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95 천계(天界) =========================================================================
상관혁의 의뢰를 받은 후 나는 고민했다.
' 마침 잘 된 셈이지만.'
바로 교주를 따라서 본단에 복귀할 경우 나는 천령단을 전수받는 일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지난번에는 무술에 혼란이 일어난다고 변명해서 적당히 때워넘겼지만, 교주는 그렇게 만만한 자가 아니다. 다음번에 천령단의 제안을 할 때는 절대 회피할 수 없도록 제반사항을 마련해놓고 이야기를 할 것이다.
지금은 상관혁의 의뢰를 들어주면서 앞으로 교주에게서 천령단의 전수를 피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교주에게서 도망치는게 가장 마음이 편하겠지만, 왠지 지금 교주에게서 떨어져 버리면 아주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없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내가 머릿속에서 작전을 짜고 있자 제갈사가 킬킬 웃었다.
[ 안 되는 머리 굴리느라 용쓴다. 그래도 방향은 안 틀렸군.]
이 놈이 이죽거리는 걸 일일이 신경쓰기도 지친다. 나는 못 들은 척 제갈사에게 질문했다.
[ 상관혁이 보패를 원하는 이유가 뭘까? 놈은 교주에게서 보패를 받을 수도 있을텐데.]
[ 그 놈이 욕심쟁이라는 뜻이지.]
[ 욕심쟁이?]
[ 교주가 황궁토벌의 상은을 내리겠다고 할 때, 놈이 교주에게 보패를 받으려 했다면 교주는 쉽게 내줬겠지. 그러나 그 제안을 하지 않고 네놈에게 따로 의뢰한 이유는, 교주에게 아직까지 빚을 지워두겠다는 뜻이다. 최대한 울궈먹으리라고 생각한 거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 기가 막히는군. 교주가 그 약속을 안 지키면 어쩌려는 건지...]
[ 물론 교주는 상황에 따라 약속을 어길 수도 있는 인물이지만, 적어도 자기가 한 말은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다. 그렇기 때문에 빚을 지워두는 건 큰 의미가 있지. 상관혁은 교주의 성정에 대해서 꽤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해.]
[ ......]
[ 놈이 보패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말해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겠지. 우선은 보패를 어떻게 얻을지에 대해서 집중하자.]
제갈사의 말이 옳다. 나는 상관혁에게 이미 보패가 필요한 이유를 물어보았으나 그는 대답을 회피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일단 의뢰를 수행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 망량을 찾아야 하나?]
[ 하책(下策)을 생각해 냈군. 등신.]
이 놈이 비꼴 때마다 머리가 아프다.
[ 뭐! 뭐가 잘못됐는데.]
제갈사가 이죽거렸다.
[ 보나마나 현이가 가진 오화칠금선(五火七禽扇)이 가장 얻기 쉽다고 생각해서 한 말이겠지?]
나는 벌컥 짜증을 냈다.
[ 그래. 백우선은 제갈부 놈이 어디 뒈졌는지 몰라서 찾을수가 없고, 천우진 놈한테 산하사직도를 달라고 한다고 줄 리가 없고, 전국옥새는 지금 눈치도 보이는데다 봉인을 해제할 술력도 없고, 화룡신검은 어딨는지 모르겠고, 순어구는 교주 손에 있잖아. 그래서 망량을 찾겠다는데 이게 정답이 아니면 뭐냐?!]
[ 흐흐. 그게 바로 범인(凡人)의 생각.]
낄낄대던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 네 녀석은 그래서 망량을 찾기 위해 정보단체를 뒤지거나 망량선사를 찾아가거나 나한테 징징대거나 셋 중 하나를 생각해 냈겠지. 하지만 그 중 어느것도 하책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하책이라고 한 것 뿐이다.]
[ 뭐?]
[ 네가 망량이라고 생각해 봐라. 백련교의 힘이 욱일승천하는 걸 모르겠냐? 당연히 네가 백련교주에게 협력하는 걸 알고 있을테니 지금까지보다 백련교의 세력이 강화되고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겠지. 이 상황에서 망량은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는 한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설령 네가 간절히 찾아다닌다고 해도 말이다.]
[ 윽...]
[ 숨으려고 마음먹은 현이를 찾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야. 게다가 네 녀석은 지금 정보단체를 쓰거나 요란하게 활동하기가 너무 힘들어. 알게모르게 네 녀석에게 감시가 붙어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지?]
나는 힐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주 은밀하게 기척을 숨기고 있으나, 수신류의 고수 두 명이 거리를 두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싸워서 이길 수는 있겠으나 피차 싸울 수 없는 입장이기에 내버려두고 있을 뿐이다.
[ 그래.]
[ 지금 현이를 찾는 건 하책이다. 잘 알아 둬.]
나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다가 말했다.
[ 그럼 중책(中策)은 뭐냐?]
[ 함정을 파고 지금부터 낙양에서 대기하는 거지.]
[ 뭐? 함정? 왜?]
[ 크크크... 정말 하나도 모르는군.]
푸념하듯 중얼거린 제갈사가 말했다.
[ 야. 일단 주관을 배제하고 사실만 말해 보자. 주작을 죽인 자는 신의 저주를 받지. 그런데 교주가 왜 안 죽었을까?]
[ 음...?]
나는 멍하니 있다가 아차해서 대꾸했다.
[ 주작이 지금 살아있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가. 하지만 그건 알고 있었던 사실이잖...]
[ 등신아. 알고 있으면 뭐 하냐? 그 놈이 살아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고 있잖냐.]
[ ......]
[ 주작 입장에서 생각해 봐라. 백련교의 압도적인 전력에 패배한 채 겨우 목숨만 건져서 예비육체로 옮긴 상황이지.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할 지를 생각해 보라고.]
[ 그야... 기회를 봐서 백련교에게 반격하려 하겠지.]
[ 그러면 반격을 어떻게 하지? 그 근본이 될만한 여지는? 정보일 수밖에 없지. 그 정보가 뭐겠냐?]
[ 어... 그게...]
잘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서 우물쭈물하자 제갈사가 말했다.
[ 천계의 정보다. 놈은 지금 태산의 천제단을 점거한 채 천상의 정보를 훔쳐듣고 있는 중이야.]
[ 아...!!]
[ 백련교는 당장 인간의 무림세력으로는 무슨 수를 써도 쓰러뜨릴 수 없다. 하지만 천계의 정보를 모으다 보면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지. 왜냐하면 주작 제갈유룡은 강력한 술법사이자 마도사니까.]
그 생각을 못 했구나!
' 그래, 주작은 태산노옹의 신분을 가지고 태산에 거주하면서 천계를 감시하는 중이었어!'
예전에 얻었던 정보였는데 이번 일과 연관을 시키지 못한 것이다. 뭔가가 머릿속에서 풀려나는 느낌에 입을 벌리자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 그리고 놈은 이미 대박정보 하나를 얻었을 확률이 크지. 그게 뭐겠냐?]
[ 뭔데.]
[ 네놈의 정보다. 네 녀석은 얼마 전에 여동빈과 교섭해서 월요의 주인자격을 얻으면서 지상의 패자(覇者)를 견제하는 임무를 받았지. 주작이 천계의 정보를 얻어냈다면 아주 기뻐할 만한 대박정보 아니냐? 왜냐하면 네 녀석을 제압하면 칠요 하나가 공짜로 손에 들어오니까 말이지.]
[ ......!!]
[ 게다가 네 녀석은 제갈부에게 이혼대법을 걸어서 최종적으로는 죽게 만들었어. 되살아난 제갈부는 당연히 네놈 얼굴을 알고 있지. 니가 주작 제갈유룡이라면 너를 가만 놔둘까? 백발백중 너를 노리고 접근해서 납치하거나 공격할 게 뻔하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상황이 안좋다는 걸 깨달았다.
[ 그래서 함정을 파고 기다리자는 거냐?]
제갈사가 비웃었다.
[ 그래. 중원 어디 있을지도 모르는 망량을 찾아나서자는 대책없는 병신새끼의 제안이 하책인 이유 정도는 알았겠지?]
[ 씨발...!!]
띠껍기 그지없는 제갈사의 말에 욕지기가 나왔지만 할 말이 없다. 제갈사가 상황을 짚어주기 전에는 중책의 제반사항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 ... 그럼 상책(上策)은 뭔데?]
제갈사가 킬킬댔다.
[ 흐흐. 듣고 싶냐?]
[ 말해 줘. 어차피 상책으로 진행해야 하잖아.]
[ 그 전에 하나 확인해야 할 게 있다. 네 녀석은 목숨을 담보로 모험을 할 생각이 있냐?]
[ 엉?]
[ 모험에 성공하기만 하면 굉장히 일이 쉽게 풀린다는 가정이라면 말이다.]
이건 무슨 의도로 하는 질문일까?
나는 뭔가 싶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 아니, 그럴 생각은 없어.]
[ 왜지?]
[ 이번 생은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어. 끝까지 살아남을수록 얻게 되는 정보도 많아질 것 같아서 웬만하면 무난하게 가고 싶군.]
[ 흐음... 그렇단 말이지.]
[ 대체 왜 그런 질문을 한 거냐?]
[ 아아. 별 거 아냐. 그럼 지금부터 상책을 설명해 주마.]
대충 얼버무린 제갈사가 말했다.
[ 상책은 망량선사가 있는 마을로 찾아가는 거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다.]
[ 어? 차라리 이쪽에서 먼저 태산으로 가서 주작놈을 치면...]
[ 미친 놈. 백련교주에게 패배한 주작이 최후의 근거지이자 절대 뺏겨서는 안되는 태산의 천제단에 웅크리고 있는데, 그걸 이쪽에서 너 혼자 찾아간다고? 백련교주가 직접 찾아가도 크게 반격당할지도 모르는 함정이 설치되어 있을텐데 미쳤냐?]
[ ......]
백련교주나 호법사자를 데리고 가자는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백련교주가 그 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 의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일이 제멋대로 꼬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 잔말말고 일단 망량선사가 있는 곳으로 가라. 그래야 일이 제대로 진행된다.]
"잠깐, 그 전에 거기를 들르는 건..."
나는 생각을 짜 내서 제갈사에게 말했다. 내 생각을 들은 제갈사가 대꾸했다.
[ 나쁘지 않군. 굳이 해야되나 싶긴 하지만.]
"안 된다는 거냐?"
[ 별 상관없다는 소리다. 뇌신류와 그리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는데.]
제갈사가 떫은 듯 중얼거렸으나 나는 무시하고 진행하기로 했다.
파앗!
나는 망량선사가 있는 마을로 가기 전, 사불상을 타고 청룡무관으로 향했다. 청룡무관은 폐쇄하지는 않았으나 제자가 많이 줄어든 모습으로, 전체 제자의 숫자가 스무 명 남짓에 불과해 보였다. 그리고 청룡무관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뇌신류 고수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를 발견한 이청운이 반가운 듯 말했다.
"잘 왔네. 백웅."
"잘 지내셨습니까."
"하루하루가 충실한 나날이었지."
이청운의 옆에는 이광과 진소청이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의 기도를 살폈는데, 예전에 봤을 때와는 뭔가가 많이 달라진 것을 직감했다.
' 음... 이건...'
예전에 칠대절학을 연구해서 상승경지에 올랐던 그들과는 다르다. 좀 더 본질적인 자연지기(自然之氣)가 그들의 몸에 흐르는 게 느껴졌다. 또한 딱딱하지 않고 유연한 의형(意形)이 감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차이는 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청운이 말했다.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군. 근황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청운과 헤어진 이래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설명이 얼추 끝나자, 좀 더 확실함을 위해서 품속에 있던 흑요석을 꺼내서 기억을 담아서 건네 주었다. 이청운은 기억을 읽은 후 침음성을 흘렸다.
"지주명왕(蜘蛛明王)이라! 교주는 칠대절학의 파괴력에 역점을 두고 연구했구나."
"그 절학이 어떤 원리인지 혹시 아시겠습니까?"
"물론이네."
그렇게 단언한 이청운이 설명해 주었다.
"태극요지유검, 현천오신결, 그리고 굴공참의 3개절학을 합친 결과일세. 자네가 이전에 보았던 바둑판같은 강기가 굴공참의 요결에 따라 확대되었다고 보면 되네. 거기에 세부적인 요결의 변화가 적용되었지만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군."
"으음."
"하지만 그건 삼보절기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킨 결과야. 무학의 유연한 활용보다는 압도적인 힘으로 파괴를 하기 위해서 만든 절기군. 교주의 성향에 딱 맞는다고 해야하나?"
"지주명왕을 삼보절기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강합니까?"
"삼보절기가 당연히 우세하네. 왜냐하면 삼보절기를 제대로 다 익히게 되면 지주명왕의 공격범위를 모두 회피하고 헛점을 찌를 수 있기 때문이지. 다만 이것도 숙련도의 차이에 따라 갈린다고 볼 수 있겠군."
이청운은 그렇게 중얼거린 후 말했다.
"백웅. 교주를 굳이 교란시킬 필요는 없어보이네."
"네? 왜입니까?"
그는 진득하게 웃었다.
"그는 절학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고 헛손질을 하고 있어. 조금이지만 승산이 보이는군."
"......"
헛손질이라고?
지주명왕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눈 앞에서 보았던 나로서는 손쉽게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마인 수백 마리를 일격에 회쳐버렸던 그 공격을 보고 승산이 보인다고 하는 이청운 또한 괴물로 보였다.
나는 이광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광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뭘 보나?"
"당신은 이제 스승이 부활했음을 인정한 거요?"
"대답할 이유는 없다."
내가 짜증나서 뭐라고 말하려 하자 진소청이 옆에서 손을 저었다.
"백웅. 괘념치 마시오. 우리는 당신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소."
"음, 알겠소."
나는 이청운에게 그간 내가 교주의 연구회에 참석해서 들었던 깨달음과 묘리를 알려주었다. 이청운을 비롯해서 뇌신류 고수들은 그걸 한 번 듣자마자 뭔가를 알아챈 표정을 지었다.
"좋아. 이쪽의 요결도 알려 주지."
또한 나도 대략 두 시진 동안 이청운에게서 칠대절학에 대해서 요령을 전해들었다. 간단한 전수였지만 도움이 많이 되는 게 느껴졌다. 정보를 전해주는 게 끝나자 이청운이 말했다.
"이렇게 된거 며칠 묵고 가는 게 어떤가? 좀 더 차분히 설명해주고 싶은데..."
"감사합니다만 제게도 수신류의 감시가 붙어있습니다. 서둘러 움직이지 않으면 꼬리가 밟힐 겁니다. 그럼 이 곳의 비밀이 들킬지도 모릅니다."
"그렇겠군. 그럼 살펴가게."
"강녕하시길."
파앗!
나는 중간의 볼일이 끝나자 곧장 사불상을 타고 망량선사가 있는 마을로 향했다. 그리고 천암비서를 묻어둔 채 마을에 진입했는데, 뭔가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다.
우우웅
예전보다 더욱 밀접하게 내 몸을 감싸는 결계의 기운이었다. 내가 답답함을 느끼고 몸을 뒤틀자 결계는 더욱 거세게 나를 압박했다. 숨이 막힐 지경이 되자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 백웅. 당신은 무슨 일로 예까지 온 것이오?]
천우진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내게서 삼 장 밖에 나타났다. 오색구름에 휩싸인 천우진의 모습은 여기가 현실이 아니라 환술공간이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적어도 칠요를 해방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가 천우진의 환술을 뚫을 수는 없으리라.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일단 망량선사를 만나러 왔소. 그 다음에 당신과 얘기할 게 있군."
천우진은 그리 곱지 않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백련교의 수하가 되어 황궁과의 전투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소. 여기에 찾아온 이유를 명백히 밝히지 않으면, 당신이 스승님을 만날 일은 없을 거요."
"찾아온 이유? 그걸 알고 싶소?"
"말하시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내가 월요의 사자가 되어 천계의 명을 듣는 건 알고 있을 거요. 그런데 중요한 임무가 생겨서 도교의 수호자인 망량선사께 의견을 구하러 찾아온 것이오."
"그 임무가 뭐요?"
나는 돌연 안색을 바꾸고는 엄중하게 말했다.
"그걸 당신이 물을 자격은 없소. 당장 비키시오!"
천우진이 황당한 듯 말했다.
"뭐라고? 당신이 지금 내 환술에 잡혀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태라는 걸 알고 하는 말이오?"
"물론이오."
"정말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천우진이 술수를 부리려 하자 나는 강하게 외쳤다.
"천우진. 당신이 잘나봤자 망량선사의 제자이며 지선(地仙)도 되지 못한 인도(人道)일 뿐이오. 천계의 사자로 선택받은 내 앞을 가로막고 겁박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멈칫
내 몸 주변을 감싸던 오색구름이 멈칫거리더니 흩어졌다. 그리고 짜증난 듯한 천우진이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곡을 찔린 천우진이 계속 나를 노려보고 있자 나는 뻔뻔스럽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비키시오. 당장."
천우진은 옆으로 물러서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시덥잖은 일이라면 각오하시오."
"아이구 무서워라."
나는 이윽고 망량선사의 사당 앞에 설 수 있었다.
"망량선사, 만나러 왔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서 잠에 빠져들었다.
[ 별일이군. 이혼대법의 부작용인가?]
검은 고양이가 맞은편 오솔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망량선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뭐가 부작용인데."
[ 배교 교주의 영혼이 너와 같은 몸에 있지. 하지만 그건 실패도 성공도 아니다. 이혼대법의 전제조건이 틀려먹었을 뿐.]
나는 검은 고양이의 몸 주변에 새하얀 불꽃 같은게 둥실둥실 떠다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불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망량선사가 말을 이었다.
[ 불청객은 먼저 돌려보내지.]
후웅!
흰 불꽃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저 불꽃이 제갈사의 영혼이었던 듯 하다. 꿈의 세계에 본의아니게 제갈사가 따라들어오자 망량선사가 그를 돌려보낸 모양었다.
' 신은 신이구나.'
내가 망량선사의 권능에 내심 감탄하고 있을 때 망량선사가 말했다.
[ 강렬한 사기(邪氣)에 오염되어 있군. 하지만 본질은 전혀 타락하지 않았어. 이런 일 또한 처음 본다.]
"내가 오염되어 있다고?"
[ 그래. 하지만 이계의 탁기가 네 영혼을 먹어치우지 못하고 있군. 대라신선조차 타락시킬 수 있는 탁기가...]
그렇게 중얼거린 망량선사가 내 이마에 앞발을 갖다대었다.
[ 정화시켜주마. 이대로 두면 안되니.]
우웅
그러자 머릿속이 뭔가 말끔해진 기분이 들었다. 내 이마를 만지작거리자 망량선사가 말했다.
[ 뭐 때문에 찾아왔는지 다 알고 있다. 천우진을 빌려가려고 온 거지?]
"으... 안 되냐?"
[ 안될 건 없지.]
잠시 침묵하던 망량선사가 말을 이었다.
[ 최근 천계의 대라신선 회의에서 서왕모가 말했다. 하늘사다리를 다시 이을 필요가 있다고.]
"......?"
[ 그녀는 인간세상의 혼란에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화를 냈다.]
이 꿈의 세계에서는 제갈사의 조언을 들을 수가 없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반문했다.
"하늘사다리라면 천제단을 부활시킨다는 말이야?"
[ 그렇다.]
"왜? 그게 뭔 의민데."
[ 천계의 경고(警告)다.]
망량선사는 보기드물게 기분이 나빠보이는 기색이었다. 꼬리를 직각으로 치켜세운 망량선사가 내 옆을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 사고뭉치인 네 녀석에게 천상천하(天上天下)의 대계(大計)를 일임할 수는 없는 법이지. 사고예방을 할 수 없다면 사후처리라도 해야하지 않겠냐.]
"그러니까 너희 천계가 알아서 혼란을 수습하겠다는 말이냐?"
[ 네가 백련교주와 십이율주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렇게 되겠지.]
"빌어먹을! 무슨..."
나는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월요를 다루고싶은 욕심에 천계의 사자 자리를 받아들였지만 왠지 생각보다 일이 극단적으로 흐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망량선사가 힐끔 나를 뒤돌아보다가 오솔길을 걸어가며 말했다.
[ 천제단이 이어지는 일은 나도 바라지 않는다. 부디 열심히 하기를 바란다.]
"일어났소?"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천우진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천우진을 멍하니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그럼 갑시다. 천계의 사자님."
비꼬듯이 말하는 천우진의 얼굴에는 신경질이 가득했다. 나는 그 얼굴을 보자 기분이 좋아져서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제 날 도와서 열심히 일해야 할 거요."
"알고 있으니까 닥치시오."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겠지?"
"으으."
"망량선사한테 들었겠지?"
내가 이죽거리자 천우진이 극렬한 짜증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알고말고!! 천계를 염탐하는 주작이라는 개새끼를 족치러 가는 거잖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