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5 천계(天界) =========================================================================
교주의 해석에 따라서 삼보절기를 전수받는 과정은 진소청에게서 배울 때와는 사뭇 달랐다. 교주는 진소청과 달리 하나하나의 요결을 자세하게 풀어서 수련과정을 내게 제시했고, 그건 상당히 명확했다. 문제점이 있다면 진소청이 가르칠 때와는 달리 엄청나게 길고 복잡한 수련과정으로 변해버렸다는 거지만 나는 도리어 안심할 수 있었다.
' 실력이 늘어나는 게 느껴져.'
진소청은 불확실한 기준을 제시할 때가 많았다. 이 정도면 될 것이다, 같은 직감적인 기준이었다. 그래서 이해를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그런 탓에 삼보절기 자체를 전혀 수련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교주가 가르쳐주는 과정은 삼보절기의 한계치를 낮게 설정해버린 대신에 마치 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쳐주듯 한 걸음 한 걸음씩 풀어서 알려주는 느낌이었다.
그 덕분인지 수련을 시작한지 약 세 달이 지나자 나는 삼보절기의 천지인(天地人)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감을 잡을 수가 있었다. 물론 아는 것과 수련해서 깨닫는 건 천지차이였으므로 나는 아직도 초보단계나 다름없었지만 어쨌든 입문에 성공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혼대법을 응용한 양의신공으로 수련치를 2배로 얻은 덕분도 있었다.
제갈사가 말했다.
[ 교주는 누군가를 가르쳐본 경험이 많은 것 같군. 그래서 진소청의 교수법과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 무슨 뜻이야?]
[ 누군가를 가르치고 훈육하는 것도 재능과 경험이 필요하다. 진소청은 알아서 다 깨닫는 천재라서 남을 가르치는데는 익숙하지 못하지만, 교주는 둔재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하고 있는 거지. 그래서 네가 보는 시선을 고려하면서 필요한 부분만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 제갈사가 클클거렸다.
[ 하지만 이 속도로 가도 삼보절기를 실전에서 쓰려면 최소한 십 년은 걸리지 않을까? 정말 느려터졌어. 무지렁이 자식.]
[ 젠장. 일일이 깐족대지 마. 지치니까.]
우우웅
나는 내심 투덜거리면서 이번에는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이혼대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교주에게 가르침받는 낮시간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서 삼보절기를 수련하고, 밤 시간에는 이혼대법을 수련하는게 근 두 달 간의 일과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수면시간이 한 시진도 되지 않지만 엄청난 내공을 가진 나였기에 수면부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칠 주야 내내 경공술을 펼쳐서 달릴 수도 있을 정도의 체력회복력이 있기 때문이다.
제갈사가 설명했다.
[ 슬슬 백(魄)을 뽑아내는 요결은 기초수련이 끝난 것 같군. 그러면 이제 고급단계로 자신의 백을 강화시켜서 공명시키는 수련을 해야겠다.]
[ 뭐? 그건 왜 하는 거지?]
[ 너의 백에 흡인력이 있어야 뽑아낸 백이 네 쪽으로 올 거 아니냐? 정말 등신같은 질문을 하는군!]
[ ......]
[ 잔말 말고 시키는대로나 해라. 이 수련을 하고 나면 법력을 다룰 때도 편해지니까. 이 수련은 도가비전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에 현기를 담고 있다.]
나는 제갈사가 시키는대로 요결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혼을 둘러싼 백이라는 동력을 느끼고 감응시켜서 상대방의 혼을 끌어당기는 이혼대법의 원리가 어렴풋이 이해될 것 같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슬슬 체감되는 것이다.
수련을 하는 동안 나는 궁금해져서 물었다.
[ 제갈사. 너는 [옛 지배자]인 흉신이 부상(浮上)하면 세상이 멸망한다고 했었지?]
[ 뭐 그렇지. 그건 피할 수 없는 미래다.]
[ 그렇게 되면 예전에 봤던 환계나 금오도로 대피하면 되는 거 아니냐? 인간세상만 멸망하는 거라면...]
내가 말하자 제갈사가 우스운 듯 클클거렸다.
[ 크크... 망량 앞이 아니니 정의로운 척 가식을 떨지는 않는군. 네놈은 만에 하나 세상이 멸망하면 너 혼자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알고싶은 거지?]
나는 제갈사의 말에 뜨끔했지만 이윽고 대꾸했다.
[ 어. 솔직히 그래. 피할 방법이 있다면 알아봐야지.]
[ 아쉽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그게 가능했다면 내가 벽지상과 계약을 맺을 이유도 없었지.]
[ 무슨 뜻이지? 해저도시가 부상하면 다른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건가?]
내 질문에 제갈사가 한숨을 쉬었다.
[ 하아... 네 녀석은 차원(次元)이 뭔지 전혀 모르는구만.]
[ 지선 망량의 지식이 있어서 알고는 있어.]
[ 지선급 지식이 있어도 네 머리통으로는 해석이 안 되는 거잖나? 지금 질문하는 꼬라지를 보면 전혀 모르는거 맞구만.]
투덜대던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 혈계, 환계, 수라계, 아귀계 같은 차원들은 이 세상과 긴밀한 인과관계로 엮여 있다. 언뜻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세상은 인계가 사라지면 존재할 수 없어. 왜냐하면 그 세상을 만든 것은 결국 생자(生者)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 이해가 안 되는데.]
[ 예를 들어서 환계는 곤륜산에서 봉신전쟁 이후 환상의 존재들을 따로 분류해서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낸 세상이지. 그 근본적인 제어권은 태상노군이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인계가 르뤼에의 부상으로 멸망하게 되면 태상노군도 소멸 직전까지 가겠지. 그러면 환계가 멸망하는 식이다.]
[ ......!!]
[ 다른 세계도 마찬가지야. 독립적인 척 하지만 모두 인계의 흥망에 영향을 받는다. 세계는 인과율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제갈사의 말을 듣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반문했다.
[ 금오도나 곤륜산도 마찬가지인가?]
[ 그곳들은 좀 특별하지. 인계가 멸망해도 아마 존재는 할거야. 하지만 결국 [옛 지배자]의 노예가 될 게 뻔하지.]
[ ......]
[ 천계는 그저 중간관리자에 지나지 않기에 거대한 존재들이 발호하는 걸 막을 수가 없다.]
나는 곰곰히 생각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 그럼 네 녀석은 벽지상과 계약해서 살아남기로 한 것일텐데 어떻게 그 멸망을 피하려는 거지?]
[ 그 존재는 반신(半神)이라 할 수 있으니 그의 수하로 들어가는 거다. 그러면 최소한 성좌의 마기(魔氣)에 처절한 절망을 느끼진 않겠지.]
[ ... 그것도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 아닌가?]
제갈사가 광기어린 웃음을 지었다.
[ 크크크... 성좌가 제자리를 찾을 때 [옛 지배자]가 동시에 깨어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군. 나는 그 진실을 안 것 만으로도 자살충동이 수십 번이나 일어났다. 그건 진정한 세상의 끝이다.]
[ 음... 천계에서도 나름대로 대비해서 계획을 세우는 것 같던데.]
[ 그건 나도 모르겠군. 헌데 알게 뭐냐? 내가 살기만 해도 바쁜데.]
퉁명스럽게 대꾸한 제갈사가 말했다.
[ 이제 닥치고 수련에나 집중해라.]
[ 알았다고.]
나는 현재 나와 제갈사의 관계를 새삼 알 수 있었다. 영혼을 공유하기에 서로의 기억을 읽을 수 있으며 일정부분 생각을 공유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서로가 숨길 수 있는 부분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나는 제갈사를 아직까지 전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었고 일부러라도 삐딱하게 굴며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밤을 새워서 아침이 밝아오자 시비가 들어와서 말했다.
"호법사자님. 교주께서 급히 부르십니다. 어서 알현실으로..."
"무슨 일이오?"
"저도 모르겠습니다."
급히 부르는 거라면 아마도 수련에 관련된 일은 아닐 것이다.
' 또 내게 맡길 임무라도 있는 건가?'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알현실으로 향하자, 교주가 발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교주는 나를 불러놓고 한참동안 응시하다가 말했다.
[ 백웅. 천암비서의 효과를 알아냈는가?]
어째 호칭이 제멋대로 바뀌는 느낌이 든다. 아마 교주 맘대로 나를 호법사자, 혹은 그냥 백웅으로 부르는 것이리라.
나는 내심 뜨끔하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여기서 천암비서 얘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나는 조마조마하면서 대답했다.
"삼보절기를 연마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음...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것 또한 내가 부여한 임무이니 소홀하게 여기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 그리고 네가 한 가지 일을 해 줘야겠다.]
"하명하십시오."
교주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말했다. 이번에는 육합전성이 아니라 전음이라서 주변에 울리지 않았다.
[ 지금 즉시 하남성(河南城) 개봉(開封)으로 가서 노예시장을 감시해라. 거기에 풍신류가 있는지를 확실히 알아내서 내게 보고하라. 정보는 자세할수록 좋다.]
"......!!"
나는 흠칫하고 놀랐다.
' 이게 무슨 명령이지?'
교주가 무슨 의도로 내게 명령을 내렸는지 몰라서 허둥대고 있다가 나는 문득 과거 전생에서 얻었던 정보가 생각났다.
검마의 무영문이 해적 혈도단을 조사하다가 하남 노예시장까지 도달했으나 힘에 부쳐했던 일!
남궁세가가 노예시장에도 관여했으며 풍신류에도 도움을 요청했던 일!
그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풍신류가 하남 노예시장과 큰 관련이 있는 건 확실했다. 단지 지금까지는 더 큰 사건이 터져나왔기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 나는 그제서야 교주의 진의를 알아챌 수 있었다.
교주는 이미 풍신류가 황궁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다!
그리고 심증을 확증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를 노예시장으로 보내서 정찰하게끔 하는 것이다. 만일 풍신류가 배신자일 경우 쳐낼 생각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교주에게 전음을 보냈다.
[ 죄송합니다만 만일 풍신류의 최고수들이 연관되어 있다면 저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흔적을 안남기게 수사하는 건 혼자서는 불가능입니다.]
그러자 교주가 대꾸했다.
[ 그래서 그 동안 삼보절기를 수련시킨 게 아니었던가? 모르긴 해도 지금 네 무위는 예전보다 약간 올라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 너를 도와줄 고수를 파견해 두었으니 그가 너를 암중에서 도와줄 것이다.]
[ 네? 그게 누구입니까?]
[ 가보면 알 것이니 일단 출발해라. 내일 노예시장이 열린다.]
그렇게 말한 교주는 내게 목갑을 휙하고 던져주었다.
[ 이게 필요하겠지. 증거물을 챙기는데 쓰도록.]
"......"
원래 내 거였는데 마치 적선하듯이 받는 기분이 참담했다. 하지만 교주가 자기 손에 들어온 보물을 다시 내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나는 교주의 앞에서 나와서는 숙소에 돌아와서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개봉이라..."
하남성의 개봉은 여태 가본 적이 없는 장소였다. 듣기로는 금나라의 침입 때 정강의 변이 일어나자 일시적으로 오랑캐의 땅이 되었으며, 이후로도 여러 왕조가 난립하면서 꽤나 황폐화된 곳이라고 들었다. 물론 지금은 상당히 거대한 도시가 되었다고 알고 있으나 그 외에 내가 개봉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은 거의 없었다.
제갈사가 내게 말을 걸었다.
[ 노예시장이라면 돈이 필요하겠지. 목갑을 열어서 확인해 봐라.]
[ 엉?]
[ 교주가 바보가 아닌 이상 준비물을 줬겠지.]
그럴 듯 하다.
나는 제갈사의 말대로 목갑을 살짝 열어서 안을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헉!"
금괴와 금화, 은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게다가 벽력탄까지 수십 개나 들어있지 않은가? 심지어는 고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신분증과 관인까지 있었으며 복장도 여러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안에 웬 기인(奇人)이 세 명 들어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세 사람을 목갑에서 빼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옷에 수(水)를 새기고 있었으며 삿갓과 귀신가면을 쓰고 있었다.
"다, 당신들은 누구요?"
내 질문에 한 명이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백웅 호법사자. 우리는 당신을 지원하기 위한 전력이오."
"전력?"
"우리는 수신대(水神隊)의 최정예이니 걱정 말고 임무를 수행하기 바라오. 당신에게 무력이 필요할 때 언제든 돕겠소."
"......"
수신대!
그들은 사대무류의 무력단체 중에서도 가장 신비에 싸여있는 자들이었다. 수신류의 무인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이긴 하지만 수신류 자체가 백련교인들과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는 데다가, 수신대도 세인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백련교도들은 수신대가 아마 백련교 최강의 무력단체일 거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 이 자들... 엄청나게 강하다...'
나는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하나하나가 반박귀진의 경지에 올라있는데다가 이광보다 약한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아니, 도리어 이광 정도는 때려죽일 실력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사대무류의 무력단체라지만 중원 최정상급 고수를 넘어설 정도라니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 세 명의 합공을 받는다면 나도 승산이 이 할을 넘지 않을게 분명했다.
수신류에는 이런 괴물들이 수십 명이나 존재한다는 말인가?
내가 내심 기가 질려할 때 수신대 고수들이 말했다.
"어서 가시오. 바로 내일 노예시장이 열리게 되니 한시바삐 준비해야 할 것이오."
"준비라니, 설마 내가 경매에 참석하라는 말이오?"
"그렇지 않다면 뭣하러 교주께서 금괴와 위장복을 주셨겠소. 되도록 자연스럽게 잠입해서 알아내라고 말씀하셨을 텐데."
"으음."
노예시장에 경매를 위해 참여한다!
내게는 신선한 경험인 게 분명했다. 나는 이 기회에 풍신류의 비리를 알아내기로 마음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필요할 때 꺼내겠소."
"잘 부탁하오."
나는 그들 셋을 다시 목갑에 집어넣고는 사불상을 소환해서 개봉으로 갈 준비를 했다. 제갈사가 킬킬대며 말했다.
[ 노예시장... 백웅 넌 참 재밌는 경험을 하게 될 거다.]
[ 넌 노예시장에 가본 적 있냐?]
제갈사가 희열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 아아, 물론이지. 정말 재밌을 거야...]
이 놈은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거지?
나는 괜히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노예라는 건 말만 들어봤을 뿐 실제로 경매를 한다던가 거래를 하는 장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상상외로 끔찍한 장면같은 게 있을 건덕지가 있는 건가?
' 모르겠구만.'
일단 가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