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96 천계(天界) =========================================================================
제갈사가 말했던 상책이란 바로 천우진을 끌어들여서 주작을 토벌하는 것이었다.
' 뭐, 망량선사가 아무 말도 안했는데도 알아챈 건 신기하지만.'
원래 계획이라면 망량선사에게 내 계획을 설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망량선사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마음을 읽은 것 같았다. 제갈사가 껄끄럽다는 듯 말했다.
[ 망량선사는 진짜 엄청난 존재다. 함부로 개기지 마라 병신아.]
[ 성질 더러운 고양이일 뿐이야.]
[ 미친 놈... 망량선사를 그렇게 대하는 놈은 너 뿐일 거다.]
미친 제갈사조차도 망량선사에게는 일말의 경의를 표하는 듯 했다.
나는 신경질을 내는 천우진을 데리고 태산으로 가기로 했다. 천우진은 출발하기 전에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짜고짜 데려가기 전에 그 주작인지 뭔지가 어떤 놈인지 설명을 해줘야 할게 아니오?"
"음, 그렇군."
나는 전후사정을 천우진에게 설명했다. 천우진은 망량선사에게 간단한 지령밖에 듣지 못한 듯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다 들은 천우진이 떫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패를 사용가능한 최고수준의 술사가 두 명이나 있다는 소리군. 게다가 그들의 본거지를 직접 치러 가자는 건가."
"그렇소만..."
나는 은근슬쩍 도발했다.
"힘들 것 같으면 좀 더 동료를 모아서 가는 것도 좋겠소."
그러자 천우진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됐소. 그냥 갑시다."
"괜찮겠소?"
"나는 당신의 일정에 오랫동안 휘둘릴 생각 없소. 내 일을 할 수 있게끔 빠르게 일을 해치웁시다."
당당하게 말한 천우진이 고개를 거만하게 까닥였다. 빨리 가자는 모습이었기에 나는 황당한 느낌이었다.
' 이 녀석, 제갈유룡과 제갈부의 힘을 듣지 못한 건가?'
두려움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다.
일단 제갈사가 상책이라고 주장하기에 그의 말대로 천우진을 끌어들이긴 했다. 하지만 천우진이 정말로 그들을 해치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천우진을 미심찍어하자 제갈사가 말했다.
[ 그럴 만 하지.]
[ 뭐가? 이 녀석이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 적어도 너보단 훨씬 강하겠지.]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 의심할 필요 없다. 지금의 천우진이 주작을 정리할 수 없다면 교주를 끌어들이는 방법밖에 없으니까. 천계에서 천우진만 붙여준데는 이유가 있다.]
그 정도란 말인가?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사불상에 천우진과 함께 탔다. 그리고 사불상을 이용해서 태산 천제단 앞의 결계로 향했다.
파앗
천우진은 결계를 보자마자 알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팔진도(八陣圖)로군."
"뚫을 수 있겠소?"
"그 전에 확인할 게 있소. 이 안에 놈들이 있는 게 확실하오?"
"내가 알기로는 그렇소만..."
"그렇다면야."
천우진은 자신의 왼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짧게 외쳤다.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콰칭!
팔진도는 공간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바로 깨졌다. 나는 천우진이 과거에 팔진도를 깼을 때보다 더 쉽고 간단하게 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난번에는 수인을 맺으며 꽤 정신집중을 하는 모습이었는데 이번에는 마치 문을 밀어열듯 간단해 보였다.
' 지난번에는 팔진도를 완전히 깨는 건 안된다고 했었는데.'
지금도 천우진 본인이 말했던 설명이 기억난다.
[ 이 진법은 술자의 생명력과 연결되어 있소. 이 진을 펼친 자의 각오가 굉장하다는 증거요.]
[ 이 팔진도를 설치한 자는 대단한 술법사요. 그런 자가 목숨을 걸고 설치한 진법은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리 쉽게 부술 수 없소. 적어도 하루동안 제(祭)를 치르며 고생해야만 거둘 수 있소.]
[ 안쪽의 동향을 살펴볼 시간이라면 한 식경까지 마련할 수 있소.]
즉 지난번에는 진을 깬 게 아니었다. 한 식경동안 잠시 진법을 해제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천우진은 가타부타 언설하지 않고 바로 진을 영구히 해제해버린 모양이었다. 천우진이 예전보다 더 강해진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팔진도가 깨지자 천우진은 성큼성큼 발을 딛었다. 그리고는 버럭 외쳤다.
"오뇌호령(五雷號令)!"
번쩍!!
호통과 함께 난데없이 하늘에서 번개가 다섯 줄기 떨어졌다. 그 번개가 떨어지자 거무튀튀한 흑연(黑煙)이 멀리서 피어올랐는데, 천우진은 마음에 안 드는 듯 재차 외쳤다.
"총소만령(總召萬靈)!"
쿠콰쾅
이번에는 번천지복하듯 땅과 하늘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태산 전역에 지진이 울리는 듯 했다. 나는 천우진이 외치는 게 무엇인지 깨닫고 기겁했다.
' 언령(言靈)?!'
언령이란 말 자체에 담긴 힘인데, 마치 공식처럼 발동하여 말을 하게되면 힘을 부여하는 방식의 술법이다. 하지만 언령이란 어디까지나 술법의 부차적인 요소로서 나머지 수인(手印), 의식 등이 받쳐줘야만 제 기능을 할 수 있었다. 언령 자체로 강력한 술법을 부릴 수 있는 자는 언령사라고 불렸는데 술법사 중에서도 아주 희귀한 존재였다.
그런데 천우진이 내뿜는 언령은 차원이 달랐다. 설령 진짜 언령사라고 해도 언령만으로 천지의 정령(精靈)을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의 한 마디 말은 만물의 요소를 조작하고 심지어 파괴시킬 수 있는 듯 했다. 술법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있는 나는 지금 천우진의 힘이 얼마나 가공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오뇌호령 총소만령은 급급여율령과 마찬가지로 별 의미없는 도교 오뇌패의 법언에 지나지 않는다. 주술적으로 별다른 기능을 할 수 없는 걸로 천지를 뒤엎는 언령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언령이 내질러지자 먼 곳에서 메아리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 너는 누구냐? 누구길래 팔진도를 깨고 나를 공격하느냐?]
십중팔구는 주작일 것이다. 천우진은 싸늘하게 웃더니 마주 대꾸했다.
[ 천기(天機)를 훔쳐보는 사악한 자를 없애러 왔다.]
슈욱
천우진이 갑자기 내 눈 앞에서 사라졌다. 아무래도 주작을 공격하러 직접 가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기(氣)를 감지해서 희미한 잔향을 쫓아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 공간이 일그러진다.'
대략 오십여 장을 뛰었을 때 느낀 점이었다. 팔진도는 이미 사라졌는데도 이 주변의 공기는 무겁게 짓눌리며 왜곡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갈수록 뇌염(雷炎)과 풍운(風雲)이 치솟으며 가공할만한 용권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 쳐라!]
거대한 신장(神將)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며 창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키가 이 장에 이르는 신장들은 천우진의 소환술으로 나타난 게 틀림없었다.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신장들이 일제히 돌격하자 산이 무너져 내릴 듯 했다.
그와 동시에 머나먼 허공에서 풍뢰가 몰아쳤다. 천우진의 술법에 대항하기 위해서 제갈유룡이 술수를 부리는 걸로 보였다. 풍운이 신장들을 휩쓸며 크게 산사태를 일으켰고 진흙과 토사가 터져나오며 기경한 폭발음이 울렸다.
쿠르릉
동시에 허공에서 흰색 깃털이 휘날리며 부적이 성광(聖光)과 함께 나타났다. 마치 빗줄기처럼 쏟아부어지는 부적의 향연과 함께 오행(五行)의 갖가지 요소가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화룡과 수룡이 교차하며 허공을 날아다니며 염옥(炎獄)을 장식했다.
' 엄청난 술법이다...!!'
나는 천우진과 제갈유룡 사이의 술법전이 벌어지는 걸 보자 침을 꿀꺽 삼켰다. 일반적인 술사들의 수준에서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오행술과 술법! 보통이라면 저런 술법을 하나 쓰려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기력을 소모할텐데 그들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천우진이 귀찮다는 듯 자신의 손을 앞으로 내뻗으며 외쳤다.
[ 삼천양지(參天兩地)가 뒤집어진다!]
그 순간이었다. 제갈유룡이 펼쳐내던 오행술과 부신술은 갑자기 형상을 잃고 픽하고 흩어져 버렸다. 제갈유룡을 보호하고 있던 임시결계도 함께 깨어져 버려서, 대략 삼십여 장 밖에 제갈유룡의 본모습이 명백히 드러나 있었다.
이대로 결판이 나는가?
그러자 제갈유룡이 자신의 품 속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천지에 팔괘(八卦)가 둥실거리며 떠다니기 시작했다. 내 주변에도 건괘와 감괘가 흐릿하게 스쳐지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엄청난 범위에 팔괘를 소환한 모양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제갈유룡이 어떤 수를 썼는지 직감하자 머리털이 쭈뼛 섰다.
' 토요 팔괘도!'
토요의 술법무효화!
이건 칠요의 힘마저도 봉인할 수 있는 능력으로써, 과거 나는 미호와 함께 천제단에 이동했을 때 제갈유룡에게 이 수법을 당했던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의 제갈유룡은 지난번처럼 토요를 미리 대여해서 그 힘을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술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천우진은 그저 평범한 청년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닌가!
나는 위기감을 느끼고 재빨리 천우진을 보호하려고 움직였다. 여기서 천우진이 당해버리면 모든 게 끝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우진은 토요 팔괘도의 술법무효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제갈유룡에게 말했다.
"분수에 맞지않는 힘이군."
"......"
"신의 힘을 빌려온들 인간이 신이 될 수는 없는 법이지."
그렇게 중얼거린 천우진이 갑자기 허공에 손을 뻗어서 움켜잡는 자세를 취했다.
우드득!
"커헉!"
난데없이 허공에서 사람이 나타나더니 무형의 힘에 옥죄여서 버둥거리는 모습이 되었다. 그 자는 제갈부였고 고통때문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제갈유룡이 난데없이 벌어진 일에 흠칫하는 기색이자 천우진이 차갑게 말했다.
"자충수를 뒀군. 이놈을 어떻게 처치할지 고민중이었는데."
"......"
"기습을 하려고 내 주변에 은신해 있었던 모양인데, 멍청한 짓이었어."
제갈유룡은 아들이 인질로 잡히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재빨리 천우진 옆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괜찮소?"
그러자 천우진이 뭔 소리를 하냐는 기색으로 나를 멀뚱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뭐하시오?"
"응?"
"저 놈을 제압하시오. 저 놈은 지금 무공밖에 쓸 수 없으니까."
"아!"
"나는 이 놈을 인질로 잡아야 하니까 당신이 일을 해 줘야하오."
나는 상황을 이해했다. 천우진은 토요 팔괘도 때문에 술법이 봉인당했는데도 한 수를 써서 제갈부를 인질로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토요의 봉인은 장난이 아니라서 천우진도 그 이상 뭔가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내가 나서서 제갈유룡을 제압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알았소."
스윽
내가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서자 제갈유룡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상하군. 너는 배교의 교주일텐데 왜 천계의 도움을 받는 거지?"
내게 한 질문같다. 나는 그를 쳐다보다가 씩 웃었다.
"넘겨짚기가 수준급이군. 그럼 각오해라!"
내공을 강하게 일으키자 검에 뇌기(雷氣)가 어렸다. 지금 내가 쓰는 검은 백련교에서 받은 명검인지라 내구도가 아주 강해서 웬만한 싸움으로는 흠도 가지 않았다. 나는 살기를 끌어올리며 빠르게 그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제갈유룡이 자신의 검을 뽑아드는 광경이 내 눈에 박혔다.
쩌엉
첫 격돌은 뇌신검무(雷神劍舞)와 공손검결(公孫劍決)의 충돌이었다. 나는 첫 충돌 직후 3초를 교환하는 동안 그의 검초가 무척이나 오묘한 변화를 12개나 머금고 있다는 걸 알아채자 급히 손을 뗐다.
' 음!'
끝을 알 수 없는 깊이가 느껴지는 검법이다! 첫 수로 그의 실력을 가늠해보려 했으나 검초의 파생변화가 너무나 불규칙하고 자유로웠다. 지금까지 대적해 봤던 그 어떤 검법과도 이질적인 느낌에 탄성이 나올 정도였다.
[ 수라천광대법(修羅天光大法)과 공손검결(公孫劍決)이에요. 수라천광대법은 내공심법을 비롯한 내가중수법의 운용이며 공손검결은 상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검법입니다.]
[ 충고해 두겠네. 태산노옹과 싸울 때는 그의 검법을 조심하게. 그 검법은 말도 안될 정도로 강력하다네.]
[ 그가 천하에 삼대기인으로 우뚝서게 한 대표적인 절기일세. 조심, 또 조심하게.]
사공린이나 신승의 말에 따르면 공손검결은 무시무시한 절기였다. 나는 이전까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 직접 마주쳐보니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검로의 변화와 장중함, 예리함이 하나같이 초일류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고 균형 또한 완벽했다. 그러면서도 상대의 힘을 파고들어서 갈라버리는 기괴함마저 품고 있었다. 내가 검술로서 검호(劍豪)의 경지에 이르러 있기에 공손검결의 위력을 대번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승의 내공은 나에 비해서 그렇게 떨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 엄청난 내공을 가진 신승조차도 공손검결을 조심하라고 평가한 걸 보면 지금 그를 얕볼 수는 없다. 직접 공손검결의 소유자와 싸워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서 부담감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전생을 하는 동안 공손검결의 파해식 또한 들은 적이 있었다.
[ 공손검법은 사상오행의 원리에 의거해서 만들어진 검법이다. 무공의 연원부터 의념절기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거지. 그래서인지 상대하다보면 상대의 흐름에 끌려들어가며 수세에 몰리게 되는데, 이걸 막기 위해서는 대등한 무리(武理)로 상대의 흐름을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
[ 백웅. 그 자를 상대할 때는 굴공검과 천축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걸 권하오.]
[ 간합을 조절하게 되면 공손검법의 무결성에 흠집이 나게 되오. 상성상 좋소.]
재수없는 이광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한번 번득이자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진소청이 말해줬던 조언을 되새기며 침착하게 굴공검과 천축검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제갈유룡의 내공 또한 굉장히 높은 수준인지라 내가 내공으로 쉽사리 밀어버릴 수는 없었다.
우우웅
약 이십여 초를 겨뤘을까? 나는 천방지축으로 날뛰며 만변(萬變)하던 제갈유룡의 공손검결이 간합에 휘말려들며 평범한 검초로 전락하는 것을 느꼈다. 제갈유룡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아니!"
아직까지 제갈유룡이 크게 수세에 놓이지는 않았으나 그는 본능적으로 공손검결의 약점이 노출되었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이대로 계속 싸울 경우 내가 그에게 치명상을 줄 수 있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그것은 공손검결의 완전무결함을 굴공검이 헤집고 천축검이 벌려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굴공검과 천축검이 딱히 공손검결의 천적이어서가 아니다. 애초에 공간의 힘을 조종하는 굴공천축검이 너무나 사기적인 검술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었다. 나는 자신감을 얻으며 한층 강하게 제갈유룡을 정면으로 밀어붙였다.
콰과광!
내가 직도황룡의 일초로 내려친 강검(剛劍)과 함께 폭발음이 일어났다. 제갈유룡의 검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히 부숴졌고, 비틀거리는 제갈유룡을 추격해서 그의 명치에 슬격(膝擊)을 꽂았다.
"커헉!"
제갈유룡이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슬격 한 방에 가슴뼈가 죄다 부러지고 장기가 터졌을 게 분명했다. 나는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 죽이면 안되지.'
여기서 죽여버리면 예비육체로 도망갈 뿐이다. 나는 순식간에 그의 혈도를 점하기 시작했고, 제갈유룡은 내 점혈을 보자 뭘 하려는지 예감했는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찰나의 순간에 심맥을 터뜨렸다.
푸확
그의 칠공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그가 자진하는 속도는 매우 빨라서, 그가 사전에 몸 안에 독단(毒丹)을 넣어서 대비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최대한 그를 살리기 위해 혈도를 잡았으나 이미 늦어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천우진이 말했다.
"됐소. 이 놈한테 물어보면 되겠지."
천우진은 허공에 제갈부를 인질로 잡고 있었다. 제갈부는 백우선을 들고 있는데도 쓸 수가 없는 듯 몸을 꿈틀거릴 뿐이었다. 그를 붙잡고 있는 무형의 힘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이리라. 나는 천우진에게 반문했다.
"천우진. 여기는 아직 팔괘의 힘으로 술법이 봉인되어 있는데 당신이 지금 제갈부를 제압하고 있는 그 술법은 무엇이오?"
그러자 천우진이 여상하게 대답했다.
"이건 술법이 아니라 의념(意念)으로 만든 거요. 그래서 팔괘를 봉인해도 이정도는 힘을 쓸 수 있지."
"뭐?!"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의념이란 뛰어난 재능을 지닌 무술기재가 수십 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다해서 간신히 깨우치는 무예가 극고의 경지였다. 아무리 천우진이 술법사로서 최상의 경지에 도달한 환신이라고는 하지만 의념을 사용할 수 있다니?
"극에 이르면 통하는 법이지."
그렇게 중얼거린 천우진이 말을 이었다.
"우선 태산의 천제단 상태부터 확인합시다. 제갈유룡은 그 다음에 쫓아도 늦지 않소."
"알았소."
나는 제갈부를 점혈해서 완전히 포박한 후 그가 들고 있던 백우선을 뺏았다.
백우선.
이것은 본래 제갈무후(諸葛武侯)가 사용했다고 알려진 전설의 보패로서 천계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 알려져 있었다. 출중한 재능을 지니고 있던 제갈무후가 본인의 지식과 역량으로 순수하게 제작한 인간계의 보패라는 소문도 있었다. 나는 보패 백우선의 정확한 능력은 알 수 없었지만 이게 내게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 상관혁에게 이걸 주면 되겠군.'
그럼 간단하게 의뢰 완료다. 물론 백우선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알아보고 줘도 늦지는 않으리라. 내가 백우선을 챙기며 천우진과 함께 태산의 정상에 올라서 천제단에 도착하자, 천제단에는 한창 의식을 치르던 '준비'가 남아 있었다.
"......!!"
인간의 시체와 피가 널려 있다! 인간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평범한 양민들의 복색이었으며 끔찍하게도 심장을 뽑히거나 두개골이 부숴진 시체도 더러 있었다. 뿐만 아니라 피로 그려진 도형이나 신비도안이 있어서 여기서 악독한 제의(祭議)가 이뤄졌다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천우진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역시 [옛 지배자]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 사악한 의식을 치르고 있었던 모양이군. 빨리 와서 다행이오."
"이 놈들이 힘을 얻기 전에 분쇄했다는 말이오?"
"그렇소. 만일 의식이 완료됐다면 나라도 힘들었을지도 모르겠군."
"으음..."
나는 몸서리를 쳤다. 주작 제갈유룡은 전생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굉장히 까다로운 상대였다. 한방에 죽일 수도 없었고 조금만 시간을 주면 철저히 준비해서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이 놈을 단숨에 제압할만한 정보와 힘을 마련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복잡해질 게 틀림없었다.
"백웅. 제갈유룡의 행적을 알려면 이 자를 고문하는 수밖에 없을텐데 나는 그리 고문이 취향이 아니오. 당신이 하겠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귀찮은 짓은 하지 않소."
슈칵!
나는 천제단 위에 제갈부를 눕히고는 단숨에 검을 뽑아서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러자 잘린 목에서 푸른 피가 터져나오더니 그 안에서 시뻘건 촉수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키긱거리면서 제갈부의 몸이 이질적인 마(魔)로 변해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제갈부의 몸을 재차 검강으로 난도질해서 놈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쳐죽였다.
제갈부라고 불렸던 마(魔)가 잠잠해지자, 나는 두 손을 들어서 십지(十指)에 의지를 모았다. 그리고는 천신경의 술법을 발동시켰다.
우웅!
이윽고 영이 십지와 감응하더니 바로 눈 앞에 거대한 영이 존재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혼돈과 공포에 휩싸여 있는 제갈부의 영혼이 눈 앞에 있었다. 나는 웃으며 제갈부의 영혼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반가워."
[ 으으... 네... 네놈...]
제갈부를 일일이 고문하는 건 너무 번거롭고 짜증나는 과정이다. 그래서 그냥 제갈부를 죽여버리고 그의 영혼을 천신경의 술법으로 불러내어서 강제로 정보를 토해내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천신경의 주인으로서 명한다. 제갈유룡의 예비육체가 있는 본거지를 알려 줘."
왜냐하면 영혼의 호오에 상관없이 천신경의 술법으로 불려나온 영혼은 시전자의 부탁을 들어줘야 했다. 위증이나 교란도 있을 수 없었다. 살아있는 제갈부와 입씨름하는 것보다는 이게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