이 갑자기 크게 작아지고 말았다. 원래는 삼 장 크기였으나 일 장으로 확 줄어든 게 보였다. 아무래도 봉인이 강화되면서 어둠의 힘도 약해진 모양이었다. 상관혁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이로써 내 대에 할 일은 끝마쳤구나!"
"칠요해방에 대해서 말해 주시오."
"일단 위로 올라갑시다."
쿠구궁...
나는 상관혁과 함께 다시 기계장치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전각의 상층에 앉아서 낙양의 시내풍경을 바라보았다. 차를 타 온 상관혁이 탁자 위에 올리며 입을 열었다.
"백웅. 칠요를 해방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는 걸 알고 있소?"
"잘은 모르오."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의 입으로 제대로 듣고 싶었다. 상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하나는 살육으로 칠요에 힘이 축적되어서 결국 봉인이 풀리는 방식이오. 그러나 이 방식은 칠요와 계약을 맺은 [옛 지배자]도 깨어나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은 고스란히 먹혀버리고 말지. 함정이라고 할 수 있소."
"다른 하나는?"
"먼저 천계에 허락을 구해서 봉선의식의 권한을 얻은 후, 삼황오제를 소환하여 그들에게서 칠요의 주인으로 인정받고 해방하는 방식이오. 이렇게 하면 [옛 지배자]를 삼황오제가 억눌러주기에 안전하게 칠요의 주인이 될 수 있소."
"......"
"봉선의식이란 오악의 천제단에서 기원하여 삼황오제를 비롯한 신적인 존재를 소환하는 의식이오."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
' 헛수고를 한 건가?'
내가 내심 실망하고 있을 때 상관혁이 말을 이었다.
"봉선의식이 왜 칠요를 얻는데 굳이 필요한지 궁금하겠지. 봉선의식을 처음으로 행한 건 진시황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렇소. 봉선의식은 대체 왜 만들어진 거요?"
"그건 고대의 비사(秘事)가 있소."
상관혁이 말했다.
"생각해보면 신 입장에서는 봉선의식은 그리 필요없는 일이오. 인간에게서 공양물을 받아먹을 수 있는 기회이지만, 그건 받아도 그만 아니라도 그만이오. 왜냐하면 인간에게서 섬김받지 않아도 상관없기 때문이지. 그런데도 굳이 인간과 계약을 맺어서 인간의 염원을 들어주는데는 이유가 있소."
"응...?"
"황제(黃帝) 공손헌원이 인간을 좋아하기 때문이지."
이건 망량에게서도 듣지 못한 관점이다. 나는 과거 망량이 해줬던 봉선의식에 대한 정보를 기억속에서 떠올렸다.
[ 생각해 보시오. 왜 수천 년 전의 고대인들은 중화를 넘어서 사이(四夷)마저 끌어안는 구주의 영토를 성좌(星座)에 대응시킨 거겠소?]
[ 구주에 정의된 분야는 바로 태초의 [옛 지배자]들에게 할당된 지상의 지배권역이자 영토였소. 그 안에서 그들은 진정한 신 노릇을 하며 태초의 인류에게 암흑신화(暗黑神話)로서 군림했던 거였지. 이 또한 천계가 지상의 인간들에게 숨기고 싶어하는 비밀이오. 그렇게도 숨기고 싶어하는 [옛 지배자]의 존재를 알 수밖에 없으니까.]
[ 봉선의식으로 구주의 지배권과 천운을 얻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천하(天下)의 주인이 됨과 동시에 신과 인간을 잇는 제사장(祭事長)이 된다는 걸 의미하오.]
[ [옛 지배자]에게 인간을 대규모로 공양하여 먹이로 바치면서 천하의 태평을 약속받으며 본인도 불로불사의 마법과 힘을 손에 넣으니... 진시황이나 연후의 황제들이 눈에 불을 켤 수밖에 없었겠지.]
망량의 말은 옳았다. 봉선의식으로 신에게 공양물을 바치고 힘을 얻는다는 배경에 대해서 대부분의 설명을 했었기에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옛 지배자]와 적대하는 내 입장에서는 그저 개새끼들 하고 속으로 욕을 하는 걸로 끝이었다.
그러나 황제 공손헌원이 왜 언급된다는 말인가? 이건 망량의 관점과 달리 신이 '왜' 봉선의식을 굳이 받아들여주느냐 하는 문제를 논하는 걸로 보였다.
나는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의성 상관혁 - 천하오대의원이자 마도사이며 상관가의 가주!
이 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나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믿을 수가 없군. 그 전에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칠요에 대해서 그렇게 상세히 알고 있는 것이오?"
"......"
내가 추궁하자 상관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건 내가 상관가의 가주이기 때문이오."
"무슨 소리요?"
"일천 년 전, 측천무후를 도와서 봉선의식을 치렀던 게 바로 상관가문의 시조이신 상관완아(上官婉兒)님이오. 내 가문은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의식을 주재했으며 그 비밀을 일천 년동안 전승하고 있으니, 그 누구보다도 봉선의식과 칠요에 대해서 잘 알고 있소."
이윽고 상관혁이 말을 이었다.
"황제가 원하고 있기에 인간세상이 존속되고 있으며, 천계도 모순투성이인 봉선의식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납득하고 있는 구조요. 그리고 황제의 심복인 창힐이 그 체계를 생각해 냈지."
"체계라고?"
"그렇기 때문에 만일에 당신이 칠요의 주인으로서 봉선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상관혁의 눈이 빛났다.
"황제와 창힐에 대해서 알아보고 접근해야 할 것이오."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왜 봉선의식을 바꾸려 한다 생각하지?"
"아... 나라면 그럴거라는 말이오."
상관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젊은 시절부터 가문의 지식을 전승받고 수십 년간 생각했소. 칠요 하나하나를 찾아서 일일이 천계의 허락을 받아 해방하는게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어려운 일인지를... 천계에서도 귀찮아하는 일이 분명한데 다들 고대의 의식이란 이유만으로 내버려두고 있지."
"흐음."
확실히 그런 식으론 생각해보지 못했다. 이윽고 상관혁이 말했다.
"내 생각이지만 칠요를 간단하게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창힐부터 찾아내야 할 것이오. 창힐이 봉선의식을 제안했으며 성립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오."
"창힐 또한 삼황오제 바로 아래급의 신위(神位) 아니오? 그 자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내란 거요."
내 말은 지극히 당연한 반문이었다. 상관혁이 말했다.
"백웅. 당신은 창힐이 문자를 발명했을 때의 고사(古事)를 들은 적이 있소?"
"뜬금없이 무슨 소리요?"
"문자가 발명된 순간 모든 인간이 통곡했으며, 귀신들 또한 두려움에 경악했다 하며, 천재지변이 일어났다고 하오. 창힐이 문자를 만들어낸 건 결코 상서로운 일이 아니었으며 불길하기 그지 없는 재액(災厄)이었다는 소리요. 그리고 창힐은 문자를 발명한 공(功)으로 황제의 제일가는 심복이 되는 데 성공했소."
"으음."
"이건 그가 엄청난 권력욕의 화신이었다는 증거."
상관혁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는 사황(史皇)이라는 별칭을 지니고 있으며, 본디 인간이었으나 신위에 이른 입지전적인 존재요. 그래서 상관가의 시조이신 상관완아 께서는 창힐이 아직까지도 인간세상에 자신의 화신(化神)을 보내서 지속적으로 세상을 염탐하고 있다고 확신하셨소. 왜냐하면 창힐에게 있어서 지금의 중화세계는 그가 만들어낸 예술작품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오."
나는 황당해서 대꾸했다.
"무슨 신이 그렇소? 천계에서 고고하게 굽어보아도 모자랄 판에..."
"나도 모르지. 하여간 우리 상관가에서 봉선의식을 쉽게 하기 위해 내린 결론은, 그 사황 창힐의 화신과 접촉해서 봉선의식 과정을 조율하는 게 맞다는 거였소. 지금의 답답한 체계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오."
나는 그리고 상관혁에게서 칠요와 봉선의식에 대해서 좀 더 듣고나서 자리를 빠져나왔다.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 근처의 야산에 올라가서 고요를 느끼자, 제갈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소득이 없는 건 아니군.]
인적없는 야산이었기에 나는 중얼거렸다.
"창힐의 화신을 찾으라니 너무 엉뚱한 소리 같은데."
[ 나도 잘 모르겠다.]
"네녀석이 모르는게 있다니 별일이군."
제갈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 고대의 비사나 도교신위의 연관관계는 내 전공이 아니야. 굉장히 어려운 추론관계가 이어져 있을테니 가공할 독서량과 연구능력이 필요하다. 이걸 알아낼 수 있는 자는 따로 찾아봐야 할 거다.]
나는 그 순간, 그런 인간이 딱 한 명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서 소리내어 말했다.
"망량."
[ 그래. 그 녀석밖에 없지. 책으로 읽은 지식만으로 초고대 갑골문을 해석해내는 녀석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나는 새삼 망량이 그리워졌다. 헤어진지 시간으로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의 빈자리가 조금씩 느껴졌다. 만일에 제갈사와 더불어 망량에게서도 조언을 받을 수 있었다면 훨씬 더 나았을까? 하지만 지금 망량은 힘을 쌓기 위해 수련중이니 볼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좋아. 이제 마음정리가 됐어."
[ 거참 마음정리 하나 하는데 오래도 걸리는군. 그렇게 죽기가 싫으냐?]
"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해 둘께."
[ 크크크...]
제갈사가 나를 비웃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제 교주한테 내 말이 통할지 시험해봐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